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7화
“네?”
“네가 무언가를 한 것 아니더냐.”
‘내가 했다는 게 그렇게 티가 나나?’
당연히 눈앞에서 함께 코피든 뭐든 피를 흘리니까 이상하게 여길 수는 있겠지만, 어떻게 련 자신이 뭔가를 해서 나은 거라고 이렇게 금방 확신하는 거지?
“오랫동안 늪에 빠져 꿈쩍도 않았던 네 조부를 떠민 것이 너라고 들었다.”
“할머니께서 한련서리단을 두 개나 주셨으니까 더 늦기 전에 뵈러 가고 싶다고 말씀드렸을…….”
“더 늦기 전에?”
빙설언이 말꼬리를 잡듯 말하며 중얼거렸다.
련은 아차 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빙설언의 눈동자가 한층 더 깊어졌다.
“내 아까 진 의원에게도 말했듯…… 세상천지에 그리운 이 얼굴 좀 보았다고 낫는 병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거였다면 애당초 발병하지도 않았을 것이 아니냐.”
“…….”
“네 조부 역시 마찬가지다. 그 어둠 속에 갇혀 있던 사람이 손녀 얼굴을 좀 보았다고 벌떡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다시 일상으로 전진할 수 있겠느냐? 그 정도로 될 거였다면 진작 다시 일어섰겠지.”
련은 빙설언이 하는 이야기를 차분히 기다렸다.
“세상사 그렇게 좋을 대로만 흘러갈 턱이 없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한 것이다.”
빙설언의 눈동자가 련을 똑바로 향했다.
“그리고 이 자리에 너 아니고서야 그럴 사람이 없구나.”
피를 토하는 자신을 보면서 그럴 것을 대비한 듯했던 동작, 그러면서도 큰 위기는 느끼지 못하던 표정.
나았다는 자신을 보며 기뻐하면서도 손녀딸이 마치 무리하기라도 한 듯 걱정스러워하던 단목천기의 눈길까지.
그렇게 자신의 추론을 늘어놓던 빙설언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제야 잔뜩 곤혹스러워하는 소녀의 얼굴이 보였다.
“……너를 추궁하려는 것이 아니다. 네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다는 얘기였지.”
빙설언은 왠지 민망하고 미안해져서, 얼른 침상에 자리를 만들어 손짓했다. 올라오라는 얘기였다.
그녀의 허리까지 올까 싶은 조그만 손녀가 눈밭 위의 흰 토끼처럼 꼬물거리며 침상 위로 올라왔다.
그 손녀가 뭔가를 결심한 표정을 짓더니 설명을 시작했다.
“할머니는…… 병이 아니에요.”
“병이 아니다?”
“작은 독 같은 게 몸에 있었는데, 할머니의 몸이 그 독이랑 싸우느라 쇠약해지신 거예요. 혹시 혈루가 뭔지 아세요?”
“혈루? 그건…….”
순간 빙설언의 눈에 한기가 돌았다.
“……우리는 혈라곡의 혈귀들이 어떻게 나타나는 건지 꾸준히 추격해 왔다.”
련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떴다.
“무수히 많은 가설이 있었고 그중 하나가 ‘혈루’였다……. 혈라곡의 곡주가 어떤 독 같은 것, 굳이 명명하자면 혈루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먹여 그리 만드는 거라는 추측이었지.”
빙설언은 먼 옛날을 회상하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가 말을 이었다.
“내가 베어 넘긴 혈귀들의 수를 생각하면 그들이 배부르게 처먹었을 혈루가 내게도 스며들었다는 게 놀랍지는 않구나. ……내가 토한 검은 피가 바로 그것이었더냐?”
조모의 물음에 련은 고개를 끄덕였다. 황규온은 황 채주가 혈귀들 틈바구니에서 구해 온 아이였다. 아마 그 틈에 오염되었으리라.
“한데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이더냐?”
“제가 왜 아팠는지 들으셨어요?”
갑자기 화제가 옮겨갔지만 빙설언은 담담하게 고개를 내저었다.
련은 천천히 손끝에서부터 영기를 피워 올렸다.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겠으나 지나치게 청명한 기운이 앳된 손끝에 서리는 걸, 빙설언은 놓치지 않았다.
“그건……?”
“이상하게 저는 이런 영험한…… 기운이, 그러니까 영기가 쌓이는 체질인데 제 몸이 받아 주질 못해서 아팠던 거였어요. 아주 오래 아픈 동안…… 마음이 떠돌기만 하다가…… 할아버지와 어머니가 벌모세수를 받게 해 주신 덕분에 아픈 게 나았고요.”
믿을 수 없는 이야기였으나 자신의 몸이 한순간에 나은 기적, 눈앞에 영기가 서린 걸 느끼는 기적이 있었으니 믿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사실 완전히 나은 건 아니고, 계속 영기를 사용해서 비우지 않으면 아프게 돼요. 당장 내공도 쌓을 수가 없어서 아직 심법도 못 배웠고요…….”
“아…….”
빙설언의 눈에서 애달픈 탄식이 스쳐 지나갔다. 무가에서 이토록 명석하게 태어났는데 내공을 쌓을 수가 없다니.
“지금은 할아버지만 알고 계세요. 어머니나 고모, 숙부가 아시면 너무 힘들어하실 것 같아서요.”
빙설언의 눈이 붉어졌다.
분위기가 지나치게 무거워졌다는 생각이 든 련은 일부러 발랄한 목소리를 내어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하여간! 그 힘으로 어떻게 된 것 같아요. 제가 이걸 어디서 알았냐면요…….”
이상한 경어를 쓰는 황 채주의 딸 황규온의 이야기, 그 황규온의 별명이 채소국수라는 것, 왜 채소국수가 되었느냐 하면 단목성이 백미밥인데…….
련의 이야기가 길어지면서 빙설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어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래서? 취려에게 뭘 배웠느냐?”
“모용세가의 그 비기라는! 그거!”
“설마 두전성이를? 말도 안 된다! 나한테도 절대 알려 주지 않았는데!”
당연한 얘기였다. 세가의 비기를 아무리 절친한 친구라곤 해도 남에게 알려 줄 턱이 없다.
“두전성이의…… 훈련법을! 배웠죠. 때는 이렇게 꽃잎이 사락사락 흔들리는 밤이었어요…….”
련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련의 손길을 따라 등잔의 불빛이 일렁거리며 그림자를 만들어 냈다. 그 그림자가 흩날리는 꽃잎처럼 보였다.
련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듣는 빙설언의 얼굴에는 은은한 생기가 떠올라 있었다.
“그래서 채소국수가 된 것이야? 이 녀석들도 참!”
빙설언이 껄껄 웃다가 자신의 웃음소리에 자신이 더 놀랐다.
짜증을 낼 기력조차 없을 만치 아팠던 지난 세월, 기침은 서리 같았고 웃음은 이슬 같았다. 더 큰 고통이 나타나면 눈 깜빡할 사이에 사라지는.
빙설언이 자신의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련은 그 모습을 보며 말했다.
“이제 더 건강해지실 거예요. 제 힘이 있잖아요!”
거기까지 말한 련은 잠깐 고민하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 산채에…… 사당이 하나 있었어요. 되게 낡은 사당이었어요. 안에는 커다란 구천현녀의 조각상이 있는…….”
그 순간 빙설언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버지가 거길 지키셨다고 들었어요. 그 구천현녀가 가지고 있던 태극패를 지키려고 했다고.”
“……그랬지.”
련은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 이야기를 시작한 건, 빙설언에게 한두 시진 일찍 달려오는 것으로는 단목현성을 구할 수 없었을 거라는 이야기를 해 주기 위해서였다.
단목현성의 싸움은 하루도 더 전에 있었고, 정말 누구도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 그가 빙설언이 올 때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아마도 태극패의 힘 덕분이었을 거라고.
— 때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힘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 사당에서 들었던 조언이었다. 련은 이게 빙설언에게 하는 말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막상 말을 할 수 있는 상황에 이르자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힘이 될까?’
하루 이틀 먼저 달려올 생각을 하지 않은 자신을 더 자책하게 되지 않을까.
더 힘들지…… 않을까?
빙설언이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로 도피를 할 사람이던가.
아들이 죽어 가는 시간을, 만 하루를 홀로 그 사당 앞에서 누운 채 죽음을 셈하고 있었을 거라는 생각에 더 가슴이 아프지 않을까.
“……그래서 그 태극패의 힘이 아닐까? 했어요. 제 이거요. 아버지가 지켰던 게, 저한테 온 것 같아요.”
“하하, 그땐 성아가 그걸 산산조각 냈단다.”
“그것도 아버지가 지켜 주려고 한 거잖아요. 혈귀들 손에 들어가지 않게 해 줬으니까요!”
련의 말에 빙설언의 표정이 눈에 띄게 부드러워졌다.
아들이 했던 일이 되돌아와서 이어졌다는 건 그렇게까지 싫지 않은 느낌이었다.
“내일은 성아도 같이 자도 돼요?”
“너희만 좋다면야 나야 기쁠 일 아니겠니. 네 덕에 이제 건강해졌으니!”
빙설언이 껄껄 웃었으나 련의 표정은 그렇게까지 밝진 않았다. 빙설언은 련이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알았다.
“진 의원 말 때문에 그러느냐?”
무공을 완전히 회복할 수 있을지는 확답할 수 없다는 말.
일평생을 무인으로 살아왔다는 무인에게 무공을 되찾을 수 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 어디에 기쁨이 있단 말인가.
“그래도 방법이…… 있을 거예요. 제가 찾아올게요. 꼭 할머니를 낫게 해 드릴 거예요.”
욕심이 없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이 기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손녀가 저렇게 죄라도 지은 것처럼,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못 한 것처럼 죄책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다니.
“성아가 말을 하기를 네가 다시 창궐할 혈라곡을 무찌르겠다고 선언했다며.”
“네?”
순간 련의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 터무니없는 장래 희망을 들킨 것처럼 창피해하는 것이 딱 그 또래 아이처럼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