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5화
* * *
다음 날 아침.
눈앞에는 따끈하게 김이 올라오는, 약간 뜨거운 것 같은 세숫대야가 있었다.
‘적당히 할 걸 그랬나? 아냐, 그래도 그 덕에 숙부랑 고모가 다 조금씩 전진했으니까……. 하아, 그래도 적당히 할걸.’
련은 침대에 엎드려 후회했다. 그런다고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세숫대야가 다시 얼어붙지 않는데도.
문비나 다른 빙궁 소년 소녀들도 정말 노력했지만 그렇다고 련이 했던 것처럼 한눈에 보고 그대로 흉내 낼 수는 없었다.
련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요령과 검로를 첨언하며 알려 주려고 했고 문비 역시 눈에 불을 켜고 새겨들었지만, 평범하게 무재가 뛰어난 아이가 잘 습득하는 수준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아이들끼리 모인 공간이 어색한 침묵 속에 질식해 가는데 단목세가 사람들은 뿌듯해하기만 했다.
그 이후로 단목현우와 단목현요, 그리고 도위와 빙궁 무사들이 차례로 검법을 선보이고 담론을 나누는 것은 훨씬 더 치열하고 격정적이었다.
재능이 특출나기로는 지지 않는, 비슷한 자들이 한데 모였으니 당연한 일이다. 서로 비무도 하고 지적했다가 기분이 상해서 다시 비무 하고 그러다가 의기투합해서 함께 저녁을 즐기러 갔다.
그 자리에 빙궁 아이들도 함께했는데, 련은 단목성과 같이 빙궁주의 도법을 봐야 해서 먼저 일어섰었다.
그렇게 단목성이 성취하는 걸 보느라 즐거워서 낮에 있었던 일들도 잊고 까무룩 잠에 빠졌다.
그런데 푹 자고 일어나 눈을 뜨자 밖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뜨거운 물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세숫대야가 대령된 것이다.
‘난 늦잠 잤는데…….’
그런데도 이렇게 딱 맞춰 뜨끈한 물을 가져오려면 물이 식을 때마다 다시 데워야 했을 것이다.
문비 나름의 사과 혹은 화해의 표시인 모양이라고 생각하면 귀엽게까지 느껴진다. 련은 너무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고 기쁘게만 생각하기로 했다. 이대로 빙궁과 사이가 좋아지는 건 련이 바라는 바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따끈한 세숫물은 하루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며칠이나 그 세숫대야가 대령되더니, 결사의 각오를 다진 듯한 얼굴의 문비가 대련을 청해 왔다.
“한 판만…… 부탁드리겠습니다.”
요 며칠간 마음 고생 몸 고생을 다 했는지 문비의 안색은 조금 초췌했지만, 눈동자만은 형형하게 빛났다.
련은 어색한 얼굴로 문비를 바라보다 세숫대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나 세수만 하고…….”
“네, 넵!”
* * *
‘오.’
문비와 마주 보고 선 련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를 찬찬히 살폈다. 선비는 헤어진 지 며칠만 지나도 눈을 비비고 다시 봐야 한다더니 그 얘기가 선비에게만 해당되는 건 아닌 듯했다.
빙문비
특성 : 각인된 / 자부심 / 헌신적인 / 앞만 바라보는 / 빛을 좇는
자질과 오성 : 중-상
빙백신검 : 5성 (1▲)
빙백신공 : 3성
백운보 : 3성 (1▲)
고민 : 내 성취를 보여 주겠다.
도움말 :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는 법입니다.
단 며칠 새에 빙백신검과 백운보의 성취가 1성씩 올랐다. 보통 노력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다만 불안한 것도 함께 보였다.
‘각인이…… 됐다고? 무슨 말인데, 이게? 그리고 뭐가 두드릴수록 단단해지냐고? 그건 철이나 그런 거잖아!’
“왜…… 왜 그러십니까?”
련의 눈빛이 시시각각 놀라움, 감탄, 이 성취를 함께 만들어 냈다는 자부심에서 뒤이어 불안과 걱정으로 번져가자 문비의 표정도 함께 불안해졌다.
련은 얼른 얼굴을 고치고는 방긋 웃었다.
“아니야! 대련, 대련해 보자.”
“네!”
한껏 긴장한 문비가 목검을 쥐었다. 그리고 련의 고갯짓에 따라 달려들었다.
목검과 목검이 부딪치는 경쾌한 소리, 급박하게 움직이는 보법을 따르는 발자국 소리, 옷깃이 격렬하게 펄럭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땀방울이 흩날리고 문비의 머리를 올려 묶었던 끈도 풀어져 날아갔다.
타아아악!
그리고 마침내 문비의 목검이 손아귀에서 날아가 먼 곳에 떨어졌다. 문비가 그 목검을 쳐다보다가 련을 보고는 좌절한 표정을 지었다.
련은 대련을 시작하기 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양새였다. 격하게 움직였으니 땀이 송골송골 맺히긴 했지만, 땋아서 둥글게 말아 묶은 머리카락도 그 머리카락에 꽂은 갖가지 옥과 보석 장식도 흐트러짐 하나 없이 그대로였다.
“엄청 늘었다! 대단해! 얼마나 열심히 한 거야?”
“네…… 네?”
피를 흘리지 않을 뿐이지 엉망진창이 되어서는, 성취를 보여 주고 싶었는데 모자란 모습만 보여 침울해지려고 했던 문비가 얼떨떨하게 고개를 들었다.
련은 박수까지 치면서 기뻐하고 있었다.
“며칠밖에 안 됐는데 검로가 훨씬 더 정교해졌네. 보법이랑 검법이 움직이는 것도 합이 딱 맞고. 진짜 대단해.”
문비의 얼굴이 천천히 상기되기 시작했다. 신경 썼던 부분을 련이 명확히 집어 준 것이다.
잠깐 고민하던 련은 문비에게 기다리라고 말한 뒤 지필묵을 가지고 왔다.
그러곤 문비에게 일러줄 수 있는 얘기를 죽 적어 내렸다.
“빙궁 스승님들이 더 잘 봐주시겠지만, 난 타지 사람이니까 다르게 보이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서.”
“말씀으로 해 주셔도 되는데…….”
련은 다 쓴 종이를 접어 문비에게 건네주며 빙긋 웃기만 했다.
‘그럴 수는 없지!’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말로 단점을 지적받으면 인간인 이상 욱하는 마음이 들 수밖에 없지만, 글로 보는 것에는 훨씬 유하게 반응했다.
일단 서면으로 한 번 걸러지고 지적하는 상대가 눈앞에 보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마음의 날이 가라앉는 법이었다.
‘이제 겨우 빙궁이랑 사이가 좋아지고 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선경이 보여 준 도움말이 도움이 되긴 했다. 말로는 안 된다…….
“필요 없으면 버려도 돼.”
“아니에요!”
문비가 화들짝 놀라서 서찰을 품에 꼭 안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감사하다는 말을 겨우 하곤 목이 새빨개져서 돌아갔다.
“그거 사람들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요?”
“그거?”
“누이가 써 준 거요.”
조금 떨어진 곳에 다소 방만한 자세로 앉아서 둘의 대련을 구경만 하던 화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툭툭 털며 말했다. 련은 고개를 갸웃했다.
“낭랑비급이라고 하던데.”
“낭랑, 뭐?”
“맘도 좋지. 그걸 다 알려주고 있어요? 세가에서야 같은 세가 사람이라고 해도 여긴 빙궁인데.”
“나누고 살면 다 나한테도 돌아오는 거야…….”
진짜로…….
련은 빈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눈을 깜박하자 그 위로 선경이 파르르 떠올랐다.
빙문비의 배움 1
행운 수치 : 115 / 120 (1▲)
‘다 차기까지 얼마 안 남았는데. 이거 다 채우면 뭔가 있나?’
지난번에 거의 다 채워 뒀던 행운 수치는 혈라곡 혈귀들 상대하면서 다 태운 통에, 행운 수치를 여기까지 채워 본 건 처음이었다.
“그리고 빙궁이 어? 옛날에 혈라곡 물리칠 때 얼마나 도움을 줬니. 나중에 혈라곡이 다시 난리칠 때도 서로 도우면 얼마나 좋겠어.”
“무림맹이 있잖아요. 흑천련에 마천교까지 끌어들여 놨는데도 부족하겠어요?”
“난 솔직히 마음 같아선 남만야수궁이든 태양궁이든 포달랍궁이든 다 같이 손잡고 싸웠으면 좋겠어.”
전설에나 남아 있는 새외무림의 이름이 줄줄 나오자 화륜이 웃음을 흘렸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는데 혈라곡 좀 맞들자는 게 웃겨?”
“다 같이 손잡으면 그 손잡은 놈들끼리 싸울 텐데 그럼 안 웃겨요?”
“안 싸우게끔 해 봐야지.”
“어떻게요?”
련은 솔직히 이 순간 선경이 보여 준 문비의 도움말이 떠올랐지만-말로는 안 됩니다-, 화륜의 얼굴을 보곤 말을 꾹 참았다.
* * *
그날 이후 문비는 매일같이 찾아왔다. 도움을 받고 있다는 걸 아는지 올 때마다 문비는 달콤한 간식이나 자신이 아끼는 장신구, 빙궁 비전의 금창약 같은 걸 가지고 왔다.
련에게 그런 게 모두 다 있다는 걸 모른다기보다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걸 그러모아 오는 것이었기에 련은 몇 번 사양했다가 기쁘게 받았다.
그렇게 오전에 문비와 대련을 하고 나면 낮에는 온천에 가서 나무 열매들마다 물을 주고 온다.
도위만 데리고 거기까지 갔다 온 걸 뒤늦게 안 정영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것 같은 표정을 한지라 그까지 데리고 다녀오는데, 한창때의 무림인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니 결국 무공 얘기만 하게 되었다.
둘 다 얌전하고 고지식하게만 보였는데, 온천이 있는 곳까지 가서 논검으로는 답답하다며 비무를 벌였다. 련이 부추긴 덕이었다.
거기서 련은 나무 열매들에게 물을 주며 그들의 비무를 구경하다가 떠오르는 게 있으면 한두 마디씩 얹곤 하는데, 둘은 그걸 또 진지하게 들었다.
도위의 실력이 빠르게 느는 걸 보고 가장 놀란 건 그와 맞붙었던 단목현우였다.
해서 요 며칠 련은 온천에 가서 나무에 물만 주고 오는 데 장정 셋을 달고 다녔다.
그렇게 돌아오면 재종조부인 빙궁주의 도법을 보고서 불타오른 단목성과 함께 요리조리 도법을 살펴보고 수련하다가, 조모의 건강을 살펴보면서 저녁을 먹는 것이 요 며칠 빙궁에서의 일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