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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03)화 (203/204)

몰락 세가의 시한부 영약 203화

련이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만, 그만! 오늘은 수련 없어.”

“예?!”

“부대주! 부대주가 괜히 가마 같은 걸 준비해서 아가씨 기분이 상하신 것 아닙니까!”

“아, 아니 이건 대주님 생각이었단 말이다! 아가씨! 저희가 가마 말고 다른 걸 준비해 올 테니까 제발!”

“아니, 너무 무리하면 안 되니까 없다고 하는 거야……. 오늘은 푹 쉬어야지.”

“하지만…….”

천랑대는 돌아갈 날이 멀지 않다 보니 련의 좋은 말씀 들을 하루하루가 아까운 눈치였다.

련은 방긋 웃으며 챙겨 두었던 종이 뭉치를 꺼내 왔다.

“그래서 쉬는 동안 생각해 보면 좋을 것 같은 걸 좀 적어 봤어.”

“헉! 낭랑비…… 큽!”

누군가 눈치 없이 말하려다가 옆구리를 얻어맞고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가마를 짊어지고 온 무사들도 가마는 반쯤 팽개친 채 눈이 초롱초롱 빛났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한 장씩 나눠 주고, 없는 사람들 것은 한데 모아서 부대주 악화에게 건네주었다.

“아가씨……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나에게도 도움이 돼서 하는 거야!”

다른 사람의 무공을 세심히 들여다보고 고찰하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경험이었다. 혼자 해야 하는 논검에 한 사람이 더 있는 것과도 같다.

거기다 돌아온 직후부터 천랑대는 살아 있는 행운 수치 꾸러미나 다름없다.

더군다나 지금 련은 뭐라도 할 게 있고 바쁜 게 좋았다.

천랑대 대원들이 종이를 보물처럼 품에 안고서는 련과 단목천기에게 꾸벅 인사하곤 몸을 돌렸다.

련은 할아버지의 얼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걱정과 사랑이 범벅된 얼굴이었다.

“……괜찮으냐?”

“네? 그럼요! 좀 놀라긴 했지만.”

곡주 얼굴을 보게 될 줄은 몰랐으니.

‘곡주의 정보도 볼 수가 없었지…….’

마치 화륜을 처음 봤을 때와 같았다.

“너무 걱정할 것 없다. 마천교의 장로들이 그를 크게 부상 입혔다 했으니.”

련은 복잡한 표정을 애써 갈무리했다. 그 장로들과 단목천기가 한때 같은 전선에서 혈라곡을 상대한 적 있다는 사실에 단목현요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어쩔 줄 몰라 했었다.

- 그놈들이…… 아니 그분들이 딸과 조카를 찾겠다고 난리를 치셔서 제가 놀라 따라갔었는데…….

따라갔다기보다는 추격에 가까웠다. 부친의 전우에게 손가락질하며 욕을 한 셈이었다. 단목천기는 껄껄 웃고는 단목현요를 칭찬했었다.

“할아버지, 제가 걱정하는 건…… 혈라곡이 뭔가를 찾아온 것 같았어요. 영단을 찾는다고 했는데, 정작 뭔지도 몰랐죠. 만약 영단이 있다는 정보를 잘못 입수해서 온 게 아니라, 그저 뭔가 영험한 기운을 쫓아 온 거라면 그게 혹시…….”

제가 아니었을까요?

련은 마지막 말을 삼켰다. 키우게 될 새에게도 말하지 말라 했던 선운신의의 말을 기억하기 때문이었다.

그건 키우는 짐승에게 마음을 털어놓는 사이 그걸 엿들을 다른 누군가를 염려한 말이었다.

단목천기의 기감을 속이고 엿들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 올 수 있는 사람은 없겠으나.

“제가 태어나던 날에도 혈라곡에서 쳐들어온 적이 있었잖아요. 그리고 경항운련에서도, 그리고 이번에도…….”

백사검이 따로 대기한 채 추적해 온 것도, 그 사달 끝에 마침내 곡주가 나타나 추적해 온 것도 자신이 있는 곳이었다.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

단목천기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혈라곡 곡주에게 목표한 것을 추적할 수 있는 기물(奇物)이 있다고 추측 중이다.”

“그자가 지신침이라고 말했어요.”

“영험한 힘이 있는 방향을 찾는 도구인가…….”

그런 것이 어찌 그의 손에 있나, 단목천기는 탄식하면서도 진중한 눈으로 손녀를 내려다보았다.

“그자가 무얼 노리고 왔든 무슨 생각을 하든 네 탓은 없음이야.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네.”

련은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었다.

“할아버지, 그런데…… 그 혈귀들이 이상한 행동을 보인 건…….”

“그 역시 찬찬히 알아볼 것인즉.”

련은 입술을 달싹이다가 다물었다. 혈귀들이 서로를 상하게 하는 건 단목천기에게도 기이한 일이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왜 자신만, 혈라곡과 두 번 마주해서 두 번이나 그런 모습을 보게 된 걸까?

한 번은 기묘한 우연이 겹쳐 그럴 수 있겠지만 두 번은?

“너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거라.”

련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곡주는 마치 그 지신침이 진실로 가리키고 있던 것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투로 떠들고는 떠나갔다.

그것이 화륜이었다는 것처럼, 앞으로 화륜을 뒤쫓을 것처럼.

화륜은 왜 그랬을까. 왜 자신의 앞을 막아서서, 왜 곡주의 추론이 맞은 것처럼 수긍하고만 있었을까.

그래서 무슨 득이 있다고?

련이 잠시간은 더 안전해지겠지만 그동안 마천교가, 화륜이 그 위험을 감내할 뿐이지 않은가.

화륜의 셈은 이상했다.

하지만 따져 물을 사람이 곁에 없었다.

단목현요는 련이 아끼던 하인 아이가 없어진 걸 알아보았다. 세가의 식구이니 당연히 수색대를 파견하겠다고 한 걸 련이 말렸다.

세가로 돌아가거든 새 하인을 구해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고개를 흔들었다.

‘손 안의 모래는 빠져나가는구나.’

언젠가 오래된 사당에서 들었던 얘기가 떠올랐다. 움켜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고 그것이 섭섭했다.

련이 누구를 생각하고 있는지 알아챈 단목천기가 련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흑담과 백담이 여기까지 와서 함께 혈귀들을 상대하다가 홀연히 사라졌다. 련의 하인도 자취를 감추었다.

그 소년의 기백이 남다름을 익히 알고 있던 단목천기는 아마도 그 아이가 장로들과 함께 마천교가 있을 천산으로 향했으리라 생각했다.

그 사실을 련도 알고 있다는 것 또한, 단목천기는 알았다.

“사람에게는 제각기의 자리가 있는 법이다.”

“……할아버지.”

“제각기 맞는 옷이 다 다르고, 있고자 하는 곳이 다르다. 정갈한 옷도 따스한 날씨도 누군가에게는 맞지 않는 법.”

련은 화륜의 앳된 얼굴을 떠올리곤 입술만 달싹거리다가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생각해 보면 화륜은 여지를 남긴 적이 없었다. 양자 입적도, 새 옷 한 벌도 받지 않으려 했다.

아주 처음부터 멀리 떠날 셈이었으리라.

자신이 화륜에게 주려 했던 가문의 이름이나 새 옷, 어쩌면 미래 같은 것은 그에겐 이미 있는 것이었다.

그는 갈 거였으리라, 어떤 말이나 정이나 손짓으로는 붙잡을 수 없었을 테다. 그 어떤 방법으로도.

그렇게 생각하자 왜인지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 때로는 어쩔 수 없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더 힘이 될 때도 있습니다.

오래된 사당에서 들었던 말이었다. 할머니를 위한 말인 줄 알았는데 자신을 위한 말이었을까.

그때 단목천기가 련의 어깨를 토닥이고는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벗들이 오려고 하나 보구나. 이 할아비는 먼저 가 보마.”

“네?”

련이 반문했지만 단목천기는 대답없이 훌쩍 자리를 떴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 처소의 담벼락에서부터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련!”

하인들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난 모용설호였다.

“이거 먹으려고 왔다.”

“어…….”

하인들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화로와 고구마를 한 바구니 들고 와서는 련의 처소 마당에 주섬주섬 내려놓았다.

“그때 맛있었잖아.”

“으응, 그랬지…….”

경항운련에서 구워 먹었던 고구마가 그렇게 맛있었나, 하고 생각을 되짚어보던 련은 은근히 눈치를 보고 있는 설호의 표정을 보고 그게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몇 호흡 뒤에 몹시 어색한 동작으로 단목성까지 찾아왔다.

“아니! 밤에 이런 걸 몰래. 해 먹으면. 어떡하니?”

“그래도 모처럼. 왔는데.”

“그럼 이번만. 불은 조심해. 우리 산불도 났잖아.”

“…….”

단목성과 모용설호가 어색한 연극을 주고받았다.

련은 그 어색함에 너무 놀라서 멍하게 바라보려다가 웃음이 터질 뻔했다.

련의 기분이 가라앉은 걸 알아채고는 둘이서 이런 일을 꾸민 모양이었다. 안색이 그리 티가 났나 싶어서 민망했다.

“그럼 한번 고구마를 구워 볼까?”

련이 웃으며 화답하자 둘의 표정이 동시에 환해졌다.

매미 소리가 맴맴 우는 여름밤이었다.

화로에서는 타닥타닥 불티가 튀며 새카만 밤에 붉은 빛을 수놓다가 사그라들기를 반복했다.

고구마를 화로에 올리며 아이들은 재잘거리기 시작했다.

“천랑대가 예전보다 훨씬 더 강해진 것 같다고 세가 사람들이 난리 법석이야. 련이 네가 한 거지?”

“으응?”

약간 부끄러워서 모른 척하려는데 단목성이 당차게 나섰다.

“그럼 누가 했겠어? 그 덕에 우리가 살아왔는데.”

“아니 그게, 성아야…….”

“빙궁은 좋겠다. 련이 궁주님 재종손이라서. 무력대 하나가 바로 성장하고.”

“흥, 좋기는 단목세가가 제일 좋지. 우린 련아가 소가…….”

뭐라고 말하려던 단목성이 황급히 말을 감추었다. 모용설호가 눈을 가늘게 뜨는데 단목성이 얼른 말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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