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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0)화 (180/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0화

간신히 건강해지긴 했지만, 사실 한창때의 힘은 조금도 되찾지 못했다.

오늘내일하던 처지에서 벗어난 것만으로 기뻐하고 있을 뿐.

“그래서 그게 좀…… 그랬네.”

오늘 딴 영약이 그 문제를 해결할 밑준비였다는 얘기까지는 하지 않았다.

“그러셨군요…….”

“도위도 고민이 있어서 왔어? 혹시 낮에 내가 한 말 때문이야?”

도위는 아니라고 부정하진 못한 채 입술만 꾹 닫았다.

긴 침묵이 흐르는 동안 련은 등 뒤로 돌린 손을 가볍게 움직였다. 영기가 일어나며 주변 공기를 정화하기 시작했다.

영기로 정화된 공기가 그의 심신을 안정시켜준 덕인지 도위가 불쑥 깊은 얘기를 꺼냈다.

“저는…… 북해에 어울리는 사람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깊은 얘기를 할 줄은!’

속으로 많이 놀랐지만 련은 당황한 기색을 티 내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북해에 어울리는 사람이 있고 안 어울리는 사람이 따로 있어?”

“전…… 제 아버지는 북해 밖에서 오신 분입니다.”

련의 기분을 생각해서 돌려 말한 모양인데, 중원 사람인 듯했다.

련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도위가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래서만은 아닙니다.”

“그러면?”

도위가 잠깐 머뭇거리다가 속내를 털어놓았다. 련이 곧 떠날 어린아이이면서도 아이답지 않다는 생각에 마음의 짐을 덜었는지도 몰랐다.

“전…… 사실 궁주님의 선택도, 철담빙혼 어르신의 선택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

도위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철담빙혼 어르신은 그때 사실상 빙궁주로 결정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단숨에 북해를 떠나셨지요.”

“아…… 그랬지.”

그리고 그 덕에 내가 태어난 셈인데…….

련은 거기까지는 말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도위의 말을 귀 기울여 들었다.

“중원 무림에서 우리를 보고 새외라고 하는 걸 압니다. 변두리라 여기는 것이겠지만 우리에겐 여기가 전부이고, 모든 것이며, 가장 눈부신 곳입니다. 이걸 모두 저버리고 먼 타지, 다른 가문의 안주인이 된다는 것이…… 저는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위는 단목세가를 비하하는 것이 아니라, 중원에게 북해빙궁이 새외이듯 북해빙궁에게도 중원은 밖의 일이라는 걸 찬찬히 설명했다.

련은 다 이해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주님께서도…… 마음에 두신 한 사람을 계속 지키고 계시지요. 지금까지요. 하지만 저라면 그러지 않았을 겁니다.”

“빙궁주님께서 그러신다는 건…… 그러니까 마음에 둔 사람이 있어서 혼인을 하지 않고서, 자기 아들도 아니고 중원 사람 피가 섞인 도위를 성심성의껏 키워다 후계자로 삼는 그런 거 말하는 거야?”

“……예, 저라면 그런 마음은 금방 정리하고 다른 사람과 혼인하고 아이를 낳았을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도위는 다소 자괴감 어린 미소를 지었다.

“빙궁의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그럼 뭐라고 해?”

“자기 마음에 솔직하신 두 분을 동경하지요.”

그리고 다들 그런 열렬한 마음을 한 구석에 품고 있다는 것이다.

련은 어느 정도 납득했다.

련이 본 빙궁 사람들은, 북해라는 위치에서 오는 편견 때문에 차갑고 이성적일 것 같았지만 잘 보면 오히려 무척 불같고 다혈질이었다.

빙설언을 꼬여낸 단목세가 사람이라고 얼린 세숫대야부터 들고 오는 성미들이 어디서 오겠는가?

동시에 그토록 열정적이니 실력에 한 번 꺾였다고 곧장 승복하곤 졸졸 따라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이유로…… 소궁주가 되지 않겠다는…… 거야?”

련은 말끝을 조금 흐리며 물었다.

“예? 예…… 전 아무래도 북해 사람이라기에는 기질적으로도…….”

“지금 도위가 제일 북해 사람인 것 같은데.”

“네?”

“뭔가 하나 정하면 미쳐서 달려드는 게 북해 사람들이라는 거 알아. 문비도 처음에 그랬잖아. 할머니를 그렇게 존경하니까, 내가 할머니 손녀인데도 나한테 얼린 세숫대야를 가져왔지. 나와 단목세가 때문에 할머니가 다쳤다고.”

지금은 사과했으니까 괜찮아, 라고 련은 얼른 덧붙이곤 말을 이었다.

“지금 도위가 하는 거랑 완전 똑같은데.”

“네?”

“빙궁 사람은 이래야 된다, 빙궁주는 이래야 된다. 딱 정해 놓고 이게 아니면 죽어도 안 된다고 하는 거잖아. 할머니가 박차고 나간 걸 이해 못 한다고 하면서 지금 할머니랑 똑같은 거 아니야? 남들은 못 해 안달인 소궁주 자리를 자기 발로 차면서.”

“아, 아니…….”

도위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지만 차마 부정하지 못하고 입술만 달싹였다.

“그게 아니면, 사실 도위한테 중원 피가 섞인 게 마음에 걸리는 거 아니야?”

“…….”

이번엔 도위가 입술을 달싹이지도 못하고 다물었다.

“이상하네. 도위가 그렇게 말했잖아. 빙궁의 후계자는 혈통으로 결정되는 게 아니라고.”

“그 말은…….”

도위는 자가당착에 빠져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아니면 혹시 누가 도위 괴롭혔어?”

그런 핏줄로 소궁주가 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따지는 사람이 있었냐는 질문에 도위는 화들짝 놀라기까지 하면서 부정했다.

“아닙, 아닙니다. 아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위의 망설임은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본인이 빙궁의 핏줄에서 멀다 못해 중원의 피까지 섞였고, 한번 뭔가에 빠지면 앞뒤 양옆 재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이성 챙기고 있자니 그 다름이 더욱 사무치게 느껴졌을 것이다.

‘……지금 빙궁에 정말 가장 필요한 인재네.’

그래서 빙궁주 빙설한도 그를 소궁주로 내정한 듯했다.

그러나 그의 이성과 침착함이 도리어 문제가 된 상황이었다.

다른 누군가, 북해 사람조차 아니었던 작은 소녀가 빙궁주가 되겠다는 말을 해도 마지막 한 발을 내딛지 못하는.

련은 정화를 조금 더 강하게 일으켰다. 조화도 곁들였다.

사당의 작은 창 틈새로 스며든 달빛이 희미하게 흔들거리는 향의 연기 사이로 내리쬐며, 련의 머리 곳곳에 매달린 장신구들과 만나 흩어졌다.

아련하게 빛나는 장신구, 반짝이는 눈빛, 련의 형체와 기척이 흐린 듯 아닌 듯 모호해졌다.

일렁이는 영기 탓에 련의 흘러내린 머리카락 몇 가닥과 옷자락이 부유하듯 가볍게 떠올랐다. 장신구들이 부딪히며 맑게 잘그랑거렸다.

그 희미하고 위태롭고 은은한 기척에 도위의 시선이 홀린 듯 커졌다.

‘분위기는 얼추 됐나?’

빙궁의 후계자 자리에 관한 일이다. 도위 스스로도, 빙설한과 빙설언도 얼마나 많은 생각과 대화를 했을 것인가.

그런데도 결정하지 못한 걸 고작 열 살 어린애의 말 몇 마디로 바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등을 떠밀어 달라는 말은, 이미 그쪽을 바라보고 있다는 뜻이다.

거창한 말이 없어도 작은 계기가 있다면 알아서 바른 곳으로 걸어갈 것이다.

‘가령 건강한 몸에 깃든 건강한 정신 같은 거.’

도위는 가장 먼저 중원에서 온 손님을 맞이한 데다가 매일같이 단목현우와 부딪치고, 후계자 자리를 고민하고 있을 터였다. 그가 얼마나 피곤하겠는가.

련은 정화한 공기를 흘려 주며 말을 이었다.

“도위. 난 항주로 돌아가면, 성아하고 나 중에서 누가 단목세가의 소가주가 될지 경쟁하게 될 거야.”

“네? 경쟁…… 이요?”

도위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떠올랐으나 련은 계속 말했다.

“그래, 우리 둘 다 북해빙궁의 피가 섞였지만 다른 사람한테 단목세가 소가주 자리를 양보하진 않을 거야.”

“그 피는…….”

빙궁주와 연결된 고귀한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련은 고개를 젓고 말했다.

“왜냐하면 나와 성아가 같은 또래 중에서 세가의 무공을 가장 잘 이해하고 또 세가를 가장 사랑하고 있으니까.”

그 말에 도위는 눈을 크게 떴다.

련은 그런 도위를 가만히 내버려 두고서 조용히 사당을 먼저 빠져나왔다.

* * *

‘그만하면 됐을까?’

기기묘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런 얘기를 듣고 정화된 공기도 한껏 들이마셨으니 오늘은 잠도 푹 잘 것이고, 잘 자고 일어나면…….

‘잘 결정하겠지.’

망설임과 불안과 두려움을 걷어내고 정말 원하는 걸 선택할 수 있다면 그걸로 되었다.

그게 소궁주 자리를 끝내 거절하는 거라고 해도.

그렇게 도위의 등을 한번 떠밀어 준 련은 스스로의 등도 떠밀기로 했다.

준비는 모두 됐다. 품 안에 든 잘 익은 홍화자가 따뜻한 열기를 뿜었다.

빙설언의 처소로 찾아가자 거기엔 단목천기가 함께 있었다. 련은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곤 방긋 웃었다.

서로 티격태격하는 척을 해도 오랜만에 재회한 서로가 반갑지 않을 리 없다. 보고 있어도 그리울 터,

“밤이라 공기도 찬데 어찌 예까지 왔어? 무슨 일이 있더냐?”

빙설언이 거의 맨발로 달려 나와 이불로 련을 꽁꽁 싸매며 말했다.

련은 이불 속에서 머리를 빼꼼 내밀곤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에요, 들고 온 게 따뜻해서 하나도 안 추웠어요.”

“무얼 가져왔기에?”

단목천기가 련을 번쩍 들어 올려 자리 위에 앉히며 물었다. 련은 이불을 헤치고 나와 조그만 함을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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