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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4)화 (184/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4화

“……잠깐만, 잠깐만 하다가 이게 무슨 꼴인지.”

— 그릉…….

창과 문은 모두 닫혀 있는데 바람이 불어오는 것처럼 난로의 불빛이 일렁거렸다.

그 일렁거림은 점점 거세졌다. 창문이 흔들리고 난로에서 불티가 튀어 올랐다. 기류가 휘몰아치며 화륜의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공기가 거세게 움직이며 난로의 숯이 더욱 새빨간 빛을 발했다.

그리고 그 차가운 기운들은 세차게 련에게 빨려 들어갔다.

화륜 역시 느껴 본 적 있는 기운이었다.

‘그 빙정의 힘인가?’

화륜이 의원을 부르길 그만두고 련의 곁에 자리를 잡은 건, 지금 련이 무언가 힘을 얻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기 때문이었다.

평소에도 주위를 꿰뚫어 보는 시야가 보통 깊은 것이 아닌 련이니, 낯선 북해에 와서 많은 걸 보고 조모를 위하느라 몸을 혹사하면서 뭔가를 깨닫는 것도 있을 법한 일이었다.

괜히 사람들이 수선스레 들이닥쳐 일이 파탄 나기라도 한다면, 늦되게 핀 민들레 홀씨처럼 무른 련이야 그럴 수도 있다며 웃고 말겠으나 자신을 비롯해 다른 사람들까지 그럴 것 같지는 않았다.

‘내가 살다 살다 남의 호법을 서는 날이 오는군.’

남들이 봤으면 이렇게 어린아이가, 침상 옆에 대충 걸터앉은 방만한 자세로 무슨 호법이냐고 했겠으나.

화륜은 무릎에 팔을 대고서 턱을 괸 비뚠 자세로 련의 앳된 얼굴을 가만히 쳐다보며 혀를 찼다.

‘또 피를 한 바가지 토하고 왔네.’

련이 자신을 떼 놓고 갔을 때부터 이럴 생각이었다는 걸 눈치챘다.

화륜은 도무지 그 마음을 알 수가 없었다. 자신의 피를 토하면서까지 타인을 위하고 싶다는 그 마음을.

화륜이 그런 사람들의 존재를 모르는 건 아니었다. 범이 토끼의 존재를 알고 있는 것처럼 그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러나 토끼는 그저 범의 먹이일 뿐이다. 토끼가 어떻게 태어나고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는 범의 고려 사항이 아닌 것처럼, 화륜 역시 그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련이 토끼냐고 한다면, 화륜은 이렇게나 말을 듣지 않는 토끼가 있냐고 한탄하고 싶었다.

“적당히를 모르고.”

련은 상대가 조모가 아닌 화륜 자신이었더라도 이런 짓을 했을까?

매일같이 멀리 있는 온천까지 가서 식물을 가꾸고 약을 챙기고 자신의 피를 토하면서까지 아픈 것을 낫게 해 주려 했을까?

‘그랬겠지.’

그리고 자신이 아니었더라도 련은 그랬을 것이다.

경항운련에서 처음 만난 또래를 위해서도, 길가에 엎어진 거지를 위해서도 그랬을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화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빙정의 기운이 휘몰아치며 냉기가 스쳐 더욱 그렇게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도 이번엔…….’

련의 선행이 정말 되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화륜은 기운이 휘몰아치기 시작한 련을 내려다보며 그런 생각을 했다가 헛웃음 지었다.

스스로 그런 순진한 생각을 했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련이 지금 이 순간 뭔가를 얻었다면 그건 련이 믿을 수 없을 만큼 영민하기 때문이고 노력했기 때문이다.

그런 시답잖은, 스스로를 불태우는 선행 때문이 아니라.

그 순간 련을 지키는 화륜의 눈동자 위로 불그스름한 기운이 한 번 일었다.

닫힌 창의 문틈 사이로 가느다란 종이 한 장이 미끄러지듯 안으로 들어와 바람을 타고 화륜의 손에 안착했다.

얇고 거친 종이에는 분명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는데, 화륜은 코웃음을 치곤 종이를 손으로 한번 훑었다.

그와 동시에 그 위로 투박한 글자들이 떠올랐다.

종이 위에 간략한 진법을 그려 넣어 신묘한 효과를 보인 것이다. 간략하다곤 해도 간단하진 않았으나 화륜은 익숙한 듯이 종이를 훑었다.

위쪽 서체와 아래쪽 서체가 전혀 다른 것이 두 사람이 쓴 듯한 모양새였다. 글자를 빠르게 읽어내린 화륜은 미간을 모았다.

“이 ■■들이 지금.”

된소리 섞인 단어를 뱉었던 화륜은 깊은 심호흡을 한번 하곤 종이를 그대로 난로의 숯 사이에 집어넣었다. 푸르스름한 불꽃이 난로를 한번 휘감았다가 사라졌다.

화륜은 잠깐 미간을 짚었다가 한숨을 내쉰 뒤 침상으로 고개를 돌렸다.

눈을 감고 있는 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화륜은 그 곁에서 손을 쥐었다 폈다 하며 잠시 망설이다가, 나직한 한숨과 함께 이불을 끌어와 련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어휴, 어쩌다가…….”

그러곤 요즘 부쩍 자주 읊조리는 말을 흘리고 한숨을 내쉬었다.

* * *

련은 몸속으로 파고드는 냉기를 느끼며 그 사이를 부유했다. 친숙하고 편안한 걸 포근하다고 표현한다면, 련에게는 이 냉기가 포근했다.

날 때부터 이 속에서 태어난 것 같았고 잃었다가 다시 만난 듯 반가웠다.

빙궁에서는 줄곧 안정적이었던 영기가 휘몰아쳐도 괴롭지 않았다.

‘빙정?’

온천 위로 드리웠던 그 거대한 얼음이 저절로 떠올랐다.

‘그런데 이 냉기가 내게 뭘 하려는 거지?’

의문은 금세 풀렸다.

빙정의 냉기가 련의 단전에 얼음으로 된 벽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련의 몸에서 솟아나는 영기를 하나하나 얼려 벽돌로 삼으며.

련은 자신의 몸 안에서 일어나는 그 흐름을 관조하면서도, 빙정의 따스한 냉기가 그녀를 위하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소용없을 텐데…….’

바다처럼 해일처럼 휘몰아치는 영기의 틈바구니에 작은 벽돌을 쌓는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러나 벽은 점점 높아졌다. 처음에는 휘몰아치는 영기가 벽의 안팎을 마음대로 들락거렸지만, 마침내 바깥에서 들이닥치는 영기를 막아 낼 정도로 높은 벽이 완성되었다.

둥글게 감싸는 얼음으로 된 작은 궁전은 련의 육신 위에 단단히 뿌리내렸다. 그리고 그 밖에서 마치 폭풍우처럼 거세게 움직이는 영기.

련은 어느새 그 벽 안에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며 양손을 모아 ‘후’ 하고 입김을 불어 보자 김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순간 손안에 온기가 일렁거렸다. 련은 놀라서 자신의 손을 조심스레 펼쳐 보았다.

따뜻한 열기가 조금 더 뜨겁게 느껴졌다.

‘이건…… 홍화자의?’

빙설언이 먹고 그 신맛에 어찌할 바 모르는 걸 보고서 자신도 한 입 먹었던 그 홍화자의 기운이었다.

온기가 벽 안으로 퍼져 나갔다. 얼음벽은 그 열기에 살짝 녹았다가 다시 얼어붙으며 더욱 단단하고 견고해졌다.

그와 동시에 손가락 사이에 물방울이 맺혔다. 똑, 똑 소리를 내며 투명한 물방울이 떨어져 내린다.

련은 알았다. 이게 바로 내공이라는 것을.

단 몇 방울에 불과하지만 련의 생애에 단 한 번도 허락되지 않았던 바로 그것.

어떻게 된 일인지 눈에 잡힐 듯이 보였다.

자신이 할머니를 위해 온천에서 키우던 홍화자의 열기가, 바로 그 온천 위에 자리 잡고 있던 거대한 빙정의 힘을 녹여 낸 것이다.

녹은 빙정의 힘을 끌어와 이 영기의 얼음으로 벽을 만드는 것이 아마도 행운을 다 소모해 만든 기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한 입 먹은 홍화자의 차가운 속성이 그 냉기와 어우러져 영기의 벽을 만들고 홍화자의 따뜻한 속성이 벽을 강화하는 것과 동시에 영기를 가장 순수하게 녹여 내 내공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주 조금이었지만, 분명 내공이었다.

‘헉! 그런데 빙정의 힘을 내가 흡수해도 되나?’

그 빙정이 몽땅 녹은 것은 아니겠지만 남의 집 뒷산에 열린 과실을 서리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이미 먹은 걸 무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련은 안절부절못하다가 포기하곤 얼음벽을 손으로 쓸어 보았다.

심상의 세계이겠으나 냉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거기서 녹아 나온 맑은 물방울도.

‘빙정의 힘으로 이 벽을 넓히면서 안을 채워 나가면 된다는 거지.’

보통의 내공심법으로는 성취하기도 어려울 것이고 시간도 배로 걸리겠으나, 지금까지의 련에겐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가능성이었다.

련은 앞으로 소요될 그 긴 시간마저도 기껍고 반가웠다.

‘할머니 덕분이구나.’

냉기를 능히 버티는 힘은 조모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분명했다. 부친을 거쳐 자신에게까지 온.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도 걱정 안 하셔도 되고, 어머니한테도 비밀로 할 필요 없어.’

자신 때문에 딸이 아픈 것이라고 쉼 없이 자책했던 위지청의 짐을 드디어 덜 수 있다. 그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벅차올랐다.

‘빙정은…… 미안하다고 하자.’

빙궁의 힘을 쪽 빨아먹고 말 한마디로 무마할 수 없겠지만, 련이 일부러 훔친 것도 아니니 그걸 참작해 주지 않을까? 그리고 다 훔쳐먹은 것도 아닐 텐데. 아주 조금 녹은 것일 테다.

‘어쨌거나 친척이니까…….’

어쩌면 혼이 날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저절로 웃음부터 났다.

‘드디어 나도, 내공이, 내공을!’

처음에 단목천기는 무공을 알려 주지도 않으려 했다. 련이 차후에 만나게 될 벽을 걱정해서였다.

그때 자신이 무슨 말을 했던가.

그런 날이 온다면 참고 견뎌내 보이겠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듣던 단목천기의 표정은 가슴이 찢어지는 듯 보였다.

이제 조부도 더는 그런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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