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리자 외전: 어느 관리자의 이야기
#1
황금빛 머리칼에 황금빛 눈동자, 그리고 늘 웃고 다니는 얼굴.
의뭉스러움과 능청스러운 해맑음을 의인화하면 나올 것 같은 그는, 바로 ‘관리자’였다.
***
세상의 모든 이야기는 도서관에 저장되듯, 하나의 책처럼 세계로 탄생한다.
그리고 그런 책, 세계를 모아둔 도서관이 있다면.
그 도서관의 사서이자 도서관장이 바로 ‘관리자’였다.
본래 모든 이야기의 주인은 따로 있지만, 애초에 그 주인들은 자신이 만든 세계가 존재하는지조차 모른다.
그렇기에 관리자는 그 책들을 관리하는 것이다.
이야기가 엉키지 않도록, 이상하게 망가지지 않도록. 수정하고, 주인의 의지를 반영하고, 보관하고.
그게 그의 일이고 또 숙명이자 삶이었다.
딱히 불만은 없었다. 재밌었고, 즐거웠으니까.
“응? 삭제?”
그런데 간혹, 그의 주의를 끄는 일도 일어나기 마련이다.
곧 삭제될 책 한 권의 소식을 접한 그가 의아히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그때 그 작가 건가?’
죽으려던 사람.
끝내 결정을 내린 모양이었다. 자신의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를 삭제하기로.
“차악을 선택한 거니까 나름 최선의 선택이긴 했는데…….”
관리자는 영 아쉬웠다. 꽤 오랜만에 재밌는 이야기였는데.
그리고 좀 안타깝기도 했고.
“재능 있는 이야기꾼 하나가 이렇게 떠나가나~”
계속해서 더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주면, 자신도 심심하지 않고 좋을 텐데.
관리자는 아쉬움에 혀를 차다가, 손에 든 책을 허공으로 던졌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주인은 저 사람이니까.’
주인이 없애겠다면 없애주는 게 원칙이다. 창조주에게 버림받은 세계는 존속할 가치가 없으니까.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세계의 의지를 산산이 부수며, 관리자는 그렇게 이야기를 삭제했다.
책이 허공에서 사라졌다.
그렇게 ‘멸망의 앞에서’는 삭제되었다.
“아깝긴 하네, 아까워.”
이야기도 아까웠지만, 그보다 더 아까운 건.
“원해서 내린 선택이 아닐 텐데 말이야…….”
주인, 한이레가 내린 선택이 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온 진심이 아님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본래라면 저러지 않았을 텐데.
주변 상황이 그녀를 너무 몰아붙여, 훗날 스스로 후회할지도 모를 선택을 내리게 만들었다.
“흐음…….”
관리자는 잠시 고민하다, 다른 칸의 책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아직 이게 하나 남아 있지.”
본래의 이야기에서 파생된 또 하나의 이야기.
‘원칙대로라면 이것도 지금 삭제해야 하지만…….’
우우웅.
책이 미약하게 진동했다. 꼭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것처럼.
관리자는 잠시 고민하다 시선을 돌렸다.
황금색 눈동자에 서찬란의 모습이 비쳤다.
‘그러고 보니 이걸 쓴 주인도 이 세계가 없어지길 바라진 않겠지.’
일찍이 떠나간 제 친구 대신 붙잡고 있던 이야기다.
관리자는 잠시 책을 바라보다, 다시 책장에 돌려놓았다.
오랜만에 변덕을 좀 부려볼 심산이었다.
***
“야호, 안녕!”
괴상한 것을 보듯 하는 한이레에게, 그는 낄낄 웃으며 설명했다.
네가 만든 세계는 정말로 부숴져 삭제되었지만, 남은 게 하나 있다고.
“네가 만든 세계의 명맥을 잇는 곳이야.”
“…….”
“저것도 없어졌으면 좋겠어? 아니면, 저렇게라도 남아 있으면 좋겠어?”
선택은 네가 해.
관리자는 그녀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알면서도 그리 말했다.
“다 없어졌으면 좋겠어.”
한이레는 예상대로의 답을 내놓았고, 관리자는 마찬가지로 준비한 거짓말을 꺼냈다.
“저 세계도 멸망하려 들 거야. 하지만, 그게 그렇게 쉽지 않단 말이지?”
“왜? 내가 원작을 없앴는데, 저딴 게 뭐라고?”
“저 세계도 작가가 존재하잖아. 기반은 분명 너지만, 한 명 더.”
“…….”
“그 사람을 불러올 거야.”
세계가 아니라 자신이 그렇게 만들 것이다.
그 의지를 담은 서찬란을 데려가도록.
한이레는 그럼 어떻게 하느냐 물었다.
“간단하지 않아? 네가 들어가면 되는 거야.”
“……내가?”
“뒤이어 들어올 작가가 저 세계를 포기하게 만들면 네가 원하는 대로 멸망할 거야. 저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그 일을 할 수 있는 건 다른 작가인 너밖에 없어.”
“좋아, 들어간다 쳐. 어떻게 하면 되는데?”
“간단해. 너도 이미 아는 방법이야.”
“내가?”
“애정을 버리면 돼.”
한이레의 표정이 굳는 것을 보며, 관리자는 속으로 웃었다. 거봐.
‘너도 그러고 싶지 않았잖아.’
그러니 가서 네 진심을 깨닫고 와.
“네가 버린 것처럼, 그 작가도 그곳을 증오하게 만들면 돼.”
“…….”
“방법은 자유야. 괴롭히든, 진실을 알리고 설득하든……. 하지만 후자는 통하지 않을 것 같네. 너 못지않게 너의 이야기에 감정이 많은 사람이라서.”
한이레의 표정이 죄책감, 망설임에서 결연하게 바뀐 것을 본 관리자는 손을 내밀었다.
“자, 그럼 다녀와. 결과가 어떻든 응원할게.”
그렇게 훗날의 네가 자책하지 않길 바라. 아까운 작가님.
***
큰 틀은 자신이, 세세한 것은 이 모든 일의 주역인 두 작가들에게 맡긴다.
‘내가 억지로 깨닫게 만들어 봤자 무슨 의미가 있겠어.’
한 명에겐 친구와 함께하던 세계를 지속하는 일이 될 것이고, 다른 한 명에겐 자신이 버렸던 세계를 다시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제는 없어져 버린 제 이야기의 명맥을 잇는 세상이란 분명 위안이 되어줄 터였다.
하지만 너무 긍정적인 방향으로만 생각했을까.
“아…… 이런.”
관리자가 탄식했다. 망했네.
무너져 내리는 세상 속의 슈넨, 서찬란과 흔들리는 눈으로 웃고 있는 사렌, 한이레를 내려다보았다.
단기간에는 안 통하는 건가.
‘여기서 끝낼 순 없는데.’
양쪽 모두 얻은 게 없는데, 여기서 그만둘 순 없었다.
관리자는 잠시 방도를 생각하다가, 아이작과 하젠에게 시선을 돌렸다.
저 둘을 이용하면 될 듯했다.
그렇게 그는 둘을 불러냈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주었다.
둘의 원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는 범위의 일을 가능하게 해주면서까지.
“이번 시도는 성공하겠지.”
어차피 슈넨과 하덴베르크가 다섯이 멀쩡하게 만날 거란 사실은 안다. 그랬기에 과거의 다섯 명과 미래의 슈넨이 함께할 수 있던 거니까.
관리자가 신경 쓰는 부분은 슈넨의 선택.
그녀와 사렌이 합의를 보고 이 이야기를 멸망이 아닌 존속의 끝으로 이끄는 것.
그 성공을 바라고 있었다.
***
슈넨이 저택을 떠나 하덴베르크와 함께하고, 시간을 다시 한 번 거스를 때.
“이번 판으로 끝낼 수 있을 것 같네.”
관리자는 그제야 슈넨을 만나러 갈 준비를 했다.
“그럼 채비를 해볼까.”
드디어 두 작가가 대면할 순간이었다.
슈넨과 사렌으로서가 아니라, 서찬란과 한이레로서.
그러기 위해선, 자신이 힌트를 던져줘야 했다.
“드디어 만났네. 꽤 긴 여정이었어.”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저를 쏘아보는 슈넨에게, 관리자는 장난스레 인사했다.
“만나서 반가워, 작가님. 난 ‘관리자’라고 해.”
원작의 작가는 사렌이지만, 그에겐 슈넨도 그 못지않게 중요한 존재였다.
어떤 식으로든 이야기를 남기는 자라면 관리자는 존중하길 마련이다.
더구나 슈넨이 어떤 마음으로 그 이야기를 만들었는지 알기에. 이렇게 답지 않게 변덕까지 부려봤을 정도로.
세계가 작가까지 끌고 들어오는 초유의 사태를 관리자는 일부러 방관했다.
그래야 두 작가가 함께 만날 수 있을 테니까.
관리자는 폐허가 된 황궁을 내려다보며 사렌과 슈넨의 대면을 치켜보았다.
“왜 좋았냐고? 내 힘들던 나날에, 그 이야기가 있어 버틸 수 있었으니까.”
“오히려…… 네가 더 작가 같네. 나보다. 좋아. 졌어.”
그리고 마침내 원하던 말이 둘의 입에서 나온 순간.
와장창-!
책장 한구석에서 유리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사렌의 인정으로 인해 세계가 틀을 부수고 독립했다는 신호였다.
***
끝났다.
물론 슈넨은 이곳에 남는 걸로 선택했지만, 적어도 관리자가 초기에 바랐던 목적들은 모두 달성했다.
“왔구나.”
관리자는 사렌의 몸을 떠난 한이레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와.”
“오랜만에 보네, 너.”
“이제 돌아갈 시간이네. 긴 여정 끝에 말이지.”
“잘 돌아가고 있었는데, 왜 또 나온 거야? 일 다 해결된 거 아니었어?”
관리자는 그저 말없이 웃을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말이 있어서.”
“뭔데?”
“그 전에 질문 하나. 소감이 어때? 끝까지 자신의 세계에 애정을 잃지 않은 다른 작가와…….”
관리자의 황금색 눈이 그녀를 향했다.
“그 덕분에 조금 다른 방식으로 남을 수 있게 된, 네 원래 세계를 보는 느낌은?”
“……날 비난하는 거야?”
“아니. 네가 이 말에 기분 나빠하지 않을 건 알거든!”
한이레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젓다가, 이내 홀가분하게 웃었다.
“예상외로, 꽤… 좋네.”
“…….”
“짜증날 거라 생각했는데, 내심 아쉬웠나 봐. 저렇게 될 수 있었던 걸 내가 망친 거나 마찬가지니…… 그것도 내가 작가였는데 말이지.”
“…….”
“뭐, 그래도 어쩌겠어. 이미 끝난 일이고, 저렇게 잘 남아 있고.”
“만족해?”
“이 정도면 충분하지. 나보다 자신들을 더 아껴주는 작가와 함께하니까, 이제 서로에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그러니 난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갈래.
한이레가 기지개를 피며 웃었다. 언뜻 그리움이 담긴 표정에, 관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락-
황금빛 물결이 피어올랐다. 한이레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다시는 볼 일 없겠지?”
“아쉽지만 이번이 특별했던 경우라, 그럴 거야.”
“내가 또 글을 쓰더라도?”
“네가 또 글을 쓰더라도.”
관리자는 싱긋 웃었다.
“또 이야기를 쓰려고 마음먹을 일이 생기면, 하나만 기억해.”
“…?”
“‘보라, 너의 이야기는 너를 아프게 했지만 누군가에겐 구원이었다’.”
“…!”
“해주고 싶었던 말이었어.”
이제 정말 안녕.
관리자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는 한이레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이제 그의 일도 끝이었다.
다음 이야기가 올 때까지는.
파델 외전: 마지막 마법사의 제자
#1
황실과 귀족들마저 무시할 수 없는 범접 불가의 힘을 다루는, 마법사들의 둥지이자 정수.
그런 마탑의 수장인 마탑주는 출신과 관계없이 제국 내에서도 황제 다음으로 손꼽히는 권위자였다.
그 위명에 걸맞게, 마탑주는 당시대 최고의 마법사만이 가질 수 있는 칭호.
현존하는 마법사들 중 최강인 자가 앉는 자리였다.
그리고 파델은 바로 그 자리에 오른 자.
전례없이 막대한 양의 마력을 타고난 천재.
능력자가 존재하지 않은 지 오래된 이 대륙에서, 누구도 부정하지 못하는 최강.
이것들이 전성기 시절의 그를 따라다니던 칭호.
하지만 이것들은 후에 생겨난 다른 칭호에 묻혀 버리고 만다.
‘마탑을 등진 은둔자’
제발로 마탑을 나와, 시간의 흐름마저 비껴간 곳에 틀어박힌 마탑주. 그게 바로 파델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