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0화
* * *
“그냥 감나무를 온천수로 키우기만 하면 되나?”
“안 되죠. 그런 애들 중에서도 뿌리가 익지 않고 살아남은 나무에 맺힌 감, 또 그중에서도 첫눈을 전부 녹이는 열기를 가진 감이 홍화시일걸요.”
련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감이 눈 올 때까지 남아 있었으니 엄청 붉게 익었을 테고 온천수로 자랄 정도로 생명력이 강했다면 영기로 충만할 터였다.
“그 첫눈 어쩌고는 발현하는 조건이야? 아니면 홍화시를 감별하는 조건이야?”
“그건 저도 모르죠. 그냥 그런 얘기가 있다고만 들었어요. 한 번도 본 적 없기도 하고.”
“그렇구나…….”
“누이는 어디서 들었는데요?”
얼버무리려던 련은 문득 고개를 돌려 눈을 가늘게 뜨고 화륜을 쳐다보았다.
‘얜 또 이걸 어디서 들었지?’
홍화시라니, 자신은 이번에야 처음 알게 된 것인데 화륜은 어째 저리 상세하게 잘 알고 있단 말인가?
“나는 그냥…… 할머니 약 만드는 데 필요할 거 같다고 들어서.”
“그럼 여기 약당에 그게 있겠죠.”
련은 한 번도 본 적 없고 그전까지는 안 적도 없는 영약의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겨울이 다가와 앙상한 나뭇가지에 매달린 진한 색 홍시로밖에 상상이 되지 않았다.
‘여기에 그런 게 있을까? 이게 보관이…… 되나?’
톡 건드리기만 해도 터져서 흐르는 결말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여태 상하지 않고 남아 있을 수가 있어? 지금은 여름인데. 아니, 뭐 영기를 머금고 있으니까 어떻게 가능할 것 같기도 하지만 북해에 감나무는 있을까? 감나무가 살아서 자랄 수가 있어?’
북해의 기후와 식생까지 고민하던 련은 미간을 문질렀다.
“너 그거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
화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련을 쳐다보았다. 이심전심이라던가? 련이 빠르게 말했다.
“뭐 힘든 거 하는 거 아니야! 무리하는 거 아니야! 아무것도 아니야! 솔직히 힘든 건 무공 수련이 제일 힘들지.”
당장 내공을 쌓을 수 없다는 약점이 있으니만큼 련은 스스로의 무공을 좀 더 엄격하게 익히려고 했다.
내공이 있는 사람보다 더 정교하고 확실하고 세밀하게 검을 놀릴 수 있다면, 상대의 움직임을 한발 먼저 꿰뚫어 보고 움직일 수 있다면.
‘이것만으로는 몇 년 버티는 게 고작이겠지만 그 안에 방도를 찾으면 돼.’
아직은 또래들의 심법에 대한 깨우침이 고만고만한 터라, 무공 자체에 대한 련의 압도적인 이해력만으로도 지금 당장은 큰 문제가 없지만…….
경항운련을 거쳐 보니 알았다.
할아버지나 모용취려가 그렇게 걱정한 이유가 있었다.
‘무림인들…… 일단 자기보다 힘이 세지 않으면 말을 안 들어.’
가문을 건사하고 이런 문제가 아니었다.
경항운련에서 아이들을 통솔해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던 것도 아이들이 련을 잘 따랐기 때문인데, 련은 그 이유를 명확하게 알았다.
자신이 그 애들을 이겼기 때문이다!
약하면 보호나 받아야지, 앞에 나설 수 없다. 화륜의 태도만 봐도 명확했다.
가장 가까이에서 병약한 모습만 몇 번 봤더니 홍시 생김새 좀 물어봤다고 행여나 무리해서 찾아다닐까 봐 도끼눈을 뜨는 것이.
‘얘는 무공은 안 배운다 안 배운다 노래를 해 놓고 사고방식은 어쩜 이렇게 꽉 막힌 무림인이지? 저러고도 무공 배우기 싫다고? 참 나!’
“아 또 왜 그러는데요? 제가 또 뭐 잘못했어요?”
‘엎드려 절이라도 할까요?’라는 표정으로 양팔을 들어 보이며 물어보는 게 괜히 얄미워서 련은 고개를 홱 돌렸다.
“넌 내가 할머니 앞에서 딱! 얜 제 동생이에요, 라고 소개를 하는데 거기서 하인이라고 대뜸 대꾸하니?”
“할머니한테 생판 남을 손자로 들이미는 게 좋은 생각 같진 않은데요.”
련은 언제 고개를 돌렸냐는 듯 다시 화륜의 정면에서 그의 뺨을 양손에 쥐고 조물거렸다.
“아니, 생판 남이래도. 이렇게 귀엽고 말랑한 찹쌀경단이면 손자 삼으실 수도 있지.”
“안 말랑하고 안 귀여우니까 저리 좀 가요.”
련은 ‘그래도 찹쌀경단 아니라는 소리는 안 하네?’라며 놀려 줄까 하다가 번쩍하는 화륜의 눈동자를 보고 입술을 꼭 깨물며 미소 지었다.
화륜이 눈을 치뜨며 말했다.
“찹쌀경단 얘기하려고 했죠.”
“아닌데.”
“했잖아요.”
“아니라니까.”
* * *
“홍화시…… 요?”
련은 빙궁 의약당 중에서도 약당 의원의 표정을 보자마자 답을 알았다.
‘없구나.’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그…… 홍시 말씀하시는 것이지요?”
“옛날이야기?”
련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련이 전혀 모르는 눈치를 보이자 약당 의원은 얼떨떨한 얼굴로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었다.
“그 옛날에…… 아프신 어머니께서 풍문으로만 들었던 홍시를 먹고 싶다고 하셨지요. 안도 밖도 붉고 꿀처럼 달콤하다는 걸 말입니다. 그 딸이 열심히 찾아 헤매었는데 사실 북해에는 나지 않는 과일이라 도통 찾을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북해에는 나지 않는 과일…….’
련은 눈을 질끈 감고 싶은 마음을 꾹 참았다.
“그러다 위로는 차가운 공기가 요동치고 아래는 온기가 올라오는 땅에서…… 내리는 눈이 녹아서 떨어지는 곳에서 홍시를 하나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게 홍화시?”
“예에에.”
만년설삼 같은 건 진짜 있잖아,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으나 꾹 참았다.
‘하긴, 그것도 다 진짜 만년짜린 아니겠지…….’
그냥 엄청난 양의 영기를 품고 있을 뿐이지.
련이 시무룩해지는 모습을 보고서 의약당 의원은 못내 귀여워하는 표정을 짓다가, 뒤에 선 소년이 매서운 눈길을 한 걸 보곤 몸을 움츠렸다.
마치 ‘그거 하나 안 구해 놓고 뭐가 좋다고 쪼개고 있어?’라고 호통치는 것 같은 표정 아닌가.
그러나 련은 둘 사이의 그런 교감은 눈치채지 못하고 터덜터덜 몸을 돌렸다.
‘그냥 옛날얘기 속에나 나오는 거라고? 하지만 선경에서 그렇게 얘기해 주었으니까 정말 없을 리는 없는데.’
거기다 이 세상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해도 당장 구할 수 없으면 아무 소용 없었다. 빙설언의 상태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완치된 것은 아니었다.
거기다 북해빙궁의 의약당이니 단목세가 사람인 자신이 귀한 물건을 달라고 해도 내주지 않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어서, 빙설언과 단목천기에게도 얘기해 보았으나 무척 곤혹스러운 듯한 표정만 돌아왔다.
자신을 고쳐 준 련의 말을 믿긴 하지만, 무림에서 만만치 않게 굴렀던 둘도 홍화시가 실존한다는 얘기는 들어 보지 못한 것이다.
온갖 기상천외한 일들이 벌어지고 나타나는 게 강호인 만큼 어딘가에 존재할 수도 있겠지만, 빙설언은 이미 거의 나은 듯한 자신의 병을 가지고 아랫것들한테 환상 속의 물건을 찾아오게 시키는 건 꺼려지는 듯했다.
그나마 단목천기만은 련의 이야기를 좀 더 심각하게 받아들여, 당장은 구할 수 없더라도 사람을 움직여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너무 늦게 구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는데…… 아니, 그런데 륜아는 이걸 정말 어떻게 아는 거지?’
조부모님도 들어 본 적이 없다는 옛이야기 속 물건인데도 화륜은 그게 마치 실존한다는 듯이, 본 적은 없지만 익히 아는 물건이라는 듯 말했었다.
련이 눈을 가늘게 뜨고 쳐다보려니 화륜이 무심한 동작으로 그의 양 뺨을 가렸다.
“또 갑자기 뺨 꼬집지 마요.”
“안 하거든.”
“지금까지 엄청 했거든요.”
“나중에 다 커 봐라. ‘누이 제발 한 번만 쓰다듬어 주세요!’라면서 울고불고 매달릴걸.”
화륜이 코웃음 치는 걸 흘겨보던 련은 퍼뜩 든 생각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갑작스러운 표정 변화에 곁에서 나란히 걸어가던 화륜이 또 미심쩍은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없으면…… 만들면 되잖아?’
자신이 이렇게 오락가락하는 시한부 삶을 살고 있는 이유가 다 무엇인가? 몸에서 퐁퐁 솟아나는 영기 때문이 아닌가?
‘만들면 돼. 문제는 어디서 만드냐는 건데.’
그것도 이미 답은 나와 있었다.
의약당 의원이 말해 준 것, 위로는 차가운 공기가 요동치고 아래는 온기가 올라오는 곳.
“누이?”
옆에서 화륜이 한가득 마음에 걸린다는 표정으로 련을 불렀다. 련은 그저 흐뭇하게 웃기만 해서 화륜을 더 불안하게 했지만.
* * *
“어, 그러니까 온천이요?”
“응, 빙정 근처에 있는 온천에 가 보고 싶어.”
“빙정…… 근처 말씀이십니까?”
련에게 붙잡힌 도위는 다소 의아한 표정이었다.
북해빙궁 사람들에게 빙정이란 그들을 보살피는 힘의 근원, 즉 천지신명과 동의어였다.
그러나 동시에 그 ‘빙정’은 실존하기도 했다. 빙궁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호수의 북쪽 끝에 존재하는, 산과도 같은 거대한 얼음덩어리를 북해 사람들은 빙정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자연 앞에 압도되는 마음을 담아.
그리고 그 근처에 온천이 있기는 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아니, 음…… 가는 건 어렵지는 않지만 그렇게 재미있는 곳은 아닙니다. 그리고 그 온천에서 물을 끌어오고 있어서, 따뜻한 온천욕을 하고 싶으시다면 궁 안에서도…….”
“세숫물이 꽁꽁 얼어서 왔는데 무슨 소리람.”
화륜이 틱 던진 말에 도위의 표정이 그만 붉어졌다.
그도 빙궁에서 손님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는 눈치챈 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