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1화
‘강자다.’
천랑대 대주는 숨을 고르며 전방을 주시했다.
저벅저벅 걷는 걸음 소리와 함께 긴 그림자 세 개가 드리워졌다.
이제 삼사십 대쯤 된 듯 보이는 남자가 하나, 여자가 둘이었다. 가운데에 선 여자가 단목천기를 보며 눈을 가늘게 뜨고 웃었다.
“홀홀홀…… 무월검(無月劍), 기다려 주고 계셨소?”
얼굴은 중년이건만 말투는 마치 팔십 먹은 노파 같은, 소름 끼치는 목소리였다.
여자가 손을 들자 길의 양옆으로 그림자가 커졌다. 나무 사이를 빽빽이 채운 인원이 칼을 쥔 채 그들을 둘러싸며 한 걸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렇게 많은 수가 언제?’
“나는 적사검(赤死劍), 이놈들은 흑사…….”
천랑대 대주가 참지 않고 외쳤다.
“보나 마나 한 놈은 흑사검이고 다른 한 놈은 청사검이겠지! 잡귀들의 이름 따위 궁금하지 않다. 선운신의는 어찌했느냐!”
“뭐야? 이 ■■■ 것이 선배의 말이 말 같지 않은 것이야!”
울컥!
천랑대 대주의 말에 적사검이 버럭 성을 내자 젊은 대원 몇이 가볍게 피를 토했다.
목소리에서 사악한 내력을 가득 실어 외치는 음공의 일종이었다.
대원 몇이 흔들리는 걸 본 적사검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코웃음 쳤다.
“선운신의는 우리도 모른다! 고놈 한낱 의원 주제에 끈질기더구나. 두들기다 보니 절벽으로 굴러떨어졌느니라. 운이 좋으면 즉사했을 것이고 운이 나쁘면 산 채로 호랑이의 먹이가 되겠지!”
그 말에는 뒤에 있는 흑의인이 대꾸했다.
“이제 그만 주절대고 쳐라, 적사검!”
“닥쳐라, 흑사검. 이러니까 우리를 보고 저 잡것들이 혈귀니 잡귀니 하는 것 아니냐.”
그러나 그들 가운데 가장 강한 것이 적사검이었는지, 흑사검도 청사검도 더는 나서지 않았다.
“너희가 가진 영단이 있을 것인즉. 그걸 상납하고 우리 다리 사이로 기어가면 목숨만은 보전할 수 있을 것이야!”
“뭐? 여기서 살인멸구 해야 한다. 넌 무슨 헛소리냐!”
청사검이 눈살을 찌푸리고 말했다.
지나가던 의원과 제자를 잡으려고 들었던 것도 모두 죽여 없애기 위해서였다. 그 의원이 지니고 있을 영단을 탐낸 것은 덤이고.
“저치들의 영단을 가져가면 우리도 더는 숨죽여 지낼 필요 없지 않으냐? 혈라곡이 마침내 다시 일어섰음을 만천하에 공표할 기회다!”
“곡주의 뜻을 네 멋대로 해석하지 마라.”
청사검은 그렇게 말했으나 더 강하게 제지하지는 않았다.
‘영단?’
천랑대 대주는 이 일행이 가진 영단 같은 것은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백년삼 수준인 것은 몇 있겠으나 그걸 구하기 위해 이 많은 혈귀들이 달려든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단목천기가 검을 뽑아들곤 사자후와도 같은 웃음소리를 터뜨렸다.
“네놈들이 무슨 착각을 하고 달려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너희를 멸해야 할 권리와 의무를 모두 지고 있거늘 너희 스스로 예까지 달려온 것이 어찌 반갑지 않으랴?”
백도 무림인이라곤 믿기 어려울 만큼 짙은 살기가 깔리며 새들이 다급하게 날아올랐다.
적사검이 뺨을 파르르 떨며 외쳤다.
“너는 끝까지 살려 두고 네 처와 아이들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모두 내 힘과 젊음이 되는 꼴을 네게 보여 주마!”
“잡귀들아, 시끄럽게 떠들었다면 이제 저승으로 갈 시간이로다.”
“하하, 네가 언제 적 천하제일인데 그리 당당하느냐! 바로 작년까지 비루먹은 개처럼 제 처소에 틀어박혀 있던 주제에!”
적사검이 버럭 외쳤으나 단목천기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빙설언이 도발을 할 때는 상대의 위로 삼대 아래로 삼대를 전부 엮어다 교접을 시켰다가 겉과 속을 뒤집었다가 머리를 벗겼다가 아랫도리를 뗐다가 하는 말을 서슴치 않았는데 고작 저 정도 발언에 놀랄쏘냐!
그리고 천랑대 대주가 본인이 빙궁의 후예임을 입으로 먼저 증명했다.
“네가 감히 무월검 어르신께 그딴 소리를 하느냐? 웃기는구나, 혈라곡의 잡귀야! 기생충처럼 피 빨아 생을 연명하는 버러지 같은 놈들이 앵앵대는 소리가 지겹다! 그 썩은 비린내 나는 몸에 들러붙는 것들은 나란히 피 빨아먹는 거머리뿐일 테고 네 어미 아비도 네가 수치스러워 저승에서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혀를 깨물 것이다!”
적사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이 개잡놈들이 뚫린 입이면……!”
그 순간 단목천기가 칼을 번쩍 들어 올리며 외쳤다.
“멸-! 라-!”
단목천기의 목소리가 천지를 진동시켰다.
그리고 단목세가와 빙궁의 무사들이 검을 세우고 수십 명의 목소리를 하나로 모아 외쳤다.
“행! 협!”
* * *
피가 썩어 가는 악취와 비린내가 숲속을 진동하기 시작한다.
수백이나 되는 숫자가 일시에 들이닥쳤으나 천랑대와 단목세가의 무사들은 잘 버텨 내고 있었다.
“아이고, 아이고. 이걸 어쩐다? 지금 가서 도련님만 빼 와?”
“아직 때가 되었다고 하지 않으셨다. 얼른 이놈들부터 때려잡자고.”
퍼버벅!
퍽!
퍼벅!
검은 머리 흑담과 흰머리 백담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도 가차 없이 손을 휘둘렀다.
그들 주위로 진한 피 웅덩이가 빠르게 차올랐다.
“네가 괜히 밀서를 보내서 이러시는 것 아니냐?”
“너도 동의했지 않느냐! 왜 이제 와 딴소리냐!”
찔리는 백담이 냅다 소리치며 혈귀 하나를 반으로 베었다.
촤아악!
그들이 말하는 밀서란 마천교의 술법 중 하나로, 종이에 진법을 발동시켜 원하는 사람에게 날아갈 수 있도록 만든 것이었다.
교인이 아니면 서신을 받아도 내용을 알 방도가 없다.
심지어 그들이 보낸 건 같은 교인이 아니라 교주나 소교주만이 열어 볼 수 있는 밀서였다.
거기에 수상한 놈들이 눈에 띈다는 말을 적어 보낸 것인데…….
“네가 괜히 도련님을 시험하려고 보낸 것 아니냐!”
흑담은 화륜을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그날을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고 뜨거운 차를 마셔도 얼음물을 마신 듯 몸이 떨렸다.
제법 싹수가 보이는 놈이 하나 있어 데려가려고 했더니 모시는 어르신이 있네 어쩌네 하기에 그가 대체 누군가 하고 찾아갔더니, 그들이 상상한 어르신은 온데간데없고 곱상하게 생긴 소년만 서 있을 뿐이었다.
왼쪽 눈 아래의 눈물점과 깊은 눈매가 인상적인.
본 순간 왜인지 심장이 철렁한 느낌이었다.
— 이게 또 이렇게 되나.
— 지금 이게, 무슨…….
— 주워.
— 뭐…… 뭐?
— 보잔이 떨어졌잖아! 시끄러우니 빨리 주워.
작은 소년이 귀찮다는 듯 턱짓을 했다. 흑담이 떨어뜨린, 그들의 소교주 후보를 찾는 성좌보잔(星座寶盞)이 바닥에서 웅웅 울리고 있었다.
흑담은 홀린 듯이 팔을 뻗어 그 잔을 집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성좌보잔 안에서 빛이 뿜어져 나와 방을 가득 채웠다가 천천히 사그라들었다.
시야가 하얗게 번졌다가 가라앉으며 소년의 형상이 흐릿하게 보이다 점차 선명해졌다.
성좌보잔이 울리며 빛을 발했으니 바로 이 소년이 그들이 찾아 헤매던, 삼십욱천강(三十六天罡) 중에서도 ‘천괴성(天魁星)’을 타고 태어난 소교주 후보임이 분명했다.
— 네…… 네가…… 우리 교의…….
— 어느, 크흠, 어느 집 아해더냐? 부모님은 계시는가? 아마 없지 싶은데.
흑담이 더듬거리는 사이에 간신히 정신을 차린 백담이 기세를 풀어 압박하며 물었다.
삽십육천강을 타고난 아이들은 흉성 아래 태어난 탓인지 대개 어려서부터 부모를 여의고 고달픈 신세이거나, 그게 아니어도 부모와 사이가 살갑지 못했다.
고아들은 대개 힘을 얻을 수 있다는 말에 망설임 없이 장로들의 손을 잡았다. 부모가 있어도 동전 몇 푼에 아이를 팔아넘기기 일쑤였다.
해서 백담도 흑담도 아이를 찾는 것만 걱정했지 데려오는 것은 걱정하지 않았더랬다.
아무리 소교주 후보라도 무림인을 처음 상대하는 아이라면 놀라서 울음부터 터뜨릴 험악한 기세였는데, 소년은 눈썹만 까딱하곤 픽 비웃은 뒤 말했다.
— 내가 할 일이 있으니 지금 당장은 갈 수가 없어.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 뭐? 너 우리가 누구, 누군 줄 알고……!
— 그러는 너는 내가 누군 줄 알고 입을 놀릴까?
어린애가 치기 어린 말을 하는 것이 분명했는데 흑담은 저도 모르게 무릎부터 꿇을 뻔했다.
— 네가, 네가 어떻게!
부드럽게 움직이는 기운은 그가 교주를 영접할 때 보았던 그 기세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 생각 자체가 교주에 대한 죄임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소년의 머리카락이 유영하듯 일렁거렸다. 소년은 천진해 보일만치 눈을 접은 채 웃고 있는데 어째서인지 입이 바싹바싹 말라 목이 탔다.
흑담이 입만 달싹이는데 소년이 팔짱을 낀 채 추궁했다.
— 그래서 너희가 누구라고?
— 아, 우, 우리는…… 우린…….
— 마처, 마천교에서 왔다. 소교주 후보를 찾기 위해서…… 네가… 후, 후보에 발탁되었으니 이를 광명으로 알고 우리를 따라 서쪽으로…….
— 아 지금 바빠서 못 간다고 했잖아. 몇 달만 기다리라니까.
소년이 팩 짜증을 내는데 울면서 엎드려 빌고 싶었다. 그런 마음이 드는 이유도 모른 채.
— 이, 이놈…… 무엄…… 무엄하게…….
그나마 백담이 체면을 차리려고 애썼으나.
— 내가 소교주 후보라며?
— 그, 그게 소교주라는 말은 아니다! 다른 장로들도 제각기 후보를 찾아오니 너는 그, 그들과 겨루어 네 가치를 증명해야만 한다.
소년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 하지만 다른 장로가 찾아온 후보가 소교주가 되면 너희는 ■ 되는 거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