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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4)화 (16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4화

“네 마음 어찌 모를까.”

빙설언은 련의 뺨을 한번 쓸어 주곤, 꼭 맞잡고 있는 단목성과 련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쳐 올렸다. 흉터로 얼룩덜룩한, 앙상하고 주름진 손이었다.

“자매끼리 사이가 좋으니 이 할미가 기쁘기 한량없구나. 네 어미와 숙부가 어렸을 때는 얼마나 아웅다웅해서 나를 걱정케 했는지 모른다.”

빙설언이 다른 손으로 두 소녀의 뺨을 차례로 쓸어 주었다. 단목성이 의젓하게 말했다.

“련아와 저는 한 몸처럼 서로를 의지하고 다투지 않습니다.”

“세상에 형제자매와 다투지 않는 것만큼 중한 일이 또 있을까? 성아 네가 이치를 잘 알고 있구나. 아주 명석해.”

빙설언이 흐뭇하게 웃고는 빙설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궁주께서 아이들을 잘 챙겨 주셨나 모르겠으나…… 내가 일어났으니 더욱 허투루 해선 안 될 일이오.”

어느 집단이나 외부인에게는 배타적이기 마련이고, 오랫동안 빙궁을 떠나 살았던 빙설언은 빙궁 또한 얼마나 폐쇄적인지 잘 알고 있었다. 북해 사람들이 자신을 아끼는 만큼 단목세가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까지도.

“하하, 설언. 그걸 말이라고. 아이들 줄 간식도 벌써 산처럼 만들어 놓았다!”

빙설한의 호언장담에 빙설언은 눈을 가늘게 떴다가 자신의 딸과 아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현요야, 현우야. 여긴 너무 추우니 아이들 데리고 가서 따뜻하고 달콤한 것들을 좀 먹이도록 해라.”

단목현요는 아쉬운 마음에 괜찮다는 말부터 하려고 했다가, 자신들의 뒤에서 줄곧 말이 없었던 아버지 단목천기를 떠올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자식과 손자들이 있는 자리에서는 할 수 없는 두 분만의 대화도 있을 것이다. 그 깊이와 한을 어찌 가늠하랴…….

단목현요가 련과 성을 감싸 안았다.

“얘들아, 할머님께 인사드리고 우리 먼저 나가도록 하자꾸나.”

“네, 어머니. 할머니, 소손 먼저 물러갑니다.”

단목성이 먼저 인사를 올렸다. 혹시 련이 어떻게 인사하는지 모를까 봐 일부러 동작을 크게 보였다.

련은 잠깐 목이 메어서 그런 단목성을 보며 어설프게 웃다가, 단목성의 동작을 그대로 따라 하며 절을 올렸다.

“할머니, 소손…… 먼저 물러가옵니다. 또 찾아뵐게요.”

* * *

아이들이 나가는 것과 동시에 빙궁주까지 자리를 비켜 주었다.

빙설언은 흰 천이 너울거리는 우아한 공간이 드넓고 황량하게만 보인다고 생각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남편의 얼굴이었다. 흉터로 얼룩진 얼굴.

“독선이 뭘 어쩐다 저쩐다 하더니 아무것도 못 했군그래.”

빙설언이 불쑥하는 말에 단목천기는 자신의 얼굴을 쓸었다. 그 모습을 보며 빙설언이 한껏 이죽거렸다.

“하긴, 독선이 아무것도 못 했으니 사람이 그 세월을 ■■■으로 월영재에 처박혀 허송세월했지. 독선이 뭐가 독선인지 모르겠다니까. 선(仙)자를 떼라고 하시오! 독얼간이쯤으로 하라고.”

“남의 별호를…… 감 놔라 배 놔라 하기가 좀 그렇지 않겠소…….”

이게 아주 오랜만에 재회한 뒤의 첫 대화인가 싶어 어안이 벙벙하면서도 그가 알던 빙설언이라는 사실에 갑자기 가슴이 빠듯하고 눈이 시큰거렸다.

그러나 빙설언은 발끈하여 외쳤다.

“내가 당신이랑 왜 결혼했는데!”

“왜…….”

“얼굴 하나만 보고 한 결혼이었는데 이 모양 이 꼴이 됐으니. 독선 그 ■■는 나한테 저만 믿으라고 호언장담을 하더니, 이 모자란 ■■…….”

“그, 그도 최선을 다했으니 너무 역정을 내지는…….”

“당신 내 편이오? 아니면 사천당문 편이오?”

빙설언이 손가락을 치켜들고 삿대질하다가 고개를 돌리곤 기침을 흘렸다.

단목천기가 놀라서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쿨럭쿨럭하는 기침은 격하지 않았으나 길게 이어졌다. 단목천기의 표정 역시 새카맣게 어두워져 갔다.

빙설언은 간신히 기침을 멈추고 다시 단목천기를 쳐다보았다.

“그러고 보니 련아를 낫게 도와준 분들이 있다 해서 보은할 거리를 취려 편에 보냈는데, 그건 잘 전달들 했소?”

“하나는 경항운련 끝나고 세가로 돌아가자마자 바로 유성도에게 주었고 하나는 며느리가 비아를 데리고 화산으로 갔지. 그래서 함께 오지 못했소.”

“무인이 젊을 때는 하루하루가 피를 말리는 법이니 그러는 게 옳지.”

빙설언은 그렇게 뇌까리며 말끝을 흐렸다. 세월 앞에 하루하루 피가 마르는 건 노인네들도 마찬가지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다가 흩어졌다.

빙설언은 대신 단목천기를 바라보고 다른 말을 했다.

“성아는…….”

빙설언의 얼굴에 짙은 그늘이 졌다. 단목성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주름진 얼굴이 척척하게 젖어 들어갔다.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기고 으깨진 사람의 얼굴이었다.

빙설언이 아들의 소식을 들은 건 오래되지 않았다.

그간 빙설언의 몸 상태가 좋지 않았기에 빙궁에서도, 단목세가에서도 그간 알리길 원치 않았던 것이다.

아프던 손녀딸의 호재가 아니었다면 영영 알릴 수 없었을 테다. 그날 빙설언은 손녀의 벌모세수를 도와준 이들에게 보낼 영단을 준비하게 하고 밤새도록 오열했었다.

“바보 같은 녀석……. 제 처와 아이들은 보이지도 않았던 건지…….”

가망이 보이지 않아도 절박하게 붙잡고 있을 수는 없었던 건지.

그가 왜 그랬는지 안다. 병든 그가 금가장의 장남과 붙어 승리하면 그것은 그의 자기 증명이며 그와 동시에 세가의 건재함을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아직 단목세가의 후계자는 멀쩡하다고, 그대들이 걱정할 건 아무것도 없다고…….

어쩌면 세가의 위기를 단숨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잘만 되었다면 그랬을 것이다. 그가 죽지만 않았어도.

“집안 일으키는 게 무어 그리 중한 일이라고, 자기 힘을 증명하는 게 뭐가 그렇게 절박한 일이라고, 뭐가 그렇게…….”

빙설언이 중얼거리다가 기침을 토했다. 기침에 붉은빛이 섞였다. 단목천기가 황급히 다가와 빙설언을 부축하려고 했으나 빙설언은 그를 밀어냈다.

그러곤 여전히 젖은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하면, 왜 왔소.”

“왜 왔냐니, 난…….”

단목천기의 가슴이 턱하고 막혔다.

그녀가 반겨 주지 않을 거라는 생각은 했으나 왜 왔느냐는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

“지난 세월 한 번도 온 적이 없었으면서 이제야 온 이유가 뭐냐는 거요.”

“…….”

단목천기는 입을 다물었다.

하고 싶은 말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입술에 아교를 칠한 것처럼 말문이 막혔다.

그리고 한참 만에 단목천기가 겨우 목소리를 쥐어짰다.

“그대가 나 때문에…….”

“당신 때문에?”

“모든 걸 다 잃었으니까.”

“그래서 날 보러 오지 않았다고?”

“……날 보고 싶어 하지 않을 줄 알고…….”

“그럼 지금 온 건 왜요.”

“당신이 날 보기 싫어한다면, 보기 싫다고 하는 말이라도 들어야 한다고 하기에.”

“누가?”

“……련아가.”

빙설언은 탄식을 흘렸다.

장남이 남긴 딸. 자신과 똑 닮은 눈을 하고 있는 그녀의 손녀.

범상치 않게 명석하다는 건 첫눈에 알아보았다. 그렇다고 그 아이가 단목천기를 설득해 북해로 오도록 했을 줄은 몰랐지만.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빙설언은 허리를 꼿꼿하게 세운 채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잘났소?”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

“우선 그 옛날 빙궁을 떠나겠다고 했던 건 내 선택이었지 당신 때문이 아니오. 내가 빙궁을 떠나고 싶었던 거라고. 내가! 내가, 항주에서 살고 싶었던 거라고.”

“…….”

“내가 혈라곡과 맞서 싸우겠다고 결정한 거란 얘기요. 당신만 정의로운가? 당신만 백성을 생각하고 무림을 걱정하는 거요? 나는 당신 뜻을 따라가기만 하는 꼭두각시고? 모산파 장문인도 못할 일을 당신이 해냈다고?”

모산파는 주문, 기문진법, 부적, 환술 등을 능숙하게 다루는 문파다.

단목천기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빙설언이 이렇게 화를 낼 때는 한 번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그 뜻이 아니오, 내 말은…….”

“항주는 내게도 터전이 되었지, 내가 거기서 살기로 결정했으니까.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을 지키겠다고 마음먹은 거요, 내게 힘이 있으니까! 아니면 당신 무슨 혈라곡의 비밀 결사대원이야? 이 모든 일이 당신 탓이게?”

혈라곡과 상대하느라 한때 거의 모든 걸 잃었던 단목천기에게 감히 할 수 없는 말이었으나 말을 한 사람이 빙설언이기에 그는 입을 다물었다.

그녀 역시 가진 전부를 잃지 않았나. 자신의 힘을, 빙궁주의 자리를, 첫째 아들을…….

빙설언이 코웃음 쳤다.

“세상만사가 다 그대 탓이라고? 어찌 그리 오만한지!”

“그렇지 않소, 그런 뜻이 아니라…….”

“나 철담빙혼의 뜻을 그대 맘대로 좌지우지했다 여기는 것이 오만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이오? 세상만사가 자기 책임이라는 마음가짐이 오만이 아니면 무엇이오!”

단목천기는 조금 울고 싶었다. 그래도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얘기는 단순한 자기합리화 같지 않은가. 그저 저 좋자고 하는 얘기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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