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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8)화 (178/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8화

“어머니가 더 건강해지시면…….”

사람이 몇 명이나 모였는데 묵묵하게 열매만 따는 것도 지루한 일이라, 단목현우가 먼저 말을 꺼냈다.

“항주로 돌아오시려나?”

그 말에 도위의 표정이 슬쩍 굳었다. 단목현우는 그 표정을 알면서도 눈썹만 슬쩍 움직이고는 련 옆으로 한발 다가왔다.

“련아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할머니 뜻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렇긴 하지.”

“빙궁 사람들하고도 얘기를 해 봐야 할 것 같고.”

그 말에 도위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련은 흘끗 도위를 돌아보았다.

“도위는 할머니가 빙궁에 계속 계셨으면 좋겠어?”

이렇게 곧장 물어볼 줄 몰랐는지 도위는 잠깐 당황한 표정이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어떤 모습으로든 힘이자 균형추가 되어 주실 분이십니다. 지금 궁주께서 의지하실 수 있는 가족이기도 하고요.”

“흠. 그러고 보니 궁주님께서는 결혼을 안 하셨네.”

보통 일가를 이끄는 사람은 혼인을 미루는 법이 드물다 보니 단목현우도 의아하다는 투로 중얼거렸다. 몸이 나빴던 형조차 후계자였기에 혼사를 피할 수 없었는데.

“궁주님께서 마음에 두신 분이 따로 있다 하셨습니다.”

“그런데 왜 결혼을 안 하셨지? 그분은 궁주님이 싫대?”

“아뇨, 좀 멀리 계시기도 하고 여러 가지로 사정이 있어서…….”

“우리 어머니 아버지는 북해에서 항주 사이였는데도 결혼하셨는데.”

“그래서 어르신께서 항주까지 가셨지 않습니까. 하지만 궁주님까지 가실 수는 없잖아요.”

항상 침착하던 도위가 이번만은 약간 따지듯 말했다. 단목현우도 움찔했다.

정영은 ‘전 여기 없습니다.’라고 말하고픈 눈동자로 묵묵히 산수유 열매만 땄다.

“그럼 그 문제는 궁주님, 소궁주님하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함께 얘기해야겠어요.”

“어…… 빙궁에는 소궁주가 아직 없단다, 련아야.”

단목현우가 퍼뜩 떠오른 사실을 알려 주었다.

소궁주 얘기에 도위가 제일 크게 움찔했다. 그 자리를 고사하고 있는 장본인이니만큼 소궁주에 대한 이야기가 껄끄러웠다.

련은 소쿠리 한가득 산수유 열매를 담고는 몸을 일으키며 도위를 내려다보았다. 소쿠리의 반도 채우지 못한 도위가 련을 올려다보았다.

온천의 뜨거운 열기와 위로 솟구친 빙정의 냉기가 어우러져 생긴 기묘한 물안개가 신비롭게 일렁거렸다.

“북해 사람의 거취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는 건…… 우리가 아니라 장본인과 궁주님, 소궁주님이시겠지?”

도위는 멍한 얼굴로 올려보기만 하다가 스르르 고개를 내렸다.

그때 련이 짓궂은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흐음. 나도 소궁주 입후보해 볼까?”

“뭐?”

“뭐?”

“뭐라고요?”

“네…… 네?”

빙궁의 소궁주 자리가 입후보한다고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 테지만, 그래도 괴상한 얘기를 했으니 반향이 있을 줄은 알았다.

하지만 이 자리의 모든 사람이 바람 소리가 나도록 홱 돌아보자 련도 조금 놀랐다.

특히나 화륜은 눈까지 가늘게 뜨고서 무언가 미심쩍다는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련은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방긋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아니, 소궁주 없다며, 빙궁에. 나는 궁주님의 재종손이니까 먼 사이도 아니잖아.”

련이 손가락으로 촌수를 꼽아 보며 말했다.

빙궁주에게 남아 있는 가장 가까운 혈육은 사촌누이 빙설언이니 혈통으로 따졌을 때 빙궁주 자리에 가장 가까운 것 또한 련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긴…… 그렇긴 하지만 련아 너는…….”

안색이 시퍼렇게 질린 단목현우가 무어라 말하려고 하다가 그보다 더 넋이 빠진 도위를 보고서 입을 다물었다.

거기다 정영은 이번에야말로 절벽에서 떨어질 것 같은 얼굴이었다.

마침내 도위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궁주 자리는…… 혈연…… 혈연으로만 계승되는 자리가 아닙니다. 북해의 검을 가장 잘 이해하는 사람이…….”

“흠. 그건 나였던 것 같은데?”

일견 오만방자한 말에 도위의 안색이 변했으나 부정하는 말을 하진 못했다.

단 한 번 본 검법을 그대로 따라 하다 못해 심법조차 연마하지 않았으면서 그 칼날 위에 냉기를 서리게 할 수 있었던 련 아니었던가.

도위가 멍하니 련을 쳐다보았다.

련의 손짓은 아이답지 않게 우아하고 그 손목에 새하얗게 윤기가 감도는 가느다란 옥팔찌가 달랑거렸다.

땋아서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카락에 달린 주황색 꽃 장식은 아마도 마노를 얇게 깎아 만든 것, 허리춤의 옥 노리개와 매듭은 갖은 모양으로 아름답게 달랑거리며 빙정의 빛을 받아 반사했다. 그 모든 게 새파란 북해 특유의 무복과 어우러져 눈에 띄었다.

타지에서 온 아이인 것을 단숨에 알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나고 자라기를 북해의 가장 깊은 곳에서 고귀하게 자란 아이 같기도 했다.

“그 자리는…… 그 자리는…… 가장…….”

도위가 입술을 꽉 깨무는 순간 련이 눈을 접고 사르르 웃었다.

“하지만 소궁주는 차기 궁주님이라는 뜻이니까, 역시 북해를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하는 게 맞겠어.”

“…….”

“난 여기에 와서 이곳이 정말 좋아졌지만 북해 사람들이 여길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큼 사랑하진 않을지도 모르고.”

“그래! 넌 단목세가를 사랑하니까!”

숨을 참고 있던 단목현우가 버럭 외쳤다가 조카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에 얼른 다시 호흡을 가다듬곤 빠르게 말했다.

“너 이런 얘기 한 거 성아가 알면 뒤집어진다. 이 중원 무림이 뒤집어질 거라고.”

“헉. 성아한테는 비밀로 해 주세요.”

“숙부랑 합주 한번 해 주면 비밀로 해 주지.”

“그건 제가 더 좋은 일인데…….”

“그럼 두 번.”

“고모한테 잉어는 방생해 준 거라고도 말해 볼게요.”

“그 얘기는…… 괜찮아…… 이미 틀린 것 같아…….”

단목현우와 련이 주거니 받거니 하는 사이에 정영은 세상을 다 얻은 듯 뿌듯한 얼굴이었고, 소년 화륜은 련의 의도를 다 알고 있다는 듯 찌푸린 낯이었으나 별달리 입을 열진 않았다.

“그럼 다 땄으니까 이제 가요!”

바구니를 품 안 가득 안은 련이 말했다. 장정들이 반을 겨우 채운 바구니를 내려다보며 당황이 역력한 얼굴로 련을 종종종 따라왔다.

가장 뒤에 선 도위의 표정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 * *

여름이 가까워지는 계절이라곤 해도 서늘한 빙궁이건만 이번에는 기이한 열기로 후끈했다.

바로 빙궁을 찾아온 손님들이 일으킨 열기였다. 빙설언의 부상으로 오랫동안 외부와 교류를 거의 끊었던 빙궁에 신선한 바람이 불어닥친 것이다.

특히나 어디에서도 본 적 없는 재능을 뽐내는 소녀의 존재가 준 충격이 컸다.

“현성이 녀석도 그렇지는 않았는데…….”

빙설언이 중얼거리는 말에 단목천기가 고개를 끄덕여 동감을 표했다.

“아이 교육에 좀 더 신경을 쓰셔야겠소. 련아 눈에 지금 재미있고 흥미로운 게 있기나 하겠소?”

지나치게 빼어난 재능 탓에 지금의 무료함을 견디지 못하게 되면 어쩐단 말인가.

타인의 무공을 보아도 한순간에 그 묘리를 이해하고 체화하니 탐구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셈이었다.

“왜 없단 말이오? 처음 만난 조모 생각에 하루가 꼬박 지나는 듯한데.”

“그건…… 그거완 다른 얘기 아니오.”

빙설언은 조금 쑥스러운지 답지 않게 어색한 동작으로 손을 휘저었다.

“세가의 소가주는 정하시었소?”

“그대가 잠들어 있었는데 어찌 정하겠소.”

빙설언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단목천기가 소가주를 정했다면 아마 자신이 죽고 난 이후였을 것이다.

“현요와 현우는 무슨 생각이라 하오?”

“저들은 할 마음 없다 하더군.”

그들에게 소가주는 형이자 오라비였던 단목현성뿐일 것이다. 빙설언은 가슴께가 잠시간 저리는 걸 내버려 두었다가 숨을 토해 냈다.

“요아가 생각이 많았을 것인데…….”

오라비가 죽었으니 자신이 첫째 몫을 해내려고 단목현요가 얼마나 아등바등했는지는, 빙설언이 앓아누운 와중에 드문드문 들려오는 소식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비정한 척을 하기도 하고 이기적인 척을 하기도 하면서, 남들에게 미움받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고 말하면서…….

단목천기가 조용히 말했다.

“성아와 련아가 결정케 하려 하오.”

“그 또한 가혹한 짓 아니오.”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빙설언 역시 크게 반대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단목천기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두 아이가 제각기 뜻이 있으면서도 서로 마음이 맞으니 괜찮지 않겠나 하오.”

“언제 그렇게 부쩍 자랐는지…….”

손녀들이 응석 하나 모르고 어른스러운 걸 보면 의젓한 모습을 보았다는 기쁜 마음은 하나도 들지 않았다.

“그 나이대 아이들이 방종한 면도 있어야 할 것인데 대체 항주에서는 뭘 어찌했소?”

“아니…… 현요와 며느리가 아이들을 기특하게 잘 키운 것이지…….”

“응석 하나 안 받아 주고 엄하게만 키운 것은 아니고?”

“아니 내가.”

단목천기가 억울함을 듬뿍 담은 눈으로 빙설언을 쳐다보았으나 빙설언은 이미 다른 생각으로 빠진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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