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3화
련이 웃는 걸 보고 나서야 빙설언이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련을 끌어안았다.
“네 혈라곡 퇴치 연맹에 쓸 사람을 구하려고 이 늙은 할미도 일으켜 세웠으니 내가 반드시 힘을 써 주마.”
그와 동시에 련이 뜨악한 표정으로 외쳤다.
“……할마니도 그 연맹을 아세요?”
“비밀 연맹이라더니 그걸 할미에게도 비밀로 할 생각이었더냐?”
“아니, 그건 아닌데.”
“그나저나 번듯한 이름이 있는 게 좋겠는데. 혈라곡 퇴치 연맹이라고 해도 줄이면 그냥 혈퇴맹 아니냐. 그건 좀 그렇지.”
번듯한 이름까지?
련이 눈만 깜박거리는 사이에 노부부가 주거니 받거니 했다.
“아까 부인이 말한 것이 뜻이 좋지 않았소? 백 명의 힘을 하나씩 모은다는 뜻에서 백 송이의 연꽃을 피운다는 의미로 백련회(百蓮會) 어떠오.”
“그건 련아가 키우는 고양이 이름이잖소.”
“아니, 그 백(白) 자와 이 백(百) 자는 다른 것인데…….”
단목천기의 말에 빙설언은 코웃음 치며 덧붙였다.
“그리고 할 거면 천련회(千蓮會)는 되어야지.”
“그건 흑천련 같지 않소.”
“그럼 만련회(萬蓮會).”
“숫자가 크다고 다가 아닌 듯한데.”
“■■, 트집만 잡지 말고.”
“아이가 듣소……. 그리고 트집 잡은 건 부인이 먼저.”
“아! 그럼 천하맹(千荷盟)?”
천이라는 숫자와 연꽃이라는 뜻이 있는 하 자를 쓴 이름이긴 했으나…….
단목천기가 중얼거렸다.
“천하라고 하면 무림맹에서 싸우자고 하지 않겠소?”
“아 그 천하도 아닌데! 아니 진짜 천하맹(天下盟)이라고 한다 쳐도 제깟것들이 뭐 된다고 유난이야. 제기랄, 그럼 련아 눈이 밤하늘처럼 아름다우니 야천맹(夜天盟)은?”
“암살하러 다닐 거 같은데…….”
“…….”
“…….”
싸늘한 분위기 속에서 련이 황급히 말했다.
“그리고 연맹 이름이 제 눈동자를 따서 만들어지게 되면 약간…… 목적이 이상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빙설언과 단목천기는 기어코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게 했다.
한밤중에 불려온 의원은 빙설언의 상태가 나빠진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달려왔다가, 그녀가 제 손녀를 내미는 서슬에 얼떨떨해하며 진맥했다.
그러곤 련의 몸이 다소 허해진 것 같으니 보양할 영약이라도 달여 오면 어떻겠느냐는 얘기를 꺼냈다가 대로한 빙설언에게 영문도 모른 채 쥐어박힐 뻔했다.
그러다가 빙설언이 무공을 되찾았다는 걸 알게 된 의원이 경악해 소리를 치고, 빙궁주가 달려오고…….
아마 다음 날 눈을 뜨면 빙궁 전체가 들썩일 정도로 큰 잔치가 열릴 것 같았다.
그 앞에서 입을 열고 어색하게 ‘하암’ 하며 하품하는 시늉을 했더니 화들짝 놀란 조부모 두 사람이 직접 련을 처소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렇게 처소에 돌아왔더니 어두컴컴한 실내에 불 하나 켜지 않은 채 구석진 곳에 앉아서 백련의 등만 쓰다듬는 화륜이 련을 맞이했다.
“…….”
“…….”
슬쩍 눈치를 살피다 조용조용 홍화자 함을 옆에 두고 침상 위로 기어 올라갔다.
신을 벗고 머리 묶은 걸 낑낑대며 풀고 있자니 화륜의 입에서 기나긴 탄식 같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가만히 있어 봐요.”
“으, 으응.”
화륜은 난로에 불을 지피곤 련에게 다가갔다.
련이 얌전히 앉은 채 손을 내리자 화륜이 련의 등 뒤에서 머리 장식부터 하나하나 풀어 주었다. 찔러 넣었던 빗과 장식들이 침상 위에 한가득 펼쳐졌다.
화륜이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땋은 머리도 가닥가닥 풀어서 손가락으로 빗질하며 풀어 내렸다. 련이 얼른 말했다.
“이제 푸는 것도 잘하네, 우리 륜아!”
화륜이 련의 머리카락에 손을 대 본 건 북해로 오기 직전이었다.
함께 오지 못하는 위지청이 이제 련의 머리는 누가 묶어 주냐며 걱정하는 눈길에 화륜이 직접 해 보겠다고 자청했던 것이다.
처음에는 화륜이 머리 푸는 것도 어설퍼서 머리카락이 다 쥐어뜯기는 줄 알았다.
— 날 아미산으로 보내려고 그러는 거야?’
사천의 아미산에는 불가 문파인 아미파가 있다. 머리 다 뽑아 중으로 만들 셈이냐는 질문이었다.
— 아미는 너무 머니까 그냥 가까운 소림으로 가요.
화륜이 어찌나 뻔뻔하게 대꾸하던지 련은 그대로 토라질 뻔했다.
하지만 그것도 며칠 가지 않아서, 화륜은 완벽하게 련의 머리카락을 땋아 줄 수 있게 되었다. 푸는 것은 물론이다.
“지금 이럴 때 아니죠?”
“하하핫…….”
련이 말끝을 흐리며 웃자 화륜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장신구들을 한데 모아 함에 쓸어 넣었다.
그러다가 련의 손발에 주렁주렁 달린 장신구들을 보고서 더 깊은 한숨을 내쉬곤 그것도 하나하나 풀어 주었다.
“그 어르신들은 아무 말 안 해요? 그냥 당신들 나으시니 좋대요?”
“엄청 혼났지…… 엉덩이 맞는 줄 알았어.”
“아니, 낫게 해 줬는데 때렸다고요?”
련이 혼이 났어야 마땅한 일을 저질렀다고 확신하는 얼굴이었으면서 막상 련이 그렇게 얘기하자 화륜이 눈을 치떴다. 련은 그런 화륜을 보다가 배시시 웃었다.
화륜이 재차 물었다.
“진짜 어디 맞은 건 아니죠?”
“아냐, 아냐. 혼만 났어.”
“많이요?”
“좀 많이.”
“많이 혼나야 돼요.”
화륜은 눈을 치켜뜨면서 련의 조부모에게 공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꺼림칙한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괜히 이죽거렸다.
“처음부터 혼날 짓을 안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어른은 혼날 일도 해야 할 때가 있단다.”
련은 그렇게 대꾸하곤 침상에 털썩 몸을 던지고는 대(大)자로 누웠다.
“그래도 할머니가 다 나으셨다니까 진짜 엄청 기분 좋아.”
“뭐…… 이제 빙궁이 힘이 되어 주긴 하겠네요.”
빙궁주가 아끼는 사촌이 잃었던 힘을 되찾았으니, 빙설언 본인뿐만 아니라 빙궁주 역시 응당 무엇이라도 하려 할 것이다.
빙주 체면이 있지, 련에게 개인적으로 보답하는 것만이 아닐 게 분명했다.
“아니…… 그런 문제가…….”
련은 뭐라고 말을 하려다 말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그렇지. 할머니도 그…… 혈라곡 퇴치에 진심으로 도와주겠다고 하셨어.”
“왜요? 연맹이 부끄러우세요, 맹주님?”
련이 특정 단어를 피하고 싶어 하는 걸 눈치챈 화륜이 씩 웃었다.
“조용히 해……. 안 그래도 정식으로 이름 짓자고 하시는 거 미루고 왔어.”
빙설언과 단목천기의 후보군에 대해 들은 화륜이 큰 웃음을 터뜨렸다.
“마지막에 야천맹은 무슨 뜻인데요?”
“아니 그게…….”
지나가듯 물어본 화륜이었으나 련이 부끄러워하자 눈에 불을 켜고 다가왔다.
“뭔데 그래요?”
“웃지 마.”
“안 웃어요.”
“아니 내 눈이…… 야! 안 웃는다며!”
‘내 눈이’까지만 듣고도 맥락을 파악한 화륜이 웃음을 터뜨렸다. 련의 얼굴이 발갛게 익는 걸 보고서도 한참이나 웃다가 겨우 멈췄다.
“알았어요. 그만 웃을게요.”
“나도 그 이름은 좀…… 너무 나하고만 관련된 이름은 아닌 것 같다고 말씀드렸어.”
“그렇죠? 무슨 추종자 모임도 아니고.”
그렇게 말하던 화륜이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아닌가? 맞는 것 같기도 하네요.”
“거기에 너도 들어가 있거든.”
“역시 다른 이름으로 해요.”
련이 화륜을 흘겨보며 한창 티격태격할 때였다.
“어라?”
련은 잠깐 눈을 비볐다. 시야가 살짝 흐려졌다.
“왜 그래요? 졸려서 그래요?”
“졸리긴 한데…….”
그러다 갑자기 미열이 오르며 덥다는 느낌이 들 무렵, 눈앞에 선경이 빠르게 떠올랐다.
빙궁주의 진보 5
단목천기의 진보 5
빙도위의 결심 6
빙설언의 진보 4
현재 행운 수치 : 120/120
행운 수치가 가득 찼습니다.
선행이 쌓여 행운이, 행운이 쌓여 기적이 이루어집니다.
순간 더운 와중에도 소름이 살짝 돋았다. 무슨 일이 벌어질지 전혀 알지 못하면서도.
“어어…….”
아마도 자신이 처소로 돌아온 뒤 빙궁주와 단목천기는 빙설언이 완전히 나았다는 사실을 새롭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도위 또한 마음을 정한 모양이었다. 셋 다 마음의 짐을 나란히 덜고 그만큼 나아간 게 분명했다.
‘그런데 기적? 무슨 기적?’
련은 몸을 덥히는 열기로 멍한 와중에 그렇게 생각했다.
할머니는 이미 다 나았는데 무슨 기적이 더 필요해서…….
주위 상황을 확인합니다.
안전이 확보되었습니다.
기적이 임합니다.
그리고 그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번져 갔다. 그 빛 사이로 당황한 화륜의 표정이 살짝 스쳤다.
그와 동시에 련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누이!”
화륜이 황급히 다가와 련의 목 아래에서부터 손목 위까지 차례로 맥을 짚었다.
가슴 저릿하게 가냘픈 박동을 들은 화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가, 그 박동에 점차 규칙적인 힘이 돌아오는 걸 느끼며 천천히 자신의 호흡을 가다듬었다.
‘의원을 불러야…….’
귀한 손녀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하면 빙궁 사람들이 맨발로 뛰어올 게 눈에 훤했다.
그러나 초조함을 감추지 못한 얼굴로 재차 맥을 짚어 보던 화륜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규칙적인 박동, 그리고 자신의 머리끝을 스치고 지나가는 서늘한 바람.
의원을 부르기 위해 입을 열었던 화륜은 잠깐의 심각한 고민 끝에 다시 입술을 앙다물곤, 얼굴을 찌푸린 채 련의 곁에 자리를 잡았다.
백련이 얕은 목소리로 야옹 하고 울며 련의 머리맡에 앉았다.
련은 어딘가 아파서 혼절한 것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