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1화
“그건…… 그건 시정하겠습니다. 사죄드립니다.”
왜 그랬는지 변명을 할 법도 한데—련의 조모를 너무나 아끼는 마음에 원통해 그랬다고— 도위는 그런 것 없이 사과하기만 했다.
“난 그 온천을 직접 보고 싶어.”
“어…… 그러면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귀찮은 일일 텐데도 도위는 내색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영락없이 배를 타고 가야 할 줄 알았던 련은 눈을 크게 떴다.
“마차 타고 가?”
“예, 다리를 놓았습니다. 한겨울에는 눈이 쌓여서 썰매를 타고 갈 수도 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날씨가 훈훈해서 어렵겠습니다.”
그 빙정이라는 것을 그렇게 접근하기 어렵게 감춰 두진 않는가 보다 했던 련이었는데, 도위와 함께 온천에 다다르자 접근을 제한하지 않은 이유를 명확하게 알 수 있었다.
‘진짜 크다…….’
멀리서 봐도 작은 산 같았는데, 가까이 오자 마치 거대한 얼음이 자신을 굽어보는 것만 같았다.
이건 접근을 막으려야 막을 수도 없고, 누가 사특한 마음을 가지고—가령 북해의 빙정을 오염시키겠다는— 달려든다고 해도 방법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온천이 있었다. 수원을 보호하기 위해 나무로 된 벽을 치고 자물쇠로 잠궈 두었는데 그 위로 모락모락 김이 올라오는 게 보였다.
“여기서 뭘 하려고요?”
“응? 구경, 구경.”
작은 온천이라고 하긴 했지만 아이 둘과 어른 하나가 구경만 하기에는 차고 넘치는 크기였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따뜻한 수증기가 확 덮치며 뺨을 데웠다.
“하아아아……. 따뜻하다.”
“누이, 지금 열 살이에요.”
중장년인 같은 소리 하지 말라는 화륜의 말에 그를 한번 쏘아본 련은 척척 걸음을 옮겼다.
온천 근처에는 여러 나무와 풀들이 자생해 있었다.
“감나무 찾는 거죠?”
“며칠 새에 열매가 맺힐 수도 있잖아…….”
련의 말에 화륜은 잠시 멀리 떨어진 빙궁을 흘끗 쳐다보다가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왔다 갔다 하는 데 마차를 탄 데다가 온천 바로 근처라 그다지 춥지 않아서 걱정을 던 눈치였다.
“그런데 없는 것 같네…….”
“찾으시는 거라도 있으십니까?”
련이 풀숲만 헤매고 있자 도위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 감나무. 감나무가 아니면 주황색이나 빨간색 열매가 맺히는 나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감나무가 없으면 색이 붉고 과육이 물러지는 과일로 어떻게 비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련의 생각이었다.
“감나무는 북해에서 자라지 않아서…… 없으리라 생각됩니다.”
련의 얼굴이 급속도로 시무룩해지는 걸 본 도위가 황급히 다른 나무 몇 가지를 가리켰다.
“아! 산수유나무가 저기 있습니다. 열매가 다 익으면 붉은색으로 물듭니다. 이건 산사나무이고.”
“와!”
때마침 키가 그다지 크지 않은 나무 두 개가 온천 바로 옆에 붙어서 자라고 있었다.
련은 나무 가까이로 다가가 고개를 위로 들었다. 정수리가 조금 서늘하게 느껴지는 건 저 위압감 넘치는 빙정에서 흘러나오는 냉기 때문인 것 같았다.
“아니, 그건 또 언제 챙겨왔어요?”
련이 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조그만 조롱박 바가지를 보고서 화륜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련은 의기양양하게 온천수를 한번 퍼 올렸다.
‘들어가라, 영기 영기…….’
약간 뜨겁게 느껴지는 뽀얀 온천수에 청명한 기운이 가볍게 소용돌이쳤다. 련은 그 온천수를 나무 아래 뿌리 쪽에 몇 번 뿌려 주고는, 약간 시들었거나 벌레 먹은 나뭇잎들도 한 번씩 다 쓰다듬어 주었다.
‘차라리 잘됐어. 열매가 많이 맺히는 나무들이니까 이 중에 하나는…… 어떻게든 되겠지?’
영기를 준다고 죄다 영물이 되는 게 아니다. 닭장에 닭이 몇 마리나 있었지만 주작이 되어 날아간 건 흑월 하나뿐이었던 것처럼.
영기를 흡수하는 것들 중에서도 빼어난 단 하나만이, 혹은 아주 소수만이 다른 모습으로 탈피할 수 있다는 얘기였다.
‘아니, 그럼 홍린은 뭐지? 한 마리 있었는데 그 한 마리가 바로 딱 그렇게? 청룡이…… 됐다는 거야? 아니, 아니지! 부정 탈 생각하지 말아야지.’
련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도위, 이렇게 우리랑 같이 있어도 돼?”
련이 약간 신경 쓰이는 얼굴로 물었다.
‘궁주님도 도위 이름을 따로 알고 있던데.’
그러면서 도위를 보내 단목세가를 맞이했던 것이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일인 것처럼 말했다.
즉 궁주에게는 그가 단순한 경비대장 같은 게 아니라는 말이었다. 그의 실력을 봐도 그렇다.
‘어지간한 세가 후계자 정도였지…….’
이런 사람이 경비 무사 노릇만 하고 있으니 기묘한 일이었다.
“괜찮습니다. 빙궁을 지키는 일에는 빙궁의 손님들을 지키는 일도 포함됩니다.”
“난 내일도 또 오고 싶은데…….”
시간 뺏기 부담스럽다는 표정을 여실히 지었는데도, 도위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기만 했다.
금방 다 둘러보고 물장난이나 좀 치더니 곧장 내일도 또 오고 싶다는 황당한 얘기에도 직접 수행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도위의 정체에 대해서는, 며칠 뒤 열불이 뻗친 얼굴의 빙설언이 알려 주었다.
* * *
“소궁주 되기 싫다고 해요?”
“내 열이 받니, 안 받니! 기가 막혀서. 자리 준다는데 싫다는 놈은 빙궁에서 또 처음이다.”
“빙궁에서 처음은 아니지 않소?”
그 자리에 함께한 단목천기가 툭 던졌다.
단목천기와 만나서 빙궁주 자리를 내던지고 중원에 남았던 건 빙설언이 먼저였다.
빙설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련에게 조그만 앵두를 반으로 갈라 씨까지 빼 주면서 말했다.
“나야 궁주가 있었으니까 그런 거지! 그를 믿고 간 거다 이 말이오.”
“아니, 나를 믿고 와야지…….”
“믿고 왔더니 나보다 월영재를 더 좋아하는데 내가 뭘 어쩌겠소?”
빙설언은 단목천기가 세가에서 내내 은거해 있던 처소 이름을 언급하며 삿대질했다.
련은 티격태격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쳐다보며 내심 놀랐다.
‘빙궁이 생각보다 유연하게 계승하는구나.’
빙설언에 의하면 빙궁주는 여태 결혼한 적이 없어 아이 또한 없었고, 거기다 애당초 빙궁은 직계 방계 할 것 없이 모아다 ‘빙(氷)’이라는 성을 주고 가장 성취가 빼어난 자 한 명을 찍어서 차기 궁주로 올리는 모양이었다.
“도위는 사실…… 먼 방계의 자손이기는 하나 그 실력이 출중하고 차분해 큰일을 할 수 있을 거라 눈여겨봤느니라. 그래서 빙궁주께서 붙어 아들처럼 가르쳤는데…….”
빙설언이 탄식했다.
“자긴 북해를 이끌 그릇이 안 된다며 경비대장 노릇만 하고 있구나.”
련은 빙설언의 말투에 담긴 뜻을 읽어 냈다.
방계면 방계지 먼 방계의 자손이라고 하면, 사실상 그냥 남이라는 소리였다. 그런 그를 차기 궁주로 삼을 정도로 그의 능력이 출중했던 모양이었다.
빙설언 옆에서 앵두 꼭지를 하나씩 따던 단목천기가 고개를 기울였다.
“흠. 왜 그릇이 안 된다 하는지는 아시오?”
“아 모르지! 알면 진작 뭐 대가…… 머리를 비틀든 멱을 따든 했을 터인데.”
“단어만 바꾼다고 될 일이 아니오, 부인…….”
“하여간 자긴 뭐 북해 사람답지 못하다나 어쩐다나 하는데 무슨 씨알도 안 먹힐 소리만 하는지 모르겠다니까. 궁주께서도 도위 녀석이 외부인과 좀 만나면 맘이 바뀔지 모른다 여기셨는데…….”
별로 소용이 있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련이 온천 나다니는 것에나 따라다니는 걸 보면 훤했다.
“그러면 할 마음 있는 녀석들 중에 골라 앉히면 되지 않소?”
“여기는 말랑한 중원이 아니오. 약자가 어찌 우두머리가 될 수 있겠소?”
“중원이라고 썩 말랑하진 않소.”
“하긴.”
단목천기가 이마를 짚는 사이에 련은 내심 고개를 주억거렸다. 빙궁에 도위만 한 실력자가 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다면 그거야말로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참에 녀석들을 좀 보면 좋겠구나!”
련이 입술을 오물거리며 앵두 먹는 모양새를 흐뭇하게 지켜보던 빙설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련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단목천기가 얼굴을 쓸어내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럴 때의 빙설언은 말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 * *
“아니 이게 왜 갑자기 이렇게, 이렇게 돼요?”
단목현요가 경악한 얼굴로 눈만 치뜨고 쳐다보았다.
그러나 어느새 무복을 단정하게 차려입고 이마에 얇은 띠까지 두른 단목성은 엄한 얼굴로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어머니. 무인이라면 어디서나 배움을 추구해야 하는 법이니까요. 괜찮습니다.”
그 옆에 있는 련 역시 어색하게 옷깃을 추슬렀다. 빙궁의 무복인데 어째 딱 맞았다.
“아니…… 아니, 성아야. 이게 그런 게 아니라…… 어머니, 아버지! 말씀 좀 해 보세요!”
마지막 말은 단목현요가 숨을 죽이고 외쳐서 아주 작게 들렸다.
그러나 일을 키운 장본인인 빙설언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표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