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9)화 (199/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199화

둘의 검초가 한 호흡에 수십 번 변화하며 빗방울들을 모조리 튕겨 내고 곡주의 심장과 목을 노리며 매섭게 달려들었다.

따다다당!

그와 동시에 곡주 역시 그 수십 번의 변화를 모두 튕겨 내며 여유 있게 뒤로 한 발짝 뛰어올랐다가 도를 휘둘렀다.

“크으읏!”

흑담이 양손으로 검을 들고 도를 막는 사이에 백담이 곡주의 뒤에서 찌르는 것을, 곡주가 몸을 젖히며 피했다. 걸친 장삼의 앞섶이 살짝 베였으나 살갗에 닿지는 못했다.

세 사람의 무기에 튕겨 나간 빗방울이 마치 나무에 화살처럼 박혀 상처를 냈다.

화륜은 이쪽으로 날아오는 빗방울들을 손으로 쳐 내며 곡주와 흑담, 백담의 싸움을 무심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파바바밧!

빗방울을 밟고 떠오른 흑담이 검을 위에서 내리치고 백담이 아래에서 찔러 넣는 것을, 곡주가 양손을 팟 펼쳐 기막으로 막아 냈다.

콰아앙!

콰가가강!

기막과 내력을 실은 무기가 격하게 부딪치며 천지가 진동했다.

그 열기에 빗물이 증발하고 쏟아지기를 반복하며 수증기를 뿜어냈다.

그 수증기가 걷히는 동안 세 사람은 잠깐 소강상태에 돌입했다. 멀리서 낙뢰가 번쩍였다.

“재미있는 짓을 하는구나.”

곡주의 말과 동시에 흑의인들이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줄을 맞춰선 흑의인들이 주변을 빼곡히 감싼다.

조금 먼 곳에는 활을 든 궁수들이 그들을 빙 둘러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모두 단 한 사람, 혈라곡 곡주를 노리고 있었다.

“설마 본좌가 올 줄 알았더냐? 남들 모르게 준비했다 여겼거늘.”

정말 모르게 준비하기는 한 듯했다. 흑담과 백담도 단목세가의 뒤를 따라다니지 않았다면 몰랐을 터다.

“마천교에서도 장로인 우리를 수행할 인원이 이걸로 되겠느냐? 약소하게 나왔더니 너를 만나는구나!”

혈라곡 곡주가 앙천광소를 터뜨리더니 돌연 웃음을 뚝 그치고 흑담과 백담을 바라보았다.

“너희는 언제까지 네 교주의 내공 단지로 살아가려 하느냐?”

“이놈이 할 말이 없으니 간계를 쓰느냐?”

곡주가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며 말했다.

“교주가 교도들에게 힘을 나눠 주지는 못할망정 아랫것들의 힘을 흡수해 강해지다니, 그거야말로 언어도단 아니냐.”

“교의 일에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입을 놀리느냐! 그러는 너는 한 호흡에 이 갑자의 내공을 얻을 수 있다는 비약을 동네방네 파락호들에게 뿌려 대고는 그놈들이 미쳐 죽어 가는 꼴을 구경만 하느냐?”

“그걸 제 것으로 만드는 정도의 노력은 해야지.”

“어리석은 우민을 보고 계도하지는 못할망정 악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어 놓고서 알아서들 기어 올라오라고 하느냐? 네가 바로 사(邪)요 마(魔)이며 악(惡)이다!”

흑담이 버럭 외쳤다.

혈라곡의 혈귀들 대부분은 노력 없이 힘을 탐하던 파락호들이었다. 남을 억압하고 파멸시키고자 했던 욕망의 집결체.

그러나 그들 중에는, 누군가 바른길을 한 번이라도 보여 주었다면 그쪽을 돌아볼 수도 있었던 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혈라곡에 들어가기 전으로 돌아올 수 있는 자들은 없었다.

그들이 얻은 힘은 그들을 미치게 했고 피를 탐해야만 하는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다.

대가 없이 얻을 수 있는 힘이 이 세상천지에 있을 턱이 없건만…….

“너희가 본좌에게 이 세상 거창한 것을 다 안겨 주는구나. 그러나 너희만 할까? 믿음을 모두에게 증명치 못하면 교주의 손에 죽어도 항변할 수 없고, 재능이 기대에 미치지 못하면 얼마나 멀리서 모든 걸 버리고 왔다 해도 돌려받을 길 없으니 이리 잔혹할 수가 있나!”

곡주의 목소리가 점점 크게 울렸다.

“백도맹이라고 고결한가? 방계로 태어나면 죽을 때까지 가문의 중심에 닿지 못하고, 어려서 눈도 못 뜰 때 장문인에게 선택받지 못하면 일평생을 평제자로 살아야 하니 그건 또 공명정대한 거란 말이냐?”

“그래서 네가 공명정대한 무림을 만들겠다는 말이냐?”

“그래!”

그 외침이 마치 우뢰처럼 산속에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빗소리마저 뚫고서.

그리고 다시 번쩍이며 어딘가에 낙뢰가 떨어졌다. 낙뢰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차라리 천하를 발아래 두고 싶다고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냐!”

“네놈! 본좌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고 너의 우매함을 떠넘기지 말지어다!”

곡주의 노성에 몇몇 무사들이 피를 토했으나 백담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무림을 피로 씻어 내리고 그 위에 새 뜻을 세우겠다는 마두가 너 하나만 있었겠느냐? 그들 모두 그 피로 몰락했느니라!”

“너희에겐 아무 죄가 없는 척 잘도 지껄이는구나!”

“우습다, 혈귀야. 우리한테도 있었으니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본 교를 일러 중원 놈들이 마교(魔敎)라 부른 적이 없지 않거늘 그걸 모른 체할까?”

“너희는 수치심도 없느냐?”

곡주가 기가 막힌단 얼굴로 묻는데 흑담이 중얼거렸다.

“사실 수치심을 모르는 건 백도맹이지. 자기네들도 중원 무림 일통해 보겠다고 덤빈 적이 한두 번이 아니면서 우리만 마교 운운하다니…….”

“맞다! 그게 무슨 백도맹이냐? 백로가 슬피 울겠다. 마도맹(魔道盟)이지, 마도맹.”

“새까만 흑천련 놈들도 말이야. 은근슬쩍 묻어가려고……. 그놈들도 마천련(魔天聯)이야, 마천련.”

흑담과 백담이 투덜거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온기 하나 남지 않은 냉혹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말했다.

“해서 네놈이 이 중원의 질서를 오늘 당장 새로이 세우려 여기에 온 것은 아닐 것이고. 무엇을 하러 예까지 온 것이냐?”

“네 뒤에 선 아이들을 내놓아라. 하면 너희를 오늘은 살려 줄 것이니!”

순간 흑담과 백담에게서 폭발할 것 같은 살기가 고요히 치솟았다.

“아이를 데려가서 무얼 하려고?”

“네가 관여할 일이 아니니 내놓고 꺼지거든 목숨만은 건질 수 있을 터!”

“피빨이 놈아. 여기서 이만 죽어 민초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게 어떻겠느냐?”

“너희야말로 이만 모두 죽어 새 질서의 반석이 되거라!”

그리고 때를 맞춘 것처럼 다시금 공방이 시작되었다.

촤촤촤촤!

우르르릉!

빗방울들 사이로 낙뢰가 번쩍번쩍 내리꽂히고, 한발 늦은 천둥소리가 맹수의 울음처럼 쩡쩡 울렸다.

칼과 칼이 부딪치고 비에 젖은 옷자락이 격렬하게 춤췄다.

빗방울을 밟고 뛰어오른 세 사람이 격돌했다. 비는 끝없이 쏟아지고 빗물에 피가 섞여 붉은 비가 내렸다.

가가가각!

검과 검이 질기게 부딪치며 소름 끼치는 소음을 냈다.

칼끝에서 검기가 줄기줄기 뻗치며 불꽃과 증기를 연거푸 뿜어냈다.

잔혹한 살초가 뒤섞여 기파를 방출하고, 흙과 바람 그리고 빗방울과 나뭇잎이 칼날이 되어 주위를 할퀴었다.

콰과가강!

천둥소리가 산을 깨부술 듯 울리며 낙뢰에 시야가 번쩍였다.

새하얀 빛이 모두의 눈을 메우는 사이에, 곡주가 흑담과 백담의 공격을 몸으로 기꺼이 받아 내며 다른 쪽으로 검을 날렸다.

쐐애애액!

바람과 빗방울을 가르고 날아간 칼은 정확하게 화륜을 노리고 있었다.

“안 돼!”

“막아야 한다!”

곡주가 제 몸을 신경도 쓰지 않고 거길 노릴 줄 몰랐던 흑담과 백담이 비명처럼 외쳤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까지 닿지 못한 그 순간, 바로 지근거리에서 낙뢰가 내리 찍혔다.

콰과과광!

그 직후 천둥소리가 세상을 깨부술 듯 울려 퍼졌다. 모두가 잠시간 눈과 귀가 멀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는 천천히 밝혀졌다. 곡주가 날린 검에 낙뢰가 꽂히며 산산이 터져 나간 것이다.

날카로운 파편이 주위를 훑었으나 화륜에게는, 그리고 화륜의 뒤에는 한 점도 닿지 못했다. 화륜이 손을 휘둘러 모두 튕겨 낸 것이다.

“하하…… 하하하! 아하하하하하!”

곡주가 웃기 시작했다.

흑담과 백담의 공격에 당해 온몸에서 피를 흘리며, 터져 나간 검의 파편이 스친 눈 아래가 쭉 찢어진 채.

처음에는 호쾌한 웃음이었던 것이 나중에는 점점 커지더니 이내 산속을 쩌렁쩌렁 울렸다.

흑의인들 가운데 몇몇이 귀에서 피를 흘렸으나 그들 중 누구도 흔들리지는 않았다.

“누군가 했더니 너였구나, 바로 너였어! 인연이 이다지도 깊구나! 하하하! 마천교도들아, 개 밥그릇으로 후계자를 찾아다닌다며 내 너희를 비웃었건만 이제 보니 그것이 제법 용하지 않으냐.”

“이놈이 지금 교의 신물을 모욕하느냐!”

흑담과 백담이 노호성을 지르며 검을 놀렸다.

곡주는 무기를 잃기도 했으나, 확연히 그 전보다 움직임이 둔해졌다. 날붙이를 손발로 쳐 내고 반격하고 있으나 공격은 물렀고 움직임은 느렸다.

그 순간 다시금 낙뢰가 꽂히며 세 사람 사이를 벌렸다.

그들에게서 조금 떨어진 나무 위에 올라선 곡주의 미소가 짙어졌다.

“지신침(指神針)이 가리키는 것이 무엇인지는 알았으니 되었다. 하나 아직 때가 아니로다. 아쉽구나, 아쉬워. 너무나 아쉬워…….”

그렇게 말하는 곡주는 화륜을 보다가 고개를 들고 주위로 시선을 옮겼다. 마천교의 사람들이 아니라 좀 더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곡주가 화륜이 선 나무로 한 걸음 다가가기가 무섭게 백담이 화급히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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