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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9)화 (18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89화

천랑대 부대주가 당황해 얼이 나가 있는 사이, 자신의 실력 이상을 발휘한 팽자광이 단목련에게 다가가 포권지례를 올리는 게 보였다.

조부와 함께 바둑을 두고 있던 단목련이 방긋 웃으며 팽자광의 팔을 톡톡 두드려 주었다. 비록 패배하긴 했으나 그의 노력과 성취를 축하하는 듯한 손동작이었다.

“이제 우리 유성표국이 절강성 제일의 표국이 되는 날도 머지않았네!”

“부, 부끄럽습니다. 정진하겠습니다.”

표국주 양금보 역시 팽자광의 어깨를 두들겨 주었다.

야영지가 금방 시끌벅적해지며 또 웃음꽃이 피었다.

야영지의 밤이 깊어 갈 때, 천랑대 대원 중 한 사람이 단목세가 일가를 흘끗거리며 부대주에게 다가왔다.

조금 전의 비무를 곱씹어 보고 있던 부대주가 고개를 들었다.

“뭐, 왜.”

“저…… 그거 아닐까요?”

“무엇이?”

멀찍이 떨어져 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대장의 눈치를 살피던 부대주가 인상을 찡그렸다.

무인이 이기고 지는 것에 일희일비해선 안 되는 일이지만, 심지어 이기기도 했지만, 그래도 일개 표국의 젊은 표두에게 잠깐이라도 몰렸다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처음에는 절대 그만한 실력이 아니었기에 그 충격이 더 컸다.

대원이 더욱 목소리를 낮추었다.

“빙궁 아이들이 요새 그 뭐라더라, 낭랑비급이라고 해서…….”

‘뭐라더라’라는 추임새는 지나가다 들었다는 뜻을 피력하기 위해서였으나 사실 대원은 그 얘길 처음 들었을 때부터 마음속에 꼭 품어 두고 있었다.

‘애들 실력이 말도 안 되게 일취월장했던데.’

그냥 무공을 좀 더 익힌 수준이 아니었다.

숨겨진 묘리, 한 끗 차이를 깨우친 것이 분명해 보였다.

문비가 서책 하나에 홀린 듯 코를 박고 보기에 그게 뭔지 좀 보여 달라 했더니, 무슨 연맹에 들지 않으면 죽어도 보여 주지 않겠다고 해서 결국 구경도 못하고 급히 길을 떠난 차였다.

“……낭랑비급?”

“련 아가씨가 무공을 정말 잘 봐준다고 합니다. 그걸 적어 준 걸 돌려본 애들 모두 실력이 부쩍 늘었는데…….”

“그걸 일컬어 낭랑비급이다? 그래서 요 며칠 어린아이가 표두의 무공을 좀 봐줬다고 그의 성취가 며칠 새 저리 늘었단 말이냐? 잠깐이나마 나와 동수를 이룰 정도로?”

“그게…….”

그렇게 말을 듣고 보니 또 말이 되지 않는 얘기 같긴 했다.

“애들끼리 치고 박고 하며 느는 것이야

“그렇지만…… 그래도 비무가 끝날 때마다 저 팽 표두와 아가씨 두 분이 말씀을 나누지 않으셨습니까?”

“이놈이 그래도?”

부대주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잠깐 인상을 쓰고 있던 부대주는 조카를 어화둥둥 하고 있는 단목현우, 그 곁을 지켜고 선 표두까지 흘끗거렸다.

“……그게 정말이냐?”

“예?”

“낭랑비급 말이다. 문비 실력이 눈에 띄게 는 것은 나 역시 보기는 했는데…….”

어린애들 장난이라고 해도 저 표두의 성취가 눈에 보이니 마냥 장난 같지 않았다.

“정말이라니까요. 저도 돌아가면 무슨 퇴치 연맹인가에 들어가 보려고요. 거기 가입하면 보여 준다는데…….”

어린애들이 어찌나 엄하고 독한지 가입 지장을 찍기 전까지는 낭랑비급 표지도 보여 주지 않더라며 대원이 투덜거리는데 부대주가 결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가르침을 좀 구해 봐야겠다.”

“……예?”

“엎드려 빌든 재물을 바치든 해서 아가씨께 조언 한마디라도 구해 봐야겠다고.”

대원이 눈을 크게 뜨고는, 단목현우의 한쪽 어깨에 올라가 있는 소녀와 부대주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제 사십 줄을 넘긴 부대장의 눈동자에 불꽃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어, 어어, 그…… 그래도 저희가 모시고 가는 분들께 그럴 수는 없지 않습니까?”

“현우 공자께서 내게도 권한 적이 있다.”

“무얼요?”

“아가씨 말씀을 같이 들어 보지 않겠느냐고.”

비무가 끝난 그에게 단목현우가 무슨 부처님의 좋은 말씀 들으러 같이 가자는 스님 같은 투로 말했던지라 완곡히 거절했던 부대주였다.

‘하지만 정말 좋은 말씀이라면?’

단목현우 어깨 위에서 웃으면서 장난치던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부대장은 얼른 고개를 꾸벅 숙였는데, 왜인지 소녀의 머리 위로 후광이 비치는 듯했다.

‘아닌가? 그냥 햇빛인가?’

* * *

‘후광이다.’

부대주는 그 빛이 무엇인지 며칠 지나지 않아 확실히 알았다.

함께 좋은 말씀 들어 보자던 단목현우의 권유는 거짓말이 아니었고, 단목련은 정말 반갑게 그를 맞이해 주었다.

그러곤 기다렸다는 듯이 그에게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강맹한 내공을 상대로는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가?

이 초식에 내재된 가능성은?

다른 방향으로 움직일 때의 응용법은?

그러곤 그가 그 말을 듣고 뭔가 깨우칠 때마다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해 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어린애가 멋모르고 하는 말 몇 마디 듣는다고 뭐가 되나 싶었는데, 모르면 알게끔 귀에 때려 박아 주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가 반백살 가까이 살아오며 한 몸과도 같이 여겼던 빙백신검이 이렇게나 다른 것이었던가?

그걸 북해 사람도 아닌 이 소녀는 어찌 그리 잘 파헤치는 걸까?

이것이 하늘이 내린 기재라는 것인가? 자신은 아닌, 이 소녀에게만 허락된?

첫날에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고 영문 모를 억울함까지 들어 밤잠을 설쳤다.

그러나 깨고 나자 그런 생각도 사라졌다. 성취는 도망가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세상은 처음부터 불공평하다는 걸 충분히 알 만한 나이이기도 했다.

‘그리고 세상천지에 저런 사람이 없을 듯도 하다.’

대단한 기재는 그도 몇 번이나 봤다. 저 소녀의 아비였던 단목현성이 그랬고 가깝게는 소궁주가 된 도위 역시 놀랄 만한 재능의 소유자였다.

그들과 잠깐이라도 함께 있으면 그 천재들만의 시야와 집중력에 영향을 받곤 했다.

그러나 그들도 이렇게 주위의 기량을 멱살 잡고 끌어올리지는 않았다. 그것도 이렇게 기꺼이.

부대주와 단목현우가 련에게 붙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더니 며칠 새 실력이 느는 것을 보고 천랑대원들도 관심을 가지자, 련은 그들까지도 환대했다.

‘보통…… 이러나?’

앎은 독점하는 것이고 가르침은 값비싼 것이며, 따라서 배움은 대가를 치러야만 한다.

장인의 제자들은 일평생 스승을 수발들고 무인은 사문에 충성을 맹세하며, 명성 높은 스승이 있는 학당에 들어가기 위해선 이름 있는 학자의 추천이나 고귀한 가문의 힘이 필요했다.

장인의 기술, 문파의 무공, 명사의 학문은 유출되어선 안 되는 것이다. 그것 자체로 힘이기 때문에.

상승무공의 비급은 부르는 게 값이요, 절정 고수에게 훈수 한마디를 듣기 위해 천금을 싸 들고 오는 자들도 흔했다.

그런데 여기는, 이 단목세가 일행은, 련은 그런 게 없었다.

부대주가 어물쩍거리며 이러셔도 되냐는 말에 작은 소녀가 배시시 미소 지으며 한 말이었다.

“다 같이 강해지면 좋잖아.”

“그게…….”

좋죠. 좋은 일이죠……. 참 좋은 말씀이죠…….

‘바둑돌로는 상대방을 죽이고 있지만.’

그걸 보면 이 소녀가 진짜 부처는 아닌가 보다 싶어서 오히려 조금 안심이 되긴 했다.

맞은편에 있는 천랑대 대주의 생각은 다르겠으나.

“크, 크윽…….”

“한 수 물러드릴까요?”

련이 방긋 웃으며 말했다. 천랑대 대주는 순간적으로 울컥한 눈으로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다시 숙였다.

여태 련은 세 번이나 물러주었는데, 결국 다른 방식으로 그를 몰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이번에 무른다고 답이 나올 것인가?

대주는 잠깐 고민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상대는 그냥 작은 아이가 아니라 한 세가의 장손이요 빙궁주의 재종손 아닌가.

“아닙니다. 제가…… 졌습니다.”

“그러면 대주님께서도?”

“말씀하시는 대로 따르겠습니다.”

“와아아아!”

옆에서 대원들이 좋다고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천랑대 대주의 얼굴이 흐려졌다.

‘이 자식들아, 대주가 졌는데 좋으냐? 좋냐고.’

처음에는 부대주와 유성표국의 표사들만 련의 꽁무니를 쫓아다녔는데, 부대주의 실력이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걸 보고 대원들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명 한 명 넘어가더니, 천랑대에서 련의 얘기를 한 번도 들어 보지 않은 건 대주만 남은 것이다.

대주로서는 호위와 수행을 할 대상과 무공에 대한 논의를 하며 사적인 시간을 보낸다는 것은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는데…….

— 련아가 심심해하니 바둑 한 번만 같이 둬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단목현우가 방긋방긋 웃으며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야영지의 안전을 확보하고도 시간이 남았으니, 북해의 귀한 손님이 하는 부탁을 더는 거절할 수도 없었다.

— 아! 그러면 기왕 붙는 김에 내기를 해 보면 어떨까요? 진 사람은 이긴 사람이 하는 말을 다 들어주는 겁니다!

모시는 입장에서 이긴다고 해도 이거 해 달라 저거 해 달라 할 수는 없겠지만, 장단에 맞춰 주는 거야 어렵지 않았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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