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01화
흔적만으로 마천교가 다녀간 걸 알아본 첫 번째 이유는 그녀가 혈라곡이 들끓었던 수십 년 전 그들과 함께 최전선에 선 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천교도들이 숨기지 않고 섬광탄을 두 개나 쏘아 올렸기 때문이었다.
그 덕에 련과 쓰러져 있던 선운신의를 빠르게 찾아낼 수 있었다.
“소교주 후보 탐색 중인 것 같았소.”
“아, 그럴 때라고 했었지…… 그렇다곤 해도 그들이 혈라곡과 굳이 다툼을 벌인 일은 놀라운데…….”
약자에게 단숨에 힘을 주는 혈라곡의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쉽게 사람들을 끌어들였고, 한때 그들은 중원을 반쯤 점령하다시피 했다.
마천교가 움직인 것도 그래서였다. 자신들의 천산까지 피로 물드는 것을 용납할 수 없어서 뿌리를 뽑는 일에 동참한 것이지 중원을 수호하고자 했던 것이 아니다.
그런 만큼 이번 일에 직접 연루된 것도 아닐 마천교 장로들이 굳이 혈라곡의 혈귀, 그것도 곡주급으로 보이는 강맹한 자와 맞붙은 건 다소 의외였다.
“소교주 후보가 이 사달에 얽힌 건가?”
모용취려는 중얼거리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어쨌거나 마천교 장로들은 이런 일에서는 의외로 믿음직한 상대였다.
불굴의 믿음이 있는 이들이다 보니, 오히려 흑천련이나 백도맹 이들보다 혈라곡의 유혹에 강한 면모가 있었다.
특히나 장로쯤 되면 노력 없이 강해지는 혈라곡의 수법을 오히려 극도로 혐오하곤 했다.
“그나저나…… 련아는 좀 어떻소?”
“…….”
단목천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단목성과 단목현우가 눈물을 멈추지 못한 채 련이 누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련은 중간에 한번 정신을 차렸다가 다시 잠들어 사흘째 깨지 못하는 중이었다.
“……선운신의께서 하신 말씀으로는 심력이 다해 쉬는 중이라고 하니, 곧 일어날 수 있을 테지.”
선운신의는 깨어나자마자 스스로의 몸을 처치하곤 차근히 주위의 상황을 파악했다.
혈라곡이 창궐했다는 걸 알아채고는 가슴 답답해하다가 빙설언이 완치되었다는 얘기를 듣고는 누구보다 놀라며 기뻐했다.
그러면서 단목세가의 어린아이가 다친 걸 손수 챙기며 진료해 주었다. 자신과 제자를 구해 주었으니 당연한 것이라며.
— 계속 쫓기다 높은 곳에서 떨어졌으니…… 그럼에도 몸의 상처는 발목의 상처 외에는 중한 것이 없고, 다만 온 힘을 짜내 이번 사태에 맞서 싸우느라 마음이 다소 지친 듯하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일어날 거라는 말이었다.
그러나 당장 련이 눈을 뜨지 못하는데 그런 말에 안심이 되겠는가.
단목현우와 단목성은 눈물에 퉁퉁 부은 얼굴로 련의 곁을 떠나지 못했다.
“심지가 곧고 강한 아이이니 곧 일어나리라 믿소.”
단목천기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모용취려는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날 때까지 내 집이라 생각하고 편히 머물다 가시오.”
* * *
련은 천천히 눈을 떴다. 목은 마른 논밭처럼 갈라진 느낌이었고 눈은 뻑뻑했다.
잠깐 여기가 어디인지 멍하게 고민하던 련은 차분히 생각을 정리했다.
‘혈라곡 혈귀들한테 쫓기다가, 불이 났고…… 숲을 빠져나와서…… 떨어졌다가…….’
화륜이 떠났다.
련은 잠깐 숨을 멈췄다가 천천히 몰아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화륜이 떠나고 가족들이 자신을 찾은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아마도 여기는 모용세가…….
“련아야! 련아야, 일어났느냐? 이 숙부 얼굴을 알겠어? 응?”
“련아……, 흐읍, 련아야!”
련은 화들짝 놀라서 눈만 크게 떴다. 이미 얼굴이 눈물로 다 젖은 단목현우가 손에 든 것도 다 내팽개치고 후다닥 다가와서 련의 얼굴을 쓸었다.
그사이에 단목성이 눈물을 꾹 참으며 얼른 하인을 보내 의원에게 기별을 넣었다.
“수, 숙부. 알다마다요. 숙부하고 성아랑…… 다른 가족들도 다 괜찮아요?”
“다들 괜찮고말고! 네가 일어나지 않아서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느냐? 그 절벽에서 굴러떨어지다니, 아이고, 이 숙부가 모자라서…….”
단목현우가 엎드려 딸꾹질까지 하면서 우는데 단목성이 그런 숙부를 옆으로 밀어내며 련의 앞에 섰다.
“내…… 내 뺨을 때려도 돼.”
“뭐?”
단목현우는 울고 단목성은 바르르 떨면서 이상한 말을 했다.
련은 뜨악한 표정으로 단목성을 바라보았다.
“무, 무슨 소리야!”
“내가 널 지켜 줬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
“아니, 아니…… 아니!”
그 순간 단목현요가 들이닥쳤다. 가장 가까이에 있다 소란을 듣고 달려온 모양이었다. 단목현요를 보자마자 련이 다급하게 말했다.
“고모! 고모, 숙부랑 성아 좀 말려…… 고모! 고모! 울지 마세요! 아, 아니, 이게 무슨…… 아니…… 할아버지…… 울지 마세요……. 제가 미안…… 잘못했어요…….”
련은 말끝을 흐리다가 머리를 싸맸다. 어느새 온 가족이 몰려와서 울고 있었다.
한발 늦게 들어선 선운신의가 그 모습을 보고 껄껄 웃으며 우는 단목현우의 등을 두드려 주곤 련의 손목을 부드럽게 붙잡고 진맥했다.
“보자…….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네? 네……. 기지개를 켜고 싶은 느낌 정도?”
“오래 누워 있어서 그런 게지. 맥도 안정적이고, 안색도 좋구나. 발목의 상처도 다 나았고. 흉은 좀 졌지만 자라면서 희미해질 것이니 걱정할 것 없다.”
“무, 흡, 무인에게 흉은 자랑입니다!”
단목성이 눈이 빨개져서는 외쳤다. 눈물을 꾹 참는 모양이었다.
선운신의는 그런 단목성을 보고 흐뭇하게 웃고는, 우는 어른들을 양 떼 몰듯 밖으로 몰았다.
“눈 뜨자마자 사람들이 이리 몰려들어서 아이를 두고 울기만 하면 아이 마음이 어떻겠소? 일단 다들 물러가시오.”
“그래, 너희들은 다 나가도록 해라. 가서 련아 먹을 죽이라도 준비를 시키고…….”
“무월검 어르신. 어르신도.”
“아…… 아니 나는 아이 할아비인데.”
“허허.”
결국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모두 련의 방에서 쫓겨났다.
겨우 방이 조용해지고, 련은 처음 보는 선운신의의 얼굴을 흘끗흘끗 살폈다. 그도 련을 살피고 있었다.
“이제 보니 우리가 나란히 절벽에서 구른 동지로다.”
“네?”
련은 처음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다가 곧 작게 웃었다. 선운신의도 혈귀들을 상대하다가 절벽에서 굴러떨어졌던 것이다.
“그렇지? 너와 내가 참으로 운이 좋다. 그 높은 데서 구르고도 무탈히 일어났으니.”
정말로 있는 행운 없는 행운을 닥닥 긁어다 썼기에, 련은 진심으로 동의한 얼굴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 달리 아픈 데는 없느냐?”
“네! 엄청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해요. 배는 엄청 고프지만…….”
“정말 어디 아픈 데는 없느냐?”
“네네, 발목도 이제는 하나도 안 아프고요.”
련이 발을 앞뒤 좌우로 까딱까딱하며 방긋 웃었다.
그런데 선운신의가 재차 물었다.
“정말로 어디 아픈 데 없느냐?”
“어…….”
련은 눈만 깜박였다.
선운신의는 련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고는 재차 맥을 짚으며 말했다.
“높은 산이나 깊은 숲, 깨끗한 연못이나 냇가에 가면 불편해진 적 없었느냐?”
련의 눈이 크게 뜨였다.
“사람이 많고 번잡한 곳에 가야 오히려 몸이 더 편해지지 않던?”
련의 얼굴이 굳는 걸 보고서 선운신의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너를 추궁하거나 뭔가를 알아내려고 하는 게 아니다. 다만 옛날에 서책을 본 일이 있는데…….”
“서책이요?”
“수십 년 전 유명 의각이 멸문당하면서 유출된 연구 같았는데…… 짐승들 중에서도 오랜 세월 살아남아 영물이 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신묘하게도 날 때부터 영험함을 타고나 영물이 되는 것들도 있지 않으냐? 사람도 그와 같이 태어나길 영물로 태어날 가능성이 있지 않나…… 하는 연구였다.”
“……!”
련은 너무 놀란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애써 눈만 깜빡였다. 선운신의는 자신이 봤던 서책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연구 방법에 대한 책은 보지 못했지만 결론은 실패였다고 했다. 그런 힘을 타고난 아이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대개는 오히려 병약했다지.”
선운신의가 읽었던 글을 곱씹으며 안타까움에 끌끌 혀를 찼다.
남들이 죽도록 원하는 힘을 타고났는데 도리어 그 때문에 힘을 펼칠 기회조차 없다는 것이.
“그런 경우의 특징이 몇 있는데……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주위에서 동식물이 잘 자라고, 악기 연주에 재주가 좋고…… 노름이나 수 싸움에 아주 능하다더구나. 사실 이쯤이면 좋은 얘기를 적당히 주워다 붙인 것 같지만 말이야.”
“네…… 에?”
“이 세상의 영험한 기운을 타고났으니 사물의 본질을 꿰뚫어 볼 수 있고, 영기가 있으니 주위에서 동물이건 식물이건 참 잘 자라는 것이지. 정작 힘을 가진 당사자는 그렇지 못했던 모양이지만…….”
선운신의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