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6화
‘왜지?’
잔존 혈루를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습니다.
혈루의 완전한 제거를 위해 ‘홍화시(紅火枾)’가 필요합니다.
‘빙설언’의 상태 이상 일부가 치료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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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샌가 련의 코에서 흐르던 피도 멎었고 기침을 멈춘 빙설언의 안색도 확연히 좋아지긴 했지만, 그녀의 몸에는 아직도 혈루가 남아 있는 것이다.
“이게, 이게 어찌 된…….”
고통이라는 새카만 어둠 속을 헤맸던 사람들은 눈앞에 빛이 비치는 것을 누구보다도 빠르게 알아차릴 수 있다.
황규온이 그랬듯 빙설언 역시 마찬가지였다.
토했던 검은 핏자국은 사라지고 몸이 가뿐해졌으니 경악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안에서 격한 기침 소리가 났으니 문을 지키고 섰던 무사들이 얼른 의원과 함께 들이닥쳤다.
문을 지키고 있던 무사들은 어떻게 자신들 모르는 사이에 두 아이가 들어와 있는지 어안이 벙벙한 눈치였으나 의원은 그런 것은 신경 쓰지 않고 빙설언에게로 직행했다.
진 의원은 련의 주위를 살피다가 조금 놀랐다. 빙설언이 크게 기침하는 소리가 났다기에 각혈을 했으리라 생각했는데, 아이는 물론이거니와 빙설언의 주위에도 피 비슷한 것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피가 보이지 않더라도 기침 소리가 났다 하니 다급히 살펴보려는데 빙설언이 손을 들었다.
“아니, 나는 되었고 아이부터 봐주게!”
“예, 예?”
그간 꾸준히 빙설언을 살펴 왔던 진 의원은 그녀의 기세 넘치는 외침에 눈을 휘둥그레 뜨면서 그녀의 품 안에 거의 안기다시피 한 작은 소녀를 바라보았다.
‘단목세가의?’
빙설언의 손녀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궁주가 도위까지 내보내 환대하지 않았나. 빙궁 사람들에게는 그녀의 손녀라기보다는 단목세가의 아이라는 인식이 더 강했지만.
“아이가 갑자기 피를…….”
빙설언이 의원을 잡고 다급하게 말하다 말끝을 흐렸다.
자신도 그렇지만 분명 아이도 피를 흘렸는데 주위 어디에도 그 흔적이 없었다.
“피…?”
“전 괜찮아요. 할머니가 기침을 하시는 걸 보고 놀라서……. 빨리 할머니부터 봐주세요.”
그리고 진 의원은 련이 또랑또랑하고 유창하게 북해의 말을 구사하는 걸 보고 또 놀랐다가 다시금 빙설언에게로 눈을 돌렸다.
그 말대로 소녀가 다소 창백해 보이는 건 조모의 아픈 모습을 직접 보아서 그런 것일 테니 더 급한 것도 빙설언이었다.
“일단 어르신부터 보겠습니다.”
“아이부터 보라니까!”
“아 어르신이 더 급합니다!”
진 의원은 버럭 소리치곤 빙설언의 손목 위에 손가락을 올리고 맥을 짚었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그녀의 남은 시간을 헤아리고 있었다.
큰 각혈을 한 번씩 할 때마다 빙설언은 눈에 띄게 작아져 갔었다. 이제 몇 번 남지 않았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녀에게는 결코 말한 적 없지만.
‘아니……?’
그러나 맥을 짚는 의원의 눈동자가 점점 커졌다.
빙설언의 처소에 의원이 다급히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단목천기와 궁주 빙설한까지 달려왔는데, 그들은 예상과는 다른 대답을 듣게 되었다.
“세상에! 궁주님! 빙정이 가호하사 어찌 이런 기적이…….”
오래도록 빙설언을 치료해 오면서 언제고 침착했던 의원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서는 재차 맥을 짚고, 그녀의 심음(心音)을 확인한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상태가 완전히 호전된 것은 아니지만 지난 날과 비할 바 없이 좋아졌습니다. 상태는 경과를 지켜보아야겠으나…….”
“그녀가 나았다고?”
“내가 나았다고?”
“그, 그러니까 경과를 보긴 해야 합니다. 하지만 정말 안정되어 있습니다.”
진 의원은 그 뒤로 빙설언에게 몇 가지 질문을 이어 나갔다.
손발에서 냉기가 느껴지진 않는지, 속이 메스껍거나 구역질이 나거나 어지럽진 않은지, 통증이 느껴지는 부위는 없는지…….
빙설언은 하나하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면서 그녀 스스로 그간 자신을 괴롭혀 왔던 것들이 한순간에 거짓말처럼 모조리 사라졌다는 걸 더욱 명징하게 깨달을 수 있었다.
진 의원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 어두운 밤에 등롱으로 밝혀 놓은 실내에서도, 빙설언의 안색이 확연히 좋아진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뒤이어 단목현요와 단목현우까지 헐레벌떡 달려왔다가 예상하지 못한,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고 눈만 꿈벅였다.
“어, 어머니……? 아버지?”
“어떻게 이런, 이런 일이…… 역시 가족분들이 와 주신 덕분일런지…….”
말하는 의원의 목소리는 여전히 떨렸다.
의원이라고 그 마음이 얼음과 강철로 빚어졌겠는가.
매일같이 마주하는 환자, 한때 빙궁의 모두가 사랑했던 후계자가 하루하루 죽어 가는 걸 보는 것이 괴롭기는 매한가지였다.
북해 제일의 의원이라고 자부했음에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매일매일 되새김질할 뿐이었던 무력한 나날들이 얼마나 길었던가.
빙궁주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빙설언과 의원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그게 정말이냐? 설언이 거의 다 나았다고? 이렇게…… 이렇게 갑자기? 분명 조금 전까지 심한 기침 소리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느냐?”
“무공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는 확답드릴 수 없습니다마는 이만큼 호전된 것도 기적이나 다름없지 않겠습니까. 진작 단목세가에 사람을 보냈더라면……. 아니, 어쩌면 빙궁으로 모셨던 것부터…….”
“아니.”
그때 빙설언이 단언하며 자괴감 어린 의원의 말을 잘랐다. 그녀의 눈은 자신의 손녀딸을 똑바로 향하고 있었다.
“예?”
“가족을 만나 반가운 마음에 나을 것이었으면 옛날 현요가 들렀다 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바로 나았을 것이요, 그간 그대가 낫게 하지 못했을 턱이 없다.”
그가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에 빙설언이 고개를 들고 단목천기를 쳐다보았다.
단목천기는 입술을 꾹 다문 채, 기쁨과 걱정이 얼룩진 눈으로 빙설언과 련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빙설언은 말을 바꾸었다.
“……아니다, 자네 말이 맞아. 손녀들이 온 덕분에 나은 게지.”
“맞습니다, 어머니! 저도 련아를 보고 심마에서 벗어났거든요!”
“잘하는 짓이다. 조카한테 쓸데없는 걱정이나 끼치고!”
“쓰, 쓸데없다뇨. 쓸모 있지 않긴 했지만.”
“그래, 사람이 살다 보면 한 번쯤 번민에 빠질 때가 있지 않소.”
자식에게 엄격한 단목천기가 저도 모르게 막내아들을 두둔했으나 빙설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놈의 번민들은 단목씨 집안 내력이냐? 어휴, 됐다. 됐어. 놀란 련아에게 먹일 따뜻한 죽만 한 그릇 내오고, 오늘은 련아와 같이 잘까 하니 다른 이들은 다 나가 주시게.”
“하지만 아직 안정을…….”
“몇 년을 앓았는데 내 몸을 내가 모를까! 얼른 죽이나 내오지 않고 뭐 하는 게야! 조금 전까지 련아 얼굴을 보고 나았다지 않았느냐!”
빙설언이 했던 말을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버럭 짜증을 냈는데 빙설한과 의원이 도리어 반갑고 기쁜 얼굴로 활짝 웃고는 얼른 죽을 내오겠다고 외치며 후다닥 방을 빠져나갔다.
빙설언은 마지막까지 남은 단목천기를 바라보다가 턱을 들어 바깥을 가리켰다. 그 역시 나가 보라는 말이었다.
주위의 소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가만히 있던 빙설언이 련에게 손을 뻗었다.
련이 조금 더 가까이 갔다.
“괜찮으냐? 네가 알려지길 원치 않는 듯하여 의원을 따로 붙잡지 않았다.”
빙설언이 련의 안색을 이리저리 살펴보며 말했다.
련이 무리를 해서라도 무언가를 해 주었음을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전 괜찮…….”
련은 웃으며 손을 내저으려고 했지만, 빙설언은 엄한 표정으로 련의 양 뺨을 쓸고 맥을 짚어 본 다음에야 다소 한시름 놓은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제야 고개를 돌려 묘한 얼굴로, 아직까지 버티고 서 있는 화륜을 쳐다보았다.
소년이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것은 련을 걱정하기 때문일 테다.
“화륜이라 했느냐?”
“……예.”
대답하는 목소리가 의외로 무거웠다.
“네 누이는 오늘 내가 끼고 잘 터, 너는 이만 물러가 보도록 해라.”
빙설언은 손을 가볍게 휘저어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소년은 자신을 하인이라 했지만, 손녀인 련이 그를 아우라 하였으니 그렇게 부르겠다는 눈빛으로.
하고 싶은 말이 가슴 가득 부풀어 오른 얼굴을 한 소년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고개를 끄덕이곤 몸을 돌렸다.
그때 문득 할 말이 떠오른 빙설언이 그를 다시 불러세웠다.
“잠깐, 얘야.”
“……왜 그러십니까?”
방을 빠져나가던 화륜이 등을 돌렸다. 그의 얼굴에는 표정이랄 것이 없었다.
“사람의 몸만을 지켜 주는 것은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다. 호화롭고 안락한 부귀영화를 쥐여 주는 것도, 상대를 지켜 주는 것이 아니다.”
“……예?”
뜬금없는 소리에 소년이 눈을 치떴다. 빙설언은 낮게 웃고는 손을 내저었다. 이만 나가 보라는 뜻이었다.
화륜까지 처소를 빠져나가고 나서 빙설언이 조용히 물었다.
“무얼 했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