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2화
“예까지 와서 너희도 뭘 좀 배워 가면 좋잖니.”
“견학해도 되는 건 맞아요?”
북해 사람들이라면 기본적으로 다들 익히는 빙백검을 배워 보기로 한 것이다.
그것이 발전된 최종 형태가 바로 빙백신검이다. 빙궁 무사들의 검법.
빙백신공과 어우러질 때 위력이 극대화되는 검법이다 보니, 기초적인 빙백검 정도는 내놓을 수 있다고 본 듯했다.
“무림 세가 기본 검법 같은 건 뭐 가문 소속 표국에만 들어가도 가르쳐 준다며? 우리도 그리하는 중이다. 하물며 내 자식과 손녀들인데 뭘 그리 질색해? 이 어미의 무공은 기본도 공부하고 싶지 않다 이거야?”
“당연히 배우고 싶죠! 북해빙궁의 기본 검법이라니 천금을 주고서라도 배우고 싶죠!”
단목현요는 그야말로 ‘단목세가 외당주란 이런 것이다’라는 걸 보여 주듯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외치고는 곧장 모친을 잡아끌고 구석으로 가서 속삭였다.
“하지만 저기서 우리 애들이…… 너무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어떡해요.”
“어릴 때 배움이 고달픈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
“북해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해요, 어머니. 어머니 뺏어 왔다가 이렇게…….”
단목현요는 입술을 깨물고 왈칵 올라오려는 눈물을 꾹 참았다.
그들이 찾아온 이후, 빙설언은 기적이라고 불려도 아깝지 않을 만큼 혈색을 되찾았지만 그렇다고 한창때의 위용을 찾은 것은 아니었다.
앙상하게 마른 몸은 아직 산책마저 부축이 필요한 지경 아니던가.
“……이렇게, 아니 어쨌든. 그러니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실수하면 더 싫어할 것 아니에요.”
“너희만 어렵겠니? 저놈들도 어렵겠지.”
단목세가에서는 낙성십이검 중에서 초식 몇 가지를 선보이기로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저희가 그쪽에 뭐라 할 수는 없잖아요.”
병약해진 빙설언을 두고, 단목세가에서 어떻게 북해빙궁에 그러겠는가?
그러나 빙설언은 단호했다.
“왜 못 해? 혼쭐을 내줘! 내가 다친 게 너희 때문이냐? 왜 너희가 나서서 기가 죽어? 그러니까 이놈들이 대놓고 설치는 거야!”
빙설언이라고 빙궁 사람들에게 호통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러나 오히려 역효과였다.
빙궁 사람들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빙설언이 이제 자신들보다 중원 사람들 편을 든다는 생각에 서운한 마음이 넘치니, 빙설언이 아니라 단목세가를 향한 그 사나운 마음이 더 깊어질 따름이었다.
“너희가 죄진 건 아무것도 없다.”
“어머니…….”
“굳이 있다면 네 아버지?”
빙설언은 그렇게 말하곤 껄껄 웃다가, 딸의 이마 선을 따라 쓸어내렸다.
“나와 네 아비의 일에 네가 왜 움츠러드느냐. 그럴 것 하나 없느니라. 너는 빙궁주의 당질(堂姪) 아니냐. 혼낼 것은 혼내면 되지.”
겨우 마음이 차분해진 단목현요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그놈들이 련아 세숫대야를 얼려 왔다고요. 그 작고 여린 게 한참을 아프다가 이제야 나아서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 그래요?”
정작 련아도 이르지 않은 일을 그 애의 고모 되는 단목현요가 조르르 일러바치는 모양새였으나 빙설언은 그런 실없는 모양새를 보고도 꾸중하지는 않았다.
“그놈들은 내가 따로 일러 혼을 내도록 하마.”
“……그러, 그러진 마시고요. 다 어머니 좋다고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 이후로는 제가 련아 알아서 챙겼어요.”
“우리 딸이 다 컸구나. 제 조카도 먼저 챙길 줄 알고.”
“당연하죠! 성아는 저하고 왔지만 련아는 부모님도 동생도 없이 혼자잖아요. 현우 녀석은 철이 없고. 어머니, 그 녀석이 련아 아끼는…….”
떠들다 보니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아무리 단목현요라고 해도 그걸—동생이 저 좋자고 잉어를 고아 먹었다고는!—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었기에 황급히 둘러댔다.
“아, 아끼는 잉어도 방생해 버리고 말이에요.”
“현우도 내가 꾸중을 해야겠다.”
“아니 뭐…… 자기 잉어이긴 했으니까요.”
빙설언은 괜히 툴툴대는 둘째 딸을 바라보다가 뭉근히 저려 오는 마음을 꾹 눌러 참았다.
제 오라비가 멋있다며 눈을 빛내고 동생하고는 티격태격하면서도 동생이 형에게 한 대 맞고 오면 또 오라비와 다투기도 하던 조그만 아이였던 단목현요였다.
가운데에 끼여 두 형제들보다 부족한 자신의 성취를 매일 밤 곱씹으면서 잠 못 이루던 것도 알고 있었다. 한 번은 엉엉 울면서 안겨 온 적도 있었다.
그랬던 딸이 이렇게 의젓하게 자라서 세가와 빙궁 사이를 조율하려고 눈을 빛내다가, 금방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투정을 부리기도 하는 건 어머니와 함께 있다는 걸 실감했기 때문일 터였다.
“자, 그럼 재미난 구경을 하러 가 볼까?”
* * *
련은 빙설언이 어떻게 이 먼 북해에서 중원 남쪽의 항주까지 와 자리를 잡게 된 건지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과 실행 사이에 간격이 없으시구나…….’
할 마음을 먹으면 그냥 하는 거다.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니까 도위의 얘기에 갑자기 빙궁 연무장에 가서 후계자 후보들 구경이나 하자는 것에서부터—이것도 갑자기 잡을 만한 일정이 아니건만!— 여기까지 온 것이다.
빙설언은 연무장에 와선 한 바퀴를 둘러보더니 아이들을 모아 놓고 ‘저 남쪽에는 경항운련이라고 해서 물길 하나 내놓고서는 다들 모여 무공에 대해 익히고 교류한다는데 우리는 아무것도 안 하나?’라고 한마디 했다.
빙설언이 하자고 하면 하는 것이 바로 빙궁이다. 여기에 빙궁주가 그 소식을 듣고 재미있겠다며 헐레벌떡 달려오기까지 해서 바로 자리가 완성된 것이다.
모처럼 할머니가 신나 하시는데 맞춰드리는 게 또 손녀의 도리이다 보니, 련과 단목성도 무복을 갖춰 입고 왔다.
위 연배는 다들 흥미진진한 얼굴이었다. 단목현요와 단목현우 둘인데 그 둘이 빙설언의 자녀들 아니던가.
북해빙궁 사람들이 빙설언을 사랑하는 건 그녀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북해의 태양이 될 존재였으니까.
그런 그녀의 자녀들을 꺾는다면? 그 생각만으로 호승심이 끓어오르는 모양이었다.
‘도위는…… 저래서 북해 사람답지 않다고 한 걸까?’
다들—심지어 단목현요나 단목현우까지— 열기에 가득 차서 신이 나 있는데, 이들 틈바구니에서 도위만이 다소 곤혹스러워하는 표정이었다.
한숨을 깊이 내쉬고는 이리저리 사람을 보내서 관람하려는 이들을 정리하고, 비상사태를 대비해 의원들을 불러오고, 수건이나 물 등을 챙겨 오느라 바빴다.
그러나 련은 그쪽에 오래 눈을 주지 못했다. 어른들은 그쪽이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인데 빙백검을 선보이기 위해 나선 아이가 낯이 익었기 때문이었다.
“어라?”
빙설언 앞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겠다고 온몸에 힘이 꽉 들어간 소녀.
북해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련의 방에 꽁꽁 얼린 세숫대야를 가져온 바로 그 시동이었다.
‘세상에, 얼린 세숫대야가 제자였구나.’
번쩍번쩍 빛나는 눈으로 빙설언을 흘끗대는 모양새가 아무래도 그녀를 몹시 동경하는 눈치였다.
젊어서는 자신의 것이 될 수 있었던 빙궁주 자리를 내치고 사랑 하나만 붙잡은 채 중원에 뛰어들었고, 그 이후에는 혈라곡을 상대로 자신의 모든 역량을 불태우며 약자를 지켰던 빙설언의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얼음과 냉기로 둘러싸인 땅에서 태어난 불꽃 같은 무인이라면야 어린아이들이 전해지는 말만 듣고도 동경할 법했다.
련은 부채를 펼쳐 보기 마땅치 않아 아래쪽 흙바닥을 흘끗 쳐다보았다.
빙문비
특성 : 각인 / 자부심 / 헌신적인 / 앞만 바라보는 / 빛을 좇는
자질과 오성 : 중-상
빙백신검 : 4성
빙백신공 : 3성
백운보 : 2성
고민 : 철담빙혼 앞에서 반드시 단목세가를 꺾고 완벽한 모습을 보일 것!
도움말 : 말로는 안 됩니다.
각인은 뭔지 모르겠지만 그 뒤는 줄줄이 알 만했다. 빙궁에 대한 넘치는 자부심, 빙설언이나 궁주에 대한 헌신, 거기다 옆을 돌아보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
‘아니, 그런데 말로는 안 된다니? 다른 걸로는 된다는 거야? 말 말고 뭐?’
“그럼 먼저 빙백검을 선보여도 되겠습니까?”
“오! 좋아, 좋아!”
궁주 빙설한이 눈을 깊게 접고는 손뼉까지 치면서 허락하자 얼린 세숫대야, 문비가 자신의 검을 휙 뽑아 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빙설언이 설명을 시작했다.
“북해의 검은 차갑다고만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지. 얼음을 끓여 녹이는 열기와 그 열기를 단숨에 다시 얼음으로 잠재우는 냉기가 공존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검이다.”
그녀의 말대로 문비의 검 또한 거칠었다. 3성에 불과한 성취 탓도 있겠으나 본래부터 험악한 기색이 역력한 검법이었다.
“차가운 쇳덩이는 나약한 인간의 살갗을 잡아 뜯는 맹수나 다름없지.”
련은 문비의 호흡에 희뿌연 김이 서리는 것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저 호흡에 입김이 서리는 건 여기가 추워서는 아니었다. 아무리 북해라 해도 일단은 여름인 데다가 사람들이 왕창 모여 공기가 데워진 연무장인데 김이 서린다는 건, 반대로 저 호흡이 더 차갑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