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79화
“아이들이 돌아갈 마차에는 금은보화를 가득 실어다 보내야겠소.”
“……함께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오?”
단목천기가 먹먹한 목소리로 물었다. 빙설언이 호탕하게 웃었다.
“아직 내가 덜 낫지 않았소. 이대로 항주로 돌아가도 약값만 축낼 터인데 눈치 보고 싶지 않소.”
“누가 감히!”
“그대가 내 약값을 벌 수는 있고? 세가 살림은 련아가 다 벌어온다는데 손녀딸한테 돈을 내놓으라 할 참은 아니겠지?”
빙설언이 놀리듯 낄낄대며 하는 말에 단목천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잠깐의 우스갯소리가 지나고, 빙설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련아가…….”
빙설언은 잠깐 목울대를 울리며 숨을 삼켰다. 목이 아렸다.
“내가 이만큼이나 나았는데도 련아가…… 련아 표정이…… 마치 죄라도 지은 것 같더이다.”
“…….”
“유례없이 명석하고 그러면서도 다정다감한 아이인 것을 알겠소. 그러나 그게 그 아이한테 짐을 다 맡겨도 된다는 얘기는 아니지 않겠소.”
잠깐 공기가 무거워졌다. 빙설언은 금방 호탕하게 웃었다.
“뭐 그건 그렇다 치고, 어쨌거나 무공을 되찾으려면 여기서 애를 써 봐야 할 것 아니오. 내 힘은 모두 북해에서 비롯했으니. 그러니 그때쯤 되면 그대가 북해로 오면 되겠다 싶소.”
단목천기는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리할까 하오. 그 전에 항주를 한번 둘러봐 주었으면 했지만…….”
“에잉, 재미없게.”
놀리는데도 반응이 돌아오지 않으니 빙설언이 투덜거렸다. 단목천기가 고개를 흔들었다.
“나이가 몇인데 평생 재밌게만 살려고 하오.”
“당신 얼굴이 재미있어서 결혼까지 했는데 그게 다 망했으니 다른 재미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소?”
“……내가 독선(毒仙)의 주리라도 틀면 되겠소?”
단목천기는 오랜 벗의 상처를 애써 치료해 놓고도 주리가 틀리게 된 당유벽에게 속으로 작게 사과했다.
‘미안하게 됐네, 벗이여.’
하지만 지금 빙설언의 표정을 봤으면 당유벽도 분명 이해해 줄 것이다.
“같이 가서 틀어야지!”
빙설언은 된소리를 한껏 뱉고는 단목천기의 얼굴에 남은 흉터를 찬찬히 손으로 쓸었다.
이 정도 흉터로 그칠 수 있었던 것도 독선 당유벽의 덕이라는 걸 그녀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살아서 북해까지 와 이날을 맞이한 것도 그가 죽도록 애쓴 덕분이라는 것도.
“독선이 아주 억울해 죽으려고 하겠지?”
그녀의 중얼거림에 단목천기가 낮게 웃었다.
“어쩌겠소? 이런 벗들을 둔 업보려니 할 수밖에.”
빙설언도 조금 웃었다.
아주 오래전 격전의 후유증이 지금도 씻기지 않고 남아서 그들을 옭아매고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 올가미가 그들을 지탱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 있으니 되었다, 빙설언은 하지 못한 말을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때 밖에서 련이 찾아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이 밤중에?”
빙설언과 단목천기가 나란히 놀라서 몸을 일으켰다. 의젓한 손녀딸은 특별한 일이 아니고서야 돌발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드물었다.
지금까지 특별한 일이 많긴 했지만.
“얼른 들라 하거라!”
빙설언이 바삐 재촉했다.
* * *
달이 휘영청 떠오른 밤.
련은 문비에게서 들은 작은 사당에 도착했다.
꾸준히 관리를 하고 있는지 문에도 기름칠이 되어 있고 안에는 작은 등롱에 불도 붙어 있어서 어둑한 와중에도 안을 또렷이 확인할 수 있었다.
‘자주 오는 사람이 있는 걸까?’
바닥에는 방석이 하나 깔려 있었는데 자주 무릎을 대고 앉는 것인지 가운데가 조금 꺼져 있고 반질거렸다.
련은 향 하나를 태우고 그 방석 위에 앉아서 들고 온 함을 옆에 내려놓았다.
‘제발…….’
홍화자를 수확했고 이제 이걸 들고 할머니에게 가기만 하면 일이 끝나지만, 마음이 불안해서 곧장 갈 수가 없었다.
만들어 낸 것이 선경이 얘기했던 홍화시가 아니라 홍화자인 것도 마음에 걸렸고 이걸 먹이기만 하면 되는 것인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보통 감이 새빨갛게 익은 걸 홍시라 부르니, 수확한 홍화자들도 좀 익혀 볼까 싶어서 난로 옆에서 품에 안고 영기를 불어넣기도 했다.
그러다가 기세 좋은 난롯불에 홍화자가 아니라 련이 새빨갛게 익어 가는 걸 보고서 화륜이 정색하고 끌어냈다.
수확할 땐 탱글탱글했던 홍화자들이 조금 말랑해지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걸 홍화시라고 부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이 사당도 오래됐겠지?’
해서 조언 한마디라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문비에게 빙궁의 오래된 사당을 물어 여기까지 온 차였다.
화륜이 알면 괜히 걱정할까 봐 떼어놓고 왔다. 여기에는 련의 고양이 백련의 도움이 컸다.
백련이 련의 머리 장식을 물고 도망쳐 준 덕분에 화륜이 그를 쫓으러 나갔던 것이다.
오래된 사당에 도착했습니다.
조언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예상한 대로 선경이 떠올랐다. 련이 한시름 놓고서 그 조언을 기다릴 때, 곧장 조언이 떠올랐다.
— 피의 그림자는 피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조언을 듣자마자 련은 바닥에 드러누웠다.
소리 없이 발버둥을 치고 앞뒤로 굴렀다. 그 덕에 머리며 손목 발목에 둘둘 두르고 온 장신구들이 짤랑거렸다.
련은 꼬아 올린 머리카락 마디마다 보석 하나씩 끼워 넣고 뒤통수에도 하나를 달고 허리춤에 손목에, 보이지 않는 발목에도 달고 왔었다.
불안한 마음에서였다. 여차하면 영기를 닥닥 긁어다 써서라도 뭔가를 해 보려고.
사람에게 직접 영기를 주는 건 위험한 일이니 할 수 없겠지만, 일이 틀어지면 빙설언에게 정화와 조화라도 계속 써 볼 생각이었다.
‘아니 그런데 이 망할 혈귀 놈들!’
그들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그래서 혈라곡 퇴치 연맹 같은 게 만들어지지 않았나!— 이 얘기를 또 듣자니 복장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련은 한참 버둥거리다가 축 늘어졌다. 그때를 맞춘 것처럼 다음 조언이 빠르게 올라왔다.
— 선의가 쌓이면 행운이, 행운이 쌓이면 기적이 됩니다.
‘그건 이미 알아.’
그것 덕분에 목숨 여럿 구했고 그 이후로는 틈만 나면 어떻게든 조화와 심안, 정화로 남들을 도와주면서 행운을 착실히 쌓고 있었다.
련의 불만을 알아챈 것처럼 선경이 다급하게 한 줄을 더 써 올렸다.
— 떡갈나무도 작은 도토리부터 시작됩니다.
‘아니…… 안다니까.’
련은 괜히 투덜거리다가 일단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도토리가 싹 터서 나무로 자라는 것이야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굳이 선경이 말해 주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 후학 양성에 힘쓰라는 걸까? 아니, 사실 후학도 아니잖아.’
또래들이 다 도토리라면 자신 역시 도토리였다. 다른 도토리들을 응원하는, 내공 하나 없는 부실한 도토리.
그러나 련은 투덜거림을 적당히 멈추기로 했다. 이 사당의 조언이 련을 응원하는 말처럼 들렸다. 지치지 말라고, 지금 하는 것들이 의미 없지 않다고.
련이 아끼며 뽀득뽀득 닦아 놓은 도토리들은 다 거대한 떡갈나무로 자라나 숲을 이룰 것이라고.
‘선의가 쌓이면 행운이…… 행운이 쌓이면 기적이 된다는 말도…….’
기적?
지금 련이 바라는 기적은 하나밖에 없었다.
할머니가 낫는 것.
‘그렇게 치면 지금 좀 행운이 부족한데…….’
행운 지수 120을 완전히 다 채우지는 못했다. 행운이 쌓여서 기적까지 되려면 이걸 다 채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빙설언이 회복하는 일은 기적이 아니다. 앞으로 다가올 일일 뿐. 조금의 행운은 필요하겠지만 그건 충분했다.
그렇게 련이 마음을 다스릴 때 마지막 조언이 떠올랐다.
—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의 등을 밀어 주십시오.
‘뭐?’
여태 추상적이고 모호한 조언만 들었는데—그래도 들어 본 가락이 있어서 끼워 맞춰 볼 수는 있었지만— 이건 묘하게 구체적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오는 자의 등을 밀어 주라고?’
그러나 그 이상으로는 추론할 수 없었다.
결국 모호하긴 매한가지라, 련이 한껏 심술 묻은 얼굴로 옷차림을 바로 하며 툭툭 재가 떨어지는 향을 노려보다가 사당의 문을 열고 나가려 한 순간이었다.
바깥에서 먼저 문이 열리며 달그림자가 련의 위로 길게 드리워졌다.
“어? 도위.”
‘도위 얘기였구나!’
사당에 들어서려고 한 건 다름 아닌 도위였다.
“여기 계셨습니까? 어쩐 일로……?”
“잠깐 향 좀 태웠어. 도위는?”
“저도…….”
사당으로 들어오려던 도위가 어색한 표정으로 련에게 먼저 물었다.
“음, 무슨…… 고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사용감이 있던 깔개는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와 쓰던 것인 듯했다.
련은 잠깐 망설이다가 말했다.
“할머니가…… 사실 다 나으신 건 아니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