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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0)화 (190/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0화

“대주, 같이 말씀 들어 보면 좋으실 겁니다.”

실실 쪼개는 부대주의 얼굴을 보고서 대주는 인상부터 팍 찌푸렸다.

“얻는 것이 없으면 네가 담궈 둔 백주는 내 것이다.”

“아니, 강도십니까? 제가 거기에 들어가는 재료를 어떻게 구했는데!”

사천에서부터 맛이 좋기로 유명한 수수와 찹쌀, 보리, 옥수수에 기장을 어렵사리 공수해서 혼신의 힘을 다해 담근 술이었다.

그러나 부대주는 대주를 조금 흘겨보기만 하다가 말았다.

“맘대로 하십쇼.”

“이놈 보게.”

아무래도 대주가 술을 빼앗아 마신 세월이 길다 보니 술 얘기만 나오면 눈을 치뜨는 게 부대주였다.

‘그런데도 넘어가?’

대주는 묘한 표정으로 멀어지는 단목련과 부대주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처참하게 박살 난 반상 위를 보곤 탄식을 흘렸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기도 전에, 대주는 자신과 련의 바둑 실력에 감사하고 굳이 자신을 불러다 앉히며 내기를 걸어 준 단목현우에게 감사하게 되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자신은 이 여정이 끝날 때까지 아무것도 몰랐을 테다.

‘후광인가?’

그리고 련의 머리카락 위로 비치는 햇빛을 보며 부대주와 똑같은 생각을 했다.

* * *

“이제 곧 헤어지겠네요.”

“아아…….”

모용세가가 있는 요녕성이 곧이니 작별의 시간도 가까이 온다는 뜻이었다.

단목현우의 말에 천랑대원들이 모두 아쉬워하는 목소리를 흘렸다.

그와 동시에 가운데 마차를 모두가 흘끗거렸다. 련이 타고 있는 마차였다.

함께 배우고 익히는 동안 모두 끈끈한 정이 붙었다.

더군다나 일정 수위에 오르고 나면 진보는 남의 일처럼 더뎌지는데, 운이 좋아 이 여행길을 수행한 덕분에 성큼성큼 나아간 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마치 처음 무공을 익힐 때처럼 하루 지나면 새롭고 하루 지나면 한 발 나아가니 어찌 즐겁지 않으랴.

“제가 북해로 돌아가거든 문비를 통해 맹에는 꼭 가입토록 하겠습니다.”

“맞습니다! 저도요.”

“이 은혜는 제가 맹의 혈판장에 새겨서…….”

“아, 아니. 혈판장까지는.”

단목현우가 놀라서 손을 휘저었으나 대주까지 슬쩍 한마디 얹고 지나갔다.

“빙궁의 무인이 받은 게 있으면 응당 돌려드려야 하는 법이오.”

“그, 그렇다고 혈판장을요……?”

백주를 지키는 데 성공한 부대주가 대주의 등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북해빙궁이 무림맹에 가입하는 것인 줄 알겠으나 그들이 얘기하는 맹은 다른 맹이었다.

소녀 맹주가 이름을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라 그저 ‘맹’으로만 부를 뿐.

‘문비가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다!’

본래도 또래 중에서는 가장 재능이 우수해 빙궁주도 눈여겨보고 있었고, 도위가 직접 가르치던 소녀였다.

도중에는 중원에서 온 여자애를 졸졸 따라다닌다고 놀림도 받은 모양이던데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더라니…….

‘낭랑비급을 받았다면야 나도 그랬을 텐데…….’

그리고 절대 보여 주지 않았을 것이다! 맹에 가입한다는 알량한 조건만으로 보여 준다니. 역시 아이들 마음이 바다보다 넓었다.

그렇게 다들 아직 다가오지 않은 헤어짐을 한껏 아쉬워할 때였다.

“조용!”

천랑대 가운데 가장 강한 자가 대주가 되니만큼 가장 아쉬움이 컸으나 꾹 참고 있었던 대주가 돌연 표정을 굳히고 한 손을 들었다.

그와 동시에 천랑대원들이 직접 몰고 있던 모든 마차가 멈춰 서고, 대원들은 동시에 자세를 바로하고 각자 위치로 이동해 주위를 확인했다.

착! 착! 착!

조금 전까지 아쉬워하는 얼굴로 웃고 떠들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아무도 갑자기 왜 그러느냐 묻지 않았다. 단목천기가 조용히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려섰다.

“……다친 이가 오는 듯한데.”

이 낯설고 추운 땅은 중원에서도 한참이나 멀어 오가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그들 역시 여기까지 오는 시간 동안 낯선 여행자를 한 번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런 곳에서 다친 사람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목천기의 말대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칠갑을 한 사람이 다급히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멈춰라!”

천랑대 대주가 긴 장창을 휘둘러 추상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이 길목에서 무슨 일이냐?”

정신없이 달려오던 사람이 잔기침을 토하는 순간 핏방울이 왈칵 쏟아졌다.

“혀, 혈귀 놈들이…… 혈라곡의 혈귀 놈들이 나타났습니다! 스승님께서 막으려고 하셨지만…….”

청년의 눈에서 눈물인지 피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이 흘러내렸다.

“모, 쿨럭, 모용세가에 도움을 청하러 가는 길입니다. 스승님께서는 혹시 오가는 객이 있다면 앞이 위엄하니 오지 못하게 막으라 하셨습니다. 말을…… 말을 빌려주신다면 이 은혜는 잊지 않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모두의 기세가 날카로워지며 날붙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잘게 울려 퍼졌다. 북해에서 혈라곡 얘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네가 혈라곡을 어찌 알아보았느냐!”

“저, 저와 스승님은 의원입니다. 오래전부터 혈귀들에게 부상을 입은 무인들을 치료해 왔고 이번에도 그 후유증이 남은 지인이 위독해졌다기에 급히 올라가는 길입니다!”

청년은 생사의 갈림길에서 달려 나와 다급한 얼굴이었으나 무사들이 의심하는 것도 납득하는지 최대한 침착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그때 의원이라는 얘기에 눈썹을 모았던 단목천기가 청년의 얼굴을 들여다보다 경악했다.

“너는 선운신의(仙雲神醫)의 제자 소청 아니냐!”

“엇…… 어…… 어르신! 어르신이셨습니까? 어찌 여기에……? 설마 어르신께서도 북해로……?”

“설마 설언을 보러 가는 길이었더냐?”

아는 얼굴을 마주하자 긴장이 풀렸는지 주르륵 눈물을 흘린 청년이 넙죽 엎드렸다.

“어르신, 스승님께서 홀로 싸우고 계십니다! 혈귀들이 수십 명이나 모여 있었으니…….”

천랑대 대주의 눈동자가 시퍼렇게 불타올랐다.

선운신의의 명성은 그들도 익히 알고 있었다.

피의 강이 흐르던 시대, 쓰러진 영웅을 일으켜 세우기 위해 손을 보태려 애썼던 의원이기도 했다. 단목천기와 단목현성, 빙설언까지 신세를 진 적이 있는 의원이었다.

그 의원이 늦게나마 빙설언의 몸이 나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오다가 이런 변을 당하다니.

대원과 표사들이 황급히 청년 소청을 부축하고 응급 처치하는 사이 단목천기가 외쳤다.

“그는 나와 부인의 은인이시며 또한 혈귀라면 응당 한 놈도 남김없이 쳐 죽여야 마땅하니!”

단목천기는 기감을 드넓게 뻗치며 외쳤다. 그 목소리가 우렁우렁 울려 퍼졌다.

그와 동시에 무인들이 모두 무기를 고쳐 쥐고 방비 태세로 전환했다.

단목천기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 겁 없는 놈들이 지척까지 왔구나. ……선운신의를 상대하는 데는 그중 일부만 나선 듯하다. 이 잡귀 놈들을 수십이 아니라 수백으로 생각해야겠구나.”

“……!”

천랑대 대주는 눈을 크게 떴으나 단목천기의 말을 의미 없이 부정하지는 않았다.

“어르신의 명을 따르겠습니다.”

“세가의 무사들은 검을 뽑아라. 대주, 천랑대의 일부는 마차와 아이들을 지켜 주었으면 하오.”

혈라곡이 나타났던 수십 년 전, 빙설언을 따라나섰던 빙궁의 무사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하지만 돌아온 사람은 절반도 되지 않았다. 거기다 빙설언마저 긴 세월을 몸져누워 있어야 했다.

혈라곡에 대한 증오심이라면 중원의 그 어느 문파 못지않다고 자부할 수 있는 것이 북해빙궁이었다.

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접고 마차를 지키는 데 전념해 달라는 것이 작은 일은 아니겠으나 그들 중 누구 하나 고개를 젓지 않았다.

“명을 받잡습니다. 부대주, 다섯을 데리고 마차를 지킨다. 나머지는 나를 따라라!”

“예!”

가운데에 있던 련의 마차에 쓰러진 소청을 눕히고, 그와 동시에 단목현요가 단목성을 안아 들고 와 마차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녀 역시 무섭게 굳은 얼굴이었다. 단목현요가 단목성의 어깨를 꽉 붙잡고 말했다.

“성아야, 내 누누이 말했지. 네가 단목세가의 첫째요, 장손이나 다름없다. 그게 무슨 뜻인지 알고 있느냐?”

“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동생을 지켜야 한다는 말이다.”

“네, 어머니!”

목숨보다 아끼는 딸에게 제 한 몸 챙기라는 말이 아닌 다른 얘기를 하는 단목현요의 눈은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련아야, 성아 말 잘 듣고, 만약……. 아니다. 아무 일 없을 테니 조용히 있으렴. 이 고모와 숙부가…… 네 할아버지가 지켜 줄 것이다.”

단목현요는 뭔가 말을 하려다 꾹 참는 얼굴로 딸과 조카를 급하게 한번 안아 준 뒤 마차의 문을 굳건히 닫았다.

바깥의 소리가 단숨에 잦아들자 단목성이 련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하지만 떨리는 손이었다.

“련아야, 걱정하지 마.”

“아니, 성아야. 고모 말 듣지 마. 무슨 일 생기면…….”

“내가 언니인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단목성이 엄한 표정으로 련을 쳐다보았다. 긴장하여 파리해진 얼굴이었으나 꿋꿋했다.

련의 심장이 불안하게 쿵쿵 뛰었다. 마차로 다가오는 비린 피내음에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련의 얼굴이 창백해진 순간, 앞뒤 양옆으로 음산한 울음소리와 함께 산길 주변을 빼곡하게 둘러싼 그림자가 기울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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