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5화
이 난리 통에도 때 하나 묻지 않은 새하얀 옷을 입은 남자가 위에서부터 검을 아래로 내리치며 뛰어들었다.
기척을 느끼자마자 련은 당장 바로 옆에 있는 화륜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그보다 화륜의 팔이 움직이는 게 먼저였다.
화륜이 단목성을 단목현요에게로 밀치고, 자신은 련을 끌어당겨 바닥을 한 바퀴 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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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아아앙!
그와 동시에 천지가 진동하고 강풍이 휘몰아쳐 멀리서부터 불어온 불티와 흙먼지, 자갈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화륜이 소매로 련의 얼굴을 가리는 사이에 날카로운 파편이 그의 얼굴을 스치고 생채기를 만들었다.
“하하하! 도망은 어림없다!”
“크읏!”
천랑대의 무사가 황급히 괴인의 검을 막아서는 사이, 간신히 성을 안아 들고 공격을 피한 단목현요가 폭음에 놀라 날뛰는 말을 가리켰다.
“말을 진정시켜서 소청을 데리고 모용세가로, 빨리!”
천랑대의 무인은 소청이 얹힌 말의 고삐를 강하게 잡아챘다. 다른 말 한 마리는 이미 도망친 지 오래였다.
“네놈들! 쥐새끼처럼 잘도 도망쳤구나!”
“하나가 더 있었나……!”
“너는 누구냐!”
단목성을 뒤로 보낸 단목현요가 검을 뽑으며 외쳤다. 흰 장포를 걸친 남자가 요사스런 눈을 빛냈다.
“끌끌, 셋을 죽이면서 하나가 더 있으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더냐? 척 봐도 흑, 청, 적이면 백이 하나 남아 있을 것 아니냐.”
“피 빨아 생을 연명하는 비루먹은 거머리가 셋이나 넷이나 무슨 상관이겠느냐?”
“어디 듣도 보도 못한 놈이 나와 설치느냐!”
백사검은 인상을 찌푸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어린 것이 맹랑하구나.”
그러나 단목현요는 신경 쓰지 않고 아이들에게 소리쳤다.
“말을 따라 도망쳐! 빨리! 엄마가 찾으러 갈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어, 어머니! 하지만……!”
“어이쿠. 자식 사랑이 지극하구나. 어디 네 목이 잘리고도 그런 소리를 지껄일 수 있는지 한번 보자꾸나. 단목세가의 피가 참으로 달다지? 내 오늘 그 맛을 확인해 봐야겠다!”
“단목성! 빨리 련아 데리고 뛰어!”
단목현요의 외침에 단목성은 눈물을 닦아 내곤 련의 손을 잡고, 뒤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했다.
그때 화륜이 돌연 뒤를 홱 돌아보곤, 백련을 안지 않은 쪽 팔을 빠르게 휘둘러 백사검이 날린 비수를 쳐 냈다.
그와 동시에 무사들과 단목현요가 길을 막아섰다. 곧 아이들의 모습이 산 너머로 사라졌다.
비수를 날렸던 백사검이 눈을 크게 떴으나 자신에게 달려드는 단목현요 때문에 더는 아이들을 상대하지 못하고 단목현요의 검부터 막아섰다.
* * *
아이들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단목현요는 검을 고쳐 쥐고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저 ■■■ ■■■ ■■■가 뚫린 ■■■를 재치 있게 놀리는데 네놈의 배를 갈라 ■■로 ■■■를 하고 남은 건 돼지에게 먹이로 주마!”
“……!”
“……!”
“……!”
피아 할 것 없이 다들 놀라서 단목현요를 바라보았다가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백사검이 얼굴을 악귀처럼 일그러뜨리곤 광소를 터뜨렸다.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버는구나! 좋다, 너희를 모조리 죽여 그 피로 배를 채우고 영단을 가져가마! 네 새끼들이 토끼 쫓기듯 사냥당하는 꼴을 저승에서 구경하려무나!”
그 순간 백사검과 단목현요가 다시금 충돌했다.
채채채챙!
검과 검이 맞붙고, 일렁이는 산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네가 너희 삼남매 중에 가장 모자라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느니. 우습구나, 아우보다 못한 누이라니!”
격장지계(激將之計)인 것을 아는 단목현요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 소리는 그녀 자신이 스스로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이었다. 남에게 한 번 더 듣는다고 다를 바는 없었다.
“너야말로 우습구나, 혈라곡에서 그 ■■을 하면서도 천하십존은커녕 네 이름을 아는 이조차 없으니! 널 욕하려 해도 세상 사람들이 너의 존재조차 모르니 도리가 있나? 아, 이런 때를 위해 여태 무명(無名)으로 살아온 것이냐?”
“이 새파랗게 어린 것이 감히!”
“셋 중에 제일 못한 나에게도 이기지 못하는 놈이 말이 많아!”
콰쾅!
채채챙!
그러나 검과 검이 수십 차례 더 마주하자 단목현요의 입가에 핏줄기가 주룩 흘러내렸다.
백사검의 경지는 명백히 그녀보다 몇 수는 위였다.
그럼에도 단목현요가 버텨 낸 건 그녀의 등 뒤 저 너머의 어딘가에 아이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백사검이 점점 붉게 물들어 가는 눈빛으로, 여태 보인 적 없는 내기를 끌어올리며 말했다.
“영단을 내놓으면 네 목숨만은 살려주마! 그렇지 않으면 모조리 죽인 뒤 그 시체를 뒤져 가마!”
“칠일 밤낮 쫄딱 굶은 들개처럼 킁킁거리겠다니 네놈이 딱 그런 놈인 걸 잘 알겠구나! 그리고 영단이 있었으면 이미 저 마차 안에서 모조리 불탔을 것이다! 너희가 지른 저 불로! 이 멍청한 ■■■들아!”
“이 ■■■가……!”
백사검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그와 동시에 그의 검 끝에서 검기가 줄기줄기 뻗치며 산과 흙, 풀과 나무를 마구잡이로 할퀴었다.
콰콰쾅!
우르릉!
그때 엇나간 검기를 얻어맞은 돌들이 우르르 미끄러져 길을 덮치기 시작했다.
* * *
“이쪽으로!”
련의 눈동자가 기이한 별빛을 반짝이며 이리저리 움직였다. 얼마 달리기도 전에 산속에 난 길은 끊겼고, 아이들은 나무뿌리와 풀, 돌부리에 차여 점점 더 걸음이 느려졌다.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이글거리는 불빛이 보였다. 산불이 아직도 가까이에 있었다.
“왼쪽…… 왼쪽으로!”
눈동자는 따끔거렸지만 숲속에서도 길을 찾아낼 수 있다.
련은 조금 전부터 눈이 따끔거리던 것이 홍린을 내보내던 날 느꼈던 통증과 똑같다는 걸 기억해 냈다.
‘홍린……! 이제 용이 된다고 뭐라고 하지 않을게!’
“이제 괜찮아요.”
숨이 턱까지 닿도록 달렸을까, 주위를 둘러보던 화륜이 둘을 잡아 세우며 말했다.
눈앞에는 얕은 개울이 흐르고 있었다. 잠깐 숨을 돌린 련은 개울물에 손을 넣고 휘저었다.
“여기서 물 좀 마시자.”
“마셔도 되는 물이에요?”
“응, 그렇게 됐어.”
화륜은 더 의심 없이 손으로 물을 퍼 올려 목을 축였다.
단목성도 백련도 나란히 정신없이 물을 마시고 겨우 자세를 추슬렀다.
련은 냇물을 좀 더 정화해 주었다.
혈귀들의 불꽃이 산을 태우자 산속의 영기가 우선적으로 련에게로 빨려 들어오고 있었다. 이대로 두면 혈귀들한테 잡히기 전에 산신령이 될 판이었다.
하지만 넘치는 영기를 돌려주려는 마음만은 아니었다.
불탄 산이 후일 스스로 회복할 때 힘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여기서 누군가…… 뭔가가 승천한다고 해도…… 홍린이랑 친하게 지내줘…….’
잠깐 숨돌리는 틈을 타 멍하게 생각만 하던 련은 눈앞에 다가오는 나뭇잎을 보고 놀랐다.
아이 손바닥만 한 나뭇잎을 오목하게 접어서 물을 뜬 화륜이 내미는 것이었다.
“누이도 빨리 마셔요.”
“어어…….”
입가에 물을 대자 꿀꺽꿀꺽 넘어갔다. 련이 다 마시자 화륜이 한 번 더 떠 주었다.
불길 속을 헤치고 나와서 한참을 쫓기듯 달리다 겨우 찬 냇물을 마시자 몸의 구석구석 핏줄 사이사이로 맑고 차가운 기운이 스며드는 듯했다.
“련아야, 괜찮아? 힘들면 내가…… 업어 줄 수도 있어. 넌 아직 연약하니까.”
주먹을 쥐었다 펴 보면서 자신의 힘을 가늠해 보던 단목성이 굳게 결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련은 그 진지한 얼굴을 보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니야! 그 정도는 아니야.”
련이 괜찮다는 생각이 들자 그제야 마음이 놓였는지, 단목성이 다른 쪽을 돌아보았다.
“……어머니는…… 어머니는 괜찮으실까?”
그렇게 말하는 단목성의 표정이 창백했다. 련은 힘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없으니까 오히려 마음껏 싸우실 수 있을 거야.”
지난 일주일간 일취월장했던 건 천랑대 무사들이나 표사들만이 아니었다.
평생을 동생과 오라비 사이에서 부대끼며 살아온 그녀였다. 그 동생이 조카의 말을 경청하며 성장하는 걸 보고서 그녀도 가만있지 않았다.
거기다 천랑대의 무사들도 함께 있으니 분명 괜찮을 것이다.
그래도 걱정을 완전히 감출 수는 없어서, 련은 단목성의 눈을 피해 산허리를 돌아보았다.
산등성이를 타고 악귀의 혓바닥처럼 날름거리는 불길이 보였다.
무사들이 무사히 빠져나온다고 해도 산이 전부 불타는 건 끔찍한 일이었다.
탄식을 삼키며 옆을 보자 단목성 역시 걱정과 두려움을 애써 갈무리하고 있었다.
련은 돌연 단목성을 꼭 끌어안았다.
자신에게는 경험이 있다. 그동안 받은 것이 있고 본 미래가 있고 가진 힘이 있다.
누군가 련에게 다정하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련은 자신이 그럴 수 있는 이유를 알았다. 자신에게는 힘이 있고 이유가 있으니까.
하지만 단목성은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