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과거로 돌아온 지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음에도 나는 여전히 멍한 상태였다.
도대체 어떻게 돌아온 건지 어째서 돌아온 건지 알 수 없음에도 나는 그 이유를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밥을 먹다가도 샤워를 하다가도 물을 마시다가도 문득문득 내가 왜 여기 있지? 어째서? 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괴리감이라고 해야 할까?
마치 내가 여기 있으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계속 나를 괴롭히고 있었다.
누군가는 분명 그냥 이렇게 된 거 즐기자!
라고 말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이게 그런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의식적으로 생각을 안 하려고 해도 무의식적인 행동을 할 때면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아, 몰라! 그냥 앞으로의 일에 대해서나 생각하자.
나는 애써 생각의 방향을 전환하기 위해 앞으로 일어날 심각한 일을 하나하나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바로 어비스였다.
지금이야 균열이 열리고 그곳을 통해 나오는 몬스터를 처리할 뿐이지만 앞으로 몇 년만 지나면 그 상황이 점차 심각해져 간다.
지금 열리는 균열은 바로 어비스란 곳과 연결되는 통로였는데 이게 발생하는 이유는 어비스와 지금의 차원이 연결되면서 생기는 차원의 비틀림의 영향으로 무작위로 균열이 생기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어비스 차원과의 연결이 심화 되면서 점차 심연 깊은 곳과 연결되는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다.
지금껏 상대했던 몬스터가 아닌 마수나 악마종이라 불리는 존재들이 튀어나오게 된다.
일반적인 몬스터와는 그 궤를 달리할 정도로 강한 놈들이라고 보면 되는데.
그런 놈들을 상대하던 도중 어비스와 지구가 완전히 연결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게이트가 세계 곳곳에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껏 세상을 지배하던 것은 돈과 권력이었지만 이때부터는 힘의 세력이 점차 커지며 모든 걸 집어삼키기 시작한다.
돈을 아무리 써도 고용할 수 있는 각성자라고 해 봐야 약자들 뿐이었으니까.
강자들은 스스로가 지배자가 되길 자처하고 자신들의 세력을 이용해 점차 기존의 지배층을 끌어내려 자신들의 발아래에 두려고 한다.
보호라는 미명하에 인류의 방패라는 탈을 쓰고 일반인들을 착취하고 괴롭히고 지배하기 시작한다.
그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뭘까?
나만의 세력, 바로 힘을 가지는 수밖에 없다.
나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인 균열을 이용해서 괴물 군단을 만들어 내면 된다.
균열을 이용해서 이 세계의 존재를 끌어내 유지하며 그 수를 점점 불려나가 종국에는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나만의 왕국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했지만 내가 누군가? 바로 유명그룹의 막내아들이었다.
돈이라면 썩어 넘쳤다.
정확히 말하면 돈이 아니라 마석이 필요했지만 지금 돈으로 구하지 못하는 건 없었다.
마석.
내 균열을 통해 나타난 존재들을 붙잡아 두기 위해 필요한 몬스터의 마력이 집약된 결정.
이 마석이 없으면 그 존재들을 유지할 수 없다. 내 균열을 통해 나온 존재들은 일정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 버린다.
이유는 모르지만 마석을 먹이면 그 시간이 연장되고 그렇게 마석을 먹이다 보면 어느 순간 녀석들은 적응이라도 한 것인지 마석을 먹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내 부하 1호인 뚱이가 그랬다.
뚱이는 오크였다.
사람들이 오크라 부르는 그거.
다만 오크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 뚱이는 마력을 사용할 수 있었으니까.
S급 가디언에 필적할 정도로 강한 가장 아끼던 녀석.
균열의 크기가 자신의 몸에 맞지 않음에도 기어 나온 고마운 녀석.
뚱이는 언제부턴가 마석을 먹지 않아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때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는 아무도 모를 거다.
이제 나도 제대로 된 식사를 할 수 있어! 편히 쉴 수 있는 집을 구할 수 있어!
꿈이란 것이 정말 사소한 것이란 걸 그때 알았다.
다만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죽었다는 게 안타깝지만.
*
*
*
과거로 돌아오고 두 달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었다.
남들이 보기엔 여전히 난 망나니였고, 하는 것 없이 빈둥거리는 백수였다.
돈은 많으니까 돈 많은 백수 망나니라고 하면 되나?
물론 내가 번 돈은 아니었지만 뭐 어떤가?
남들은 하고 싶어도 못하는데.
이제 좀 적응이 된 것 같았다. 예전 망나니 정도는 아니지만.
“현지야. 언제까지 거기서 그러고 있을 거냐?”
“저는 도련님의 메이드로서 언제나 도련님 곁에 있어야 하는걸요?”
현지는 좀 이상했다.
남들과 다르다고 해야 하나? 자신이 메이드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건 그렇고 요즘 너무 붙어 있는 거 아냐? 내가 무섭지도 않나?
생각해 보면 나는 집에서는 별로 망나니짓을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아버지가 금방 알거든. 그날 알거든.
내가 집에서 말썽을 피우면 김 실장이란 놈이 모조리 일러바친다.
그래서 나는 집에서는 조용히 지내는 편이었다.
“그럼 앉아 있던가. 왜 정신 사납게 계속 돌아다니냐고.”
하는 것도 없으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현지에게 아무리 말 해봐야 소용이 없는 것 같았다.
차라리 조용히 앉아 있던가?
왜 계속 돌아다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나는 결국 현지에게 신경 끄고 하던 걸 마저 하기로 했다.
마나 호흡법.
마력을 늘리는 호흡법으로 일반인도 꾸준히 하면 언젠가 마력을 쌓을 수 있다고 한다.
물론 마력을 느낄 수 있어야겠지만.
나는 이걸 근 한 달간 열심히 하는 중이었다.
앞으로 내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마력이 정말 중요하니까.
“도련님 그런데 그게 뭐 하는 거예요? 명상?”
“명상이 아니라 이 시발!”
아, 성질 나온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정신도 그때로 돌아간 건가?
그건 그렇고 내가 요즘 너무 조용했나?
요즘 현지가 말을 거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아니 시비를 거는 건가?
“깜짝이야! 왜 욕을 하고 그러세요. 회장님 아시면 큰일 나요.”
“제발 좀 조용히 좀 해줄래? 나 지금 명상하는 거 안 보여?”
“신기해서요. 정말 도련님이 변하시긴 변하셨나 봐요.”
본인 앞에서 그런 말은 좀 자제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그렇고 너 요즘 자꾸 까분다?”
“아니 저는 도련님이 심심할까 봐요.”
니가 심심한 거겠지.
내가 심심할까 봐서가 아니라.
“됐고 말 걸지 마라.”
“네. 조용히 있을게요.”
다시 시작해 볼까?
현지에게 조용히 있으란 경고를 하고 다시 눈을 감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정신을 집중하여 주변의 마나를 느끼며 마력 호흡법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 마력은 처음 마나 호흡법을 시작했을 때에 비하면 거의 3배 정도 늘어났다.
물론 3배라고 해봐야 콩 하나가 콩 3개가 됐을 뿐이지만, 그래도 3배라고 하면 뭔가 엄청나게 늘어난 것 같아 보이잖아.
그런 마인드로 열심히 마력을 모으고 있었다.
점차 마력의 크기가 커지면 마력을 모으는 속도도 가속화되기에 시간을 가지고 열심히 해야 한다.
언젠간 드래곤도 한 마리 뽑아봐야겠다.
*
*
*
“그러니까 요즘 그 망나니 새끼가 조용하다고?”
“네. 부회장님.”
부회장이란 명패가 떡하니 걸린 방 안에서 대화 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명그룹 부회장. 선우의 작은 아버지였다.
“왜?”
“얼마 전에 수면제를 먹고 쓰러진 적이 있는데 그때부터 지금과는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요즘 뭐 하는데?”
“그게··· 거의 방안에만 있어서 그것까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놈이 사고를 쳐줘야 내가 움직이기가 편할 텐데 말이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있는 대로 사고를 치고 다니던 놈이 갑자기 왜 이렇게 조용하지?
설마 철이 들었나? 그럴 리가.
그런 개망나니 놈이 이렇게 쉽게 철이 들 수 있었다면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이렇게 막 나가는 나라가 되진 않았을 거다.
부회장은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뭔가 생각났는지 작은 감탄사를 내뱉곤 바로 눈앞의 부하직원에게 물었다.
“진 이사. 혹 그놈들 아직 써먹을 수 있나?”
“흑곰파 말씀이십니까?”
진 이사는 부회장이 원하는 걸 단번에 알아챘다.
부회장은 그런 김 이사를 보며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 저번에 망나니 놈한테 작업 걸어 놨던 놈들.”
“네. 아직 끊어내진 않고 있습니다.”
“저번에 계획해놨던 거 있지? 그 일 좀 앞당겨봐.”
“그 일이라시면? 설마?”
깜짝 놀란 진 이사는 급히 부회장을 말렸다.
“너무 이르지 않을까요?”
“어쩔 수 없지 않나. 지금으로선 형님을 흔들 방도가 망나니밖에 없어. 그놈이 꼼짝도 안 하면 끌어내는 수밖에.”
“그러다 회장님이 눈치라도 채시면···.”
“자넨 다 좋은데 그게 문제야. 겁이 너무 많아.”
이놈은 쓸모는 있는데 겁이 너무 많단 말이야.
조금이라도 형님이 추궁하면 모든 걸 실토해버릴지도 모르는 놈을 너무 오래 데리고 있었다.
부회장은 진 이사를 조만간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진행하고 보고 드리겠습니다.”
“그래. 실수하지 말고.”
“네. 부 회장님.”
“그건 그렇고 그쪽은 어떻게 되가?”
부회장은 진 이사를 보며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로 입을 열었다.
“길드 쪽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놈들.”
“그게···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 회장님이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충성심이 대단합니다.”
부회장은 들고 있던 고풍스러운 찻잔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얼굴을 구겼다.
앞으로는 그런 놈들이 필요했다.
깡패 새끼들을 써먹어야 하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곧 그것도 한계였다.
가디언이란 놈들이 힘을 대변하는 시대에 깡패들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밑바닥일 뿐이니까.
큰일을 하려면 큰 힘을 가진 놈들이 필요했다.
“놈들이 제일 필요로 하는 걸 찾아. 무조건 돈만 안겨준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그런데 괜찮을까요?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만···.”
“많이도 필요 없어. 위에 있는 놈 한두 명이면 충분하니까.”
상자 안의 사과를 모두 썩게 만드는 건 한두 개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부회장이었다.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리게. 내가 형님 자리에 앉는 순간 자네의 자리는 이 자리가 될 거니까.”
“감사합니다. 회장님.”
부회장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지 못하는 진 이사는 부회장의 말에 그저 조용히 기쁨을 표할 뿐이었다.
적응
똑똑-
“네~ 잠시만요.”
노크 소리에 현지가 반응했다.
이런 건 편하단 말이야.
괜히 누가 들락날락하지 않아도 알아서 처리해 주니까.
“도련님. 회장님께서 같이 식사하시자는 데요?”
잠깐 나갔다 들어온 현지가 마나 호흡법을 하던 내게 말을 전했다.
“아버지가? 왜?”
“그거야 저도 모르죠?”
아버지가 나를 찾다니? 그것도 밥을 같이 먹자고?
요즘 정말 조용히 있었나 보다.
나만 보면 속이 터진다던 아버지는 제발 밥 먹을 때는 나를 보지 않았으면 한다고 하셨었다.
그래서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방 밖을 잘 나가지 않았었는데.
“알았어. 그런데 이대로 나가도 되겠지?”
“잠시만요.”
현지는 나를 한 바퀴 빙 둘러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딱히 회장님이 싫어하시진 않으실 것 같아요. 얼굴만 빼면요.”
반박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내 얼굴을 싫어하시는 게 틀림없으니까.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밥을 먹자고 한 건 아버지니까.
그건 그렇고 현지가 까부는 횟수가 늘어난 것 같은데?
잠시 쓸데없는 생각을 한 나는 서둘러 움직였다.
걸음을 옮겨 문을 열고 나가자 고풍스러워 보이는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벽에는 수많은 그림이 장식되어 있었다.
“너는 이 그림이 왜 수십억씩 하는지 알겠냐?”
“아니요. 제가 뭘 본다고 아나요? 그냥 그렇다고 하니까 그런 줄 아는 거죠.”
복도의 벽에 걸려있는 그림을 보니까 문득 예전 생각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였나? 그림이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로 그림 몇 개를 불태워 버린 적이 있었다.
술에 취한 상태로 집에 들어온 나는 비틀거리며 방으로 올라가던 도중 그림이 나를 친다는 이유로 사실 내가 취해서 그림에 부딪힌 거지만.
그래서 그림을 가지고 나가 액자를 깨버리고 그림에 불을 붙였었다.
물론 말리는 사람이 있었지만, 적극적으로 말리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그래도 말리는 사람이 있어서였을까? 그림이 완전히 타버리진 않고 구멍이 뻥뻥 났었다.
그거나 이거나 지만.
아무튼, 이 모습을 보신 아버지는 처음으로 나를 때렸다. 아니 팼다.
들고 있던 지팡이를 붕붕 휘두르시는데 무협지에 나오는 중년의 검객을 보는 것 같았다.
나를 이리저리 두들기시던 아버지의 입에서 쌍욕이 나온 것도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거다.
세기의 명작이라나 뭐라나? 하시면서 쌍욕을 하시는데 아마 그때부터 난 아버지를 무서워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그 이후로 내 방 주변의 미술품들이 전부 교체되었지? 아마?
뭐 그래도 싸구려는 아니겠지만. 생각해 보니까 이때도 술을 마셨었네?
생각에 잠겨 복도를 지나 계단을 내려온 나는 계속해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빌어먹을 집이 왜 이렇게 큰 거야!
걸음을 빨리 옮겨 식당의 문 앞으로 간 나는 또 한 번 투덜거려야 했다.
“문 열겠습니다.”
지금이 중세시대도 아니고 말이야 무슨 식당 문이 이렇게 커?
혼자서는 문도 제대로 못 열겠네.
문이 열리자 보이는 아버지와 형의 모습에 마음을 단단히 먹기로 결심했다.
돌아온 지난 두 달 동안 아버지를 만난 횟수는 손에 꼽았다.
그것조차 아버지가 나를 피하는 바람에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적도 없었다.
아니 아들을 피하는 아버지가 어딨어?
아마 얼굴을 보면 또 싫은 소리가 나올까 봐 그러셨을 거다.
수면제를 먹은 이유가 자살이라고 생각하시는 모양이시니까.
그저 나를 보시곤 근엄하게 못난 놈! 하고는 지나가셨었다.
잠시 주춤한 사이 현지가 먼저 가서 의자를 빼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 저 왔어요.”
“그, 그래.”
일단 인사를 드리고 의자에 엉덩이를 들이대자 요리를 내오기 시작했다.
먼저 드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던 모양이다.
평소랑 너무나도 다른 모습에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는데.
“형. 나왔어.”
들고 있던 서류를 보던 형은 대답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나를 보곤 다시 서류에 집중했다. 형은 그대론데?
“요즘 방에서 잘 나오지 않는다고 들었다. 새로운 취미라도 생긴 거냐?”
“네? 아니요. 그냥 좀 쉴까 해서요.”
“그럼 방에서 먹고 자고 싸고만 있었단 말이냐?”
이거 긍정하면 또 못난 놈! 이 날아올 거다.
“그런 편이죠.”
“못난 놈!”
내가 이럴 줄 알았다.
우리 아버지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못난 놈이라고 할게 분명했다.
그게 우리 아버지니까.
“아버지 그동안 정말 죄송했습니다.”
“못난 놈! 그걸 이제 알았느냐?”
설마 설마 했는데.
감동은 받지 않으셔도 화를 내진 않으실 거라 생각했건만.
그래도 할 건 해야겠지?
내가 하려는 것은 용서를 비는 일이었다. 나는 이 시절에 아버지와 형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그 모든 게 내 자격지심 때문이란 걸 알고 있다.
아버지와 형을 보면서 자신의 초라함을 느낀 나는 모든 걸 잘난 아버지와 형 탓을 했었다.
왜 아버지는 날 이렇게 낳아놓고 형은 저렇게 잘나게 낳은 거지?
노력조차 하지 않으면서 항상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결국 일을 벌였고 우리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다.
물론 이제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그래도 말만으로라도 용서를 빌고 싶었다.
나는 이어서 형을 보며 말했다.
“형. 그동안 미안했어.”
역시나 형은 나를 쳐다도 보지 않았다.
그런 내 눈에 형이 읽던 서류가 식탁 한쪽에 반듯하게 놓여 있는 게 보였는데 맨 위에 ‘메탈컴퍼니’란 이름이 보였다.
메탈컴퍼니라?
각성자 무구를 양산해 내는 곳이었나?
양산품치고는 괜찮은 물건을 내놓는 곳이었기 때문에 기억 속에 있었다.
나도 인생의 후반에는 가디언을 하면서 먹고 살았기에 가디언과 관련된 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형. 그 회사에 투자하려고?”
“아는 회사냐?”
오랜만에 듣는 형의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호감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미성이었다.
형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지만.
“조금?”
“네가 아는 회사도 다 있고 신기하구나.”
신기한 눈빛으로 나를 보시며 아버지가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예전 기업인들의 어쩌고 모임에 따라갔던 나는 개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짧은 지식 때문에···
이런저런 회사의 높은 사람들이 자신들을 소개했는데, 모두 이름만 알지 정확히 무엇을 하는 회사인지 모르는 나는 되는대로 떠들었다.
시멘트 만드나 봐요? 배달하나 봐요? 뭐, 이렇게?
그들이 건넨 명함에는 XX시멘트, XX유통 이라고 적혀 있었기에 생각도 제대로 하지 않고 입 밖으로 내뱉었었다. 근데 맞는 말 아닌가?
그동안 그런 자리에는 참석한 적이 없었다. 귀찮기도 했고 아버지가 데려가 준 적도 없었으니까.
알지도 못하는 지식을 아는 척했던, 나는 개망신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대한민국의 경제를 움직이는 유명그룹의 자제인 내 앞에서는 티를 내지 않았지만, 아마 뒤에서 엄청 욕했을 거다.
그래! 떠올랐다.
그때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한테 ‘나가 죽어!’라고 하신 날이었다.
그 이후로는 날 볼 때마다 그 소리를 하셨었다.
오늘은 안 하시려나?
“자세히 아는 건 아니고요. 그냥 몇 번 들어본 정도?”
“그래? 네 생각은 어떠냐? 투자해도 될 것 같으냐?”
지금 그 회사의 규모도 뭣도 모르는 내가 알면 얼마나 알겠나?
이번에도 역시 되는대로 지껄일 수밖에 없었다.
보고 왔다고 할 순 없잖아? 거기다 어차피 커질 회사고.
“네. 투자해 보세요.”
“이유는?”
“그냥 감이 그래요. 커질 것 같거든요.”
“우리가 투자를 결정하면 아무리 작은 회사라도 커지는 건 당연한 거다.”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던 중에 형이 끼어들었다.
듣고 보니 맞는 말이었다.
유명그룹에서 투자한다고 하면 여기저기서 다 달려들겠지.
“그냥 느낌이 좋은 것뿐이거든.”
“참고하도록 하지.”
말을 하는 형을 보던 내 눈에 이상한 장면이 들어왔다.
형의 입꼬리가 아주 조금 올라가 있었는데, 미소를 짓고 있었다.
비웃는 건 아닌 것 같은데? 그럴 사람도 아니고.
그건 그렇고 머리가 아파 왔다.
역시 자신은 이런 일과는 전혀 관련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
지금부터 뭔가를 한다 해도 잘할 것 같지도 않고 하기도 싫었으니까.
밥이나 먹어야겠다.
“아버지. 저 통장에 있는 돈 좀 쓸게요.”
밥을 먹던 도중 대뜸 아버지에게 말했다.
“뭐···라고?”
아버지가 약간 더듬으시는 걸 보니 이 말을 사고 좀 친다는 뜻으로 알아들으셨나 보다.
통장에 있는 돈을 건든다는 것은 사용처를 밝히지 않는다는 말이었으니까.
“얼마나?”
“한·· 20억 정도?”
그것도 대형사고.
“이, 이놈의 새끼가 또 무슨 사고를 치려고!”
나왔다. 아버지의 진짜 모습.
아버지는 어디서나 근엄한 회장님의 모습을 연기 하고 있지만 내 앞에서는 가끔 이런 모습을 보이신다.
아버지가 들고 있는 금수저가 떨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기에 얼른 대답했다.
“그냥 쇼핑 좀 하려고요.”
“쇼핑? 차 사려고?”
금방 안정을 찾으신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방심하진 않았다.
언제 저 금수저가 내 머리통으로 날아올지 모르니까.
“아니요. 그냥 이것저것 필요한 것 좀 사려고요.”
“그러니까 그 필요한 이것저것이 뭔데!”
안티디텍터! 라고는 말하지 못한다.
이 물건은 일정한 공간에 막을 쳐서 균열이 탐지되지 않도록 방해할 뿐 아니라 마력 역시 숨겨주는 아주 질이 안 좋은 물건이니까.
주로 ‘빌런’이라 불리는 범죄를 저지르는 각성자들이 균열을 감추기 위해 만든 물건으로 나는 전생에 이걸 사용해 균열을 넓히는 훈련을 했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사고 안 칠 거니까.”
“누가 네놈 말을 믿어! 차라리 지나가는 개를 믿겠다.”
그렇게 한참 아버지를 설득하던 중 아버지가 꺼낸 사진 한 장을 본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아는 얼굴이었으니까.
“누군데요?”
“얘 만나고 오면 허락해 주마.”
사진 속에는 참한 아가씨의 모습이 들어 있었다.
단아한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미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거기다 딱 봐도 나 보통 집 아가씨 아니다. 라는 포스를 줄기줄기 뿜어내고 있었는데.
돌아오기 전에 나는 이 여자를 몇 번 본적이 있었다.
“선화제약 손녀딸.”
선화제약.
약품과 포션에 관한 특허가 수십 개가 넘어가는 제약회사.
지금도 그 위명이 쟁쟁한데 앞으로 몇 년이 지나기도 전에 엄청난 발명품을 발표하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발돋움해 대한민국을 전 세계에 알린 기업.
근데 내가 얘를 왜 만나야 하지? 설마 선보라는 소린가?
“설마 저보고 지금 선을 보란 말씀이세요?”
“그래. 크흠.”
대답을 하는 아버지도 민망한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왜 저에게? 형도 있잖아요.”
“쯧쯧.”
내 말을 들으신 아버지는 표정을 구기시며 혀를 차시곤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모습을 보자 하나의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 기억에 고개를 돌려 형을 바라보자 형도 무언가 불만스러운 눈치로 물을 마시고 있었다.
저 완벽한 형조차도 아버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게 한 가지 있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여자 문제.
문란한 게 아니라 아버지가 보시기에 맘에 차지 않는 여성을 좋아한다는 게 문제였다.
몇 년 전까지 우리 집에서 집사를 하던 분의 딸을 사랑한다고 했던가?
그때 아마 난리가 났었지?
그때 난 진심으로 형에게 놀랐었다.
아버지의 뜻을 한 번도 거역하지 않던 형이 아버지에게 대드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궁금하긴 했다. 도대체 사랑이란 게 뭐길래 저 형이 저렇게까지 하는지.
얼마나 대단하길래 형을 저렇게 만들 수 있는지.
그래서 한번 찾아가 봤었다.
외모는 그럭저럭 합격점을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성격은 불합격을 줬었다. 그때는.
“신우 씨 동생이구나? 어렸을 때 몇 번 봤는데. 기억나?”
라며 친한 척하는 것이 꼴 보기 싫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아버지는 알까?
후에 그 여자가 어떻게 되는지?
형이 사랑하는 이 여자는 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10명의 가디언 중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한다.
나는 찬성이다.
능력 때문이 아니라 형을 정말 좋아하는 걸 알기 때문이다.
형이 죽은 후에도 그녀 옆에 남자라곤 없었으니까.
형의 기일이 되면 항상 찾아왔으니까.
도움을 많이 받기도 했고.
“그래서 만날 거야 말 거야!”
깜짝이야! 너무 오래 입을 닫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버지가 고함을 치시는 걸 보니.
형 때문에 화도 좀 나신 것 같고.
“얘만 만나고 오면 허락해 주시는 거죠?”
“그냥 만나기만 하면 내가 허락을 해줄 것 같으냐?”
“그럼요?”
“차도 한잔 마시고 밥도 좀 먹고 그 뭐냐 영화 같은 것도 좀 보고 오면 허락해 주마.”
아버지가 좀 혼란스러운 일이 있으신 모양이다.
내가 ‘못난 놈’인걸 알면서 다른 사람들은 그걸 모른다고 생각하는 걸까?
“걔가 저를 보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볼 것 같으세요?”
“그러니까 네놈이 잘해야지.”
“저 망나닌데요?”
“풉!”
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형이 웃음을 참는 모습이 보였다.
형이 웃을 때도 있네?
“그걸 알긴 아는구나? 난 모르는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말을 하시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었다.
아니 그걸 아시는 분이 이런 자리를 마련했다고?
“여자가 도망가면요.”
“그럼 허락해 줄 수 없지.”
아버지의 단호한 모습을 보자 아쉽지만 다른 방법을 찾아봐야 할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내 통장에 있는 돈 빼다가 쓰는 거기 때문에 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돈을 빼갔다는 걸 들으시면 아버지는 그 사용처를 찾아보실 게 분명했다.
그러다 내가 그 돈으로 ‘안티디텍터’를 구매했다는 걸 알게 되는 날에는 난 아마 정말로 집에서 쫓겨날지도 모른다.
“걱정하지 마라. 그쪽도 네놈이 실수만 하지 않는다면 조용히 있을 테니까.”
“고삐를 걸어 놓으셨다는 건가요?”
“그래.”
“생각해 볼게요.”
전에는 없던 일이었다.
나는 ‘선’이란 걸 본 적이 없었으니까.
나의 아주 작은 변화가 가져온 나비효과일까?
아마 내가 그녀와 정말로 차를 마시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본다면 대한민국이 한번 들썩일지도 몰랐다. 유명그룹은 그만큼 우리나라의 경제에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선화제약 역시 보통은 아닐 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