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5)화 (165/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5화

빙설언이 선명한 눈으로 단목천기를 바라보았다. 젊었을 때와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별빛이 떠오른 듯한 반짝이는 눈이었다.

“나의 모든 것은 내가 만든 거요. 그리고 내가 내일 죽는다 해도 내가 한 선택 중에 후회하는 건 딱 하나뿐이오.”

빙설언의 눈동자는 빙궁 사람답지 않게 불타는 듯이 느껴졌다.

“그때…… 북해로 돌아온 것.”

그래서 아들의 장례식조차 참석하지 못했던 것.

단목천기는 눈을 내리감았다. 실내에 다시 얼음과 같은 차가운 침묵이 감돌았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북해빙궁은 낮에도 쌀쌀했지만 밤은 더욱 서늘했다.

“어디 가요?”

살금살금 침실을 빠져나가 복도에 한 발을 내디뎠던 련은 거의 비명을 지를 것 같은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한쪽 어깨에 얇은 외투를 얹은 화륜이 뒤에 있었다.

“넌…… 너는? 왜 여기 있어? 잘 시간이잖아.”

“누이가 일어나서 어디론가 가는 것 같길래 따라왔는데요?”

“아, 그래? 다시 들어갈 거야. 너도 얼른 가서 자.”

련이 다시 방으로 돌아가는 기색을 비치자 화륜은 더 트집 잡지 않고 련이 침소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했다. 그리고 련이 잠드는 시늉하는 걸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련이 결국 이불을 걷었다.

“좋아, 할머니 방에 가려고 했어.”

“이 시간에요?”

“할머니가 아프시니까 잘 주무시는지 확인하려고. 그러니까 륜아는 들어가서 자고 있어.”

“그러니까 저하고 같이 가도 상관없겠네요.”

련은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눈동자를 굴렸다.

‘할머니하고 무슨 일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화륜이 자신의 능력을 알게 될 수도 있겠지만, 련이 걱정하는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자신이 다른 사람을 어떻게든 낫게 해 주려다가 피를 흘린 걸 알기라도 했다간, 화륜은 자신을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애 취급하면서 한 시진 동안 잔소리만 늘어놓을지도 모른다.

‘거의 연옥의 불길처럼 타오르겠지?’

그러나 여기서 떼어 놓고 가려면?

지금도 화륜은 미심쩍은 눈길로 련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한테는 말 못할 만한 짓을 하려는 건 아니죠?’라고 묻는 얼굴.

‘요즘 들어 륜아 녀석 부쩍 심해졌단 말이야.’

잠깐 고민하던 련은 결국 포기하기로 했다. 몰래 저지를 방도도 없고, 이런 상황까지 벌어졌는데 숨기다가 뒤늦게 걸리느니 차라리 함께 있는 자리에서 사고를 치는 게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래, 가자. 같이 가자.”

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화륜이 무릎에 올려두고 있던 외투를 내밀었다. 련은 춥진 않았지만 그 외투를 걸치고는 조용히 침실을 나섰다.

복도는 최소한의 불만 밝혀 두고 있어 어둑했지만, 련은 화륜의 손을 잡고는 헤매지 않고 복도를 나아갔다.

끝 쪽에 빙설언의 방이 보였다. 무사 두 사람이 방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때 방문이 조용히 열리며 안쪽에서부터 한 사람이 나타났다.

낮과 마찬가지로 눈가가 한껏 젖은 단목현요였다.

‘고모…….’

단목현요는 입구를 지키고 선 무사들을 끌고 가 북해의 말로 무어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련은 그 틈에 화륜을 데리고 침실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안은 낮과 비슷한 풍경이었으나 어두워서 밝은 빛은 거의 보이지 않았고, 난로의 붉은 빛들만 일렁거리고 있었다.

“요아야, 난 이만 됐다지 않았느냐. 이제 그만 돌아…….”

“할머니!”

련이 조그만 목소리로 외쳤다.

조금 전에 나갔던 딸이 돌아온 줄 알았던 빙설언이 놀라서 눈을 뜨곤 몸을 일으켰다.

“련아 아니냐? 여긴 어떻게…….”

“할머니 뵈러 왔어요. 잘 주무시는지 보려고요.”

빙설언은 문 쪽을 흘끗 쳐다보았으나 더는 의아해하지 않고 빙긋 웃었다.

“잘 자다마다. 아무 걱정할 것 없단다. 저 아이는 누구인고?”

“제 동생이에요.”

“동생?”

“화륜이에요. 륜아라고 불러요. 륜아, 와서 인사드려야지.”

화륜은 기가 막혀서 입술만 달싹거리며 련을 쳐다보았다.

누가 자기 하인을 동생이랍시고, 겨우 만난 조모에게 소개한단 말인가?

“련 아기씨 하인인 화륜입니다.”

화륜은 얼굴을 가리듯이 숙이고는 대답했다. 화륜의 대답에 련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당장 화를 내진 않았다.

둘의 표정을 본 빙설언이 작게 웃었다. 재밌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함께 지내는 이들끼리 사이가 좋은 건 좋은 일이다. 장하구나. 여기에 오기 전에는 경항운련에 갔었다지? 그건 어땠느냐? 재미있었어?”

아무래도 낮에는 사람들이 많아서 제대로 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기에, 빙설언은 웃으면서 찬찬히 질문했다.

“그럼요! 거기서 아이들하고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수련했는데, 수련하고 나서는 다 같이 모여서 고구마를 구워 먹었어요. 불을 이렇게 피워서…….”

“그거 아주 맛있겠는걸.”

“제가 내일 해 드릴게요! 같이 만들어요.”

같이 만들자는 말에 빙설언이 조금 멈칫했다.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나도 직접 뭔가 만들어 먹어 본 지가 아득해. 옛날에는 말이다, 산 한 가운데에서 먹을 게 없어서 개구리를 잡아먹기도 했단다.”

“개, 개구리요?”

“고럼. 난리 통에 추격하다가 가진 식량은 잃어버렸지, 먹을 건 없지. 그래서 고놈을 잡아다가 네 할아버지와 구워 먹었지. 소금만 있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얼마나 한탄을 했는지.”

빙설언은 그렇게 말하며 먼 과거를 회상하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날 이후론 어딜 가든 항상 조그만 소금 주머니를 제일 깊숙한 곳에 가지고 다녔단다.”

련은 그 얘기에 작게 웃으며 천천히 눈을 들어 빙설언을, 정확히는 그녀 너머 드리워진 흰 천을 바라보았다.

천 위로 먹물이 번지듯 선명한 글자가 떠올랐다.

빙설언

특성 : 무림을 지킨 / 죽어 가는 나무 / 회한에 가득 찬 / 비익조 / 대나무 / 수어지교(水魚之交) / 쾌속

빙백신공(氷白神功) : 8성(12성)

빙백신검(氷白神劍) : 3성(12성)

한음지(寒陰指) : 1성 (12성)

백운보(白雲步) : 1성 (12성)

자질과 오성 : 상-중 (上-中)

고민 : 마지막 마무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

도움말 : 혈루(血淚)와 싸우고 있습니다. 힘을 보태 주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빙설언 역시 황규온이 그랬듯 혈루와 싸우고 있었다.

련은 그동안 자신이 어떻게 황규온의 혈루를 몰아냈는지 알아내려 애썼고, 확실치 않지만 가장 가능성 있는 걸 알아냈다.

자신까지 피를 흘렸던 것.

하지만 자신에게는 혈루가 없다. 있다면 선경이 진작 알려 주었을 터였다. 그런데 왜 자신도 피를 흘렸을까?

‘내 피와 혈루가 관계가 있어. 그게 뭔지 모르지만, 어떻게 된 건지도 모르지만.’

그리고 황규온이 코피를 흘리고 혈루를 이겨냈던 건 자신이 ‘혈루가 사라지길’ 기원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련은 챙겨 온 조그만 천을 손에 쥐었다. 그러곤 뒤에 잠자코 서 있는 화륜을 흘끗 쳐다보았다.

화륜은 조손간의 화기애애한 얘기에 조금도 관심이 없는지 딴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좋아, 그럼 이제!’

“련아야?”

빙설언이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련은 빙설언의 손을 꽉 잡고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빨리 나으셨으면 좋겠어요.”

“곧 나을 거란다. 너무 걱정할 것 없어.”

거짓말인 걸 안다.

빙설언은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니까 혈루인지 뭔지 얼른 사라졌으면 좋겠다, 련이 그렇게 생각한 바로 그 순간이었다.

“컥, 쿨럭, 쿨럭!”

지금까지 잔기침 비슷하게만 하던 빙설언이 격한 기침을 토해 냈다. 그녀가 황급히 입을 가렸으나 검은 피가 흐른 걸 숨길 수는 없었다.

“하, 할머니!”

련이 황급히 수건으로 빙설언의 입가를 닦아 주려고 했으나 빙설언이 손을 내밀어 막았다.

“화륜, 쿨럭, 얼른 련아를 데리고 나가…… 련아야!”

그러나 말을 끝맺지 못하고 비명처럼 외쳤다. 련 또한 코에서 피를 흘리고 있어서였다. 갓 딴 과일처럼 선명한 붉은 피였다.

- 영기가 49 소모되었습니다!

- 영기 소모 속도에 주의 바랍니다.

련은 자신의 피를 침착하게 닦아 내면서 속에서 울컥 솟아오르는 것도 꾹 삼키곤 도끼눈을 뜨고 다가오는 화륜을 밀어냈다.

“할머니, 저는 괜찮아요. 그보다 기침을 하셨으니까 물부터…….”

그러나 괜찮다는 말과 동시에 코에서 왈칵 흐른 피가 천을 몽땅 적시며 흘러내렸다. 련의 눈앞이 살짝 어지러워졌다.

‘뭐, 뭐지?!’

황규온 때는 금방 피가 멎고 혈루를 없앨 수 있었는데 왜?

“누이!”

화륜이 소리높여 부르며 다가오는 걸 더 밀어내지도 못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그사이, 황규온이 그랬던 것처럼 빙설언이 토해 낸 피와 자신의 피가 검은 재로 변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코앞에 다가온 죽음과 오랜 고통으로 피로가 얼룩져 있던 설언의 얼굴에 빛이 돌아온 것도 그때였다.

그러나 련의 창백한 얼굴은 밝아지지 못했다.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