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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9)화 (16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69화

‘대체…… 대체 뭘 준비해 놓으신 거지?’

솔직히 빙궁에 올 때도 어마어마하게 두르고 왔다. 선경이 ‘일류 장인’이라고 찍어 준 남 장인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로 둘둘 감고 오지 않았던가.

그런데 빙설언의 말을 들어 보자면 ‘네가 장신구를 좋아한다던데 그 정도로 될 일이 아니다.’로 느껴졌다.

“네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구나.”

련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단목천기를 바라보았는데 단목천기가 자신의 이마를 철썩 내리치는 게 아닌가.

“부인 말이 참으로 옳소.”

“하, 할아버지?”

* * *

련이 침의 차림으로 자신의 처소로 돌아왔을 때는 빙궁의 사람들이 바삐 오가고 있었다. 그들은 빙설언이 말한 선물들을 내려놓고서는 그림자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그 사이에 뚱한 얼굴의 화륜이 허리에 손을 올리고 서 있었다. 옆에는 하얗고 토실해진 고양이 백련이 화륜과 똑같이 뚱한 얼굴로 ‘야옹!’ 하고 울었다. 련이 하룻밤을 다른 데서 자고 온 게 못마땅한 눈치였다.

‘어흥이 아니라서 다행인가?’

“그게 대체 뭐예요?”

그렇게 문이 닫히자마자 화륜이 말했다.

‘그래, 처소로 돌아오자마자 참회의 시간이 있을 줄 알았다.’

련은 그렇게 생각하며, 품에 쏙 안겨 오는 백련을 쓰다듬으면서 눈을 피했다.

“아니, 뭐, 뭐가? 잘 잤니?”

그러나 계속 추궁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화륜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그만두었다.

평소였으면 어린 게 무슨 한숨이냐며 복 달아난다고 한마디 했겠지만 화륜이 걱정해서 저러는 걸 빤히 아는 판에 그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륜아 밤새 한숨도 안 잔 거 아냐?’

자신은 할머니 옆에서 전에 없이 숙면을 취하고 돌아왔는데 왜인지 화륜은 조금 피로해 보였다.

“……피는 다 멎었어요?”

“으, 응. 그때 이미 완전히 멎었지! 잠깐 난 거였어. 할머니가 피 토하시니까 나도 놀랐나 봐.”

“이럴까 봐 밤중에 몰래 가려고 한 게 아니고요?”

“그게 말이야…….”

“채소국수도 누이가 고쳐 줬죠?”

“그게 말이지…….”

말은 질문인데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아니, 내가 무리한 건 아니야. 난 오히려 좋았지! 건강했지!”

“그래서 황규온 그 앤 누이가 다 고쳐 줬는데 아무것도 모른 채 입 딱 씻었다?”

“아니 입을 씻기는 무슨 입을 씻어. 온아도 알지, 알고 엄청 고마워했어.”

련은 놀라서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화륜은 물러서지 않았다.

“떠날 때 황 채주는 전혀 모르는 눈치였는데요?”

‘황 채주님이 네 친구니?’

련은 화륜의 말버릇을 고쳐 주고 싶었지만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내가 온아한테 비밀로 하라고 했어. 혹시 남들이 날 무슨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하고 달려들면 곤란하잖아.”

화륜은 하고 싶은 말이 갑자기 터져 나온 것처럼 입을 떡 벌렸다.

아마 ‘알긴 알아요?’의 여러 가지 변주들일 터였다.

“그리고 온아가 나한테 무슨 산채 땅문서를 준다는데 그걸 어떻게 받아.”

“그걸 준다고 했어요? 그걸 어떻게 받다뇨, 그냥 잘 받으면 되잖아요! 그래서 그걸 됐다고 하고 그냥 보냈어요?”

“난 그렇게 자연과 벗한 곳은 싫어한다니까.”

“부귀영화 금은보화 그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땅문서를 가리면 안 되죠!”

“나는 땅은 내가 직접 살 곳 아니면 관심 없어. 그리고 온아가 잘 커서 나중에 채주가 되겠대. 채주 돼서 혈라곡이랑 싸울 때 내 편 들어주는 거지. 난 그게 더 좋아!”

련의 해맑은 얼굴에 화륜은 말문이 턱 막혔다.

황규온이 련에게 은혜를 입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다면 그 성미에 결코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편을 들어주다 못해 련 대신 칼이라도 맞아 줄 터였다.

하지만.

“그건, 혈라곡 문제는……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잖아요.”

련은 온화한 미소를 그렸다. 화륜이 처음으로 움찔했다.

“왜, 왜 그렇게 웃으시는데요.”

“륜아야, 내가 걱정이 안 되겠니? 안 되겠냐고. 경항운련에서 건물이 통째로 불탔는데! 내가 태어났을 때도 그 녀석들이…….”

련은 저도 모르게 떠들다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누이가 태어났을 때 그놈들이 뭐요?”

왠지 화륜의 눈동자가 번뜩이는 것 같았다. 련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그게. 좀 그랬어. 내가 막 태어났을 때 녀석들이 쳐들어와서…….”

“쳐들어와? 그래서요?”

“집안 형편이 썩 좋을 때가 아니었기도 했어. 쳐들어온 사람 수도 되게 많았고, 그래서 나도 좀 아프고 그랬지. 그 뒤로도 별로 좋진 않았고…… 하여간 그래서 걱정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는 거야.”

화륜의 얼굴에서 표정이 스르르 사라졌다가 곧 어린아이 특유의 심술 가득한 뚱한 낯으로 돌아왔다.

“전 이해가 안 돼요.”

“뭐가?”

“…….”

말을 하려던 화륜이 입을 꾹 다물었다. 련은 화륜이 삼킨 말을 알고 있었다.

처음 본 사람을 위해서 제 피를 흘리면서까지 뭔가 해 주려는 것, 어쩌다 머무른 산채의 어린 딸을 도와주려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그렇게 혈라곡과 맞부딪힐 미래가 걱정이 된다면 오히려 련의 몸부터 챙기는 게 옳은 것 아니냐는 의문.

그러나 그것은 엄밀히 말하면 의문이 아니라 련의 생각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은 눈치였다.

“륜아야.”

“네.”

“내가 혈라곡을 어떻게 하고 싶어 하는 건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가 내 꿈이기 때문, 야! 웃지 마. 백련! 웃지 마!”

“……안 웃었어요.”

- 야옹!

련의 품에 안겨 있던 백련이 훌쩍 뛰어올라 화륜의 품에 안착했다.

“하여간 혈라곡은 내 목표를 이루는 과정이지, 결과나 목표가 아니란다. 알겠니?”

“그 목표가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라면서 왜 애먼 사람들한테 자기 몸 축내 가면서 뭔가 베풀기만 하는 거냐고 묻는 건데요.”

련은 울고 싶었다.

한동안은 화륜이 얌전하고 착실하여 무뎌졌었는데, 그러기가 무섭게 화륜이 전생의 삶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이렇게 피력해 준다.

‘내 할머니잖아! 애먼 사람이 아니라! 우리한테 비 피할 자리를 빌려준 채주 딸이었고! 우리 같이 그 산채에서 비 안 맞고 잘 지냈잖니!’

련은 책임감을 통감하며 한껏 자애로운 미소를 쥐어짰다.

“무사고 무재해 무병장수에는 당연히 내 가족 친지 친구들의 안위가 들어가 있어. 그 사람들을 잃으면, 그건 내겐 사고이고 재해야. 그러면 내 마음에는 병이 생긴단 말이야.”

“…….”

“그리고 절대, 나는 내 몸 축내 가면서 뭔가 하진 않아. 그냥…… 난 좀 아팠잖아, 예전에. 그래서 아직…… 아직 연약한 부분이 좀 남아 있는 거야. 일부러 무리하면서까지 남을 도와주는 게 아니라.”

“피 볼 줄 빤히 알고 수건까지 챙겨 갔으면서요?”

“할머니만 피 흘리실 줄 알았어.”

작은 거짓말만 보탰다. 화륜은 전혀 믿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그래도 더는 입을 열지 않았다.

깊은 한숨을 푹 내쉬고는 빙설언이 챙겨서 보내온 장신구며 옷가지 등을 시큰둥하게 들춰 볼 뿐이었다.

련은 입술을 우물거리다가 슬그머니 화륜의 소매를 잡아끌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

“네? 뭐? 하, 누가 뭘요? 아니, 제가 무슨 남 걱정 같은걸.”

련의 말에 자신이 더 놀라서는 펄쩍 뛰며 부정하던 화륜이 돌연 입을 딱 다물었다.

“륜아야?”

“아니…….”

화륜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한참이나 련을 바라보다가 슬그머니 고개를 흔들었다. 뭔가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아니,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화 풀었어?”

“처음부터 화 안 냈거든요.”

“화냈어. 눈을 이렇게 뜨고 삿대질을 하면서 뭐라고 했잖아.”

“제가 뭐라고 무슨 화를 내냐고요.”

“그야 너무 걱정하면 화를 낼 수도 있으니까. 이 누이는 하해와 같은 마음으로 모두 이해한단다.”

“…….”

“진짜 걱정 끼쳐서 미안. 근데 정말로 엄청 무리하고 그런 건 아녔어. 이제 괜찮기도 하고!”

“아……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알겠으니까 이제 그만해요.”

소매를 뿌리치면서 손을 황급히 내젓는 것이 몹시 부끄러운 눈치인 듯해서 련은 배시시 웃고는 화제를 바꿨다. 묻고 싶은 게 있기도 했다.

“그런데 륜아야, 너 혹시 홍화시라는 게 뭔지 아니?”

“홍화시요? 온천수로 키운 감 얘기하는 거예요? 그것도 무슨 영약인데.”

“아! 맞아, 그런 건가 보다.”

“홍화시는 왜요?”

“할머니 병에 그게 필요할 것 같아서 찾아보려…….”

결국 화륜이 비명이라도 지를 듯한 표정으로 역정을 냈다.

“사람이 눈치가 좀 있어야 할 거 아니에요! 조금 전까지 나하고 무슨 소리 하고 있었어요!”

남 도와주다가 자기 몸 축내지 말란 얘기를 마르고 닳도록 했건만!

“우리 아기 찹쌀 경단이 아주 귀엽다고?”

“환장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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