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8화
“어, 언제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이 할미가 그냥 늙지는 않았느니라. 다 알고 있지. 경항운련에서 애들을 그리 가르친 것도 그 때문이지?”
조금 전까지 경항운련에서 고구마 구워 먹은 얘기를 한 차라 련이 입술만 달싹이는데 빙설언이 짓궂게 웃었다.
“네 할아비한테 깨달음을 안겨 준 것도, 날 낫게 해 놓고도 이리 아쉬워하는 것도 어? 그 계획에 쓸 만한 무인을 확보하려는 것 아니냐? 요 맹랑한 것.”
“아앗! 아니 어떻게 아셨지요?”
처음엔 멍한 얼굴이었던 련이 까르르 웃으며 받아쳤다. 빙설언이 단목련의 코를 톡 건드렸다.
“이 늙은 할미가 은퇴하게 두지도 않고 말이야.”
“하지만 할머니가 진짜 진짜 강하시니까!”
“그건 아주 잘 알고 있구나. 흠흠, 네 할아비는 벌써 한몫해 줄 셈이니 나도 힘을 낼 것이다. 내가 한때는 이 빙궁에서 스승이란 놈들을 죄 울리고 다닌 사람이었느니라. 그러니 이 할미만 믿거라.”
“네! 할머니!”
빙설언은 련의 얼굴에 미약한 피로와 졸음이 어리는 것을 보곤 침상에 뉘어 주곤, 천천히 토닥이며 이불을 덮어 주었다.
눈을 가물거리며 뭔가를 더 말하려던 련이 사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실내의 희미한 등잔불 속에서도 련의 얼굴이 조금 창백해진 것이 눈에 보였다.
빙설언은 목에 얹힌 게 많은 얼굴로 그런 련의 자는 얼굴을 쳐다보며 읊조렸다.
“남은 날을 헤아리고 있었느니라. 너희를 다시는 보지 못할 줄 알았단다.”
자신에게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단목천기는 영원히 그 월영재의 그늘 속에서 숨을 다할 것이고 자신의 병세는 나아질 새 없이 나빠지기만 하니 다신 볼 수 없겠노라 여겼다.
마지막 할 일까지 마무리 지었으니 되었노라고 아쉬움을 갈무리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단목천기에게 마지막 역정을 내놓고서는 이걸로 끝이겠거니, 그도 남은 미련을 털겠거니, 그리 생각했었다.
그러다 이와 같은 기적이 벌어진 것이다.
“세상을 다시 가진 것만 같구나.”
진심이었건만 꿈속의 손녀는 희미하게 웃기만 했다.
그녀를 오래도록 괴롭혀 온 고통이 씻은 듯이 사라진 밤은 처음이었다.
무겁게 지고 있던 산더미 같은 짐을 처음으로 내려놓은 듯 상쾌해 눈물이 울컥 날 것만 같았다.
다 지고 허물어져 짓밟혔던 꽃이 다시 꽃대로 돌아가 생생히 피어난 모습을 본 듯한 전율이 일었다.
그리고 그 전율이 지나간 자리에 욕심이 움텄다.
침상에 누워 보낸 시간을 제외하면 일평생을 무인으로 살았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해도 좋았다, 다시 시작할 기회만이라도 주어진다면.
련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잠들면서 말했다. ‘더 건강해지실 거예요.’라고.
그러나 그 말에 기뻤던 것은 아주 잠깐이었고 다시 마음이 무거웠다. 어린아이가 하는 말을 믿을 수 없어서가 아니었다.
세상에는 평범한 사람의 잣대로는 알아볼 수 없는 이들도 있다는 걸, 빙설언은 알고 있었다.
빙궁에서는 한때 자신과 사촌 빙설한이 그런 존재였다. 빙궁의 장로들을 울리면서 자랐다. 시간이 흘러서는 자신의 아들이 그러했다.
이제 손녀가 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명석함과 신묘한 힘을 가졌다 해도 기쁠 뿐이었다. 하물며 그 손녀가 그녀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나. 그녀가 그토록 바라던 기회, 시간을. 다시 노력할 수 있는 힘을.
다만 손녀가 마치 부채감이라도 느끼는 듯이, 뭔가를 갚아 주려고 애쓰는 듯하는 모양새를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무거웠다.
‘세가에서는 대체 무얼 했기에!’
빙설언은 괜히 속으로 역정을 한번 냈다.
자신의 장손이라면 응당 이 정도 받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기뻐하기만 해야지, 어찌 이리 하나하나 받은 걸 다 셈해서 돌려주려 한단 말인가?
‘빙궁에 있을 때 제대로 가르쳐야겠어.’
빙설언은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손녀를 토닥이며 잠에 빠졌다.
* * *
다음 날 아침, 련은 빈 침상에서 눈을 떴다.
“흐아…… 아?”
몸을 거의 애벌레처럼 꽁꽁 싸매고 있는 이불을 겨우 헤치고 나오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우선 난로가 침상 주변에 들어차 약간 덥기까지 했고, 너울대던 흰 천은 모조리 걷혀 휑하고 드넓은 모습을 선보이고 있었다.
조심히 침상에서 내려왔다. 신을 신고 주의를 기울이자 먼 창 쪽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전면의 창을 손끝으로 밀어서 살짝 열었다. 안뜰에는 아침 해가 가득 비쳐 눈이 부셨다.
가늘게 눈을 뜨자 담벼락 쪽에 두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나란히 산책을 하고 있는 단목천기와 빙설언이었다.
정확히는 아직 완벽하게 걸어 다닐 만한 체력을 찾지 못한 빙설언을, 단목천기가 바로 곁에서 부축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로 따스한 햇빛이 비추었다. 빙궁의 냉기마저도 온화해진 것만 같았다.
“……표국은 취려하고 얘기를 하면 좋겠군. 그건 내가 다리를 놓을 수 있지.”
“빙궁에서는 아니 해 주려 하오?”
“그건 내가 내 손녀들한테 따로 말해야지. 내 덕분인데 어딜 날로 드시려고 하시오?”
“아, 알았다니까.”
“거 똑바로 좀 잡아 보시오. 이번에 련아 덕에 깨달음도 얻었다는 사람이 어찌 이리 비리비리하오?”
“힘 세게 줬다가 다칠까 걱정이 되어서 그러는 것 아니오.”
“안 죽는다니까.”
“어제까진 간다 만다 했지 않소…….”
“오늘부턴 아니래도. 생각난 김에 검부터 벼려야겠소. 안 쓴 지 너무 오래됐소.”
“그건 내가 별러 뒀소.”
“오오.”
“왜? 이제 좀 남편 같소?”
“남편 같긴 처음부터 남편 같았지.”
“남편이 아니라 ■■이라고 생각한 거 아니오?”
그러나 빙설언은 대답하지 않고, 자신을 바라보는 손녀를 보고서 눈을 반짝이며 단목천기의 손을 확 잡아끌었다. 저리로 안내하라는 뜻이었다.
“련아야, 일어났느냐?”
“할머니, 안녕히 주무셨어요? 할아버지도 안녕히 주무셨어요? 그런데 벌써 이렇게 걸으셔도…….”
“그저 요 앞을 조금 걷고 왔느니라. 수련 같은 걸 했다간 진 의원이 울며불며 쫓아올 기세라.”
련은 크게 한시름 놓았다. 한창때는 말 그대로 하늘을 날고 산을 가르던 사람이 그때를 생각하고 움직였다가는 사고가 날 터였다.
“진 의원만 그러겠소?”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침착하려고 애쓰는 눈치이긴 했으나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의 단목천기였다.
련은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걸 근거리에서 본 것은 처음이라 눈만 동그랗게 떴다.
“련아 덕에 이제 다 나았다지 않았소? 뭐가 그리 걱정이오. 산보 좀 한 걸로 빙궁이 다 뒤집어지겠군!”
빙설언이 귀찮아 죽겠다는 투로 외쳤으나 얼굴에는 보드라운 빛이 돌았다. 단목천기가 미간을 짚고서 깊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대의 열기에 북해의 빙정이 다 녹겠군.”
빙설언이 아랫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럴 거면 진작 녹았겠지. 내가 빙궁 출신인데 무슨 객쩍은 소리요?”
“내가 말을 말아야지…….”
“그러게 여태 나와 말싸움에서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지 않소?”
단목천기가 죽어도 말하고 싶진 않았지만 정말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다른 싸움은 몇 번 이겼지 않소?”
“천하제일인이 제 부인 이겨 먹은 게 자랑이오?”
“그럼 남편 이겨 먹은 건 자랑이고?”
“당연하지. 젠장, 내가 북해 출신만 아니었어도 천하제일인을 할 수 있었는데 봐준 거 아니오.”
“아니…… 새외 사람이 중원의 천하제일인에 왜 그렇게 불을 켜시오…….”
“웃기니까 그렇지! 북해며 남만 쏙 빼놓고 자기네들끼리 ‘우리 중 장원은 이 사람이다!’라고 쿵떡쿵떡하고 있는데.”
“그럼 새외를 하지 말든가!”
“그게 우리가 안 한다고 안 하는 거요? 어?”
련은 눈만 크게 떴다. 중간부터는 북해의 언어로 대화가 이어졌다. 그리고 말다툼이 한참 이어지다가 간신히 진정한 두 사람이 헛기침을 하더니 서로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그래도 멀어지지는 않는 묘한 모양새였다.
“아!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지금까지 산보하지 않았소? 그 새 또 뭘.”
단목천기가 지레 걱정하는 말을 뱉었지만 빙설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련을 향해 다정히 웃어 보였다.
“너희 옷과 장신구, 간단한 무구를 새로 더 지어 보내라고 해 두었다. 아침부터 성아까지 여기로 불러와 번거롭게 하기는 그래서 너희 처소로 보내 놓았느니라.”
“아니, 그건 언제 또…….”
“나 빙설언이오. 여긴 빙궁이고.”
빙설언이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대꾸하고는 련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련아 네가 장신구 하길 좋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련이 슬쩍 눈동자를 굴렸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에게 찬탄을 들을 수는 없는 부분이어서였다.
“사람은 자신의 부귀를 직접 드러내 보일 줄도 알아야 하는 법. 하물며 작게는 빙궁주의 재종손(再從孫, 사촌의 손자손녀)이고 크게는 나 빙설언과 저이의 손녀인데, 응당 그에 적절한 것을 걸치는 것이 옳다.”
“네?”
꾸중을 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어서 련은 이번에도 입술만 달싹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