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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7)화 (187/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7화

련이 빙판 위에서 움직이는 동작에는 빙백신검의 묘리가 깃들어 있었다.

보여 준 것은 빙백신검이 아닌, 문비가 펼친 빙백검이었는데도 련은 그 검법에서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오의(奧義)를 깨우쳐 빙백신검을 이해한 것이다.

그 움직임을 따라 휘몰아치는 미세한 기류는 보잘것없어 보였으나 꿰뚫어보면 주인의 움직임을 돕고 있었다.

‘마치 얼음 속에서 태어난 것만 같군.’

그것은 생김새나 기질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북해에서 대단한 기재를 칭찬할 때 으레 하는 표현이었다.

빙궁주였으니 아랫사람들을 칭찬할 때 몇 번이나 했던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만큼 그 말이 가슴 깊이 와 닿은 적은 없었다.

빙판 위에서 미끄러지는 움직임 한 번에 빙궁의 무리(武理)가 담겨 있으니, 그야말로 얼음 속에서 태어난 아이라고 할 수밖에.

그러나 거기까지 알아보지 못한 주위의 아이들은 단순히 아름다운 눈보라와 유연한 동작에 경탄의 소리를 내다가 너도나도 따라 하거나 자신의 재주를 자랑했다.

“이제 항주로 돌아갈 것이오?”

빙설한이 물었다. 단목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기치 않은 희소식이 이미 넘치지 않소. 여기서 더 머무른다면 우리 욕심에 빙정이 노하실 것 같군.”

“하하! 북해 사람이 다 되셨군.”

술잔이 몇 번 더 오가는 사이에 단목현우와 도위도 빙판 위로 뛰쳐나갔다.

소궁주가 된 도위는 안색이 한결 좋아 보였다. 그와 마주한 단목현우는 눈이 퉁퉁 부어 있긴 했지만 짓궂은 표정은 여전했다.

“그럼 설언…….”

“나는 몇 달 더 여기 있을까 하오.”

“뭣?”

궁주 빙설한이 놀라 빙설언을 쳐다보았다. 빙설언은 손녀와 아들에게 손을 흔들어 주며 무심히 말했다.

“본래도 남으려 했지 않소.”

“그건 무공을 되찾기 전에…….”

“되찾았다고는 해도 몇 년을 누워만 있었던 몸이니, 긴 여행에 괜히 폐가 될까 저어되기도 하고. 도위 녀석이 마음을 잡았을 때 이것저것 깨우쳐 줄까 하오.”

북해에서 마무리 지을 것들과 챙겨 줄 것들을 다 하고 나서 항주로 향하겠다는 얘기였다.

빙설한이 단목천기를 쳐다보았다. 둘이 합의가 된 사항이냐는 눈빛에 단목천기가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의 고집을 내가 어찌 꺾겠소?”

“설언의 아들과 딸도 받아들였소?”

“자식들이라고 이이의 고집을 꺾겠소?”

“보통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하는데…….”

빙설한이 고개를 흔들며 읊조리는 말에 괜히 뿌듯하게 웃음을 흘린 빙설언이 말했다.

“내가 아니 가니, 그 대신 북해의 천랑대(天狼隊)가 배웅을 길게 해 주었으면 하오, 궁주.”

“천랑대를?”

천랑대는 빙궁이 자랑하는 타격대로 전원이 고절한 무공을 가진, 빙궁에서 궁주와 소궁주를 제외하곤 가장 강한 무인들이었다.

빙설언이 말을 이었다. 시선은 여전히 아이들에게 꽂혀 있었다. 소녀 둘이 머리를 맞대고 까르르 웃고는, 손을 맞잡고 빙판 위를 달렸다.

“모용세가에 들렀다 갈 것이니 거기까지만 천랑대를 보내 주오.”

“모용세가에?”

“내 남편과 아이들이 북해에 올 때 모용세가에 들르지 않아서 서운했던 모양이야.”

그때는 빙설언의 상태가 괜찮다는 확신이 없던 터라 단목세가에서는 여유를 부릴 수가 없다. 당연히 모용취려 역시 이해할 터였다.

빙설한은 넘기려던 술을 내려놓았다. 빙궁주이니만큼 보고 듣는 것 또한 많았다.

“요즘 불온한 움직임이 눈에 보인다는 얘기는 들었다.”

“조심할 때는 과해야 적절한 것 아니겠소.”

“련아에게 입은 은혜가 있는데 천랑대를 내주는 것이야 당연히 할 것이니 누이는 걱정할 필요 없소.”

“그거면 되었소.”

빙설언이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둠의 핏빛 일렁임을 멀리서 감지했다 해도 한때 천하제일인이었던, 지금 그때의 힘을 회복한 단목천기까지 있는 단목세가의 여행길에 많은 무력대가 필요할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빙설한은 사촌 누이의 반응을 소심하다 탓하지 않았다.

그사이 빙판 위에서 소년 하나를 붙잡고 놀던 련이 고개를 들고는 조모에게 손을 흔들었다.

‘걱정이 된다 하였지.’

단목천기에게 돌아가는 길을 방비해야 할 것 같다고 먼저 얘기한 것이 련이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 좋은 일이 이토록 많았으니 조심하는 게 옳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 말을 하는 련은 조금 더 먼 곳을 보는 눈이었다. 손녀가 그런 말을 했는데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북해빙궁에서의 마지막 만찬은 밤이 늦도록 오래오래 계속되었다.

* * *

“넌 우리 연맹의 북해지부 담당이야. 책임감을 가지고 동료들과 훈련에 집중하며 또…….”

문비가 간절한 눈빛으로 련을 흘끔거렸다. 작별의 인사를 하려는데 조금 전부터 단목성에게 붙잡혀 풀려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련도 풀려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 할미가 곧 갈 테니 그때까지 건강히 있어야 한다.”

“네, 할머니…….”

“조심히 돌아가십…… 돌아가시오.”

곁에 선 도위가 어색하게 말미를 고쳤다. 그전까지야 빙궁의 경비대장 정도였으나 지금은 소궁주가 되었으니, 소가주도 아닌 태상가주의 장손에게 편히 말하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도위가 어색해하는 건 하루아침에 말투를 고쳐야 해서는 아니었다.

웃으면서 아쉬워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앳된 소녀의 얼굴 위로 그날 사당에서 본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건 정말…….’

그 이후 자신은 마음을 정했다.

오래도록 이어졌던 깊은 생각에 마침내 마침표를 찍은 그날 보았던 련의 모습을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소궁주님도 건강하세요.”

련이 정중하게 인사하자 궁주 빙설한이 껄껄 웃었다.

“오누이처럼 지내면 되지 그리 격식 차릴 것이야 있느냐?”

“그렇게 따지면 오누이라기보다는 숙부뻘이지.”

빙설언의 말에 빙설한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뒤에 서 있던 단목현우가 투덜거렸다.

“아니, 련아 숙부는 저인데 왜 자꾸 새 숙부를 만들어 주십니까?”

시간이 지나 부은 눈이 가라앉은 단목현우가 그 눈을 치뜨고 도위를 쳐다보았다.

그렇게 티격태격하는 사이에 련은 겨우 그들에게서 벗어나 문비에게로 올 수 있었다.

“아, 아가씨…….”

단목성 앞에서 곤욕을 치르던 문비가 반가운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련에게 매달렸다. 련은 문비의 등을 두들겨 주곤 챙겨 온 것을 내밀었다.

“이거 내가 간단하게 정리한 요령인데, 그동안 적어 줬던 것들 있지? 그거랑 같이 보면 좋을 것 같아.”

“아! 낭랑비…….”

뭐라고 말하려던 문비가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련은 못 들은 척했다.

“물론 빙궁 스승님들이 알려 주시는 게 제일 훌륭하겠지만, 이것도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까…….”

“아니에요!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문비가 얇은 서책을 품에 꼭 안고는 연거푸 인사하는데 곁에 선 단목성이 말했다.

“이걸로 정진해서 우리 연맹에 부끄럽지 않은 모습을 보이도록 해.”

“……네…….”

“맹도들을 늘리는 것도 좋겠다.”

“네?”

“우리 연맹에 가입하면 그 비급을 보여 준다고 해. 네가 어렵게 얻은 것이지 않아? 가입하지 않는 놈들에게는 보여 주지 말고.”

순간 문비의 눈이 번뜩였다.

단목성의 말은 옳았다. 자신이 수치심과 죄책감을 한가득 안고 련을 부지런히 쫓아다니며 얻은 것인데!

“네, 꼭 맹도들에게만 보여 주겠습니다!”

“연맹에 가입한 사람들은 지장을 찍어 두고.”

련은 그럴 것까진 없을 것 같다고 말릴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그…… 맹에 사람이 느는 건 좋은 거니까…….’

연맹 이름을 생각하면 순간 후보군이었던 다른 이름들이 연이어 떠오르는 통에, 련은 생각마저 얼버무리곤 문비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이건 내가 이번에 딴 산사나무 열매랑 산수유 열매를 말려서 설탕에 절인 건데…….”

빙궁주는 약속을 지켰다. 듣기로는 련이 돌아가는 날에 맞춰서 주려고, 충분히 말리는 과정에 시간이 촉박하니 직접 내공으로 바람까지 날려 주었다는 소문도 있었다.

련은 조그만 단지를 문비의 손에 쥐여주었다.

“음, 홍화자라고 해. 그…… 연맹에 사람이 들어오면 같이 조금씩 먹어. 한 번에 많이 먹으면 안 되고, 하나씩 먹어야 하는데 먹고 나서는 꼭 운기 조식을 해야 해.”

“그건…….”

보통 영단에 그런 주의 문구가 붙지 않나?

그리고 련이 지내는 내내 련에게 도움을 받았던 문비는 련이 내미는 걸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진짜 영단 같은 건가 보다! 말린 과일 영단!’

문비의 눈이 글썽했다.

“이, 이렇게 귀한 걸 주시면…….”

“문비가 강해지면 나도 좋지. 우리 그…… 여…… 연맹이 강해지는 거니까. 그리고 문비도 내게 소중한 여지 단지를 줬잖아.”

“흑……. 아가씨…….”

문비가 훌쩍훌쩍 울기 시작했다.

련은 어색하게 웃다가 그런 문비를 한번 꼭 안아 주었는데 한 호흡이나 지났을 무렵 단목성이 단칼에 떼어 놓았다.

“이제 충분해.”

“어? 어어.”

“오이 국수, 수작은 적당히 해.”

“네? 아니, 아닌데.”

문비가 황급히 부정했지만 단목성은 엄한 눈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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