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안 외전: 그 이후에 다시 만난
#3
“그럼 다행이네. 이런 걸로 거짓말 할 인간은 아니니까, 머리 열어볼 필요까진 없겠지.”
……황실 관리들은 원래 말투가 다 이런가.
이안은 차마 따라 웃지 못했다.
***
“여름이라 그런지 확실히 덥네요. 이안, 저랑 마실 것 좀 사러 다녀올래요?”
얼마 후에 바다에서 나온 슈넨이 제안했다.
이안은 흔쾌히 승낙했고, 둘은 찡찡대며 슈넨에게 매달리는 노벨을 뒤로하곤 근처 상가로 향했다.
“옷이 많이 젖으셨는데…….”
“괜찮아요! 여름이라 금방 말라!”
“그래도 실례가 아니면, 이거라도 걸치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안은 얇은 겉옷을 벗으며 물었다.
슈넨은 그것을 빤히 쳐다보다가, 그럼 잠시만 빌리겠다며 받아들였다.
그렇게 인근에서 간단히 마실 것들을 양손 가득 사들고 나와 돌아가던 중.
“……음. 이안,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슈넨이 한 가판대 앞에 서 손짓했다.
웬 노인이 자잘한 액세서리들을 기념품으로 판매하는 모양이었다.
‘품질이 좋아. 지역이 지역이라 그런지, 이렇게 소소한 곳도 질이 좋군.’
경력자답게 빠른 탐색(?)을 마친 이안 역시 물건을 잠깐 구경했다.
유독 그의 시선을 끄는, 옅은 노란색 보석이 박힌 은색 목걸이 하나.
“…….”
슈넨은 말없이 목걸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고 보니, 이안도 이런 걸 만들죠? 보니까 금색 마력석을 유독 많이 사용하시는 것 같던데…….”
말리기도 전에 목걸이 두 개를 구매한 그녀가 하나를 내밀며 물었다.
“이유가 있나요?”
이안은 선뜻 답하지 못했다.
금색 마력석.
마력석은 같은 성질을 띠더라도 색은 제각각이지만, 그중에서도 귀하게 취급되는 몇몇 색이 있다.
대표적으로 황금색. 주로 황실의 상징으로 쓰이기에 황금색 마력석들은 황실에 일차적으로 공급된 후 남은 것들이 시장에 풀린다.
당연히 이안으로서도 구하기 힘든 색이었지만……
“글쎄요. 큰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냥…….”
“…….”
“뭔가 그 색이 좋은 것 같아서요.”
힘닿는 데까지 구해서라도, 세공하고 아름답게 꾸몄다.
그렇게 만든 것을 손에 쥐고 있어도 왠지 모를 허전함이 느껴지긴 했지만.
그럼에도 더 짙고 예쁜 황금색을 찾길 멈출 수 없었다.
슈넨이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이상하네. 분명 다 잘….”
“네?”
“아, 아니에요. 그것보다 자, 이거. 선물이에요.”
슈넨이 목걸이를 이안의 손에 쥐여 주며 활짝 웃었다.
“오늘 우리가 너무 제멋대로였죠?”
“…….”
“부정은 안 하시네요!”
“죄송합니다.”
“솔직해서 좋아요. 사실 지금도 너무 착해서 걱정인데.”
슈넨이 이안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어느새 해가 슬슬 지고 있었다.
붉고 노란 노을이 검은 머리칼과 눈에 물들었다.
“이거 하나는 제가 간직할게요. 나머지 하나는 이안이 가지고 있어줘요.”
“감사히 받겠습니다.”
“있잖아요, 이안.”
슈넨이 손에 든 목걸이를 목에 걸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우리 친구할래요?”
“친구… 요? 저와?”
“네. 우리 가족들도, 아닌 척하지만 사실 이안을 되게 마음에 들어 하고 있거든요.”
말은 저렇게 해도, 만약 정말 싫어했다면 애초에 상종도 안 했을 거라며 슈넨이 킥킥 웃었다.
“난 이안이 되게 좋은데.”
“…….”
“다음에도 또 만날 수 있었으면 좋겠거든요.”
“다음에……?”
“자주 찾아오진 못하더라도, 이안만 불편하지 않으면 친구 하고 싶거든요.”
이안은 손에 든 목걸이를 빤히 응시했다.
참 뜬금없고 뒤죽박죽인 하루만큼이나 뜬금없는 말이다.
황실에서 일한다는 높으신 분들이 저 같은 게 뭐라고, 만난 지 하루 만에 친구를 하자니.
부담스러워서라도 거절해야 할 말인데.
“……저도.”
왜 거절하고 싶지가 않을까.
“저도 좋습니다.”
목걸이를 조심스레 손으로 꼭 쥐었다.
슈넨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이안!”
검은 눈이 주홍색으로 반짝였다.
***
-우리 친구 하기로 했어.
-뭐?!
-슈넨, 우리 다시 생각해 보자. 친구우우우?!
슈넨의 폭탄선언에 하덴베르크가 잠시 뒤집어졌던 소동이 있었지만, 그럭저럭 잘 마무리 되었다.
그리고 그들의 휴가(?)는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와, 꽃밭이다…!”
“이 꽃이 여기 피는군. 카르틸란에만 나는 희귀종이라더니, 이렇게 볼 줄은 몰랐어.”
“슈넨, 이리 와 봐. 화관 만들어줄게…….”
“어, 하젠, 그거 꺾어도 되는 거야…?”
기어이 다음 날에는 지도상 정반대에 위치한 산꼭대기(민간인 출입금지 지역이었다)에 가질 않나.
“와, 만년설!”
“슈넨, 보온 마법을 한 겹 더 걸자. 감기 걸리겠어.”
“이안한테나 하나 더 걸어줘. 난 괜찮아.”
북부의 손꼽히는 명물인 만년설로 뒤덮인 얼음 장벽까지 보고 왔다.
‘내가 죽기 전에 이런 걸 다 볼 줄이야.’
이안은 평생 갈 일이나 있을까 싶던 명소들을 도장 깨기 하듯 격파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전국 투어를 시켜 주겠다는 게 농담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아, 돌아가기 귀찮은데. 하루만 더 묵을까.”
하지만 눈밭에 누워 있던 에단이 꺼낸 제안은 예상치 못한 방해로 무산되고 말았는데.
“여기 계셨습니까!”
“아.”
“젠장. 귀찮게.”
“뭐야, 벌써 찾았어……?”
눈밭 위를 구르듯 달려오는, 제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에 하덴베르크가 투덜댔다.
하젠과 함께 눈덩이를 뭉치고 있던(눈사람을 위해) 이안은 흠칫 놀라 들고 있던 걸 떨어뜨렸다.
카르틸란의 제복 한 무리, 그리고 다르지만 똑같이 범상치 않아 보이는 제복 한 무리.
그들이 울다시피 소리쳤다.
“이렇게 온갖 곳을 다니시면 어떡합니까…! 황제께서 찾고 계십니다!”
“분명 하루만 묵으신다 하지 않으셨습니까아아…… 카르틸란의 황제께 보고 드리다 죽는 줄 알았습니다!”
“알겠어, 알겠다고. 이제 가면 되잖아.”
“지금 속히 돌아가셔야 합니다!!”
“아, 시끄러우니까 조용히 말해!”
노벨이 버럭 고함쳤다.
그제야 입을 그들은 입을 잠시 다무나 했지만.
“저희가 얼마나 고생한지 아십니까아아…!”
“노벨 님은 모르실 겁니다! 저희가 워프 게이트 좌표 일일이 추적하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아무리 허가를 받았다지만 엄연한 타국을 이렇게 횡단하시다니요…!”
“덕분에 두 분 황제께 번갈아 보고 드리느라 사이에서 얼마나 죽어 나갔는-”
“다 좀 닥쳐 봐.”
이틀이란 시간 동안 지나친 긴장과 스트레스에 멘탈이 갈려버린 이들에겐 두려움이 없었다.
결국 노벨과 레틸리아가 돌아가겠다고 선언하자마자, 동행한 마법사가 게이트를 열었다.
“이거 아무래도 저흰 이만 가봐야 될 것 같네요.”
“충분했습니다. 조심히 돌아가세요.”
“이안도요.”
슈넨이 머쓱하게 인사했다. 이미 나머지 넷은 게이트 앞에 서 있었다.
보좌관이 재촉했다.
“이제 오셔야 됩니다! 여긴 마법 캐스팅이 어려워서 잘못하다간 게이트 닫혀요!”
“아, 갑니다!”
“하덴베르크 니임-!”
뭐?
이안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하덴베르크?
게이트로 뛰어가는 슈넨의 뒤로 검은 머리칼이 흔들렸다.
루스페르투의 최고위 귀족이라는, 그 하덴베르크라고?
그 소리에 뒤통수를 맞은 것마냥 당황하던 것도 잠시.
“나중에 또 봐요, 이안 하덴베르크!”
-전 우리 가족을 많이 아껴서요.
-내가 인정했는데 충분하죠. 내가 바로 하덴베르크인데.
게이트 앞에서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슈넨의 외침 위로, 들은 적 없던 말이 덧입혀졌다.
“어…?”
왠지 모를 기시감. 그리고, 갑작스레 찾아오는……
“잠깐만, 슈넨……!”
분명 겪은 적 없던 몇몇 장면들.
게이트의 빛 속에 파묻힌 슈넨이 뒤를 돌았다.
절박한 이안의 얼굴을 본 슈넨이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활짝 웃었다.
펑-!
이내 빛이 폭발하고, 하덴베르크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이안은 저도 모르게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고마워.”
다시 만나러 와줘서.
-우리 친구할래요?
그리고 앞으로 또 만날 수 있게, 손을 내밀어 줘서.
이안은 저도 모르게 목에 걸린 보석을 꾹 쥐었다.
이제야 황금색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감정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의식적으로도 끝없이 찾고 있던, 애틋한 그리움이었다.
***
황제에게 탈탈 털리고(물론 타격은 전혀 없었다) 저택으로 돌아온 하덴베르크.
“그런데 슈넨.”
“응?”
“마지막에 그 녀석이 뭐라고 한 거야?”
먼저 게이트로 들어갔던 에단이 질문했다.
슈넨은 잠시 생각하다 픽 웃었다.
“음, 아무래도 기억이 났나 봐.”
“……응?”
“뭐?”
“아니, 잠깐만. 그게 가능해?!”
“그러게. 나도 이게 왜 가능한진 모르겠는데…….”
슈넨은 태평히 중얼거렸다.
“원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생기는 게 세상이니까. 뭔가 작은 오류가 있거나, 아니면……”
“아니면?”
“아니면, 어쨌든 동일한 영혼이라 가능하거나.”
이미 힘을 다 써버려 알 방도는 없었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슈넨은 창틀에 걸터앉아 마지막으로 보았던 이안을 떠올렸다.
“다음에 또 보러 가자.”
이번엔 적이 아니라 친구이자 가족으로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