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6화
‘역시…… 폐쇄적으로 꽁꽁 싸맨 채 발전하는 것엔 한계가 있는 것 같아.’
단목성만 봐도 그랬다. 단목성이 폭발적으로 성장한다고 느껴졌던 건 금종하와의 비무, 경항운련, 그리고 지금이었다.
‘혼자서 열심히 꽁꽁 감추고 수련하면 그냥 혼자서 그 검법만 잘 쓰는 사람 되는 거야.’
요즘 이름 높은 무림 세가에서는 공개적인 비무를 기피하는 경향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세가가 가진 힘이 이미 충분하니, 맞붙어서 얻을 배움과 교훈보다 패배했을 때 얻을 수치를 더 부담스럽게 여기는 것이다.
‘다들 빠져 가지고!’
그러니까 혈라곡이 다시 나타났을 때 그 난리가 나지!
련은 속으로 툴툴거리면서 항주로 돌아갔을 때의 계획을 세웠다.
경항운련을 좀 더 활성화하고 가까이 있는 무가들끼리는 정기적으로 비무를 가지면 어떨까?
단목세가만 강해져서 될 일도 아니었다. 그 결과는 이미 알고 있다. 제2의 단목현성들만 우르르 생길 뿐이다.
‘다른 데는 몰라도 금가장은 해 줄 것 같은데.’
금가장주 금적걸은 련의 아버지 단목현성과의 일 때문인지 빚이라도 진 사람처럼 구는 데다가, 특히나 금종하는 하자고 하면 곧장 달려올 것 같았다.
련이 이런저런 계획을 세우는 사이에 하인이 나타나 목욕할 수 있는 물을 대령해 놓았다고 알려 주었다.
목욕물에 대해 알려 준 하인이 방을 빠져나가자, 화륜이 그쪽을 바라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역시 사람은…… 말로는 안 되나 봐요.”
“그렇지? 다들…… 뭐? 아니야!”
무심결에 대꾸하던 련은 퍼뜩 정신이 들자마자 놀라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뭐가요?”
“당연히 말이! 말이 먼저야. 무조건 얘기를 먼저 해야 해. 알겠지?”
“아니, 갑자기 무슨…… 무슨 소리예요?”
“상대가 맘에 안 들어도…… 먼저 때리고 그러면 안 돼. 알았지?”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상대가 마음에 안 든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걔가 잘못했을 텐데.”
“지난번에도 얘기했지만, 오해가 있을 수 있으니까.”
“오해를 하게 한 것도 잘못이잖아요.”
“네가! 네가 실수로 오해했을 수도 있다니까.”
련이 한껏 마음졸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쳐다보던 화륜이 짓궂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럼 얘기부터 해요? 죽을지 살지 결정하라고?”
“아니 아니, 무슨 오해가 있었는지…… 그런 얘기를 먼저 하는 거야.”
“흐음. 그렇게 하면 진짜 뭐가 좋은데요? 시간만 더 걸리고.”
화륜이 입술을 비실거렸다. 련을 놀릴 생각에 벌써부터 웃음이 나오는 얼굴이었다.
자신이 남에게 관심 없다는 듯이 굴면, 련이 언제나 놀라서 펄쩍 뛰는 게 조금 즐거운 눈치였다.
그러나 련은 강수를 두었다.
“우리 륜아가 그렇게 하면 내가 이상한 하인을 안 데리고 오지요.”
이번에는 화륜이 눈을 치켜떴다.
“그 얘기가 갑자기 왜 나와요? 원래 안 하기로 했잖아요.”
련은 못 들은 척 자신이 할 말만 늘어놓았다.
“륜아가 강자가 되어도 관대한 마음을 잃지 않고, 어어? 약자를 지키고 보호하고…… 대화를 먼저 시도하는 그런 멋진 사람이 되면 나도 이상한 하인을 들일 필요 없겠지?”
그러나 그렇게 말하면서도 련의 눈빛은 아주 간절했다.
‘얘가 아주 성심이 악한 애는 아니잖아. 납득을 못 해도 그냥 외우게 하면 어떻게 되지 않을까?’
왜 사람을 두들겨 패기 전에 대화부터 해야 하는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는 못해도, 외워서라도 실행할 수 있으면…….
“만약 상대가 말로 해도 안 되면, 그땐 련아 누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고 생각해 보기. 약속해.”
“약속이요? 갑자기요?”
“아 빨리 약속해. 목욕하러 가야 돼. 바빠.”
정말 바쁜 것도 있긴 했지만, 진짜 바빠서라기보다는 이렇게 몰아쳐서라도 약속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이 컸다.
화륜은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 기색이긴 했으나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약속했다!”
“혹시라도 제가 약속 안 지키면요?”
“넌 항상 빠져나갈 구석을 만들려고 하더라. 그냥 지키면 되는 거 아니야?”
“만약을 말하는 거잖아요.”
련은 젖은 손으로 미간을 짚으며 심각하게 고민하다가 답을 내렸다.
“꿀밤 백 대?”
“꿀밤 백 대요? 죽어요, 그러다가…….”
“아, 아니 무슨 꿀밤을 어떻게 때리길래 사람이 죽어…….”
련은 잠깐 혼미해졌다가 겨우 정신을 다잡았다.
“이, 이건…… 륜아한테 이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서 하는 얘기니까…… 륜아가 약속 안 지키면 뭐, 안 지키는 거지…… 나만 울고…….”
“아 뭘 또 울어요.”
“울지 그럼. 계속…… 훌쩍훌쩍 울지…….”
‘꿀밤을 때려도 사람 죽을 때까지 때린다는 앤데 이걸 어쩌면 좋지?’
벌써 눈물이 날 것만 같았지만 꾹 참았다. 그래도 자신이 울 거라고 하니까 화륜이 안절부절못한다. 그걸 보면 아주 가망이 없지는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화륜이 졌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알았어요. 울지 마요.”
“그래도 누가 널 괴롭히면 그때는 생각하지 말고 두들겨 패야 돼.”
“그건 걱정 마세요.”
“…….”
화륜이 너무 당연하다는 듯이 대꾸해서, 련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 * *
“…….”
“…….”
복도에 두 소녀가 조용히 서서 상대를 쳐다보았다.
한쪽은 머리를 하나로 단정하게 높이 올려 묶은 단목성, 다른 한쪽은 땋아 내린 문비였다.
살가운 사이가 아니니만큼 둘 다 그 자리에 서서 약간 살벌하게 바라보기만 했다.
잠깐의 침묵 끝에 문비가 먼저 꾸벅 묵례하곤 지나가려는데 단목성이 말했다.
“요즘 아침마다 련아 졸졸 따라다닌다며?”
지나가려던 문비의 표정이 크게 흔들렸다. 문비의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문비를 쳐다보던 단목성이 말했다.
“쫓아내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사과 한마디도 없이 이거 가르쳐 달라 저거 가르쳐 달라 쫓아다니는 건 너무 염치 않지 않아?”
단목성의 북해 말이 무척 유창해서 못 알아들을 수도 없는 데다가, 문비가 내심 걸려 하던 문제여서 더욱 아프게 들렸다.
“그, 그건…… 그건…….”
단목성이 턱을 치켜세우고는 할 말 있으면 계속하라는 표정으로 문비를 쳐다보았다.
문비가 입술만 꽉 깨물었다 풀었다 하길 반복하다가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려, 련아 아가씨는 아무 말 안 하는데 왜…….”
비겁한 변명인 걸 스스로도 알아서 말끝이 흐려졌다. 단목성은 팔짱을 풀지도 않고 엄한 표정을 지었다.
“그 애가 관대한 건 관대한 거고 아닌 건 아닌 거지. 그리고 련아는 우리 단목세가의 차기 가주가 될 사람이니까 내가 보필하는 게 당연해!”
“네? 련아 아가씨께서 소, 소가주셨어요?”
“아직은 아니야.”
“네? 어…… 태…… 태상가주님께서 정하신 거예요? 아니면 철담빙혼 어르신이……?”
“아니, 아직 정해진 건 아니라니까.”
‘그럼 그냥 아닌 거잖아…….’
문비는 그렇게 말을 하진 못하고 입술만 달싹거렸다. 그걸 미욱한 불신자의 마음이라고 여겼는지 단목성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될 거야.”
“그게…….”
누구 마음대로 그렇게 된다는 건가, 싶었으나 단목련을 떠올리곤 곧 납득했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고 있던 단목성이 어깨로 흘러내린 자신의 머리카락 끝을 등 뒤로 넘기며 말했다.
“넌 련아한테 미안한 마음이 없니? 없으면 됐어. 거짓된 사과를 받아서 뭐 하겠어.”
“아니, 없는 게 아니고…… 미안한데…….”
빙문비는 입술 끝을 어물거렸다.
사실 며칠 전 서로의 무공을 선보이는 자리에서 평생분의 창피를 다 당한 것처럼 부끄러웠기에, 그 수치심으로 사과를 갈음했다 여긴 것도 없잖아 있었다.
그 앞에서 그렇게나 창피를 당했으니 단목련도 어련히 마음을 풀었으리라고…….
“하지만 철담빙혼 어르신이 중원까지 가서 그렇게 심한 부상을 입고 돌아오셨는데…….”
그 말이 나온 순간 단목성의 눈빛이 번뜩였다. 눈앞에 토끼가 뛰어 들어오길 숨죽이고 기다리던 범의 눈빛이었다.
“그게 우리 잘못이야? 할머니께서 직접 중원으로 나가겠다고 결정하셨던 거잖아. 그리고 할머니가 그렇게 사람들을 지키시고 혈라곡과 맞서 싸우시다가 이렇게 돼서 제일 속상한 건 우리야! 우리 할머니, 내 친할머니시니까.”
“하지만…….”
빙문비가 억울한 표정으로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 표정을 보던 단목성이 말했다. 토끼 앞에 호랑이 꼬리를 흔들며 유혹하는 것처럼.
“사실 그렇게 따지면 제일 미워해야 하는 건 혈라곡 아니야?”
“그건…… 그렇죠…….”
하지만 혈라곡은 이미 전부 사라지지 않았던가. 그 탓에 오갈 데 없던 원망을 괜히 단목세가로 돌리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 이제 련아한테 가서 똑바로 사과하고 앞으로 혈라곡 퇴치를 위해 우리와 함께 전심전력으로 노력하도록 해.”
“네?”
갑자기요?
상상도 못한 결론에 문비가 눈만 크게 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