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외전: 그 이후에 다시 만난
#2
오랜만에 들어온 카르틸란 관련 안건이었다.
그러니 자연스레 떠오르는 인물이 있을 수밖에.
슈넨의 검은 눈이 팔걸이를 향해 내려가는 걸 알아차린 아이작이 그녀를 불렀다. 슈넨.
“그 녀석이 생각나는 거지?”
“응?”
“이안 말이야.”
그 자리의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인물의 이름이었다.
노벨과 에단의 얼굴이 즉시 구겨졌다.
“젠장, 그 새끼는 또 갑자기 왜?”
“잊고 살고 있었는데 왜 또 존재감을 부각시키고 난리야.”
“슈넨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아서 꺼낸 말이다만.”
“……그럴 수 있지! 우리가 뭐 카르틸란 하면 연결점이 그 녀석밖에 더 있나!”
레틸리아는 제 형제의 한심함에 결국 눈을 감고 말았다.
슈넨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요즘 잘 지내고 있으려나 싶어서.”
“뭐, 잘 지내고 있지 않겠어? 슈넨 네가 그렇게 힘써줬는데.”
“그건 그런데… 내 기억상으로는 분명 이안의 가게가 마력석을 취급하는 공방이었단 말이야.”
최대한 빨리 문제를 해결하긴 했지만, 그래도 잠깐의 차질은 있었을 것이다.
‘일부러 적당히 특별하면서도 크게 문제되지 않을 만한 직종으로 골라줬는데, 이게 이렇게 연결될 줄이야…….’
슈넨이 시름했다. 잘 지내나 보고 싶은 마음도 들고, 이번 일로 괜찮은지도 궁금하고.
하지만 이전에 고생을 많이 한 만큼, 괜히 평화롭게 잘 지내고 있을 그의 삶에 끼어들고 싶지도 않았다.
하젠이 쿠션에서 고개를 떼어냈다.
“궁금하면 찾아가 보면 되잖아……?”
“어?”
“뭐, 대충 황제한테 핑계는…….”
하젠의 은회안 눈이 도륵도륵 굴렀다.
“뒷처리 확인 및 수습 피해자 실태 파악, 대충 그쯤 어때?”
아이작이 픽 웃었다.
“딱 좋네.”
짐 싸자고, 다들.
***
이안은 눈앞에 선 한 여자를 바라보았다.
어깨 조금 위에서 깔끔히 잘린 검은 머리칼. 그와 똑같은 색의 눈동자.
무엇보다 사납게 치켜올라간 눈매가 꼭 고양이를 연상시키는, 서늘한 인상의 여자가 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마법사인가? 아니면 용병?’
일반 귀족들이나 평민들처럼 드레스나 치마가 아닌 바지와 부츠 차림, 짧은 머리 덕에 자연스레 그쪽으로 추측이 흘러갔다.
‘그런데 왜 날……’
이안이 슬그머니 시선을 피할 때즈음.
“안녕하세요.”
여자의 차가운 표정이 사르르 녹아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에게 인사를 건네는 목소리만큼이나 따뜻한 미소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이안 씨 맞으시죠?”
“……아, 네.”
“말씀 많이 들었어요. 솜씨가 무척 좋으시다고. 그래서-”
봄의 햇살이 여자의 검은 눈동자에 맺혔다.
황금색이 점점이 검은 유리 위에 아른거렸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그 광경을 넋 놓고 응시했다. 어째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뭔가 꿈같은 순간이었다.
“꼭 다시 만나보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참 이상한 만남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잠시 저희랑 식사라도 하시죠?”
“……네?”
……이상한 만남이었다. 확실히.
***
수도의 한 유명 식당.
메뉴가 훌륭하기로 소문난 식당은 늘 그렇듯 사람들로 북적였다.
하지만 평소와 다른 점은, 가게 한쪽 테이블을 독차지한 무리.
원체 존재감이 강한 이들인 탓에, 다들 아닌 척하면서 그들을 흘끔대는 중이었다.
“이야.”
비딱하게 턱을 괴고 이안을 바라보던 노벨이 빈정거렸다.
“그 영혼 다 빨렸던 얼굴이 멀쩡해졌네. 인생 살기 편한가 보다?”
이안은 조용히 속으로 중얼거렸다. 살기 편한 건 아니어도 만족하면서 살고 있긴 한데…….
에단이 말을 받았다.
“얼굴에서 행복이 묻어나온다, 아주? 옛날엔 죽지 못해 살더니.”
당신들 같은 외모들을 잊을 리가 없다만.
이안은 제 맞은편에 주르륵 앉은 여섯 명을 바라보며 한숨을 삼켰다.
자신이 타인의 외모에 신경을 많이 쓰는 사람인가, 일순 고민할 정도로 그들에게 시선을 빼앗겼다.
머리카락이나 눈색도 보기 드문, 심지어 가지각색이었다. 거기에 휘황찬란한 외모. 하지만 가장 압도적인 건 분위기였다.
이 조용하고 고즈넉한 마을에 이런…… 대륙 어딜 가도 튈 게 뻔한 이들이 한무더기라.
이안은 조금 전 자신을 슈넨이라 소개한 여자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농담이에요. 사실 저흰 이번 마력석 공급 차질 사건 후처리 및 보상을 위해 황실에서 파견된 대응팀입니다.
-……황실 말입니까?
-네. 그래서 이번 일로 피해를 보셨을 분들의 상황도 살피고 피해 보상도 해드릴 겸 찾아왔다~ 정도라고 보시면 됩니다.
-감사하지만, 딱히 피해랄 건 없…….
-그렇게 넘어가기엔 황실의 체면이 안 서죠!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하루는 저희가 이안 씨를 풀코스! 럭셔리하게! 아주 최고급 전국 투어 루트로 모시겠습니다!
-예? 아니, 잠…!
-우선 식사부터 하시죠!
‘……높으신 분들이라시니 조금 제멋대로일 수도 있겠지.’
이안은 애써 납득했다.
‘가게 앞에서 있는 것보단 자리라도 피할 겸 따라나선 거였는데.’
별로 소용은 없는 것 같았다.
본래라면 무어라 항의라도 했을 테지만, 어째서인지 그럴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참 묘하게도.
“얘들아, 우리 지금 너무 인성파탄자들 같거든…?”
슈넨이 지끈거리는 머리를 손으로 짚었다. 오늘 컨셉은 피해 보상이란 말이다! 몇 번이나 얘기했잖아!
노벨과 에단이 마뜩찮은 얼굴로 헛기침했다.
‘……역시 저 사람이 실세군.’
이안은 빠른 파악을 마쳤다.
다행히 분위기가 어색해지려던 찰나, 미리 주문해 뒀던 음식이 차려졌다.
슈넨이 밝은 얼굴로 외쳤다.
“우, 우선 먹고 얘기하죠!”
메뉴판을 들고 여기서부터 여기까지 다 주세요를 시전한 슈넨으로 인해, 안 그래도 넓은 테이블이 순식간에 가득 찼다.
이안은 난생 처음 보는 먹음직스럽고 어마어마한 음식의 양에 순간 어안이 벙벙해졌다.
너무 과한데. 하지만 이미 노벨과 에단, 레틸리아는 지극히 자연스럽게 나이프를 들고 있었다.
결국 이안마저 천천히 식사를 시작했다.
그의 청회색 눈이 중간 중간 제 눈앞의 이들에게로 향했다.
“하젠, 일어나. 이건 먹고 조금 이따 노벨에게 업혀.”
“으응…”
“야, 누가 업어준대? 발이 있으면 네 발로 걸으라고, 좀!”
“그냥 업혀, 하젠. 이젠 터뜨리는 것도 못해서 남은 건 덩치밖에 없는데, 그거라도 써먹어야지.”
“말 다 했냐, 에단?!”
식사를 하면서도 말싸움은 멈추지 않았다. 그럼에도 서로를 참 편하게 느낀다는 게 한눈에 보였다.
아이작은 은은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고, 이내 슈넨에게 신경을 돌렸다.
“우리 멍청한 형제들은 신경 끄고, 이거 더 먹자, 슈넨.”
“알겠어.”
형제? 이안은 눈을 깜박였다. 가족이었나?
의아한 시선을 알아차린 슈넨이 킥킥 웃었다.
“가족 맞아요, 저희.”
“아.”
“운이 좋게 같은 부서에서 일하게 됐답니다! 이쪽은 아이작이고, 저기 싸우고 있는 셋이 차례대로 하젠, 노벨, 에단이에요. 하젠을 챙기고 있는 게 레틸리아고요. 소개가 조금 늦었지만……”
슈넨이 헛기침했다.
“슈넨이라고 불러주세요.”
검은 눈동자가 잠깐 다른 색처럼 보인 것 같았다면, 착각일까.
이안은 손에 들은 포크를 내려놓으며 생각했다.
***
식사는 당연히 훌륭했다.
식당을 나오자마자 끌려간 다음 장소는 다름 아닌 웬……
“바다… 입니까?”
“휴양지 하면 바다 아니겠습니까!”
……바다였다.
그것도 카르틸란 내에서 귀족들의 휴양지로 유명한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하와유 바다!
이안은 자신이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됐는지 멍하니 생각했다.
그 비싸다는 마력 게이트에 마차까지 타고 온 곳이, 휴양지…….
“오늘 여기서 하루 묵을까, 우리?”
“슈넨 네가 원한다면야. 얼마든지.”
“아이작, 황실에 연락 넣어. 인근 인간들 다 빼라고.”
“이미 넣었어, 레틸리아.”
이안은 마냥 지나칠 수 없는 저세상 대화에 가까스로 정신을 붙잡았다. 잠깐, 뭐라고?
그가 기겁하며 말리려 했지만, 이미 레틸리아는 마력석을 이용한 통신을 마친 후였다.
“1시간 내로 전부 떠나기로 했어. 그동안 잠시 기다리자.”
화사하게 웃는 레틸리아에 슈넨과 하젠이 짝짝짝 박수를 쳤다.
이안은 이제 다른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이번 일에 휘말린 자신을 위한 피해보상이라고 했는데, 왜 자신들 가족 여행에 덤으로 데려온 느낌이 드는 걸까.
사실 그의 감은 정확했지만, 당연히 진실을 알 수는 없었다.
“야, 에단! 따라 들어와!”
“야 이 미친 근육돼지 새……!”
풍덩!
이안이 정신을 놓고 있든 말든, 하덴베르크는 마음껏 즐기기에 바빴다.
제일 먼저 바다에 뛰어든 노벨과 에단을 선두로 슈넨과 레틸리아마저 물속에 입수했다.
……역시 그냥 가족여행이 맞는 거 같은데.
이안은 말없이 모래사장에 앉아 그들을 관람했다.
‘가족이라면 그럴 수 있지. 늘 일만 하다가 이런 일이 생기면 빌미로 잠시 쉬고 싶을 수도 있는 법이니까.’
남들이 들었다면 ‘저 호구 어쩌냐’라며 고개를 저었을 생각이었지만, 이안은 원래 매사에 덤덤한 편이었다.
태어나 몇 번 보지도 못한 바다에 온 게 어디냐, 라며 이안 나름대로 눈앞의 경치를 즐기고 있을 때.
털썩.
아이작이 그의 옆에 앉았다.
“질문 하나 해볼까.”
아이작이 대수롭지 않게 물었다.
“사는 건 어떻지?”
“이미 말씀드렸지만…… 정말로 피해랄 것도 없었습니다. 일이 빠르게 해결됐으니까요.”
“내 말은, 평소에 말이야. 부모는 괜찮은지, 수입은 괜찮은지, 잠은 잘 자는지, 정신은 멀쩡한지…… 그런 것들.”
아이작이 태평히 웃었다.
“특수 업종 소상공인의 삶을 알아두기 위한 질문이라고 생각하고. 대답은?”
“……충분히 만족하며 살고 있습니다.”
“흐음.”
아이작이 비음을 흘렸다. 대뜸 던진 질문에 비하면 꽤 만족스러운 낯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