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00화
“쏴라!”
“잡아라!”
쐐애애액!
그와 동시에 살기 어린 화살들이 일시에 날아들었다.
곡주가 팔을 휘저었다. 바람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모든 화살이 추풍낙엽처럼 우수수 떨어졌다.
곡주가 빙그레 웃었다.
“너와는 참으로 인연이 깊구나. 이리 될 줄 너도 몰랐겠으나…….”
그와 동시에 곡주가 뛰어올랐다. 빗방울을 밟으며 점점 높아지다 순식간에 그 모습을 감추었다.
“조를 나누어 일부는 저자를 추격하고 일부는 자리를 지킨다!”
“존명!”
* * *
쏴아아아아.
천둥소리는 희미해져 갔으나 비는 계속 쏟아지고 있었다.
련은 화륜의 손짓 한 번에 멀찍이 떨어져 서는 두 노인과 그보다 더 멀리 떨어진 곳에 일제히 부복하는 흑의인들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방에서 폭우가 쏟아지고,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있는데도 단둘이 있는 것처럼 숨 막히게 조용했다.
화륜은 련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련의 머리카락이며 옷자락에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깨진 장신구 부스러기들이 묻어서, 이 어둑한 숲에서도 빛을 반사해 반짝반짝 빛나는 듯했다.
련 혼자만 은하수 위에 앉아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너…… 어디…… 가?”
“가야죠.”
“어디로?”
“마천교로.”
여기까지 왔는데 못 알아볼 리가 없었다.
련은 이마를 세게 누르고는 목소리를 한껏 죽여 외쳤다.
“내가…… 내가 너 종교 관련해서 관심 가지는 거 싫다고 했잖아!”
“모태신앙 같은 거라고 생각해 주면 안 될까요?”
련은 이 말만은 하고 싶지 않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너…… 넌 부모님 누군지 모른다며!”
“…….”
“…….”
“진짜, 여기서, 지금 이때 그런 말을 한다고요?”
련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새빨개졌다.
“나도 그런 말 하고 싶지 않았지만! 모태신앙이라는 거 거짓말이잖아!”
그와 동시에 련의 머릿속에 많은 것이 지나갔다. 소년의 천재성이라고 생각했던 것, 말이 잘 통하기에 마음을 놓았던 것, 그리고 그저 믿었던 것들.
순간 련이 어지러워져서 이마를 짚고 있자 화륜이 놀라서 부축했다가, 코앞에서 불타듯 반짝이는 별이 맹렬히 떠오른 련의 눈동자와 마주했다.
련이 화륜의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너 아기 아니지! 아닌 거지! 아니구나! 아니었어! 내가 아닌 줄 알았어!”
“알기는 무슨. 아기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는데 모르더니. 아니, 그리고 나만 아닌가? 누이도 아기 아니잖아요!”
“나도 다 컸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 너 사실 몇 살이야!”
“어…… 실제로는…….”
화륜이 숫자를 셈하려는데 련이 황급히 손을 들어 화륜의 말을 막았다.
“아니아니, 말하지 마. 생각해 보니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어쨌거나 내가 두 살 많으니까.”
“어떻게 이 두 살은 죽었다 깨도 엎을 수가 없네…….”
화륜이 한탄했다.
쏴아아아아.
그사이에 잠시간 침묵이 맴돌며 빗소리만 주위를 채웠다.
련은 조금 전까지 소리쳤던 게 거짓말인 것처럼 울 것만 같은 얼굴로 화륜을 쳐다보았다.
“그래서 지금…… 다시 마천교로 가겠다고?”
“네.”
“언제부터 그럴 생각이었는데?”
“처음부터요.”
“그럼 왜, 우리 세가에는 왜…….”
“만두 나눠 줬다는 애 얼굴이나 볼까 했다가 그만.”
화륜이 신세 한탄이라도 하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련은 그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곡주가 자리를 뜨던 그 순간을 떠올렸다.
화륜은 그 검을 피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가지 마.”
련이 이렇게 솔직하게 붙잡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지 화륜이 눈을 깜박였다.
“……왜요?”
“여기서 마천교 본거지까지 만 리는 가야 해! 이렇게 다쳤는데 어떻게 가려고. 어쩌려고. 그리고 가서도…… 가서도 어떡할 거야. 지금 소교주로 가는 것도 아니잖아. 거긴 후보들 모아 놓고 무섭게 군다며.”
“다 별거 아녜요.”
한 번 해 봤으니 어련히 알까마는, 련의 표정이 울 듯이 일그러졌다.
“아픈 건 한 번 하나 두 번 하나 똑같이 아픈 거야. 그냥 가지 말고 여기…….”
그러나 련의 말은 계속되지 못했다. 화륜이 덤덤하게 대꾸했기 때문이었다.
“만인지상의 자리를 버리고 계속 여기서, 하인으로 살라고요?”
‘원래 전부 제 것이었던’이라는 말을 삼킨 채였으나 련도 화륜도 모르지 않았다.
련은 순간 입을 벌렸다가 천천히 다물었다.
그의 말이 옳은 것도 같았다. 힘들다는 건 자신의 주장이다. 정작 당사자는 괜찮다는데 자신이 붙잡는 것도 이상한 일 같았다.
그를 붙잡아서 더 대단한 걸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줄 수 있는 건 기껏해야 단목세가의 양자 자리, 아니면 좋은 문파의 제자 자리일 뿐이다.
붙잡으려던 손도 천천히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래…… 그래도…….”
같이 있으면 즐겁고 재미있으니까 계속 함께하자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자신이 느끼는 즐거움도 재미도 어쩌면 거기에 깃들었을 작은 행복도, 지금 화륜의 등 뒤로 도열한 저 많은 이들의 충성에 비할 수는 없을 것이었다.
어쩌면 화륜은 그간 그렇게 즐겁지도 재미있지도 행복하지도 않았을지 모른다.
그 순간 화륜이 고개를 들고 조금 먼 곳을 흘끗 바라보았다가, 흑담과 백담을 돌아보곤 고갯짓했다.
흑담이 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내더니 불을 붙였다. 곧 이 빗속에서도 꺼지지 않는 빛 덩어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가 펑 소리를 내며 터졌다. 위치를 알리는 섬광탄이었다. 멀리서 섬광탄이 하나 더 피어올랐다.
화륜은 그 모습을 확인한 뒤 련을 나무 기둥에 기대게 해 주고 그대로 일어났다.
련을 바라보며 손을 쥐었다 폈다 했지만, 화륜은 더 이상 련의 옷을 여며 주지도 머리카락을 넘겨 주지도 않았다.
“모르는 사람한테 너무 잘해 주지 말고요. 만두 나눠 주는 것도 작작 해요. 또 괜히 엄한 놈 꼬일라.”
그렇게 말을 남긴 화륜은 빗속으로 천천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정말…… 정말 갈 거야? 여기 있겠다고 했잖아…… 가면 꿀밤 맞는다! 약속 어기면 찹쌀떡 백 개 먹기로 했잖아!”
련이 비에 젖은 목소리로 외쳤지만 화륜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륜아야!”
쏴아아아아!
빗소리가 련의 목소리를 삼켰다.
백담이 흑의인 한 사람에게서 우산을 받아 펼치곤 황급히 그에게 다가와 씌워 주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뒤돌아보지 않고, 처음부터 아무도 없었던 것처럼 사라졌다.
그리고 빗소리와 함께 련이 나무 아래 남겨졌을 때.
멀리서 사람들이 다급하게 달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단목세가와 모용세가 사람들이었다.
“련아! 련아야!”
“련아야!”
단목천기는 련이 있는 곳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련의 주위가 온통 반짝거렸다.
가까이 다가가자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부서져 모래알이 된 보석들이 련의 주위에 묻어 있었다.
단목천기는 황급히 련의 상태를 살폈다.
뺨에는 생채기가 나 있고 발목을 크게 다치긴 했지만 그 밖에 다른 부상은 눈에 띄지 않았다.
“할아버지…… 전…… 괜찮…… 괜찮아요.”
손녀딸의 표정이 이상했다. 울음을 참으면서도 웃는 것 같은. 그사이에 단목현요와 단목성이 다가와 오열했다.
모용세가의 무사들을 이끌고 한발 일찍 마중을 나왔던 모용취려가 크게 숨을 몰아쉬고는 일사불란하게 주위를 지휘했다.
단목천기가 겉옷을 벗어 련에게 덮어 주고는 련을 조심스레 안아 올렸다.
그러곤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주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 있다가 일시에 사라진 것 같았다.
항시 손녀의 곁에 있던 소년 역시 사라졌다는 것을, 단목천기는 눈치챘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 *
모용세가는 때아닌 손님들로 시끌벅적했다.
혈라곡이 다시 창궐했다는 명백한 증거를 마주한 것은 비극적이었으나 그들 수백을 일거에 섬멸한 것은 엄청난 쾌거였다.
“어찌 미리 마중을 와 줄 생각을 하셨소.”
빗속에서 혈라곡의 잡귀들을 함께 토벌하고 련과 단목성을 찾는 데 도움을 준 것은 예정보다 이른 시기에 마중을 나온 모용세가 무사들과 모용취려였다.
“예까지 오는 데 천랑대까지 함께한다고 하니…… 염려하는 바가 있는가 보다 하였소.”
단목천기가 있는데도 천랑대를 굳이 동원한다는 것은 경계하는 게 있다는 말이었다.
“감사드리오.”
“내 벗의 자식과 손녀들 일인데 당연한 일이지.”
모용취려는 그렇게 말하곤 잠깐 침묵했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다시 창궐하는가.”
목적어는 없었으나 뜻하는 의미는 분명했다. 단목천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이번 그들의 움직임은 그들에게도 적지 않은 부담이었을 것이오. 동원된 인원이 모조리 박살 났으니 한동안은 잠잠하겠지.”
“이 ■■ ■■■들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군. 예전에도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
“세상에 해악을 끼칠 생각만 하는 자들의 마음을 어찌 헤아리겠소?”
“그나저나 마천교에서 다녀간 눈치인데…… 혹시 짐작 가는 바 있으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