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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6)화 (186/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6화

* * *

빙궁에서 연 연회에 참석하기 전, 련은 빙설한과 빙설언, 그리고 단목천기와 함께 예의 그 온천으로 향했다.

“오……. 이걸 말한 거였더냐?”

온천의 열기 위로 그림자를 드리웠던 거대한 빙정이 있었지만, 지금은 그 그림자가 조금 얕았다. 거기에 한쪽 구석이 움푹 파여 있었다. 누군가 베어 먹은 사과처럼.

‘이렇게나 많이 녹았을 줄은 몰랐는데!’

련은 얼굴이 새빨개져서는 빙정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과 동시에 솔직하게 얘기했다. 어떤 기연인지 빙정의 힘이 자신에게 스며들었노라고.

빙설한은 조금도 노한 기색 없이 오히려 조금 궁금해하며 함께 보러 가자고 권하여, 연회에 참석하기 전에 빙정 앞에 다다른 것이 지금이었다.

“저게 정말……. 영험한 거였던 거군.”

빙설언이 중얼거렸다. 저 얼음이 다 녹았는데 그 아래 온천은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으니, 련이 다 흡수한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빙설한은 이미 녹아서 움푹 파인 빙정보다는 다른 것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이게 설언을 낫게 한 그 열매라 했지? 이게 보통 이 계절에 이렇게 많이 맺히는 건가?”

온천가에 붉은 열매를 한껏 매단 산사나무와 산수유들이었다.

수확하지 않고 남겨 둔 보통 열매들과 하룻밤 새 새로이 맺힌 홍화자들이 흐드러지게 맺혀 언뜻 보면 꽃나무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련이 수줍게 웃는 사이에 빙설언은 그 나무들을 훑어보다 습기가 차서 떨리는 숨을 뱉어 냈다.

계절에 맞지 않게 한껏 열린 열매는 손녀가 자신을 위해 얼마나 고군분투했는지를 증명하고 있었다.

빙설한은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사촌 누이의 등을 두드리곤 련을 돌아보았다.

“일이 어찌 된 것인지 알겠다.”

“네?”

“네 효심이 이 뜨거운 열매를 만들어 내고 이 열매가 빙정을 녹인 것 아니겠느냐.”

“아…….”

“북해의 긴 역사는 이 빙정의 힘을 녹여 제 것으로 하려는 역사와도 같았다.”

그러나 여태 아무도 그것에 성공한 이가 없었다는 말이었다.

“온갖 뜨거운 불길을 가져다대도 꿈쩍도 않던 빙정이었는데……. 빙정의 힘은 응당 너에게 감이 마땅한 듯하구나. 그렇지 않다 하여도 네가 철담빙혼 빙설언을 일으켜 세워 주었는데 아무도 가지지 못했던 빙정의 일부를 내어 주는 게 무슨 문제가 되랴.”

“능력 있는 자가 힘을 취한 것이거늘 너는 이걸 그리 염려했더냐?”

빙설언까지 오히려 꾸짖듯 말했다. 련은 민망해져서 웃기만 하다가 얼른 산수유와 산사나무를 가리켰다.

“음, 여기까지 온 김에 열매 좀 따 갈까요? 이거 몸에 좋은 거니까 다 같이 먹으면 좋을 텐데…….”

련이 부끄러워하며 말을 돌리는 통에, 빙궁의 궁주와 옛 천하제일인 그리고 철담빙혼은 얼른 작은 손녀딸과 함께 나무 열매들을 따기 시작했다.

소맷자락 위에 열매를 반쯤 채운 빙설한이 문득 생각난 것처럼 말했다.

“련아가 이제부터 심법을 익힌다고 했지.”

“네? 네!”

사실 빙설한은 련의 상태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련이 빙정의 힘을 흡수했다는 것보다는 련이 여태 내공을 익히지 못하는 상태였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그럼 여태 그런 상태였으면서도 그리 해맑게 웃으며 다른 아이들을 이끌어 주고, 알려 주고, 성취를 도왔던 것인가?

“빙백신공에는 관심이 없느냐?”

“궁주!”

빙설언이 더 놀라서 산사나무 열매를 따다 말고 외쳤다.

“단목세가의 심법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빙정의 힘을 흡수한 게 사실이라면야 빙궁의 심법이 좀 더 맞지 않겠소?”

한 문파의 심공을 선뜻 보여 준다는 것은 결코 간단한 얘기가 아니었다.

심법이란 그 문파의 심장과도 같은 것. 그렇기에 빙궁에서도 빙궁의 심법을 일컬어 ‘신공’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문비를 비롯해 아이들의 성취가 날로 눈부시더구나. 네 덕이라 들었다.”

문비와 련이 대결 아닌 대결을 할 때, 다들 련의 재능이 엄청나다고 생각했으나 빙설한은 알아보았다.

‘재능이 엄청나다는 말 정도로 표현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이 아이가 보는 세계는 어떨까? 뭘 보는 것일까?

사람이 아닌 것에 더 가깝게 느껴졌다. 중원의 도사들이 그렇게 노래 부르는 우화등선한 선인이 이와 같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유일한 약점은 아마도 내공을 익히지 못한다는 것이었을 테다. 단목천기가 소가주 자리를 아직도 결정하지 못한 것도 그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러나 이제 그 약점마저도 녹아내렸다.

“뿐만 아니라 소궁주의 마음을 정할 수 있게 해 주고 철담빙혼을 되돌려주었으니 그 은혜가 작다고 할 수 없다.”

“할머니는 제 할머니고, 도위…… 소궁주님은 할머니께도 재종조부님께도 아들과 같으니 제게는 숙부나 다름없어요.”

그들을 도운 것은 결국 가족을 도운 것이니 응당 당연한 일을 했다는 얘기였다.

빙설한이 빙긋 웃었다.

“네가 보여 준 검으로, 네가 도위의 등을 떠밀어 준 것으로, 네가 설언을 일으켜 세운 것으로 내가 한 걸음 더 나아갔느니라. 빙궁주의 성취는 천금과도 같다.”

“그건…….”

련이 조금 어물거렸다.

자신이 내공을 쌓을 수 있게 된 이후에 빙설한은 또 한 번 성취를 얻었다. 마음의 짐을 던 상태로 련이 한 번 보였던 빙백검을 되짚으며 얻은 성취인지, 덕분에 정말 바닥까지 긁어다 썼던 행운 수치가 다시 차올랐었다.

그때 련은 얼마나 놀랐던가?

‘압도적인 고수는 모래알 속에서도 사금을 찾아낼 수 있다더니…….’

애당초 행운 수치를 다 채워서 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었던 것도 그동안 열심히 살아온 빙설한이 약간의 계기로 진보한 덕분 아니었나.

여기에 빙정의 힘까지 흡수했는데 뭔가 더 받으려니 부끄러웠다.

“도움이 됐다니 사실 그것만으로도 기쁩니다!”

“그래서는 아니 된다!”

순간 빙설언이 버럭 외쳤다.

“네가 빈자에게 선행을 베풀면 대가로 감사하다는 말을 들어야만 하고 네가 부자에게 선행을 베풀면 대가로 성을 한 채 받아야 하느니라.”

“그렇…… 그렇게까지요?”

대가를 지불할 능력이 되는 사람들이 뭘 준다면 련도 그걸 거절할 생각은 없었는데…….

“설언의 말이 옳다.”

단목천기 또한 엄하게 말했다. 빙설언도 자신도 그렇지 못해서 여태 가족을 힘들게 하지 않았던가.

련은 품에 홍화자를 한 아름 안은 채 세 노인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빙백신공의 비급을 한 번만 보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어째서?”

알려 주겠다고 했는데도 한 번 보여만 달라니?

련은 방긋 웃었다.

“저는 단목세가의 유성진결을 배울 거니까…… 하지만 빙백신공이 도움이 되리란 말씀 또한 옳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니 한 번 보여 주기만 해도 감사하다는 련의 말에 빙설한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 뒤에 뿌듯한 표정의 단목천기가 ‘그것 보게!’라며 우쭐해하고 있었다.

“그것이야 더 어렵지 않다. 하지만 받은 것과 준 것의 저울이 맞지 않으니 이걸 어찌할까?”

“그러면 이거……. 오늘 딴 거요, 잘 손질해서 말렸다가 설탕에 재우고 싶은데 숙수를 빌려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하면 맛이 이상해져서…….”

“…….”

“…….”

‘저울이 맞지가 않다니까’라고 중얼거리던 빙설한이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대답했다.

“우리 빙궁의 숙수가 숙수 중에서는 감히 천하제일이라 할 만하니 내 꼭 여기 열매를 다 따다가 만들어 주라 하마.”

“감사합니다!”

련이 활짝 웃었다.

빙설언이 그 뒤에서 사촌의 허리를 툭툭 치며 ‘진짜 그걸로 퉁칠 것은 아니겠지?’라며 눈을 치떴다. 빙설한이 한숨과 함께 ‘당연하지.’라며 대꾸했다.

* * *

북해빙궁이 진심으로 기뻐서 연 만찬은 ‘북해’라는 말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뜨겁고 호화로웠다.

저녁이었으나 등롱과 화로가 주변을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 더울 지경이었고, 생선과 고기 그리고 그보다 더 진귀한 신선한 채소를 듬뿍 써서 만든 온갖 뜨겁고 맛있는 요리들이 끝없이 나왔다.

어른들에게는 따뜻하게 데운 진귀한 술이, 아이들에게는 과즙을 짠 음료와 설탕을 탄 양젖이 나오고 그사이 빙궁의 무사들은 호수의 물을 빙공으로 얼려 그 위에서 빙희를 직접 선보였다.

나중에는 련과 단목성도 빙판으로 내려가 그들의 빙희를 배웠다. 빙궁의 아이들도 하나둘씩 몰려오더니 다 같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빙궁에 이토록 활기가 도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빙설한이 독한 술을 한 번에 들이켜며 말했다.

곁에 앉은 빙설언은 손녀들이 노는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박수를 치느라 바빠, 단목천기가 그의 말에 응했다.

“아이들이 내는 소리야말로 희망과 기쁨의 소리 아니겠소.”

련은 무공을 파헤치는 그 신기막측한 안목으로 빙희의 요령도 금방 깨우쳤는지, 마치 빙궁 호수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능숙하게 빙판을 질주했다.

그러다 빙글빙글 도는 묘기를 보이기도 했다. 얼음 입자가 일어나 휘몰아치는 모양새가 아름다운 눈보라처럼 보였다.

빙설한은 내심 경탄을 삼켰다. 자신의 재종손이 빙정의 힘을 받아들였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단 하룻밤 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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