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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7)화 (177/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7화

“넌 애가 모자라지도 않으면서 왜 생각을 못 하니?”

“아니 뭔…….”

“할머니를 그렇게 만든 게 혈라곡이니 걔네한테도 얼린 세숫대야를 집어던져야 할 거 아니야.”

“그게 아니……, 아니 걔넨 이제 없잖아요.”

“있으면?”

“있으면…… 있으면야 얼린 거든 끓인 거든 집어던져야죠…….”

“있어. 있으니까 열심히 해.”

그걸로 끝이었다.

단목성은 싸늘하고 도도한 눈동자로 ‘련아한테 가서 사과부터 해. 아침마다 시간 내주는 것에 대해 고맙다고도 하고.’라는 말만 남기고서, 문비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등을 쌩하니 돌렸다.

한순간에 중원에 있는 무림 세가와 손을 잡고 혈라곡 퇴치에 힘을 쓰게 생긴 문비가 얼떨떨한 얼굴로 서 있다가, 제대로 된 대꾸를 한마디도 못한 스스로를 쥐어박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곤 품 안에 든 조그만 꾸러미를 매만졌다.

여지를 손질해서 설탕에 절여 말린 걸 한 단지 담아 둔 것인데, 따뜻한 곳에서 자라는 과일인 여지는 여기에서는 먹기 어려운 데다가 값비싼 설탕까지 듬뿍 사용해 절인 것이라 문비는 아까워서 열어 보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이거면 좋아하실까……?’

솔직하게 사과하지는 못해도 마음이 무거워 이런저런 것들을 주려고 했지만, 단목련에게 필요한 것처럼 느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하아, 바보같이.’

북해빙궁이라도 사람이 지내는 곳은 그리 춥지 않은 터라, 여름이 가까워지는 계절에 세숫대야 하나를 얼리는 것도 사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게 수고를 들여서 세숫대야 하나를 꽁꽁 얼려다가 아침부터 가져와서…….

그때의 분주함을 생각하면 또 수치스러워서 얼굴부터 새빨갛게 달아올랐다가, 어깨가 축 처졌다.

등을 돌리고 척척척 걸어간 단목성의 얼굴이 ‘련아의 혈라곡 퇴치 연맹의 맹도를 늘렸다!’는 뿌듯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건 알지 못하고서.

* * *

“걔가 와서 잘못했다고는 하고 갔니?”

해가 질 무렵 왜인지 의기양양한 얼굴의 단목성이 찾아와서 대뜸 하는 말을 듣자마자, 련은 일련의 사태가 어떻게 된 건지 알아차렸다.

“성아가 뭐라고 한 거였어?”

“뭐라고 했다니? 그냥 얘기했어. 제대로 된 절차를 밟았냐고.”

“무…… 무슨 절차?”

“혈라곡 퇴치 연맹에 들어오려면 차례를 잘 지켜야 하잖아.”

“혈…… 뭐?”

련이 뜨악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단목성 뒤에 있던 화륜이 웃음이 터지려는 얼굴을 황급히 돌리는 게 보였다.

“혈라곡 퇴치 연맹.”

“누, 누구 누구가 거기 들어가 있는데?”

“맹주는 너고, 지금은 나랑 채소…… 황규온하고 빙문비. 내 생각엔 금종하도 들어오라고 하면 들어올 것 같아.”

“아, 내가…… 내가 맹주야?”

“비밀 연맹이니까 아는 사람이 많진 않아.”

‘너무 비밀이라서 맹주조차 존재를 모르는 그런 연맹?’

화륜이 소리는 하나도 내지 않고 숨넘어갈 듯 웃고만 있었다. 련은 입술만 빠끔거리다가 이마를 짚었다.

“그…… 아니 그거… 그거, 어, 좋아. 난 좋은데 그 가입에 무슨…… 무슨 차례가 있어?”

“잘못한 게 있으면 청산을 해야지, 먼저.”

“아…….”

“그다음에는 진정성을 확인하는 거야.”

“진정성…….”

그래서 규온과 문비는 그 진정성까지 검증이 끝난 건가?

련은 멍하게 생각하다가 단목성을 돌아보았다.

“난…… 난 너하고만…… 뜻이 통해도 괜찮은데…….”

잠깐 멈칫한 단목성이 짧게 헛기침했다.

“대업에는 사람이 많이 필요한 법이야. 네가 낯을 가리는 건 알겠지만 조금 참도록 해.”

“아…… 알겠어.”

“어쨌든 그 애가 와서 제대로 사과하고 갔다는 거지?”

“어? 으응.”

련이 고개를 끄덕이자 단목성은 만족스러운 듯한 눈빛으로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는, 낯선 단지를 가리켰다.

“걔가 주고 간 거야?”

“으응. 여지를 설탕에 절여서 말린 거래.”

“먹어 봤어?”

“아니, 아직…….”

단목성은 대뜸 그 단지를 가져가 직접 밀랍을 뜯어 개봉하고는 안까지 두루두루 살펴보고, 하나를 집어 맛을 본 뒤에 단지를 내려놓았다.

“독이, 으음. 그런 건 없나 봐.”

설탕에 절여 말렸으니 과육은 쫄깃쫄깃하고 새콤달콤해서 맛이 있는지 단목성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련은 단목성이 굳이 단지를 뜯어서 먹어 본 목적이 련이 먹기에 앞서 기미해 본 거라는 걸 깨닫고는 감동과 웃음 사이 어디쯤에서 미소 짓고 말았다.

“독 같은 게 들었으려고…… 그리고 진짜 들었으면 어떡하려고 먼저 먹었어.”

“내가 언니니까 이런 건 언니가 먼저 해 보는 거야. 맹주 보호 차원에서도 그렇고.”

단목성이 엄하게 말하고는 새침하게 일어섰다.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도록 해!”

“알았어, 알았어.”

련은 연거푸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린 여지 단지를 단목성에게 주려고 했지만 단목성이 엄하게 고개를 저었다.

언니로서 동생의 간식을 뺏을 수는 없는 데다가 그건 문비가 사과의 뜻으로 준 거니까 련이 다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단목성이 거처를 빠져나가자, 그제야 화륜이 피식피식 웃음소리를 냈다.

“맙소사, 혈라곡 퇴치 연맹이요? 그렇게 걱정하더니 사촌이 그런 것도 만들어 오네.”

“흥, 너도 이제 거기 맹도야.”

“제가요?”

“그래, 넌 내 하인이니까. 내가 거기 맹주인데 너만 쏙 빠져나갈 수 있을 것 같아?”

“그런 거엔 취미 없는데…….”

“하인이 취미로 하는 일인 줄 알아?”

“이렇게 본격적인 건 줄은 몰랐죠.”

련은 자신도 혈라곡 퇴치 연맹에 취미는 없었다는 말을 웅얼거리고는, 단목성이 열어 준 말린 과일을 집어 들곤 화륜의 입에 밀어 넣었다. 화륜은 우물거리면서도 고개를 흔들었다.

“저 안 줘도 돼요. 누이나 먹어요.”

“이거 너 같아서 주는 거야.”

“저 같다고요?”

화륜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새콤달콤한 말린 과일이?

“그래, 너 여지 본 적 있어?”

“있기야 있죠…….”

“얇고 거친 껍질 벗기고 나면 달콤한 향이 나긴 하는데…… 씨앗이 엄청 커서 먹을 만한 과육은 별로 없고 향기는 달콤하면서 맛은 또 그저 그래.”

“…….”

“그래도 이렇게 정성껏 설탕에 절여서 말리니까 맛이 있잖니.”

“하! 원래도 맛있는 과일이거든요.”

“그러니?”

련이 봐준다는 듯이 은근한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자 화륜이 울컥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아 누이나 많이 먹어요. 나 안 먹어.”

“왜 또 토라졌어, 우리 아기 찹쌀경단아~!”

“누이는 몇 살이에요, 대체?”

“열 살인데.”

“아오…….”

화륜은 속에서 천불이 올라온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련이 자꾸 입에 밀어 넣는 과일을 뱉지는 않고 탄식 어린 표정으로 우물거렸다.

“내가 어쩌다가…….”

“어쩌기는요, 맹우님. 맛있게 드세요.”

“내가 어쩌자고.”

* * *

항주로 돌아갈 일정이 차차 잡히면서 가장 초조해진 사람은 련이었다.

그리고 그런 련의 마음을 이해한 것처럼, 오늘 온천에 갔을 때는 련이 물을 준 나무마다 모두 빨갛게 열매가 맺혀 있었다.

손을 가져다 대자 따끈한 난로처럼 열기가 느껴졌다. 심안을 끌어올리자 좀 더 명확하게 보였다.

홍화자 - 최상

산사나무와 산수유나무에 이르게 맺힌 열매마다 홍화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안절부절못한 보람이 있는지 질도 좋았다.

“됐다…… 됐다!”

때 이르게 맺힌 열매를 보고 내심 놀랐던 도위는 련이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고서 더 놀랐다.

‘뭐지?’

마치 오래도록 짊어지고 있던 무거운 짐을 겨우 내려놓은 것 같았다.

곁의 소년이 그런 소녀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마치 착잡한 것 같은 표정이다, 라고 생각했던 도위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제 겨우 열 살이 된 아이가 무슨 그런 표정을 하겠는가?

“이제 열매를 따야 해.”

“네?”

언제 훌쩍거렸냐는 듯이 굳센 눈동자의 련이 그리 말하며 가져온 소쿠리를 그들에게 나눠 주었다. 밝은 얼굴이었다. 도위는 련이 내미는 소쿠리를 손에 들며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이건 또 언제 챙겼어요?”

“이 누이는 다 큰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얼른 따자. 도위도 도와줘. 할머니를 위한 거니까.”

평소에는 뭘 부탁하는 것도 꺼리는 련이었는데 이번에는 거침이 없었다.

“따뜻한 것만 따고, 따뜻하지 않은 건 내버려 두거나 그냥 바로 먹으면 돼.”

“네?”

열매가 따뜻하다는 게 무슨 뜻인지 몰라 당황한 도위가 고개를 갸웃하다가, 산수유나무 앞에 서자마자 알았다.

“열매가…… 따뜻하군요?”

사실상 뜨거운 느낌이었다. 련은 빠른 속도로 열매를 따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따뜻한 것만 따면 돼.”

발열하는 열매라니,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서 놀라려고 했는데 단목현우와 정영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렇게 장정 셋이 바구니를 몸에 끼고 나란히 서서 따뜻한 열매를 찾기 위해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확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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