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214)

쇼핑

띠리리리링-

스마트폰 벨 소리에 나는 현지에게 고개를 돌리며 입을 열었다.

현지가 계속 붙어 있는 게 귀찮기는 했지만 이런 점은 편했다.

“받아봐.”

“제가요?”

“어.”

나한테 연락을 할 만한 사람이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나 형 아니면 따로 연락할만한 사람이 없었다. 아버지나 형이면 현지가 알려주겠지.

거기다 무슨 큰일이 일어난 게 아니라면 나한테 직접 전화를 하시지도 않는다.

현지가 스마트폰을 들어 전화를 받아 잠시 대화를 하고는 나를 보며 물었다.

“김성철이라는데요?”

“그게 누군데?”

“모르는 사람이세요?”

귀에 익은 이름이긴 했다.

근데 쓸데없는 이름은 맞는 것 같았다.

누구였더라?

“어떻게 할까요?”

내가 아무 말도 없이 가만히 있자 현지가 물어왔다.

“끊어.”

현지는 내 말을 듣고는 전화를 끊어버린 것인지 내 옆에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할 일이라고 해봐야 그냥 주변을 돌아다니는 거였지만.

그러다 나에게 와서 시킬 일이 없냐고 물어본다.

이걸 나가라고 할 수도 없고··· 분명 아버지가 시킨 게 틀림없었으니까.

이상한 짓 못 하게 나를 잘 감시하라고 하셨겠지.

띠리리리링-

현지가 내 옆에 둔 스마트폰이 울려 눈길을 돌리니 번호만 찍혀있었다.

이놈이 아마 김성철이란 놈인가 보다.

스마트폰 번호를 바꿔 버려서 이 번호를 아는 사람은 아버지와 형 그리고 몇몇뿐일 텐데?

내가 가장 먼저 한 게 스마트폰을 바꾸고 번호를 바꾼 거였다.

어차피 내 스마트폰에 저장된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대부분 쓸모없는 사람들뿐이니까.

생각하다 보니 약간 의문이 들었다. 누군데 나한테 전화를 하는 거지?

김성철이라? 어떻게 내 폰 번호를 안 거지?

궁금한데 한 번 받아봐?

나는 스마트폰의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형님. 안녕하십니까. 저 김성철입니다.

“누구?”

-왜 이러십니까. 형님 저 5년 전부터···

“됐고. 너 내 번호 어떻게 알았냐?”

나를 형님이라고 부르는 것만 봐도 내 인생에 도움이 될 놈 같지는 않았다.

어떤 놈인지 대충 기억이 나기도 했기에 말을 끊어버리고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았는지 물어봤다.

-네? 그, 그게 어쩌다 보니··· 그것보다 형님 저번에 말씀하신···

“그만! 이제 연락하지 마라.”

나는 내 할 말만 하고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괜히 전화를 받은 것 같았다.

그놈 목소리를 들으니 생각하기도 싫었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 기분이 확 나빠졌다.

“현지야 차 좀 대기시켜라.”

“네? 나가시게요.”

“그래.”

“설마 방금 그 사람 만나시게요?”

“아니. 쇼핑 좀 해야겠다.”

“네? 아, 네!”

스트레스를 푸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돈을 쓰는 거다.

*

“어서 오세요. 고객님.”

유명그룹은 수많은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중 한곳이 바로 유명백화점이었다.

내가 쇼핑을 하기 위해 온 곳은 강남에 위치한 바로 그 유명백화점이었다.

유명그룹의 계열사 중 한 곳이기 때문에 여기서는 맘껏 쇼핑해도 아버지가 별말 안 한다.

그렇다고 수십억씩 써도 된다는 소리는 아니다.

몇억 정도 쓰는 건 상관없다는 말이다.

그리고 내가 아무리 사재껴 봐야 아버지의 비서 중 하나가 쓸모없다고 생각하는 것들은 전부 취소해 버릴 거고.

결국, 내가 사는 건 거의 배달이 되지 않을 거다.

한 마디로 기분만 내는 거지 돈 쓰는 기분만.

하지만 오늘은 다르다.

오늘은 필요한 걸 사러 왔다.

거기다 직접 들고 갈 거다. 내가 아니라 내 옆에 있는 얘가.

“여긴 왜?”

이곳에 도착한 현지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는 내게 말했는데.

“쇼핑하려고.”

현지가 황당한 표정을 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지금 나와 현지가 있는 층은 11층이었는데 이곳은 아무나 출입할 수 없는 곳이다.

기본적으로 가디언이나 헌터가 아니면 출입이 제한되는 이곳은 백화점의 VVIP가 아니라면 일반인은 들어올 수조차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지 백화점이란 말이 어색할 정도로 한산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찾으시는 물건이 있으신가요?”

엘리베이터를 벗어나 출입자격을 확인하자 바로 전담 직원이 따라붙었다.

“일단 좀 둘러볼게요.”

“도련님? 지금 존댓말 하신 거예요?”

아차! 큰일 날 뻔했다.

존댓말을 한 게 무슨 큰일이냐고 하겠지만 나에게는 큰일인 모양이었다.

돌아온 후 처음에는 얼떨떨한 마음에 반말을 좀 했었다.

그런데 시간이 좀 지나고부터 내가 정말 돌아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죽기 전에 쓰던 말투가 나왔는데 그냥 끝에 요를 붙인 것뿐이었다.

문제는 내 말을 들은 사용인들이 아버지께 그 말을 전하고부터였다.

아버지는 내가 수면제를 복용한 후 정신에 문제가 생긴 줄 아셨는지 난리를 피우셨는데 그게 참 뭐라고 해야 할지··· 정말 까딱 잘못했다가는 정신병원에 입원할 뻔했었다.

결국, 나는 다시 사람들에게 편하게 말하면서 아버지를 안심시켜야 했는데.

특이한 건 아빠를 아버지라 부르는 것은 상관없으신 모양이다.

그냥 좀 철이 들었다고 생각해 주면 안 되나?

이건 좀 시간을 들여 바꾸든가 해야겠다.

“내가? 아닌데?”

“잘못 들었나?”

현지는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직원을 보며 입을 열었다.

“제 말이 맞죠? 존댓말 하셨죠?”

“됐고! 따라오기나 해라.”

직원이 입을 열기 전에 빠르게 발을 놀리며 말했다.

현지가 급히 따라오는 모습을 힐끗 보고는 걸음을 천천히 하며 주변을 둘러봤다.

검, 창, 활, 창, 갑옷, 투구, 채찍 등등의 여러 가지 무구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모두 번쩍번쩍하는 것이 명품들인 모양이었다.

하긴 최고가 아니면 팔지 않습니다. 라고 했던가?

각성자의 무구들은 돈이 되기 때문에 광고를 엄청나게 때리는데 얼마 전 유명백화점 각성자 코너에 대한 광고를 봤던 게 떠올랐다.

아마 가장 저렴한 게 몇천은 하겠지.

다만 역시나 내가 찾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하긴 이런 곳에서 ‘안티 디텍터’를 팔 수 있을 리가 없지.

있다고 해도 문제다. 그걸 사면 아버지 귀에 바로 들어갈 테니까.

그래도 혹시나 했건만.

나는 마음을 접고는 뒤따라오는 점원을 향해 몸을 틀며 말했다.

“포션하고 영약은 어디 있지?”

“네. 고객님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직원은 갑자기 몸을 틀어 말하는 나를 보고도 전혀 당황하지 않고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안내했다.

직원을 따라 이동한 곳에는 여러 회사에서 출시되는 모든 종류의 포션이 진열되어 있었다.

색은 모두가 동일했지만, 병의 모양이나 크기 종류가 달랐다.

급에 따라 병의 재질이 더 좋거나 디자인이 더 고급스럽다.

딱 봐도 내가 더 좋아! 라고 소리치는 듯한 포션이 몇 개 보였지만 내가 원하는 종류의 포션은 보이지 않았다.

“마력 포션은?”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도련님이 마력 포션은 어디에 쓰시게요?”

“마시면 몸에 좋다는 말을 들어서.”

어이없는 표정을 짓는 현지의 물음에 나는 대충 둘러댔다.

“그거 다 거짓말인데···.”

“네가 어떻게 알아? 마셔봤어?”

“네? 그게··· 아니요! 제가 그 비싼 걸 어떻게 마셔보겠어요.”

이상한데? 마셔본 것 같은 반응인데?

눈에 띄게 당황하는 현지의 반응이 약간 의심스러웠지만,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어느새 마력 포션이 진열되어 있는 곳에 도착했으니까.

나는 대충 살펴보고 선화제약에서 나온 포션 중 제일 고급스러워 보이는 비싼 걸 가리키며 점원에게 말했다.

“일단 이거 5개만 주고 영약은?”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습니까. 고객님.”

점원은 다른 직원을 불러 내가 고른 포션을 5병 포장하라고 지시한 뒤 영약이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역시나 포션처럼 수많은 영약이 있었는데, 포션과 다르게 하나하나 천천히 설명을 읽어가며 살펴보았다.

포션이야 이곳에서 파는 것 아무거나 먹어도 탈이 나는 일이 없지만, 영약은 아니었으니까.

잘못 먹었다가는 몸에 이상이 생길 수 있어서 조심해야 한다.

순수한 마력의 결정체이기 때문에 좋다고 무조건 입속에 넣었다가 몸이 터져버리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믿거나 말거나의 이야기지만.

거기다 영약은 각성자 등급에 따라 구매할 수 있는 영약에 제한이 있어서 각성자란 사실을 숨기고 있는 내가 구매할 수 있는 영약은 일반인들이나 이제 막 각성한 자들이 구매할 수 있는 것들뿐이었다.

물론 내가 살려고 마음먹으면 못살 것도 없었지만 괜히 아버지 귀에 난동을 부렸다는 말이 전해지면 골치 아프기 때문에 적당히 좋은 것을 찾아야 했다.

“이거 세트로 있나?”

나는 이번에도 선화제약에서 나온 영약을 골랐다.

보통 영약은 개별로 판매하지만, 세트로도 나오는데 그 가격이 좀 더 저렴했다.

하지만 저렴하다는 이유로 내가 세트를 선택한 건 아니다.

개별로 구매하면 포장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데 그 기다림을 피하기 위해서다.

내 쇼핑은 여기까지니까.

“네. 세트로도 판매하고 있습니다.”

“그럼 그걸로 하나 줘.”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점원 다른 직원을 불러 지시하고는 입을 열었다.

“또 필요하신 건 없으신가요?”

“됐어. 계산이나 해줘.”

점원은 나를 계산대로 안내했는데, 그녀를 따라 이동하던 내 눈에 어디선가 본 물건이 들어왔다.

이곳은 무구나 영약, 포션 같은 완성된 제품만을 판매하지 않고 균열에서 나오는 몬스터의 부산물도 판매하는데 그 부산물 코너에서 내 눈에 어디선가 봤던 그것이 내 발을 붙잡았다.

“잠깐만 여기 좀 보고 가지.”

점원에게 말을 하고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내가 본 건 하나의 알이었다. 일반적인 수박보다 조금 더 큰.

생긴 것도 비슷하다. 색깔만 좀 다를 뿐 전체적으로 은색의 빛을 띠고 금색의 줄무늬가 있는 모양의 알이었는데 난 분명 이걸 본 적이 있었다.

“이건 뭐지?”

점원은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약간 당황한 표정을 짓더니 입을 열었다.

“고객님 잠시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부산물은 제 담당이 아니라서요. 바로 담당 직원을 불러드리겠습니다.”

직원은 담당 직원을 부르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급히 뒤돌아 떠났는데.

“알이네요? 음? 이게 무슨 알이지? 스네이크 종류는 아닌 것 같은데? 그리핀 알인가?”

내 고개가 빠른 속도로 현지를 향해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일반인들은 몬스터의 알이란 것이 있는지조차 모른다.

어쩌다 한번 발견되는 것이고 그 발견된 것 자체도 기업의 연구소나 국가 시설로 옮겨지기 때문이다. 그런 걸 현지가 알 수 있는 이유는 딱 하나 직접 봐야 가능한 건데 가디언이 아니라면 직접 볼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그뿐만이 아니다.

이 알은 그리핀의 알과 비슷하긴 하다. 색과 무늬만 빼면 똑같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는데 그걸 알아본다는 것은 그리핀의 알을 자세히 본 적이 있다는 말이었다.

“왜요? 도련님. 제 얼굴에 뭐 묻었나요?”

“아, 아니. 그냥 오늘따라 이뻐 보이는 것 같아서.”

쇼핑

이년 이거 가디언이었어?

그것도 그리핀을 볼 정도면 최소 A급은 된다는 소리잖아?

“지금 저한테 작업 거시는 거예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근데 현지야. 니가 우리 집에 언제 들어왔지?”

“음~ 이제 1년 정도 됐을걸요?”

대충 날짜를 계산해 보니 내가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알고 계셨던 거야? 내가 각성했다는 걸?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자신을 감시하기 위해 현지를 옆에 붙여놨던 거였다.

아마 내가 무슨 능력인지는 알아내진 못하셨을 거다.

아직 난 내 능력을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도 밖에서 사용하지도 않았으니까.

아, 병원에서 한번 썼나?

내가 본격적으로 능력을 사용하고 연습하기 시작한 게 스물다섯이 되고부터였으니까 지금까지는 그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중요한 건 전생에서 아버지가 내 능력을 알고 있었냐는 건데···

모르셨을 거다.

그때 현지는 내 방에 잘 들어오지도 않았고 집 자체에 특수 처리를 해놔서 안쪽을 살피지도 못했을 테니까.

거기다 나는 항상 능력을 사용할 때는 문을 잠그고 ‘안티디텍터’를 사용했기 때문에 능력은 들키지 않았을 거라 생각되었다.

만약 아버지가 아셨다면 그렇게 돌아가시진 않으셨겠지.

“고객님? 어떤 물건에 대해 궁금하신가요?”

현지 때문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에 부산물을 담당하는 직원이 도착해 있었다.

“이게 뭐지?”

“이것은 얼마 전 출현한 자이언트 스네이크의 뱃속에서 발견된 부산물로···”

그러니까 자이언트 스네이크 뱃속에서 발견됐는데 그놈 알은 아니고 그놈이 먹은 알인데 생체반응도 없고 그 속이 텅텅 비어 있어서 이런저런 측정 후 결국 이리로 옮겨졌다?

껍질의 단단함 때문에 재료로서 이곳에서 판매되고 있었던 거라고?

이 알이 정말 내가 알고 있는 그게 맞는 걸까?

맞으면 정말 대박인데.

펜릴의 알

은색으로 빛나는 털에 금빛의 뿔을 가진 늑대를 닮은 마수.

그 강함은 성체가 되지 않았음에도 A급을 가볍게 뛰어넘어 S급에 올라설 정도였다.

육체의 강함뿐만 아니라 뿔을 통해 발산되던 그 뇌전은 A급 몬스터들조차 순식간에 재로 만들어 버릴 만큼 엄청난 위력을 자랑했었는데.

전생의 나는 그 모습을 우연히 목격한 적이 있었다.

눈부신 금빛 뇌전이 지나가며 스치는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 버리던 강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목격한 그 눈부심에 반한 나는 펜릴에 대한 정보를 찾아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이 알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펜릴의 알이라 추정되는 사진 속에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알의 모습과 모든 것이 일치하고 있었다.

크기, 모양, 색깔, 무늬까지 정확히.

그래서 그놈이 펜릴을 가지고 있었던 거였구나.

대장장이 출신이라고 했었지?

여기서 이걸 구매해서 부화시킨 거였어?

미안하지만 이번 생의 펜릴은 내가 가져간다.

“얼마지?”

“15억입니다.”

“15억? 이 알이 15억이라고요?”

마지막은 현지가 한 말이다.

어리둥절 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고작 무구의 재료로 쓰이는 이 알이 15억이라니?

“그게··· 조금 처지긴 하지만 강도가 아다만타이트에 버금가기 때문에 높은 가격이 책정되었습니다.”

펜릴의 알이라면 그 단단함이 아다만타이트에 버금가는 게 당연했다.

뭐, 내가 원하는 건 그 강도가 아니지만,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구매하도록 하지.”

“네 고객님. 감사합니다. 바로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도련님! 이걸 어디에 쓰시게요! 15억이에요. 15억. 이건 분명히 회장님도 가만히 있지 않으실 거라고요.”

현지가 계속 뒤에서 투덜거렸지만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천 배는 남겨 먹는 장사였다. 아니 만 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물론 내 생각이 정확하다면 말이다.

집에 가서 확인을 해봐야 알겠지만 아마 내 생각이 틀리진 않을 거다.

모든 정보가 일치하니까.

고맙다. 김정배 네놈이 자랑하지 않았으면 모르고 지나쳤을 테니까.

“계산해.”

“네? 제가요?”

“아버지가 카드 주셨을 거 아니야.”

“그건 만약을 대비해서 가지고 있으라 하신 건데요?”

“지금이 그 ‘만약’이니까 계산하라고.”

현지는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곤 그 안에서 한 장의 카드를 뽑아 들었다.

우리 그룹 계열사의 카드사에서 발행하는 VVIP의 검은색 카드를 손에 쥐고 있던 현지는 계산대의 직원에게 입을 열었다.

“얼마에요?”

“네 고객님. 총 19억 7천 5백 60만 원입니다.”

“여, 여기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손을 벌벌 떨며 카드를 내미는 현지를 보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A급 가디언 정도 되면 저 정도 가격의 무구를 한둘 정도는 가지고 있을 거였다.

저 모습이 연기인지 실제인지 모르겠지만 연기라면 보통 여자는 아니리라.

“들고 따라와. 집에 갈 거니까.”

“제가요?”

“그럼 내가 들리? 너 내 메이드라며?”

내가 구매한 것들을 하나씩 들던 현지는 결국 손이 모자라는지 나를 불렀다.

“저기 도련님. 제가 손이 두 개뿐이라 그러는데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돼요?”

고개를 돌려 현지의 모습을 본 나는 알을 포장한 상자를 들지 못하고 어쩔 줄 몰라 하는 현지에게 다가가 포션과 영약의 쇼핑백을 빼앗으며 입을 열었다.

“빨리 와. 배고프니까.”

“네. 도련님.”

알을 포장한 상자를 번쩍 들어 올리는 현지를 보자 가디언이라는 생각에 확신이 들었다.

보통 성인 여성이 쉽게 들어 올릴 만한 무게는 아니었으니까.

좀 멍청한 것 같긴 하지만.

*

“형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성철.

내게 연락을 했던 놈. 나는 지금 놈을 만나고 있다.

처음에는 만날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자 왠지 쓸모가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는데.

내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귀찮은 일을 맡길 만한 놈이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내가 놈을 만나고 있는 이유였다.

이놈은 그에 부합하는 아주 적절한 놈이었으니까.

그냥 아버지가 붙여주는 사람을 써볼까도 생각해 봤지만 그건 좀 안될 것 같았다.

내가 하는 모든 일이 아버지의 귀에 들어갈 게 뻔했으니까.

김성철도 다르진 않겠지만 그래도 숨겨지는 게 조금은 있을 거란 생각에서 이놈을 선택했다.

나름 의리도 있고.

“너랑 연결된 놈 누구냐?”

나는 다짜고짜 김성철을 몰아붙였다.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는데.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생각 잘해라. 너 말고도 쓸모 있는 놈들 많으니까.”

“그런 거 없습니다. 제가 형님을 두고 어떻게 딴 주머니를 차겠습니까?”

결백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김성철의 표정을 보고 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누가 보면 정말 억울한 줄 알겠는데?

“정말이냐?”

“네 형님. 믿어주십시오.”

김성철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는 표정을 굳히고 녀석을 노려봤다.

“내 번호 어떻게 알았어?”

그제야 김성철의 표정이 찌그러들었다.

내 번호.

바뀐 내 번호는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그 비서들 정도?

마지막으로 작은아버지란 놈만이 알고 있었다.

현지도 알고 있나?

얼마 전 형을 통해 작은아버지가 내 번호를 비서를 통해 알아봤다는 사실을 알아냈는데. 김성철이 내 번호를 안다는 것은 당연히 작은아버지와 연결된 놈이라는 소리였다.

“그, 그게 어쩌다 보니···”

지금 나의 행동을 보고도 김성철은 아직 내가 예전의 그 멍청이로 보이는 모양이다. 이런 놈이 작은아버지 직통은 아니겠지. 아마 그 밑에 있는 놈들과 연결되어 있을 거다.

“닥치고. 똑바로 들어라. 그 줄 끊어내고 내 쪽에 붙어.”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기회를 주는 거다. 니가 이 세상을 떠나지 않아도 될 기회.”

“네!? 그, 그게···”

이런 놈들의 특징이 바로 자신들은 절대 버려지지 않는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거였다. 가지고 있는 증거가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상한 놈들.

뭐, 놈들도 대비 정도는 해놨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다고 그쪽을 배신하란 소리는 아니야. 어차피 네놈이 한 일이라고 해봤자 나 부추긴 거밖에 없잖아.”

녀석은 조용히 내 말을 들으며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아마 속으로는 엄청나게 고민 중일 거다.

누가 자신에게 더 도움이 되는지.

이럴 때 한마디 해주면 내 쪽으로 마음이 기울겠지.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보여줬다.

“그냥 그쪽 끊어내고 내 말 들으면서 편히 살아라. 먹고 사는 데는 지장 없게 도와줄 테니까.”

“정말···이십니까?”

근데 이놈이 진짜 그 줄을 끊을지는 약간 의문이었다.

나에게 거짓을 말할지 모르기 때문에 약간 고민이 되었지만 그걸 알아볼 방법을 생각해 뒀기에 걱정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 어쩔 거냐?”

“그럼 형님 뜻에 따르겠습니다.”

“완전히 끊어내면 연락해라. 그리고 그때는 형님 말고 도련님이라고 불러.”

형님이 뭐야.

무슨 조폭도 아니고 나보다 나이도 많은 놈이.

근데 괜찮았나? 대충 영화에 나오는 거 따라 해봤는데 괜찮았겠지?

*

호텔의 카페에 앉아 있는 나는 약간 짜증이 올라온 상태였다.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나타나지 않는 선화제약의 손녀라는 여자 때문에.

처음엔 좋게 생각했다.

이대로 나타나지 않는다면 아버지의 허락을 쉽게 얻어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아버지에게 전화를 드리고부터 내 표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썩어가기 시작했다. 기다려! 라는 아버지의 말 때문에.

만약 그녀가 나타나지 않으면 절대로 허락을 해 주지 않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카페의 출입문과 시계를 번갈아 보며 인상을 구길 뿐이었다.

다만 그녀가 아직 나타나지 않음으로 인해 원래 약속했던 금액을 몇 배로 올릴 수 있게 되었다.

문제는 그녀가 언제 올지 알 수 없다는 것뿐이다.

오긴 올 거다.

아무리 대단한 집안이라도 우리 집안을 무시할 수는 없을 테니까.

그녀가 안 나타나면 그녀의 할아버지라도 오겠지.

그럼 나는 그녀의 할아버지와 예정된 식사를 하고 영화를 보면 된다.

이건 좀 아닌가?

“안녕하세요. 민선화에요.”

출입문만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있던 그때 옆에서 들리는 여성의 목소리에 반사적으로 고개가 돌아갔다.

고개를 돌린 내 눈에 들어온 건 사진 속에 있던 여성의 모습이었다.

손을 내민 채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잡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던 나는 결국 그 손을 잡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유선우입니다.”

내 인사에 눈이 동그래진 민선화는 곧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살짝 미소지었다.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던 나는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잠시 멈칫했다.

“생각보다 매너가 좋으신데요?”

“아, 예 뭐···”

아버지와 딜을 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그녀는 이런 내 모습이 신기한 모양이었다.

뭐, 딜을 하지 않았어도 이 정도는 했을 거다.

기본 예의니까.

“그런데 미리 와 계셨으면 말씀을 좀 해주시지 그러셨어요. 좀 민망하네요.”

나는 약속 10분 전에 왔기 때문에 그녀가 미리 와 있을 거란 생각을 못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나보다 일찍 와서 기다린 모양인데 내가 도착하고도 찾지 않아 지금껏 지켜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번 둘러 볼 걸 그랬다.

그렇다고 내가 잘못했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녀가 예의가 없는 거지.

나라는 사실을 알았으면 먼저 말을 걸었어야지.

“죄송해요. 그냥 궁금했거든요. 어떤 사람인지.”

그러니까 어느 정도 망나닌지 지켜봤다는 소린가?

화가 좀 났지만, 사과를 했으니 넘어가기로 했다.

거기다 그녀가 필요한 건 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기도 했고.

“일단 일어날까요? 식사하시면서 이야기하죠. 아, 아직 식사 전이죠?”

“네, 뭐···”

틈을 줘선 안 된단 생각에 일단 밀어붙이기로 했다.

어정쩡하게 있다가 그녀가 도망가면 나만 손해니까. 소문을 들었다면 내가 보통은 아니란 사실을 알고 있을 테니까.

거기다 이미 차는 충분히 마신 것 같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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