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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02)화 (202/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02화

“악기 연주의 경우는 정확한 이유는 밝히지 못했다고 했지만 아마도 소리로 자연과 소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추측이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노름과 수 싸움의 경우…….”

선운신의가 말하다 보니 정말로 말장난으로 느껴졌는지 민망한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장기나 바둑에도 아주 능했고 노름의 경우에는 주사위 놀이, 투실솔(斗蟋蟀-귀뚜라미 싸움), 엽자패…… 무엇이든 이겼다고 하더구나. 눈을 감고 아무렇게나 골라도 반드시 이겼다고.”

련은 입술을 뻐끔거렸다.

영기를 타고난 이점 중에 하나가 노름에서 백전백승이라니…….

“물론 그런 얘기들이 모두 그냥 뛰어난 재인(才人)을 묘사할 때 쓸 수도 있는 말이라, 사실 나도 마음에 담아 두지 않았는데……. 네 기운이 지나치게 맑더구나.”

“아.”

“여느 의원들이 다 진맥한다고 알아볼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부끄럽지만 내가 의술 실력으로는 아주 부족하진 않아 알아본 것이지. 그런데 사람들에게 얘기를 듣자니…….”

련은 아이고, 하며 얼굴을 쓸어내리고 말았다. 가족들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칭찬했을 게 눈에 훤했다.

선운신의가 웃으며 말했다.

“집안 어른들 말씀이 우리 애가 바둑도 얼마나 잘 두는지 누구와 겨뤄도 질 줄을 모르고, 피리도 배운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가만히 피리를 불면 새들이 모여 앉을 정도이고, 또 무재(武才)도 얼마나 뛰어난지…….”

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련이 황급히 말을 돌렸다.

“혹시 이…… 체질을 좀 더 안정적으로 바꿀 방법이 있을까요?”

영기는 분명 엄청난 힘이고 자신에게도 도움이 되지만, 제대로 관리를 하지 못하면 자신을 해치는 힘이기도 했다.

자신의 특성에는 아직도 ‘온실 속 병든 화초’가 붙어 있었다.

그러나 선운신의가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적은 양을 조금씩 자주 방출할 수만 있다면 괜찮을 것 같다는 얘기가 적혀 있긴 했다만……. 대부분은 제어할 수 없었다고 하더구나.”

“아아아…… 혹시 그 책을…….”

“부끄럽게도 내가 도둑맞고 말았다.”

“아아…….”

“이렇게 말하고 보니 빌려주기 싫어서 둘러대는 것처럼 느껴지는구나. 정말이다, 정말 도둑맞고 말았단다.”

선운신의가 손발을 휘저으며 허둥지둥 대꾸했다. 그 모습에 련이 웃음을 터뜨리자, 선운신의가 한시름 놓은 표정으로 땀을 닦아 냈다.

“전 심하게 아픈 건 아니에요. 보석이나 장신구를 많이 달고 있으면 좀 편해지더라고요.”

“오! 그렇구나, 그렇구나! 과연, 질이 좋은 자연의 돌이 힘을 일부 저장할 수 있는 것이로구나. 잘됐다. 아주 잘됐다.”

선운신의가 박수까지 치면서 좋아하다가, 문득 걱정이 역력한 얼굴로 말했다.

“혹시 네 체질에 대해 아는 사람이 있느냐?”

“어…… 할머니랑 할아버지요.”

“나 역시 비밀로 할 것이니, 너도 비밀로 하여야 한다. 알겠느냐? 누구에게도 말해서는 안 된다. 네가 나중에 나이가 차 마음에 둔 사람이 생겨도, 그 누구에게도.”

“아…….”

“말을 해서도 안 되고 들켜서도 안 된다.”

“…….”

“네 사촌, 고모와 숙부, 절친한 벗이나 네가 키울 새와 동물에게도 말하지 말거라.”

“……알고…… 있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싶지 않았지만…….”

선운신의의 눈매에 걱정과 안쓰러움이 스쳤다.

“네 비밀은 너뿐만이 아니라…….”

“가족과 벗들도 다치게 할 수 있겠지요?”

“보물은 피를 부르는 법이니.”

“제가 잔인해지면 괜찮을까요?”

“불가능한 일에 매달리는 것은 언제나 사람을 상하게 한다.”

“그렇게까지 불가능하지만은…….”

“가족과 벗들을 위해 일생을 피바다에서 살겠다고 말하는 아이가 정말로 그런 일을 하면서 괜찮을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구나.”

련은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런 각오까지는 필요치 않다. 네 조부모가 신중한 사람임은 익히 알고 있으니, 그저 네가 남들에게 특별히 얘기를 꺼내지 않고 노름을 즐기지만 않으면 되지 않겠느냐?”

도박장에 한 번 들어갔다간 그 도박장이 무너질 때까지 따고 나올 테니 모두 기이하게 여길 터였다.

“알겠습니다! 도박 금지.”

“그래, 그래.”

선운신의는 련의 맥을 한 번 더 짚고는 말했다.

“하면…… 네 마음의 상처는 다른 것에서 비롯된 것이더냐?”

“……네?”

“오래 누워 있었던 것은 다른 것보다 네가 심력을 소모한 것이 컸다. 너의 체질이 체질이다 보니 네 내면이 그대로 몸 상태에 나타나는 듯하구나.”

“……그런 것도 진맥으로 알 수 있나요?”

“내가 서책을 도둑맞고 다니기는 해도 세상 사람들에게 신의라 불리니라.”

선운신의는 그렇게 말하고는 련과 눈동자를 마주하고 부드럽게 말했다.

“상처받고 힘들어해도 되느니라. 너를 걱정하는 다른 사람들을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네.”

련은 잠깐 망설이다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운신의가 그런 련의 어깨를 천천히 토닥여 주었다.

* * *

일어나서 건강을 되찾기가 무섭게 련은 바쁘게 움직였다.

가장 먼저 선운신의와 함께 부상자들이 모여 있는 의각에 매일같이 들르면서 신의에게 기초적인 의학을 배웠다.

련의 힘이 있으니 간단한 처치를 할 줄 알면 큰 도움이 될 거라는 얘기였다. 발목이 완전히 나은 것은 아니어서 단목성이 옆에 딱 붙어 부축해 주었다.

저녁이 되면 이번 사태를 거치며 부족함을 느낀 천랑대 무사들이 련의 거처 앞에 각자 귀중한 것들을 구해 들고서 기웃거렸다.

그 기이한 풍경에 모용세가 무사들이 신기하다고 수군거리다가, 그 무리의 가장 선두에 모용설호가 있는 걸 보고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밤이 되면, 련은 처소의 안뜰에 마련된 정자에 앉아서 멍하게 달을 올려다보았다.

화륜은 왜 갔을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지만, 틈이 나면 그 이유에 대해 연거푸 생각하게 되었다.

논리적으로는 납득되었다. 화륜도 자신처럼 시간을 되돌아왔다면…….

그가 이미 가졌던 모든 것들.

그로서는 한 번 가 봤던 길이기에 더욱 빠르게 갈 수 있는 길. 그를 기다리고 있는 세상의 빛나는 모든 것들.

그걸 마다하라고, 잘 알고 있는 길을 두고 알지 못하는 곳으로 떠밀 수는 없는 노릇이다.

거기다 그렇게 오랫동안 몸담았던 곳이니 그에게는 아마도 가족이나 다름없을 것이고, 그러니까 때를 맞추어 떠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아니, 그러면 처음부터 왜 왔냔 말이야. 만두? 무슨 만두 같은 소리야.’

아마 자신의 생일마다 뿌린 그 만두를 말하는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이 심정이 해소되는 건 아니었다.

‘나쁜 자식, 무슨 약속만 하면 빠져나갈 구석부터 만들더니 천하의 나쁜 자식…….’

돌멩이를 걷어차려다가 발목이 지끈하고 아파져서 그만두었다.

발목은 나아가고 있었지만 상처가 나빠지면 선운신의가 귀신같이 눈치채는 통에 조심해야 했다.

그의 말이 가족들 귀에 잘못 들어가면 다 나을 때까지 방에 갇혀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백련에 대한 생각까지 닿은 련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련은 정신을 차린 뒤 사라진 백련을 찾으려고 애썼다. 그 작은 고양이가 혈귀들의 피로 덮인 숲속에서 길을 헤매고 있을 걸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다리를 다친 련이 산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안절부절못하던 지난 새벽, 뒤뜰의 담벼락에 백련이 나타났다.

산불의 흔적 같은 건 전혀 없는, 새하얗게 빛나는 흰 털이 유난히 눈에 띌 정도였다.

— 백련아! 무사했구나.

— 그르릉!

련에게 폴짝 안겨든 백련은 어째서인지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이었다. 다시 담벼락으로 뛰어올라서는 좌우로 오가며 련을 바라보았다.

련은 그 얼굴을 알아보았다.

백련도 떠난 화륜이 걱정되는 것이다.

— ……따라갈 수 있겠어?

련의 질문에 당차게 고개를 끄덕였던 백련이 또 끼잉 하고 울었다.

그쪽을 따라가면 남겨질 련이 또 걱정되는 것 같았다.

— 나는 괜찮아. 하지만 백련이 너, 그쪽으로 가면…… 좀 늦게 자랄 텐데.

— 그릉!

그건 기다릴 수 있다고 힘차게 울기에 련은 결국 머리 끈 하나를 풀어서 백련의 목에 감아 주었다.

— 난 다른 친구도 가족도 있으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혹시 륜아가 괴롭히면 돌아와야 해. 알았지?

— 그릉!

백련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련의 뺨을 연신 핥아 주고 길을 떠났다.

작은 고양이는 몇 번이나 련이 있는 뒤를 돌아보다가 그제야 떠났다. 그 새하얀 모습이 아직도 눈에 밟혔다. 먼 길을 보내는 게 맞았는지도 의문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악화?”

그때 천랑대 부대주 악화가 환한 얼굴로 다가왔다. 처음 빙궁을 출발할 때에 비하면 다소 마르긴 했지만 생기 넘치는 얼굴이었다.

그의 뒤로 대원들 몇몇도 함께 왔다.

“어, 그건 뭐…… 뭐야.”

“아! 가마입니다! 아가씨 발목이 아직 낫지 않았으니까 오가실 때 저희 대원들이…….”

“…….”

“치울까요……?”

“마음만 받을게. 정말 고마워.”

“사인교가 부담스럽다면 두 명이 드는 이인교로!”

“남들이 뭐라고 하겠어!”

“누가 뭐라고 합니까?”

빙궁 사람도 아니고 먼 친인척일 뿐인 자신이 천랑대 무인들을 시켜서 가마를 타고 다닌다는 게 퍼지면?

‘온 몸에 장신구를 둘둘 감고 천랑대 무사들을 가마꾼으로 쓰기…….’

“우리 손녀는 내가 알아서 업고 다닐 것인즉, 천랑대는 손쓸 일 없다.”

련은 더욱 아득한 표정으로 옆을 돌아보았다. 단목천기가 엄한 얼굴로 천랑대 무사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니, 업는 거라면 저희도 자신 있습니다. 한 살이라도 젊은 사람이 아가씨를 업는 것이 아가씨의 그…… 승차감에도 좋지 않겠습니까?”

상대가 련의 조부라 하더라도 경쟁에서 맥없이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가 돋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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