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외전: 그 이후에 다시 만난
#1
포근한 어둠 속에서 부유하는 느낌이었다.
이안은 몽롱한 와중에도 자신이 지금 꿈속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안녕.]
[수고 많았어요.]
[이제 더 이상 다른 게 얽매일 필요 없으니까, 마땅한 것들을 누리면서 행복하게 살아요.]
그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누군가의 입.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명백한 웃음을 담고 있었다.
누구지?
이안은 무심코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정확히는,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을 눈동자를.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던가. 분명 아니었다.
[미안했어요. 우리를 기억하지 못할 건 좀 아쉽지만, 이런 기억은 전부 없는 게 나을 테니까…….]
글쎄. 이안은, 어쩐지 그렇지 않다고 느꼈다.
목소리에 숨기지 못하고 묻어나오는 아쉬움의 손을 들어 주었으면, 하고 반사적으로 바랐다.
[잘 지내요.]
그리고 눈앞에 황금빛 빛무리가 가득찼다.
***
“이안, 일어나렴!”
짹짹, 창밖에서 울려 퍼지는 아침을 알리는 소리와 경쾌한 목소리가 섞여 들렸다.
움찔거리며 올라간 눈꺼풀 밑의 눈동자에 햇빛이 스며들었다.
“아.”
반사적으로 탄식한 이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느덧 아침이었다.
이안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꿈을 꾼 것 같은데…….”
그리고, 누군가를 본 것 같은데.
이유 모를 안타까움이 가슴 한편에 진득하게 남은 느낌이었다.
“이안, 일어났니?”
“아, 네.”
아래층에서 내려오는 모친의 목소리에 이안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활짝 열린 창문 틈새로 봄바람이 살랑이며 들어왔다.
‘……황금색.’
황금색으로 빛나는 햇빛에서 느릿하게 시선을 떼어내곤, 이내 방을 나섰다.
카르틸란 동북부, 수도 인근에 자리한 평화롭고 고즈넉한 작은 마을.
이안은 오늘도 그곳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
넓고 넓은 대륙. 그중에서도 단연 최고로 손꼽히는 루스페르투와 국경을 맞댄 카르틸란.
카르틸란은 오랜 역사 동안 루스페르투와 호각을 다투며 대륙의 패권을 놓고 경쟁했다…… 는 건 이제 옛이야기.
정확히 언제부터인진 몰라도, 두 제국 간의 경쟁은 서서히 식어가 현재에 이르러서는 비공식 평화 협정이라도 맺은 것마냥 관계가 원만하다.
특히나 루스페르투의 현 황제가 즉위한 이후로는 더욱 그랬다.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손에 꼽히는 평화주의자. 덕분에 간간히 국경 지역에서 전해지던 충돌에 대한 소식마저 뚝 끊겼다.
그리고 이건 꽤나 좋은 현상이었다.
“뭐야, 이안! 이거 재고 없다더니, 벌써 들어왔어?”
“아, 브루노 씨.”
가판대를 막 펼치던 이안은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았다.
브루노가 이안의 짐꾸러미 틈새로 보이는 주홍빛 보석을 보며 감탄했다.
“지난번에 상단 짐마차들이 루스페르투 국경에서 대거 실종되는 바람에 한동안 수급하기 어렵다 하지 않았어? 새 공급처를 찾은 거야?”
“아… 그건 아닙니다. 저희도 포기하고 있었는데, 루스페르투 측에서 사건 처리와 보상을 빠르게 해결해 주었더라고요. 덕분에 어제 막 저희에게도…….”
이안은 부모를 도와 마력석을 세공한 장신구 및 보조 도구를 만들어 파는 장인이었다.
국경 지대에 위치한 마력석 광산은 상층부와 하층부로 나뉘어 루스페르투와 카르틸란이 각각 소유했는데, 추출되는 위치에 따라 마력의 성질이 달라졌다.
이 때문에 서로에게 없는 성질의 마력석은 두 제국의 주요 교역물품 중 하나였다.
마력석을 다루기로 지정된 상단은 콜하트 공작가 휘하의 것 하나뿐.
그런 상단의 짐마차가 실종됐었으니, 이안과 비슷한 직업을 가진(사실 매우 드물다) 이들의 생계전선에서 불똥이 튄 셈이었다.
‘한동안 일이 어려울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예상외로 빨리 해결됐지.’
“어쨌든 잘 됐네. 루스페르투가 그런 일은 빠릿빠릿하게 잘 처리한단 말이야.”
브루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이안은 은은히 웃으며 가판대를 정리했다.
“어떻게 해결된 건진 몰라도, 확실히 다행이죠. 덕분에 마탑도 인력난을 면했으니까.”
“그쪽 제국엔 특이한 귀족이 있다며? 아마 이번 일도 그쪽에서 처리했을걸, 그러면.”
“특이한 귀족이요?”
이안이 가게의 창문을 열며 물었다.
“그 어느 공작가 말이야.”
브루노가 비음을 흘렸다.
“뭐라더라…… 하덴베르크?”
멈칫.
이안의 손이 잠시 허공에서 헛돌았다.
적갈색 머리카락 밑으로 빛나는 청회색 눈동자가 일순 잘게 떨렸다.
“……하덴베르크요?”
“잘 못 들어봤지? 우리 제국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은데, 루스페르투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져 있다나 보더라. 귀족치곤 특이하게 평민들을 위한 업무와 국경 분쟁 해결 업무를 맡았다던데.”
자신도 지난번에 용병 일로 루스페르투에 갔을 때 들은 소식이라며, 브루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안은 머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낯설지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분명 처음 들어보는 단어인데.
곰곰이 생각하던 이안은 이내 고개를 젓고는 브루노를 돌아보았다.
기묘한 꿈을 꾸며 시작한 날에, 신기한 소식까지 들었지만.
“찾으시던 물건, 안 가져가실 겁니까?”
어쨌거나 자신의 일상은 변하지 않을 테니까.
***
한편, 루스페르투의 하덴베르크 저택.
“결과 보고.”
자리에 앉은 레틸리아가 뻐근한 어깨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둘러앉은 이들에게서 냉큼 즉답이 튀어나왔다.
“콜하트에는 보고서 보냈고, 카르틸란 쪽 동태 및 후처리까지 우리 쪽이 건네받기로 황제와 협의했어.”
아이작이 여유롭게 웃었다.
“그 뭐냐, 원인이었던 산적들은 족쳐서 지금 지하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걸. 황제가 벼르는 중인 것 같던데.”
노벨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시큰둥이 손을 내저었다.
“카르틸란 쪽 담당자에게도 황실 입장 표명 전달했고, 향후 대책 및 대응법 어쩌구 저쩌구…… 도 처리 끝.”
에단은 이쯤 말했음 됐지 않냐는 투로 눈을 굴렸고.
“마력석 탈취 경로도 역추적해서 다 잡아냈고… 물량 완전히 카르틸란으로 넘어간 거 확인 완료래…….”
레틸리아의 옆에서 졸고 있던 하젠은 마지막 말을 남기곤 기어이 쿠션에 얼굴을 박았다.
넷의 말을 경청하던 레틸리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좋아. 잘 끝났네. 그럼 이번 일은 이걸로 완료된 걸로 황제한테도 말하면 되겠지.”
“범인 놈들 족치는 건 내가 했으니까 수고비는 배로 뜯어내.”
“그럴 거야.”
노벨의 말에 레틸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하젠의 옆에 앉아 있던 슈넨은 허허로이 웃음지었다.
“그나저나, 카르틸란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