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2화
소년은 마치 교의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 아이가 어떻게?
어딘가의 간자(間者)일까? 혈라곡이 사그라든 지도 오랜 시간이 지나 무림맹도 시들해지는 눈치인데, 백도맹이나 흑천련이 교에 도전을 하려는 것인가?
그러나 그렇다면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드러내서 될 일이 아닐 텐데.
그러나 아무리 봐도 소년은 교의 외부 사람 같지 않았다.
선대 교주의 혼백이 소년 옆에 있었다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그…….
— 결국 내가 소교주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것도 너희지. 그리고 내가 소교주가 되면 장차 교주라는 뜻 아냐? 마천교는 장로가 교주 위에 있나?
— 무, 무엄하다! 어찌 지존을 함부로 입에 담느냐!
— 하하. 그럼 죽일래? 겨우 찾은 소교주 후보를? 너희 그동안 얼마나 헤맸냐? 만두나 주워 먹으며 겨우 찾은 후보는 죽이고 빈손으로 가서 못 찾았다고 할 건가?
마른침이 꼴딱꼴딱 넘어갔다. 한 대 쥐어박기라도 했으면 좋으련만 어째서인지 팔이 떨려 올라가지도 않았다.
어째서 마천교 근처에도 오지 않은 항주의 꼬맹이가 그들을 압도할 수 있나?
어찌 이다지도 교주와도 같은 기세를 풍길 수 있단 말인가?
— 그…… 꼬마 도령이 명석하구나. 과연 교의 반석이 될 만하니, 한시라도 빨리 교로 돌아가…….
— 바쁘다니까 몇 번을 말해야 하냐, 이 ■■들아! 안 간다는 것도 아닌데.
교의 장로가 되기 전에도 후에도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단어로 불리는데도 다른 것부터 귀에 들어왔다.
— 가, 갈 거냐? 우리 교로?
흑담이 넙죽 잡아채 묻는 말에 소년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 빙궁에만 들렀다 갈 테니 너희는 멀찍이 따라오도록 해.
— 뭐? 빙궁까지? 아니, 그런데 왜 멀찍이 오라고 하시는지……?
흑담이 슬그머니 존대로 바꾸며 물었다. 백담은 경악한 얼굴로 흑담을 쳐다보았으나 이윽고 그도 흑담과 비슷한 표정으로 소년을 쳐다보았다.
어차피 그들은 그들이 찾아낸 후보를 지지해야만 한다.
후보가 실패하면 그들도 끝이고, 후보가 성공하면 그들에게도 광명이 있으리니!
‘그런데…… 이 아해는.’
지금의 교주 천혜담이 보다 어린 후보였을 적에도 이와 같지는 않았다.
성좌보잔이 거짓말을 할 리도 없다.
구천현녀가 먼저 점지해 준 사람인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차피 소교주가 될 것이고 소교주가 된다는 말은 천지가 뒤집어지지 않는 한 교주가 된다는 말과도 같다.
— 벌써부터 시끄러워지는 건 싫으니까.
— 저, 저희가 부끄러우십니까!
— 시끄러운 거 싫다니까.
무월검에게 걸리지 않도록 멀리 떨어져 따라오라는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는 곧 알게 되었다.
소년은 백도 무림 세가에서 그 집 장손의 하인 일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흑담과 백담은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지만 차마 소년의 뜻을 거스를 수가 없어서 눈물을 머금고, 그가 시키는 대로 먼 길 가는 동안 뒤떨어진 채 찬 이슬 맞아 가며 따라가기만 하다가…….
— 우리가…… 속고 있는 것은 아니겠지?
— 속다니?
소년이 소교주가 되고 장차 교주가 되는 것만 매일같이 꿈꾸던 흑담이 눈을 치뜨고 반문했다.
— 뭔가에 홀려서 예까지 온 건 아니겠지? 혹시 도련님이 마천교 소교주가 아니라 백도맹이나 흑천련의 사주를 받아 우릴 기다리고 있다가…….
— 에라이, 멍청한 놈아! 그러면 보잔이 울었겠느냐?
— 아.
생각 많은 사람이 자기 발밑 못 보고 넘어지듯 백담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가 황급히 말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밀서를 보내 보자는 것이었다. 교주와 소교주만이 열어 볼 수 있는 진법으로.
아직 천산 그림자도 밟지 않은 도련님이 열어 본다면야 그야말로 구천현녀께서 먼저 점지해 주신 소교주인 것이 아니겠나?
만약 백도맹이나 흑천련에서 밀어 넣은 간자 아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재능이 있다면, 힘이 있다면 교주로 받들어 모실 수 있다는 마음에서였다.
그런 그들의 믿음에 부응이라도 하듯 소년에게서 답신이 왔다.
— 너희가 지금 시답지도 않은 ■■을 해서 나를 ■■하게 해?
밀서를 열어 보자마자 다 늙은 노인네 둘이서 무서워 울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러고서 지금이었다.
마음만 같아선 당장 도련님을 먼저 빼낸 다음 이 미친 혈귀들을 쓸어버리고 싶건만 도련님이 저 마차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단목세가와 빙궁의 무사들 모르게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눈을 뒤집은 채 달려드는 놈들 수십을 한 번에 상대하는 건 그들에게도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다 그들이 지금 이 혈귀들의 포위망 안이 아니라 바깥에 있기에 느낄 수 있는 것도 있었다.
온몸에 힘을 주고 주위를 단숨에 쓸어내 잠시 소강상태에 들어간 순간, 흑담과 백담이 먼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구나.”
“미리 아이들을 불러 놓긴 했지만…… 쓸 일 없길 바랐건만.”
“이 잡귀들이 도대체 뭘 노리고 이토록 몰려든단 말이냐. 설마 도련님은 아니겠지?”
대화는 그것으로 그쳤으나 백담과 흑담의 눈빛에 어린 살기가 한층 더 진득하게 가라앉았다.
* * *
“범 한 마리도 늑대 수십이 덤비면 쓰러지는 법!”
적사검이 외치며 검을 휘둘렀다. 단목천기가 맞받아쳤다.
“웃기는구나! 하룻강아지도 안 되는 거머리들이 제가 늑대인 줄 아느냐!”
콰아앙!
검과 검이 마주했다고는 믿기 어려운 격렬한 소리가 산 속에서 쾅쾅 울려 퍼졌다.
검격 한 번 한 번에 땅이 파이고 나무가 날아간다. 그 기세에 혈라곡 혈귀들도 몇이 쓸려갔으나 워낙 수가 많아 티가 나지는 않았다.
“양떼 수백이 덤빈다고 호랑이가 쓰러지지는 않는다. 호랑이의 먹이가 될 뿐!”
쾅!
다시 한번 단목천기가 검을 내리찍듯 휘둘렀다. 막아 낸 건 적사검이었으나 뒤에 서 있던 흑사검의 입에서 검은 피가 주룩 흘러내렸다.
세 사람이 단목천기를 상대하는 합격진과 동시에 진법을 펼치고 있었기에, 그 타격 또한 세 사람이 동시에 나눠 부담한 것이다.
흑사검이 피를 뱉어 낸 후, 세 사람의 검이 꼬챙이처럼 단목천기를 찔러들었다.
채채챙!
단목천기가 그 칼을 한데 모아 튕기듯 한 방에 날려내며 검을 휘둘렀다.
“크아악! 네놈! 죽인다!”
어깻죽지가 베인 청사검이 눈을 희번덕거렸다.
채채챙!
흑사검, 청사검, 적사검 개인의 수준은 단목천기를 따라오기엔 멀었으나 이 셋의 합격진은 수준급이었고, 진법의 효과도 몹시 성가신 것이었다.
감각의 교묘한 왜곡과 보다 무겁게 몸을 내리누르는 대기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일평생 연마해 온 무공이 한끝 차로 달리 펼쳐지기만 해도 칼끝의 예리함은 허물어지고, 빈틈은 죽음의 틈이 되는 법이었다.
‘어느새 혈라곡의 저력이 이만큼이나 올라왔단 말인가?’
세 사람이 동시에 덤빈다고 해도 단목천기를 상대로 버티고 있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혈라곡 내부에서도 장로급인가.’
제아무리 혈라곡이라 해도 이만한 무인을 셋이나 쉽게 키워 낼 수는 없었다. 하물며 단목천기의 손에 반쯤 궤멸된 채 오랜 시간을 보낸 걸 생각하면, 혈라곡으로서도 작정하고 달려든 것이 분명했다.
‘한 명 한 명이 천랑대 대주와 동급!’
이 셋이 작정하고 달려든다면 대주 아래 무인들은 감당키 어려울 터였다.
단목천기는 짧게나마 눈을 감았다. 왜곡되는 감각이 시야인지 기감인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피 튀기는 전장 속에서 찰나라도 눈을 감는 것은 정신 나간 짓이었으나, 단목천기는 눈앞에 세 사람을 두고도 당황하지 않은 채 유려하게 검을 흔들고 막아 냈다.
‘역시 눈인가!’
기감을 속이는 진법을 단 셋이서 일구는 건 제갈세가라 해도 어려운 일이었으나 시각을 흔드는 건 비교적 쉬우면서도 효과가 출중했다.
단목천기가 눈을 감은 채 검을 쳐 내자 적사검의 표정이 악귀처럼 일그러졌다.
지금 단목천기의 행동이 그들과의 격차를 몸소 보여 주고 있었다.
“네가 한때나마 천하제일인이었다고 오만을 부리다 무릎 꿇고 피눈물을 흘릴 것이다!”
적사검이 증오와 열등감이 들끓는 목소리로 외쳤다. 병장기 부딪히는 칼날 소리와 비명, 피비린내가 한층 더 짙어졌다.
퍼버버벙!
숨 막힐 듯이 빠른 동작으로 검이 움직이며, 단목천기의 소맷자락이 폭발하는 듯 거친 소리를 내며 펄럭거렸다.
“크헉!”
그와 동시에 적사검이 피를 한 사발 토해 냈다.
그러자 중년으로 보였던 적사검의 얼굴이 순식간에 늙어 가며 머리가 새하얗게 새는 게 아닌가?
“안 돼…… 안 돼!”
단전이 있을 하복부를 쓸어 보던 적사검이 허둥지둥 검을 움켜쥐며 다시 일어서려고 했으나 그 순간 단목천기의 검이 적사검의 심장을 찔렀다.
“커억……!”
단칼에 적사검이 축 늘어지며 진법이 깨졌다. 동시에 청사검과 흑사검 역시 반동으로 왈칵 피를 토했다.
몸이 가벼워진 걸 느낀 단목천기가 눈을 번쩍 뜨고 남은 둘에게 검을 겨눴다.
“천하제일인이라는 이름 앞에 오만을 부리는 건 너희다!”
적사검의 시체를 흘끗 쳐다본 청사검과 흑사검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네놈! 경지를 잃은 게 아니었단 말이냐, 크흑…….”
“설마 곡주가 우리를…….”
“거머리 대장이 너희를 보내며 내 심마가 깊어 할 만할 거라 하더냐? 그래서 좋다고 달려왔고?”
단목천기가 호통쳤다.
“그러니 너희가 평생 무명(武名)을 떨치지 못하고 다른 이들에게 기생해 살아가다가 세상에 해악만 끼친 채, 누구에게도 아무 의미가 되지 못한 채 죽는 거다!”
“감히 네가-!”
청사검의 눈자위가 순식간에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에게서 폭발적인 기운이 터져 나와 머리카락과 옷자락이 정신없이 펄럭였으나 단목천기가 그보다 더 빠르게 움직였다.
“잡귀와 나눌 얘기는 더는 없다. 죽어라. 재가 되어 네 죄를 참회하거라.”
한 호흡에 수십 가지의 초식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며 청사검의 모든 공격을 쳐 냈다.
채채채채챙!
그리고 청사검의 검이 허공을 나는 순간 단목천기가 세상을 베듯 가로로 검을 베었다.
스아악!
청사검의 목이 단숨에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