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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4화
수련의 시간이 깊으면 깊을수록 모든 것은 체화되어 자신과 하나가 되는 법, 그에게는 빙백신검이 바로 그러했다. 그리고 궁주로 군림하며 그가 빙백신검 그 자체임을 오랜 세월에 걸쳐 증명해 왔다.
다른 이가 펼치는 빙백신검을 본다 한들 그가 펼치는 것보다 바르지는 못하다. 즉 그 긴 시간 동안, 검법의 정확한 형태를 객관적으로 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배움과 깨달음은 관조만으로도 오는 법이다. 그건 사실 무언가를 위에서 내려다보듯 정확히 살필 수 있는 기회 자체가 귀하기 때문이었다.
그 기회를 이런 우연한 자리에서, 사촌의 손녀들을 돌보며 얻으리라고 생각이나 했으랴!
“빙백신검을…… 본 일이 있느냐?”
빙설한의 질문에 련은 고개를 흔들었다. 문비가 펼친 것도 사실 빙백신검이 아니라 그냥 빙백검이었다.
“허어, 정말 처음 봤다고? 처음 보고 어떻게…….”
그 처음 본 것이 숙련된 교두나 빙궁의 고수가 펼치는 검법이 아니라, 아직 완전히 성숙하지 못한 또래가 펼치는 것 아니었나.
‘어찌 다소 부족한 것을 보고서도 그 안의 이치를 끌어내 완벽하게 펼쳐 낼 수가 있지?’
련이 빙궁의 검을 보았을 리 없다는 건 그 스스로가 가장 잘 알았다. 보여 줄 일말의 가능성이 있었던 빙설언은 계속 북해에 있었으니.
알면서도 어디서 본 적이 있느냐고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믿을 수가 없어서.
“빙백…… 검을 펼쳐 보니 어떻…….”
련이 보여 준 것이 빙백신검이라고 해도 모자람이 없다고 느꼈던 터라 빙설한은 말끝을 흐렸으나 뒤늦게 떠오른 생각에 더는 말을 잇지 못했다.
모든 걸 이해한 사람의 눈에는 어쩌면 다른 길도 보이지 않았을까.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가 긴 역사를 가진 검법을 발전시킬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 허황되다는 걸 알면서도 ‘혹시?’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생각이 들어맞는다면, 그래서 련의 입에서 그런 길이 나오기라도 한다면…….
‘여기서는 안 된다.’
배움을 얻는 길에 부끄러움과 수치가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아직 수양이 얕은 이들은 자신보다 부족해 보이는 이에게서 배움을 얻었을 때 부끄러움이나 수치를 넘어서서 분노를 느끼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
행여나 이 자리에서 그런 마찰이 일어나게 둘 수는 없었다.
빙설언 역시 빙설한의 생각을 눈치챘는지 적당히 말을 돌렸다.
“크흠, 련아가 아주 훌륭하게 펼쳐 주었구나. 그러면 이제 낙성십이검을 보여 줄 수 있겠느냐?”
‘그런데 이거…….’
빙설한은 문비의 표정을 흘끗 쳐다보고는 내심 혀를 찼다.
문비는 련이 검법을 펼치기 시작했을 때부터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더니, 이제 와서는 그냥 놀라기만 한 게 아니라 경악과 동시에 한껏 주눅이 든 눈치였다.
‘그럴 만도 하다마는…….’
자신이 평생 수련해 온 검을, 그걸 또래 소녀가 딱 한 번 보고 그보다 더 발전시켜 흉내 냈으니 그 충격이 보통일 리가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 단목세가의 차례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더라도, 아무리 본 것이 완벽한 검법이라고 하더라도 보통은 한 번 보고 그대로 따라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차라리 낙성십이검을 먼저 보여 달라고 했었어야 했나?’
후회 아닌 후회가 살짝 휘몰아쳤지만, 그의 재종손은 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촌을 쏙 빼닮은 눈동자로 방싯 웃고는 다시 연무장에 섰다.
그와 동시에 작은 소녀가 춤을 추듯 유려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문비가 눈에 불을 켜고 련의 검 끝을 노려보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련이 한 것처럼 해내 보이겠다는 의지로 가득 찬 얼굴이었다.
련 역시 빙백검을 따라 할 때보다 그 이상으로 긴장해서 휘둘렀다.
자신이 휘두르는 빙백검만으로도 눈이 좋은 무인들은 작게나마 깨달음을 얻어 가는 걸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단목현우의 깨달음 3
단목현요의 깨달음 2
단목성의 배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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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나 다를까 선경이 가족들의 진보를 알려 주는 통에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흥이 오르니 집중력도 나란히 올라서, 련이 마지막 초식을 끝맺을 때는 반쯤 무아지경이었다.
단목천기는 체면을 생각해서 애써 표정을 가다듬으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눈빛에서 놀라움과 뿌듯함을 숨기지 못했다.
손녀가 세가의 검을 완벽하게 선보였으니 그 어찌 가슴이 벅차지 않으랴.
그 와중에 단목현요와 단목현우는 아예 다른 소리에는 귀 기울이지도 못한 채 무언가를 곱씹고 있었다. 방금 본 련의 검법에서 무언가를 느낀 것이다.
그리고 고요한 건 빙궁의 무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검법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펼쳐졌을 때만 나오는, 세 살 난 어린아이까지 느낄 수 있는 압도되는 감각 앞에서 무엇을 말하겠는가.
“아…….”
그제야 주위의 분위기를 확인한 련은 일단 검을 갈무리하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다른 검법 두 가지를 연이어 펼쳤더니 숨이 차오르고 기분 좋을 정도로 땀이 배어 나왔다.
련의 호흡이 차분해질 때쯤, 처음엔 분명 이글거리던 문비의 눈이 지금은 왜인지 좀 넋이 나간 듯 촉촉해 보였다.
“음, 문비? 어땠어?”
문비가 어깨를 움찔 떨었다가 입술을 악물고는 검을 뽑아 들었다. 련이 했던 것처럼 그대로 따라 해 보려는 듯했다.
또래 소년소녀들이 간절한 표정으로 문비를 쳐다보았다. 문비가 그들 몫까지 단목세가의 콧대를 납작하게 눌러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런 문비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손녀의 검법 앞에서 잠시간 벅찬 마음을 정리한 단목천기가 헛기침을 하고는 간단하게 설명했다.
“빙궁의 검과는 좀 다를 것인즉. 낙성십이검은 하늘의 이치가 스며 있는 검법이니, 떨어지는 별을 어찌할 것인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
련은 그대로 얼굴을 쓸어내리고 싶었다.
단목천기와 이런 식으로, 검법에 관해 추상적인 대화를 한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단목천기가 단목세가의 검에 대해 완전히 꿰뚫고 있기에 가능했던 것이지, 이 검법을 처음 보는 아이에게는 통할 것이 아니건만.
그러나 련도 더 자세하게 떠들지는 못했다. 빙백검에 대한 빙설언의 설명도 그와 비슷했으니까.
곧 문비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는 검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오, 그래! 우리 문비 잘한다!”
빙궁의 젊은 무사들이 곧잘 따라 하는 문비를 보고 손뼉까지 치며 열렬히 환호했다.
련이 압도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빙궁에서도 한 방 먹여 주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묻어나는 응원이었다.
그러나 몇 분 지나지 않아 숨죽인 탄식이 살짝 흘러나왔다. 처음 본 검법을 따라 하는 데는 한계가 있는 게 당연했다. 다음 검로를 떠올리지 못한 문비가 손이 새하얘지도록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거기는! 특별하게 어려운 부분이라서 한 번 더 보여 주고 싶었어.”
그 잠깐 사이에 련이 잽싸게 말했다. 거의 울음을 터뜨릴 뻔했던 문비가 눈만 크게 깜박이며 련을 쳐다보았다.
“그 부분은 쏟아지는 유성우를 본떠 만들었다고 하는 부분인데 그래서 빠르게 여러 번 검을 휘두를 수 있어. 그러니까 여러 명을 상대할 수 있겠지?”
문비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는 뜻이었다.
“때문에 빠른 방향 전환이 가능해야 하고 그래서 팔과 다리의 무게중심이 살짝 비틀려 있는 거야. 힘의 균형이 쏠린 쪽으로 바로 움직일 수 있게. 빙백검에도 비슷한 게 있지? 일곱 번째 초식이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고 느꼈는데…….”
련은 최대한 문비가 무안하거나 창피할 틈이 없도록 빠르게 말했지만, 오히려 그 지점에서 문비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공격한 모양새가 되고 말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련은 그냥 조금 서둘러 말을 했을 뿐이지만 무학의 이치가 바구니에서 와르르 쏟아지듯 우수수 쏟아지는데 넋이 빠지지 않을 도리가 없다.
“아…….”
련이 막막한 얼굴로 단목천기와 빙설언을 쳐다보았지만, 단목천기는 그저 흐뭇하게 웃고 있었고 곁의 단목현요와 단목현우는 이 이상 우쭐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빙설언은.
“그래서? 련아야, 계속 얘기해 보거라.”
눈을 빛내며 련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던 얘기는 낙성십이검에만 해당되는 이치가 아닌바, 여럿이 얘기를 듣고 진일보하면 더욱 좋은 일이었다. 그 여럿이 남도 아니고 할머니의 가문 아닌가.
할머니 집안이 강해지고 자신은 자신대로 행운 수치를 쌓을 수 있으니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좋은 일만 가득이다.
련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