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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5)화 (185/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5화

‘행운은 바닥났지만.’

꽉 채웠던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지만 방도를 찾지 못했던 내공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고 생각하면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그만큼의 선행과 행운이 겹겹이 쌓일 만한 일이었으므로.

‘아깝지 않아! 행운 다 쓴 거 하나도 아깝지 않아. 그러니 빙궁의 벗들아…… 나 일어나면 다 함께 수련하자…….’

련은 얼어붙은 영기의 투명한 벽에 기댄 채 중얼거렸다.

그와 동시에 서서히 시야에 빛이 번져 가기 시작했다.

련은 아마도 걱정하고 있을 화륜을 떠올렸다. 화륜은 걱정 같은 감정은 전혀 모른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언제나 표정은 전혀 달랐다.

동그란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가며 걱정하고 있는 걸 보면 걱정하게 해서 미안하면서도 괜히 마음이 조금 뿌듯했다.

‘이대로만 자라라, 우리 륜아…….’

화륜이 아직 걱정하는 것이 자신 한 사람만이라는 것은 마음에 걸렸지만, 이대로 시간이 지나면 점점 더 달라진 모습을 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친구도 생길 것이고, 자라서는 새로운 가족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거기까지 생각한 련은 우선 일어나자마자 화륜의 걱정을 덜어 주기로 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심상의 세계에서 깨어났다.

“으으…… 륜아야? 나…….”

그러나 련이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입가에 잔이 닿았다. 맑은 물이었다. 꼴깍꼴깍 마시다가 잔기침을 하자 작은 손이 등을 받쳐 주는 게 느껴졌다.

눈을 깜박거리자 시야에 번진 빛도 깜빡거렸다. 그러면서 눈앞의 형상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였다.

“이거 보여요?”

“검지…….”

“여긴 어디예요.”

“내 방…….”

“나는 누구?”

“우리…….”

“우리?”

련이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리자 화륜이 고개를 숙여 귀 기울였다. 그 순간 련이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찹쌀 경단!”

“아 진짜.”

화륜이 확 멀어지며 인상을 찌푸렸다.

“놀리니까 재밌어요?”

“나, 크흠. 나 괜찮아.”

“괜찮은 거 보기만 해도 알겠어요. 뭐 얻은 건 없어요? 사람을 밤새도록 고생시켜 놓고.”

화륜이 투덜거렸다. 그의 말대로 창밖을 보자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너…… 안 잤어?”

“잠을 잤겠냐고요. 앞에서 사람이 픽 쓰러졌는데!”

“안 자면 어떡해! 키 안 큰다.”

“커요. 여기서 일주일 밤낮을 안 자도 6척 가까이 클 거예요.”

“흠…….”

련은 잠깐 고민했다. 전의 삶에서 마주했던 마천교 소교주의 키가 얼마만 했더라?

‘나보다 크긴 했었지…….’

한 뼘은 더 컸던 것도 같았다. 어렸을 때 지금보다 더 고생했을 텐데도 그만큼 성장했으니 이번에도 잘 자랄 테지만.

“륜아 네가 어떻게 알아. 약관은 되어 봐야 알지! 지금도 제대로 안 먹고 안 자면 안 자랄 수도 있어.”

“누이가 나한테 먹이는 걸 생각하면 6척이 아니라 8척까지 자랄 수도 있다고요. 그리고 지금 제일 걱정할 건 제 키가 아니라 누이 키 아닐까요?”

“찹쌀 빈대떡으로 만들어 버린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무슨 성과라도 있어요?”

“아! 성과. 있어! 있지!”

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바람에 이불이 나부꼈다.

눈앞에 선경이 좌르르 떠올랐다. 평소처럼 흰 부채를 통해 보는 것이 아닌지라 배경이 비쳐 글자가 어지럽게 느껴졌지만 련은 한 자도 빼놓지 않고 읽어낼 수 있었다.

단목련

특성 : 무한한 영기의 샘 / 조금 더 알게 된 / 악의 추모를 받은 / 온실 속 병든 화초

조화 : 7성 -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습니다.

심안 : 7성 – 장점을 발전시킬 수 있습니다.

정화 : 4성 - 신체를 정화할 수 있습니다.

내공 : 1 / 60

영기 : 59 / 120

행운 : 0 / 240

그러나 환호하려던 련은 순간 멈칫했다. 언제나 ‘습득 불가’라고 적혀 있던 내공에 숫자가 쓰인 건 정말 기쁜 일이었다.

‘그런데 행운 한계치가 240이 됐어? 이제 다 채우려면 240이나 필요하단 말이야?’

120을 모아다 기적 한 번을 치렀으니, 두 번째 기적은 배로 어려울 거란 뜻이었다.

‘그래! 그거야 뭐 좀 더 착하게 살자!’

셈을 마친 련이 다시 활짝 웃으며 말했다.

“나 이제 내공 모을 수 있다!”

“……네?”

화륜이 입을 떡 벌렸다.

“사실 지금까지 내가 몸이…… 별로 안 좋았잖아.”

“와! 알고 있었어요?”

“아니, 내 몸인데 내가 알지…….”

“아는 사람이 좋지도 않은 몸을 그렇게 굴려요?”

“하여간 그래서 내가 사실 내공을… 쌓을 수가 없었거든. 영영 못 쌓는 줄 알았는데…….”

련이 팔을 번쩍 벌리고 외쳤다.

“짜잔! 이제 된다!”

“…….”

“짜잔…….”

“…….”

화륜이 양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 짜잔이니?”

“지금까지 내공을 아예 쌓지 못하는 몸이었다고요? 그럼 무공은…… 무공을 왜 배웠는데요? 해 봤자 안 될 거였잖아요.”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 보려고 했지.”

“나중엔 심법으로 내공 쌓은 놈들한테 당해서 픽픽 쓰러져도요?”

“뭐…… 그런 날이 오긴 했겠지? 하지만 무공을 배우다 보면 뭔가 방법이 생길 수도 있을 테고……. 그 왜, 그런 사람도 있었어! 뭐였더라, 아! 백, 백의명이라는 무인인데. 내공을 못 쌓아도 외공의 고수가 된…….”

“그 작자는 진작 추궁과혈 받아서 내공 쌓고 있는데요.”

“어?”

련이 눈을 깜박였다.

“……내공도 쌓고 있다고? 아니, 넌 그걸 어떻게 아는데?”

“그 사람 항주에 살던데요? 왔다 갔다 하면서 한 번 봤어요.”

“정말? 항주에 있었어? 아니, 대체 누구한테 추궁과혈을 받아서 혼자 먼저 내공을…….”

련은 혼자 내적 친밀감을 쌓았던 얼굴도 모르는 사람에게 배신감을 느끼다가, 황급히 정신을 차렸다.

“아 하여간…… 무공을 익히다 보면 방법이 생길 수도 있지 않나 했어. 그리고 생각보다 일찍 방법이 생긴 거지! 이렇게!”

련이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화륜은 그 얼굴을 쳐다보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니 자긴 내공도 못 쌓는 몸이었으면서 나보곤 무공 배우라고…….”

자신이 무공을 배우고 내공을 쌓으면 오래지 않아 련을 앞지르게 될 걸 알면서도 그랬단 말인가?

이쯤이면 착한 것이 아니라 바보 아냐? 화륜의 눈빛에 련은 엄하게 말했다.

“나는 나고…… 너는 너니까.”

“선 그어요?”

“왜? 서운하니?”

“네.”

화륜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당연히 아니라고 할 줄 알았던 련이 화들짝 놀랐다.

“아, 아니 내 말은. 진짜 선을 그은 게 아니라. 어…… 내 몫까지 우리 륜아가 강해져서……”

“누이를 지켜 달라고요?”

“아니, 네가 강해져서 행복하게 살아야지.”

“네?”

화륜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련은 손바닥을 딱 마주쳤다.

“강해져서 남한테 구박받지 않고…… 당당하게 행복하게 잘 살면 되지. 내가 너 성인 되면 집 한 채는 사 줄게. 돈 많이 벌었어.”

“언제는 가족 어쩌고 하더니 내보낼 생각부터 했어요?”

“그럼 이 누이랑 계속 같이 있으려고?”

련이 눈을 한껏 접고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화륜은 인상을 찌푸리곤 말을 돌렸다.

“그래서 이제 누이가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된 거라고요?”

련은 그런 화륜을 흘겨보려고 했지만 곧 얼굴에 피어나는 미소를 감추지 못하고 금방 양팔을 번쩍 들었다.

“응! 이제! 할 수 있다! 나 할 수 있다!”

기쁨에 벅차서 외치는 말에 화륜은 말을 잊은 듯 쳐다보기만 하다가 결국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나 련이 갑자기 확 잡아당기는 손길에 놀라서 눈을 크게 떴다.

“갑자기 왜, 왜요?”

“아기 찹쌀 경단이 밤을 샜으니까 눅눅해졌을 거라고. 빨리 자야 해!”

“아뇨, 난 이 정도로는…….”

화륜은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련은 그를 가차 없이 침상 위로 올리고 이불을 덮어 준 뒤 토닥였다.

“잔치가 열리면 꼭 깨워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푹 자야 해.”

“아니, 누가 그런 걸 걱정한다고…….”

화륜은 련의 어린아이 취급에 툴툴거리다가, ‘어허!’ 하는 엄한 소리를 듣곤 결국 눈을 감았다. 련이 나가면 도로 일어날 생각이었는데, 심지어 련은 옆에 붙어 앉아 토닥거리기 시작했다.

“눈 뜰 생각 하지 말고 자야지.”

“잘 거라고요…….”

어디선가 보드랍고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화륜은 어쩔 수 없이 이번만은 련의 뜻대로 해 주기로 했다.

그러나 그런 자신도 해 질 녘까지 푹 잘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화륜이 깨어난 건 조그맣게 들리는 구슬 소리 같은 웃음 때문이었다. 백련이 야옹 야옹 우는 소리, 그리고 련이 조그맣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백련! 이건 먹으면 안 돼. 안 그래도 너 커서 뭔가가 될까 봐 불안한데…….”

— 야오옹.

“다른 거 줄게. 고구마 구워 줄까? 내가 맛있다고 했더니 할머니가 구해 놓으셨댔어. 이따 밤에 구워 먹자.”

“……누이?”

“어! 륜아야, 일어났어?”

고양이를 데리고 소곤소곤 말하고 있던 련이 고개를 돌렸다.

“지금이 몇 시인…….”

“유시(酉時, 오후 5시~7시 무렵). 너 사실 많이 피곤했지?”

거의 열 시간 넘게 잔 셈이니 련이 놀리듯 말할 법도 했다. 그러나 화륜 역시 몹시 놀랐다.

‘깨지도 않고 잤다고?’

꿈도 꾸지 않고 무방비하게, 이렇게나 오래 잠들었던 게 언제인지 까마득할 지경이었다.

“누이는……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너 일어나는 거 기다렸지.”

“왜요?”

“오늘 저녁에 엄청 호화로운 만찬이 열리거든. 소궁주가 결정되어서 발표도 하고 할머니가 완전히 다 나은 걸 축하도 하고! 빙희(氷戱)도 보여 준대.”

빙희란 빙판 위에서 날을 세운 신을 신고 즐기는 놀이다. 춤을 추기도 했고 재주를 선보이기도 했다.

“……깨우지 그랬어요.”

“잘 자는데 뭐 하러 그래?”

련은 그렇게 말하며 흐뭇한 표정으로 백련의 턱 아래를 얼렀다. 화륜은 그게 꼭 자신을 어르는 듯 보여 괜히 질색하는 표정을 꾸며내며 침상에서 내려왔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문이 벌컥 열리며 사람들이 들이닥쳤다. 빙궁의 하인들과 단목현요, 단목련이었다.

“련아야! 이 고모가 너와 성아 입을 것들을 가져왔단다. 어서 보렴. 어느 것이 가장 마음에 드니?”

단목현요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별다른 치장을 하지 않았음에도 누가 봐도 눈부시게 아름다워서 시선을 뗄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기쁨과 환희의 원인은 바로 그녀의 어머니와 조카였다.

지난 새벽 빙설언이 제 무공을 전부 되찾았다는 소식이 빙궁을 강타했다.

빙궁은 그때부터 거의 잔치를 열고 있는 상태였다.

그리고 해가 뜨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목세가 식구들은 겹경사를 듣게 되었다.

련이 내공을 쌓을 수 있는 몸이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 얘길 듣고 빙설언은 심장이 너무 뛰어 뒤로 넘어갈 뻔했다가 되찾은 무공 덕분에 겨우 침착해질 수 있었고, 단목천기는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황급히 세가의 심법을 생각나는 대로 옮겨 적었다.

단목현요는 처음엔 련아가 내공을 쌓지 못하는 몸이었던 거냐고 닦달을 하다가 한참을 환호한 뒤에 아이에게 줄 선물을 챙기겠다고 달려 나갔고, 단목현우는 울었다. 아주 많이.

지금도 잠깐 그쳤다 울고 그쳤다 울고 하길 반복하는 통에 아직도 제 방에서 얼음주머니를 들고 다닌다고 했다.

“저는…… 아무…… 아무거나.”

“안 된다. 단목세가의 아이에게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가릴 안목은 있어야지.”

“고모…… 고모가 골라 주시면 되잖아요.”

“물론 그러면 되지만! 내가 없을 때도 있잖니. 얼른 골라 보렴.”

련은 잠깐 고민하다가 늘어선 의복들 중에서 단목성의 것과 가장 비슷한 걸 골랐다. 단목성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었다. 친자매처럼 비슷한 옷을 나란히 입고 있을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것이었다.

딸의 표정을 알아본 단목현요는 설핏 미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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