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14)

연말 파티

펜릴.

은색으로 빛나는 털과 이마에 솟아있는 금색의 긴 뿔을 가진 신화 속에서나 볼법한 멋진 모습을 가진 마수.

전생의 내 눈에 비치던 그 모습은 삶에 지쳐 식어버린 가슴을 다시 힘차게 뛰게 할 정도로 나를 매료시켰었다.

지금 내 눈앞에서 마력을 빨아들이는 알을 보자 그때의 그 장면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그때 느꼈던 단 하나의 감정.

탐욕.

가지고 싶다. 저것을 내 것으로 두고 싶다.

그 힘들었던 시절 욕심내었던 단 하나가 바로 이 알에서 태어날 존재였다.

은빛 섬광과 금빛 섬광.

펜릴을 지칭하던 두 개의 칭호.

적들을 향해 빛살처럼 달려나가는 모습을 보고 누군가 말했다.

은빛 섬광이라고.

금빛 뿔에서 뿜어져 나오는 뇌전을 보며 다른 누군가가 말했다.

금빛 섬광이라고.

그 모습을 목격한 나는 정말 그 칭호들이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은빛으로 빛나며 스쳐 지나가는 모든 몬스터들을 쓸어버리던 모습.

금빛으로 빛나며 쏘아져 나가던 뇌전은 수백의 몬스터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 버렸다.

누구나 그 모습을 보며 탐욕을 드러냈었다.

늠름한 모습에 매료된 자들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그 시절의 S급의 가디언들 조차 가볍게 뛰어넘던 그 강대한 힘과 멋진 외양.

곧 그 펜릴이 내 것이 된다는 사실이 나에게 고양의 감정을 선사했다.

어서 그 알을 깨고 나와 나를 기쁘게 해주렴.

똑똑-

“도련님 들어가도 될까요?”

“어, 어 잠깐만!”

마력을 주입하던 알에 급히 손을 떼며 입을 열었다.

이것만큼은 현지에게 들켜서든 안된다.

혹여나 현지가 이 알에 마력을 주입하게 된다면 어떤 일이 발생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펜릴의 알에 마력이란 그 피와 살.

주입된 마력을 토대로 모든 육체를 구성하기 때문에 그 마력을 주입한 대상을 부모 혹은 주인이라 생각하게 될 펜릴에게 다른 사람의 마력은 혼란을 일으킬지도 몰랐다.

이 펜릴은 오로지 내 것이어야 한다.

나는 서둘러 알을 숨기며 말했다.

“들어와도 돼.”

내 말에 현지가 문을 열고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도련님 저한테 뭐 숨기는 거 있으시죠?”

“아니 없는데?”

현지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런데 왜 요즘 저 없을 때 방에서 마력의 파동이 느껴질까요?”

“어? 아 그거 내가 아직 말 안 했나? 이것에 대해서.”

나는 현지의 눈앞에 인피니티 링을 끼고 있던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게 뭔데요?”

현지는 인피니티 링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조금 전까지 링에 마력을 주입했기에 희미한 마력의 향이 느껴질 거다.

“너 유물 알지? 이게 그 유물이거든.”

“네?!!!”

깜짝 놀라 소리치는 현지에게 나는 천천히 링에 대한 설명을 시작했다.

“인피니티 링이라고 마력을 저장해 둘 수 있는 유물이야.”

“이게 유물이라고요? 진짜요?”

고개를 틀며 이리저리 링을 살펴보는 현지가 놀라는 것은 간단하다.

유물이란 것이 그렇게 쉽게 볼 수 있는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유물의 숫자는 많지만 가진 사람들이 드러내지 않고 숨기고 있을 테니까.

아무리 현지라 해도 두 눈으로 직접 본 적은 아마 없지 않을까?

“저 한 번만 껴보면 안 돼요?”

“안돼! 근데 갑자기 무슨 일이야? 뚱이 밥줄 시간 아니야?”

“그거 현태팀장에게 맡겼거든요. 이제 제 담당 아니거든요.”

“뭐? 그 귀한 인력을 고작 그런데 쓴단 말이야?”

A급 가디언에게 뚱이 뒤치다꺼리나 시킨다는 게 좀 어이가 없었다.

시킬 거면 그 밑에 있는 애들 중에 믿을만한 애를 뽑아서 맡기면 될 것을 문득 김현태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저도 귀한 인력이거든요!”

“깜짝이야.”

현지가 갑자기 소리를 빽 질렀는데.

생각해 보니 현지가 현태보다 더 귀한 인력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현지 이것은 하는 행동 때문에 그런가? 자꾸 얘가 누군지를 까먹는단 말이야.

“그것보다 왜 왔냐고. 내가 부르기 전까진 오늘은 오지 말라고 했잖아.”

“그게··· 아! 생각났다. 회장님께서 부르셔요.”

하는 행동만 보면 약간 멍청해 보이는 그녀가 도대체 어떻게 살성이 되었는지 의문이 들었다.

“아버지가? 왜?”

“저야 모르죠. 집에 들어오시고 바로 도련님을 찾으셨어요.”

“알았어. 바로 간다고 전해드려.”

“네.”

밝게 대답하며 문을 열고 나가는 현지를 보자 한숨이 나왔다.

저건 생각이 없는 것 같단 말이야?

*

똑똑-

“아버지 저 찾으셨어요?”

서재 앞에 선 나는 노크를 하며 입을 열었다.

“그래. 들어와라.”

안에서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문고리를 돌리며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는 책상이 아닌 소파에 앉아 계셨는데.

나를 기다리고 계셨는지 시중드시는 분 중 한 분이 차를 탁자에 내려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내 것까지 포함해서.

“무슨 일이신데요?”

나는 아버지의 왼쪽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는 시중드는 분과 개인 경호원들을 눈짓으로 내보내며 잠시 침묵하셨다.

“보고 받았다. 그 오크가 강하다고 하던데 정말이냐?”

나와 아버지를 제외한 모든 사람이 서재에서 퇴장하자 그제야 입을 여셨다.

“네, 뭐 엄청 강하죠. S급 애들이랑 붙어도 안 밀릴걸요?”

아버지의 말에 나는 약간 뿌듯해져서는 뚱이에 대한 자랑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점점 더 강해질 거에요. 싸우면 싸울수록 강해지는 놈이니까요.”

“그러냐? 그거 잘 됐구나. 그런데 정말 위험한 건 아니지?”

“아버지 저번에 설명해드렸잖아요. 저랑 계약 비슷한 거로 묶여 있다니까요.”

아버지는 내 설명에도 의심의 눈빛을 지우지 않으셨다.

“믿을만한 계약이더냐?”

계약이란 단어가 나오자 아버지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 내 가슴을 찌르려 하셨다.

사람과 사람의 계약인 줄 아시는 걸까?

“아버지 이 계약은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그런 계약이 아니에요. 영혼이 이어진 느낌? 하여튼 걱정하실 거 없어요.”

“그럼 다행이고.”

“그것보다 왜 부르셨어요. 뚱이 때문은 아닌 거 같은데.”

나는 아버지가 뚱이에 대한 궁금증으로 나를 부른 게 아니란 걸 그 예상하였기 때문에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말을 꺼냈다.

“크흠.”

아버지는 헛기침하시며 약간 뜸을 들이시고는 입을 열었다.

“너도 이번 연말에 열리는 행사 알고 있지?”

“알죠. 우리나라 유명인들 전부 참석하는 파티 말하는 거잖아요.”

연말에 열리는 이상한 행사가 하나 있었다.

정 재계는 물론 유명 가디언이나 연예인, 언론인, 각 계층의 유명인사란 자들 모두가 참석하는 파티였다.

물론 나는 단 한 번도 이 파티에 참석한 적이 없었지만.

망나니 중에는 가장 유명한 망나니인 내가 참석할 리 없었다.

아버지가 데려가 줄 리도 없고 스스로 그 귀찮은 자리에 참석할 마음도 없었으니까.

“그 파티는 왜요?”

“···그게 말이다.”

쉽게 대답하지 않으시는 아버지를 보며 의아함이 들었다.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으신데?

내 앞에서 아버지가 이렇게 뜸을 들이시는 것을 나는 본적이 없었다.

아! 저번에 선환가 뭔가 하는 여자랑 선보라고 하실 때 한번 이러셨던 것 같은데?

“설마? 저보고 그 파티에 참석하라고요?”

“···그래. 올해는 너도 참석하는 게 어떠냐?”

“진심이세요?”

“진심이고 말고. 너도 이제 나이가 있지 않으냐? 이제 슬슬 그런 곳에 얼굴도 좀 비치고 그래야 하지 않겠느냐?”

황당함에 말문이 막혀왔다.

뭔가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분명 전생에는 이런 일이 없었는데?

파티는커녕 내가 밖에 돌아다니는 것조차도 심기를 불편해하셨던 분이다.

“···이유가 뭐예요? 저를 꺼내 놓으시려는 분명한 이유가 있을 거잖아요. 요즘 안 풀리는 일이라도 있으세요?”

분명 무슨 이유가 있으실 거였다.

겨우 몇 개월 조용했다고 나를 이런 식으로 꺼내 놓으실 분이 아니었으니까.

“멍청한 줄 알았더니. 그래도 생각이란 걸 하긴 하는구나.”

아버지는 나를 질책하시면서도 낮게 미소를 지으셨다.

“이유는 알 필요 없다. 그냥 참석해서 저번에 선봤던 아이랑 함께 시간만 좀 보내면 된다.”

“설마? 걔랑 결혼이라도 시키실 생각이세요?”

“가서 사고만 치지 않고 그 아이랑 친한 척이나 좀 해주려무나.”

내 말에 대답하지 않으시고 계속 자신의 이야기만 하시는 아버지가 낯설게 느껴졌다.

어째서? 왜 변해버린 거지?

정말 몇 개월 사고 치지 않고 조용히 지냈던 게 이렇게 돌아오는 건가?

아니면 정말 전생에 내가 모르던 뭔가가 있던 걸까?

솔직히 파티에 참석하는 건 상관이 없었다.

그냥 조용히 있다가 아버지 말씀대로 선화라는 여자와 잠시 대화를 좀 나누는 거?

전생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별로 힘들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다만 좀 귀찮을 뿐.

하지만 그 이유를 짐작하지 못하는 지금 상황이 답답했다.

분명 그녀와 나를 결혼시키려는 것은 아닌 게 틀림없었다.

그녀가 나와 결혼하지 못하는 이유를 난 알고 있었으니까.

약혼자가 있다. 그녀에게는.

그쪽 집안과 약혼한 집안만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나는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녀가 태어났을 때 비밀리에 치러진 약혼식.

몇 년 후 그 사실을 밝히고 그녀는 순백의 드레스를 입는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나는 지금 아버지가 나에게 분명 숨기는 게 있다는 걸 안다.

“···이유는 말해주실 수 없으세요?”

“그걸 네가 알아봐야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네놈 성격상 오히려 화만 내겠지.”

내 성격상 화만 난 다라?

정말 무언가 있는 게 틀림없었다.

지금 아버지를 골치 아프게 하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유명그룹을 건든다고?

아직 어비스 조차 열리지도 않았는데?

호랑이 무서운 줄 모르는 하룻강아지는 아닌 게 틀림없었다.

아버지의 심기가 불편한 걸 보니 상대가 보통은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참석할게요. 뭐, 어려운 일도 아니고 고작 파티 참석해서 여자랑 시시덕거리기만 하는 게 뭐가 어렵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절대 사고는 치면 안 된다.”

“저 옛날 선우 아니에요. 변했다니까요.”

“그래. 믿으마.”

지금껏 굳어있던 아버지의 표정이 펴지며 미소가 드러났다.

“사실 그런데 한 번쯤 가보고 싶긴 했어요.”

거짓이 아니었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으니까.

돌아오기 전 나를 구원해주고 복수를 대신 해 줬던 사람.

최강준.

나를 이용해 유명그룹을 차지한 작은 아버지를 그 자리에서 끌어내렸던 존재.

그로 인해 내가 풀려날 수 있었다.

후에 대한민국의 영웅이라 불리며 세계 10대 길드 중 한 자리를 당당히 차지하고 대한민국을 강대국 중 하나로 만들었던 사내였다.

물론 지금의 그는 아직 영향력이나 그 힘이 그때에 비해서 보잘것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현재에도 대한민국 10대 길드 중 하나를 차지하고 있는 그라면 분명 파티에 참석할 거다.

직접 고맙단 인사는 못 하겠지만, 그저 반갑다는 인사 정도는 할 수 있을 거고 멀리서 그를 지켜보며 앞으로의 행보에 대한 축하 정도는 해줄 생각이었다.

은인을 볼 생각에 내 입가에는 슬며시 미소가 지어졌다.

“아버지. 저 이만 가볼게요. 준비할 게 좀 있어서요.”

“그래. 가보거라.”

“네. 그럼 쉬세요.”

선물이라도 하나 준비할까?

그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는 나를 싫어할지 모르지만 그래도 난 그를 돕고 싶었다.

이때는 몰랐었다.

그와 내가 어떤 식으로 얽혀 있는지를.

연말 파티

“성철아 이번엔 30억이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지하.

김성철의 아지트에 또 한 번 방문한 나는 작은아버지의 카드를 내밀며 입을 열었다.

“네. 도련님. 바로 다녀오겠습니다.”

카드를 공손하게 받아들고 문을 열고 나가는 성철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에휴~ 현지야.”

방 안에 있는 사람이라곤 나 혼자뿐이었지만 분명 현지가 어딘가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얼마 전 봤던 그 은신 능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테니까.

“너 있는 거 다 안다.”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아버지가 그 귀한 S급 가디언을 집에서만 내 옆에 붙여 놓는다?

말도 안되는 소리.

집에서만 붙일 거였으면 C급이었어도 충분하겠지.

최상위 능력자를 그런 식으로 써먹는 것은 아무리 우리 아버지라도 엄청난 낭비였다.

“진짜 이럴 거야?”

모르는 사람이 보면 미친놈이라고 생각할지 모를 혼잣말을 계속하던 나는 결국 집에서 챙겨온 식칼을 꺼내었다.

식칼을 챙기던 내 모습을 현지가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던 것이 떠올랐다.

이게 왜 필요한지 의아했겠지.

“잘 봐라. 내가 이걸로 뭘 하는지.”

식칼을 거꾸로 잡은 나는 내 배를 겨냥했다.

마치 할복을 하는 것 같은 포즈를 취한 나는 그대로 식칼을 빠르게 찔러넣었다.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가고 심장은 터질 것처럼 쿵쿵 뛰었지만 멈추지 않았다.

식칼이 배때기를 쑤시기 직전.

검은색 장갑이 갑자기 나타나 식칼을 움켜잡았다.

장갑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자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웬 도둑년이었다.

온몸을 감싼 시커먼 타이즈에 눈만 보이는 마스크를 쓴 여자.

현지였다.

“도련님.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잖아요.”

한숨을 쉬며 말하는 현지를 보자 할 말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시발. 죽는 줄 알았네.”

식칼을 챙기고 이곳까지 오면서 수많은 생각을 해야 했다.

그냥 나오라고 할 때 제발 나와줘라.

식칼을 품에서 꺼내면서도.

정말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만약 현지가 없으면 배때기에 구멍만 나는 거 아닌가?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이곳까지 오는 내내 벌벌 떨어야 했다.

확신은 했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포션을 챙겨왔기에 죽을 일은 없었지만.

“어쩔 수 없잖아요. 회장님이 몰래 지켜보라고 하시는데.”

“그거 지금도 유효한 거냐? 나 이제 망나니 아니라며? 변했다며?”

“아직 회장님께 여쭤보지 않아서···”

“그럼 집에 돌아가면 바로 물어봐라. 아니. 그럴 필요 없어. 내가 직접 물어볼게.”

사실 나를 보이지 않는 곳에서 감시 및 보호를 하는 건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조금 불쾌할 뿐이었다.

진짜 중요한 것은.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는데 현지가 모두 지켜보고 있다면?

마음에 드는 여성과 하룻밤을 지새우는데 현지가 은신한 채 모든 걸 지켜보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쪽팔렸다.

정말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누군가 나를 지켜보고 있다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래서 현지를 꺼내 놓아야 했다.

“네···”

“일단 숨어있어. 좀 있으면 성철이 올 거니까.”

내 말에 순식간에 눈앞에서 사라지는 현지를 보고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 있냐?”

“여기요.”

순간 등 뒤에서 들리는 현지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현지가 있음을 알면서도 깜짝깜짝 놀라는 이 증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똑똑-

“도련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그래 들어와라.”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성철은 저번보다 더 큰 자루를 들고 있었는데.

“쏟을까요?”

“그래.”

촤르륵-

한번 슥 살펴본 내가 성철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자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마석들을 다시 담기 시작했다.

자루에 마석을 모두 담은 후 자루를 어깨에 짊어지는 성철을 보던 나는 조용히 눈을 감고 기다렸다.

내 폰이 울릴 때까지.

우웅-

채 5분이 지나기도 전에 폰의 진동하기 시작했다.

발신인은 역시나 작은아버지.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스마트폰을 대며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약간 귀찮은 티를 내며 전화를 받았다.

-선우야. 작은아버지다.

“알아요.”

지금 나에게 가장 필요한 건 버릇이 없어 보여야 한다는 것이다.

-혹시··· 또 마석 구매했니?“

”그런데요. 왜요?“

-아니 선우야 너한테 마석이 도대체 어디에 필요하다고 그걸···.”

말이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는 걸 보니 화가 정말 많이 나긴 했나 보다.

“이번엔 필요해서 산 건데요?”

-뭐? 필요하다고?

내 말에 대답하는 작은아버지의 목소리에는 어떤 기대감 같은 게 서려 있었다.

마석을 가지고 어떤 사고를 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이 들었나 보다.

“저번에 산 마석을 욕실에 바닥에 깔아뒀는데 괜찮더라고요. 반짝거리는 게 있어 보이기도 하고.”

-뭐? 욕실?

“네. 욕실에 깔아봤는데 괜찮더라고요. 그런데 조금 부족한 거 같아서 이번엔 넉넉히 샀어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오는 모양이다.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작은아버지 입장이었어도 똑같았을 거니까.

어떤 미친놈이 욕실 바닦에 50억 상당의 마석을 깔아두겠는가.

통화를 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성철도 입을 벌리곤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왜요? 조카가 돈 좀 쓰는 게 아까워요?”

-그, 그게··· 그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아무리 나를 이용하기 위해 내 비위를 맞춘다고 해도 이건 아니란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조카가 그깟 돈 좀 썼다고 지금 아까워하는 거예요?”

-그, 그게 말이다. 선우야···

“됐어요! 거! 얼마나 한다고 시발. 다 돌려줄 테니까 와서 가져가요!”

돌려줄 생각 따윈 없었다.

정말 받는다고 하면 카드나 던져주고 아버지가 자금줄을 막아놔서 지금은 안된다고 할 생각이었다.

-아니다. 괜찮아 선우야. 조카가 필요하다면 써야지.

말은 저렇게 하지만 아마 카드 한도를 대폭 낮춰버리겠지.

“작은아버지. 저 아버지 아들이에요. 유명그룹 막내! 이깟 거 나중에 백배 천배로 돌려드릴 테니까 좀생이처럼 굴지 좀 말라고요! 알았어요?!”

-그렇지. 선우가 나중에 회장님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까짓게 아까울 리 있나. 나는 그냥 궁금해서 전화해 본 거야.

통화하는 목소리를 통해 아까워하는 모습이 뻔히 보였다.

아마 전화를 끊으면 책상을 미친 듯이 내려치겠지.

“됐네요. 그럼 이제 끊을게요.”

-자, 잠깐

뚝-

작은아버지가 뭐라 말하려 했지만, 전화를 끊어버렸다.

“들고 따라와라.”

“네, 네! 도련님.”

성철이는 내 통화내용이 어이가 없었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급하게 대답했다.

나는 그대로 저번과 똑같이 마석 자루를 트렁크에 싣고 자루를 열어 마석을 한 웅큼 꺼내 성철에게 건네주고 차에 몸을 실었다.

“안녕히 가십시오. 도련님!”

*

쾅-

휴대폰을 집어던지고 책상을 부실 듯 내려친 부회장은 대기하던 비서에게 소리쳤다.

“카드 막아! 당장!”

“네? 네!”

부회장이 불같이 노하며 소리치자 비서는 서둘러 움직여 부회장실을 나갔다.

곧 비서가 다시 들어와 부회장에게 보고했다.

“카드 정지시켰습니다.”

쇼파에 앉아 화를 삭이려던 부회장은 다시 들어온 비서를 향해 소리쳤다.

“그 새끼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당장 알아봐!”

“네. 바로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당장 진 이사 들어오라고 해!”

“네.”

비서가 나가고 잠시 시간이 지나자 진 이사가 뛰는 것처럼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를 삭이기 위해 소파에 앉아 심호흡을 하던 부회장의 앞에 진 이사가 나타났다.

“부회장님 찾으셨습니까?”

진 이사의 얼굴이 빨갛게 물든 것을 보니 급히 뛰어온 것 같았다.

그런 진 이사에게 숨 돌릴 틈조차 주지 않고 부회장은 곧바로 쏘아붙였다.

“그 새끼들 확실히 입단속 한 거 맞아? 확실해?”

“흑곰파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들!”

“확실히 단속했습니다. 입을 열 리가 없습니다.”

“그럼 그놈들이 장난치고 있는 게 아니란 말이야?”

진 이사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부회장을 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흑곰판가 뭔가 하는 새끼들이 망나니한테 지금껏 내가 시킨 일을 폭로한 거 아니냐고 묻는 거잖아! 이 새끼야!”

으드득-

부회장은 얼마나 화가 났는지 자신이 이를 갈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놈들이 그럴 리가 없습니다. 밑바닥이긴 해도 그 정도로 막 나가는 놈들은 아닙니다. 이쪽을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놈들이 더 잘 알 겁니다.”

“그럼. 그 개망나니 놈이 도대체 왜 이러는 건데? 5억도 아니고 50억이야! 50억 어치 마석을 사들였다고!”

“오, 오십억이요!”

깜짝 놀란 진 이사가 큰 소리를 냈다.

오십억이면 자신이 수십 년을 일해도 모으지 못할 거금이었다.

“그래. 한번은 그럴 수 있다 쳐. 그런데 또 마석을 사들여? 이번엔 30억이 넘게? 이게 일부러가 아니면 도대체 뭐냐고! 그리고 뭐? 욕실에 깔아? 이런 미친 새끼가!!”

부회장은 진 이사 앞에서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큰소리를 내고 있었다.

“진정하시지요. 제가 김성철을 만나서라도 이유를 확인해 보겠습니다.”

부회장을 살살 달래는 진 이사의 머릿속은 복잡하기 짝이 없었다.

정말 흑곰파가 그 사실을 망나니에게 말했다면 승진이고 뭐고 자기 살길부터 찾아야 했으니까.

“지금 당장 알아봐! 그 망나니 놈이 그러는 이유가 뭔지!”

“네! 당장 알아보겠습니다.”

진 이사는 부회장에게 고개를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부회장실을 벗어나려 했는데.

똑똑-

“부회장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부회장의 비서 목소리가 문밖에서 들렸다.

“들어와!”

부회장의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리고 비서가 모습을 드러냈는데.

비서는 부회장에게 가까이 다가가 귀에 속삭였다.

“작은 도련님이 이번에 파티에 참석한답니다.”

“뭐?! 정말로?!”

“네. 확실합니다. 전략기획실에서 나온 정보입니다.”

지금껏 화를 주체하지 못하던 부회장의 표정이 일변했다.

“이유는?”

“그게··· 확실하지는 않지만 아마 회장님께서 저번에 추진하시던 일의 연장선이 아닌가 예상됩니다.”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턱을 쓰다듬던 부회장은 뭔가 떠올랐는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화제약 손녀딸? 그거 말하는 거야?”

“네. 그렇습니다.”

“이것 봐라? 형님이 스스로 제 앞에 구덩이를 파고 있다는 건데? 확실해?”

“그게··· 아무리 찾아봐도 그것 말고는 이유가 없는걸로 판단됩니다.”

“진 이사. 우리 쪽이랑 연결된 애들한테 싹 다 연락해.”

비서가 들어오는 바람에 나갈 타이밍을 놓친 진 이사는 어느새 부회장의 옆에 위치하고 있었다.

“네. 헌데 뭐라고 연락을 할까요?”

“이번 파티에서 망나니 좀 자극하라고 해. 미쳐 날뛰게 할 필요는 없어. 그냥 적당히 병신같은 모습을 보이게만 하면 돼.”

“알겠습니다. 바로 연락 돌리겠습니다.”

조금 전 일은 모두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부회장의 얼굴에는 진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연말 파티

“어떠냐 현지야?”

커다란 거울 앞에 서서 잔뜩 꾸민 모습을 바라보는 내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가 베어져 있었다.

이 정도면 어디 가서 꿀릴 외모는 아니지.

“멋있으세요. 행동만 조심하시면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라고 해도 될 것 같아요.”

비아냥거리는 현지를 오늘만큼은 용서해 주기로 했다.

눈앞에 보이는 나의 외모는 요즘 인기 있는 연예인들에 비해서도 전혀 꿀리지 않았다.

185 정도 되는 키에 요즘 운동을 통해 만든 균형 잡힌 몸.

날렵한 턱선과 높은 코. 날카로워 보이지만 커다란 눈과 시원스레 뻗은 둥그런 이마.

누군지 차암 잘생겼다.

“아무리 봐도 잘생겼단 말이야.”

착각이 아니었다.

사실 외모만 보면 내가 형보다 훨씬 괜찮았으니까.

아버지는 지능을 형에게 몰방한 대신 나에게는 이 훤칠한 외모를 주셨다.

길거리를 돌아다니면 여기저기서 찰칵거리는 소리가 들려올 정도로.

그중에는 기자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평범한 여성들이었다.

연예인인가? 진짜 잘생겼다. 등등 내 외모를 칭찬하는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릴 정도로 괜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다만. 저거 그 망나니 아니야? 맞네! 망나니. 등등 나를 흉보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만하시고 준비 끝나셨으면 본채로 드시죠?”

“아버지하고 형 벌써 준비 끝나셨대?”

“아니요.”

“그럼 왜?”

“그래도 동생이고 아들인데 먼저 나가서 기다리셔야지요.”

허~ 얘가 이런 소리를 할 때도 있네?

뭔가 멍청해 보이는 모습을 주로 봐서 그런가?

오랜만에 현지에게 놀랐다.

“그 표정은 뭐에요?”

“아니. 그냥 좀 뭐랄까? 좀 달라 보이는 것 같아서.”

“이동이나 하시죠?”

현지의 약간 차가워 보이는 모습에 입을 닫고 본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만 울리는 복도를 지나던 나는 현지의 모습에 의문이 들어 다시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말이야···”

“네. 말씀하시죠.”

“너는 왜 그렇게 입고 있냐?”

바로 이것이었다.

현지의 차림.

메이드복이라 주장하던 평소의 옷이 아닌 마치 파티에서나 볼 법한 화려한 드레스로 치장한 채 높은 하이힐을 신고 내 뒤를 따라오는 현지의 모습 때문이었다.

“못 들으셨어요? 저 오늘 큰 도련님 파트너로 참석하는데.”

“형?”

나는 아닐 거라 생각했다.

오늘 파티에서 선화 제약 손녀딸과 좋은 모습을 연기해야 하기에.

그런데. 형이라니?

“형 애인 있잖아.”

“그건 아직 비밀이잖아요. 그리고 저는 오늘 호위로 따라가는 거예요.”

“거기도 경호원 많은데?”

“개인 경호는 파티장 안에는 못 들어가잖아요. 근접 호위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어서요.”

“그럼 오늘은 형 호위야?”

“아니요. 저는 도련님 호위로 참석하는 건데요.”

고개가 절로 기울었다.

형 파트너로 참석해서 내 옆에 붙어 있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인데.

“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어?”

“도련님만 개인 경호가 없거든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회장님이야 마스터가 항상 붙어 있을 거고 큰 도련님도 부 길마가 붙어 있을 예정이거든요. 도련님만 아무도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자청해서 도련님 경호하겠다고 했더니 회장님이 큰 도련님 파트너로 참석하라고 하셨어요.”

현지의 말을 듣던 나는 마음에 걸리는 게 하나 있었다.

“그런데 메이드가 형 파트너면 좀 이상하지 않냐?”

“저 메이드인거 아무도 몰라요.”

이건 또 무슨 소리야? 아무도 모른다니?

“제가 메이드로 이곳에 들어온 게 아니거든요.”

“그럼 뭐로 들어왔는데?”

“여기 들어온 거 자체를 아무도 몰라요.”

“어떻게?”

“저 죽은 사람이거든요.”

한숨이 안 나올 수 없었다.

제발 한 번에 말을 좀 해줬으면 하는데.

“이유는?”

“죽음으로 위장하고 몰래 들어왔다는 소리죠. 대외적으로 저는 사망자니까요.”

“얼굴을 알아보는 자들이 있을 텐데?”

“거의 없어요. 저번에 제 모습 보셨잖아요. 저 활동할 때 그 모습으로만 다녔거든요.”

저번 성철이 아지트에서 모습을 보였을 때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었다. 요즘 세상에 그렇게 하고 돌아다녔다니···

하지만 현지가 살성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들었던 의문이 풀렸다.

아무도 살성의 정체를 알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죽은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괜찮냐?”

“뭐가요?”

“나 때문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었냔 말이야.”

“처음에는 좀 실망했는데 요즘은 뭐 그럭저럭.”

현지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해도 분명 가슴이 쓰릴 거라 생각되었다.

“정말 멋있지 않아요? 죽음을 위장하고 주인을 지키는 메이드라니···.”

현지의 이어지는 말에 순간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이건 농담이야? 진담이야?

아마 지금 현지를 바라보는 내 눈동자는 혼돈의 카오스리라.

“어? 다들 나와 계시는데요?”

현지를 향해있던 고개를 돌리자 아버지와 형이 멋지게 차려입고 접견실에 앉아 있는 게 보였는데.

한 명이 더 있었다.

민선화.

이번에 내가 에스코트해야 할 여성.

“오랜만에 뵙네요. 그간 평안하셨나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네. 뭐 잘 지냈죠. 선화 씨도 잘 지내셨어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이는 그녀의 모습은 한 폭의 단아한 그림 같았다.

“그런데··· 이분은?”

선화가 현지를 보며 물었는데.

“오늘 제 파트너입니다. 현지 씨 인사해요. 이분은 오늘 선우가 에스코트할 민선화씨.”

형이 서로를 소개해 주었다.

아주 간단하게 이름 정도만.

현지와 선화가 인사를 끝내자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이제 출발하자꾸나.”

“네.”

“네. 아버지.”

우리는 대기시켜 놓은 차로 이동하여 각자의 차에 탑승했다.

아버지, 형과 현지, 나와 민선화 각각 나눠서 차에 탑승하자 출발했다.

3대의 차가 일직선으로 따라 달리며 양옆으로 그 두 배는 되어 보이는 차들이 호위하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

잠실에 위치한 국내 최고 높이를 가진 미래타워가 지금 도착한 곳의 정체였다.

역시나 수많은 기자와 구경 온 사람들까지 입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니 역시 좀 떨렸다.

나는 심호흡을 하며 살짝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차 문을 열고 나왔다.

순식간에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 앞에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반대편으로 이동한 나는 최대한 정중해 보이는 자세로 차 문을 열고 손을 내밀었다.

그 손을 잡는 사람은 당연히 민선화.

내 손을 잡고 천천히 모습을 보이는 민선화의 모습에 먼저 차에서 내려 걸음을 옮기고 있던 형과 아버지를 찍던 사람들의 렌즈까지도 모조리 우리의 모습을 담기 시작했다.

영향력이 없긴 하지만 그래도 유명그룹의 자제인 나와 대한민국 최고의 제약회사의 손녀.

내가 제약회사라고 부르긴 하지만 사실 선화그룹이라고 부르는 게 맞을 거였다.

그저 제약회사에서 출발했고 워낙 유명했기에 나나 사람들이 선화라는 이름을 부를 때 제약을 빼놓지 않는 것이었다.

우리 둘의 결합은 그만큼 큰 이슈를 만들 거였다.

“자 가실까요?”

“네.”

팔에 작은 공간을 만들며 그녀에게 말하자 팔장을 끼며 대답하는 그녀.

나는 그녀와 보폭을 맞추며 천천히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눈이 부셔 걸음을 옮기기 힘들 정도의 스포트라이트를 맞으며 이동하는 나와 그녀의 입가에는 미소가 사라지지 않았다.

한쪽에 마련된 연회장 전용 엘리베이터에 오르기 전까지.

“저 어땠어요? 괜찮았어요?”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그녀가 숨을 크게 내뱉으며 말했다.

“그럼요. 선화 씨보다 제가 걱정이네요. 통 이런 자리에 와본 적이 없어서.”

“잘하시던 걸요? 익숙해 보이셔서 오히려 제가 놀랐어요.”

“다행이네요. 살짝 떨렸거든요.”

그녀와의 대화를 이어가며 잠시의 시간이 흐르자 띵~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문이 열리자 보이는 것은 아버지와 형 그리고 현지였다.

“기다리고 계셨어요? 먼저 가시지.”

“너도 참석했는데 이왕이면 같이 들어가야지.”

내 말에 대답하는 형은 아주 작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식구만 알아볼 수 있는 작은 미소를.

“가자꾸나.”

아버지의 말이 떨어지자 나는 선화씨를 에스코트해 아버지의 왼편에 자리 잡았다.

형과 현지는 오른쪽.

그 뒤를 미리 와서 대기하던 유명길드 마스터와 부 마스터 그리고 수많은 경호 인력이 따라붙었다.

연회장 안은 부 마스터까지만 입장할 수 있었지만, 그래도 유명그룹의 행차인데 이 정도는 보여줘야 면이 산다.

천천히 이동해 연회장의 문 앞에 서자 그 커다란 문이 열리고 안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화려하면서도 절제된 매력이 있는 연회장 안에는 이미 많은 사람이 도착해 있었다.

아버지는 이번 파티의 주인공이 유명이라는 것을 알리고 싶은 것인지 마지막에 도착할 수 있도록 계획을 짠 모양이었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천천히 아버지를 따라 입장했다.

그러자 아버지에게 몰리는 사람들과 형에게 몰리는 사람들.

나에게 몰리는 사람은 없었다.

유명그룹의 자제라는 사실을 빼면 아무런 영향력도 없는 나에게 몰릴 사람들은 없을 테니까.

뭐 그래도 갈 곳은 있다.

바로 재벌 3세나 4세들이 모여있는 장소.

고개를 천천히 돌리며 눈에 익은 자들을 찾기 시작했는데 금방 그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몇몇 익숙한 얼굴들.

끼리끼리 모인다고 나처럼 영향력이 떨어지는 자들이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곳으로 선화와 함께 이동했는데.

현지가 내 뒤를 따라오기 시작했다.

“야. 너는 그래도 잠깐은 형 옆에 붙어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

현지에게 작게 속삭이며 현지를 바라본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현지의 표정이 얼음장처럼 차가웠기 때문이다.

마치 암살 직전 암살자의 무표정이 떠오를 정도로.

얘가 왜 이래?

“너 왜 그래? 원수라도 발견한 것처럼.”

“네?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내 말에 순식간에 풀어지는 현지의 얼굴을 보며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현지의 본래 모습.

아마 현지는 내 옆에 붙어 있기 전에는 항상 저런 모습으로 살아갔을 거라 생각되었다.

예전 뚱이를 데리고 사냥을 갔을 때 현태에게 들었던 많이 변했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했는데 이걸 말한 모양이었다.

“여! 이게 누구신가?”

어디선가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한쪽 손을 들고 나를 향해 미소짓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였더라? 아!

“이정근? 너 이정근이냐?”

“그래. 나다 인마.”

“오랜만이다.”

“너 요즘 뭐 하길래 통 보이지가 않냐? 번호도 바꾼 것 같던데?”

이정근.

미래 그룹의 차남으로 나와 비슷한 녀석.

나와 비슷하다는 건 망나니란 소리였다.

“뭐 그럴 일이 좀 있었다. 요즘 어떠냐?”

“똑같지 뭐. 근데 너 좀 변한 것 같다.”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는 놈의 시선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뭐가? 그대론데?”

짐짓 모르는 척을 하며 뻗대자 녀석의 입가에도 미소가 번졌다.

“아닌데? 너 요즘 운동하냐?”

바로 이것이다.

마력훈련과 더불어서 진행하는 체력 훈련을 통해 거의 10킬로 정도 감량했기에 오랜만에 보는 내가 좀 달라 보일 거다.

약간 통통한 체형이던 내가 날렵하게 잘빠진 모습을 하고 있으니 놀랄 만도 하지.

“선우 씨? 저 소개 안 해 줄 거에요?”

아차! 실수했다.

“미안해요. 이쪽은 이정근이라고 미래 그룹 차남이에요. 제가 예전에 사고 좀 치고 다닐 때 자주 어울리던 녀석이에요.”

전혀 꾸밈없이 말해 주었다.

있는 사실 그대로 내가 망나니 시절 어울려 놀았던 망나니란 뜻을 은근히 내포하며.

“안녕하세요.”

“그리고 이쪽은 선화제약 손녀분. 오늘 내 파트너.”

이정근은 역시나 싸가지 없는 모습으로 고개만 까딱이며 인사했다.

역시 내가 인정한 망나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저쪽은?”

정근은 내 뒤에 있는 현지를 보며 고갯짓을 했다.

“이쪽은 이현지 씨. 오늘 형 파트너.”

“신우 형 파트너라고? 근데 왜 널 졸졸 따라다니냐? 누가 보면 니 이건 줄 알겠다?”

새끼손가락만 피고는 좌우로 작게 흔들며 말하는 녀석은 기본적인 예의조차 없었다.

나도 이랬었나? 진짜 최악이었네.

“말조심해라 이 새끼야.”

이빨을 꽉 물며 녀석의 귓가에 속삭여 주자 놈이 나를 이상한 놈 보듯 쳐다보았다.

“너 외모만 변한 줄 알았더니 성격도 좀 변했다?”

“그래도 우리 형 파트너다. 예의는 좀 지켜줄래?”

이상하게 화가 나네?

“안녕하세요. 이현지예요.”

현지가 내 옆으로 나서며 밝게 미소지었다.

“네.”

고개를 위아래로 까딱까딱하며 비웃듯 말하는 이정근의 모습은 정말 치졸해 보였다.

거만해 보이기라도 하던가.

시궁창 속 쥐새끼가 따로 없었다.

마치 옛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마음이 좀 쓰렸다.

진짜 최악이었네.

“안녕하세요. 유선우 씨.”

어느새 주변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있었는데.

멈춰 서있자 원래 가려던 곳에서 알아서 모여든 모양이었다.

“네. 안녕하세요? 그러니까···”

“대림그룹 이민우입니다.”

“아, 이민우 씨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하나하나 인사를 하며 대화를 이어가던 도중이었다.

“그러니까 선우 저놈이 말이야.”

어디선가 정근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말 파티

“그랬다니까? 진짜야.”

예전 내가 망나니 시절 쳤던 사고들을 나열하고 있었다.

재수 없게 생겼다고 사람을 팼다거나, 돈으로 여자를 샀다거나, 유명 연예인을 스폰 해준다며 데리고 놀았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설마? 지금만 봐도 전혀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데?”

“정말이라니까? 아! 맞다. 너희 제일 그룹 알지? 예전 100대 그룹 끝자락에 있던데 말이야.”

아! 그걸 잊어버리고 있었구나···

정근의 말에 잊고 있었던 내 예전 기억 중 정말 떠올리기 싫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정근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지만 이미 이야기는 한참 진행되고 있었다.

“지금 제일 우유만 남은 데 말하는 거야?”

“그래 거기. 거기 장녀가 회사 살려보겠다고 선우 저놈한테 접근했었는데 저놈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거기 장녀면 서민정이었나?”

“맞아 서민정. 꽤 미인에 MBA까지 수료한 수재였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때 그 여자가 찾아왔을 때 저놈이 어떻게 했는지 알아?”

“그만해라.”

더 듣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놈의 입을 틀어막을 생각으로 입을 열었다.

그런 내 말을 들은 정근은 나에게 고개를 돌려 눈을 초승달처럼 만들며 입가에 진한 미소를 머금은 후 말을 내뱉었다.

“3일인가? 여기저기 끌고 다니면서 데리고 놀다가 5억인가 던져주더라 킥킥”

“진짜?”

“정말로?”

모두의 고개가 내 얼굴을 향해 몰렸다.

정말이냐고 묻는 듯한 의문이 가득 찬 표정에 나는 차마 아니라고 하지 못했다.

사실이었으니까.

“정말이라니까? 나한테 얼마나 자랑을 하던지. 쪽팔린 것도 모르고 말이야.”

나를 향하는 사람들의 눈빛은 마치 쓰레기를 보는 듯했다.

부정하지 않는다. 나는 쓰레기가 맞으니까.

다만 이정근. 네 입에서 그딴 소리가 나와? 감히?

표정을 굳히고 천천히 걸음을 옮겨 이정근의 앞에 도착한 나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의 멱살을 틀어쥐며 놈의 면상을 내 얼굴 옆에 바짝 끌어당긴 나는 놈에게만 들리도록 작게 속삭였다.

“지금 뭐 하자는 거냐?”

“뭐가? 난 있는 사실을 말한 건데?”

뻔뻔하게 자신은 아무 잘못도 없다는 듯이 말하는 놈의 면상을 보자 속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요즘 미래가 좀 잘나간다고 보이는 게 없는 모양이야?”

“하!”

어이없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이정근에게 나는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그 미래가 네놈 주둥이 때문에 망하면 참 볼만 하지 않을까?”

“뭐, 뭐라고?”

말을 듣고 살짝 당황했던 정근은 순식간에 표정을 풀며 비열한 미소를 지었다.

“니가? 너 따위가 무슨 힘이 있다고?”

“그래. 유선우는 힘이 없지. 그런데 유명그룹 막내의 이름은 어떨 것 같아?”

“뭐라고? 유명그룹 막내? 그게 그거 아니야 이 새끼야!”

황당하다는 듯 큰 소리를 내며 나를 쳐다보는 녀석의 눈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내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어. 내가 심한 모욕을 당했고 그 모욕을 한 상대가 미래의 차남이란 소문을 뿌리면 끝이니까.”

“그게 뭐?”

역시 이놈은 멍청했다.

내 말을 1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한숨이 나왔다.

이런 놈이니까 그런 말을 이런 자리에서 서슴없이 내뱉었겠지.

“그 소문이 퍼지기 시작하는 순간 자존심 싸움이 시작된다는 거다. 이 멍청한 놈아.”

“···뭐라고?”

“유명을 모욕한 미래. 이래도 모르겠냐?”

“자, 잠깐!”

이제야 상황 파악이 좀 되는 모양이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기업인 유명의 자존심을 건드린 미래를 우리 아버지가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미래가 통째로 날아가진 않아도 알짜 계열사 한두 개는 공중분해 되겠지.

“싸움이 시작되면 너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는 네 형제들이 가만히 있을까? 잘 생각해 봐라.”

“미, 미안. 잘못했어. 농담 한 거라고 설명할 테니까 용서해줘.”

사색이 되어 용서를 비는 이정근의 모습은 쥐새끼가 따로 없었다.

“야 이정근. 너는 사람이 한 말을 주워 담을 수 있다고 생각하냐?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바보도 아니고 농담이라고 해명한다고 그대로 끝낼 거 같아? 아마 이 파티가 끝나면 그게 사실인지 인맥을 통해서 알아보기 시작할 텐데?”

“그, 그건··· 나는 그냥 부탁받은 대로 했을 뿐이야.”

호오~ 이건 또 무슨 소리야. 부탁을 받았다고?

“무슨 말이냐?”

“진 이사. 그러니까 너희 작은아버지가 부탁했다고. 너를 좀 흔들어 달라고 해서··· 제발 용서해줘.”

이것 봐라?

그러니까 내가 이곳에서 난동을 부리길 원했다는 건가?

그걸 빌미로 아버지를 압박하기 위해서?

“요, 용서해줄 거야?”

“꺼져.”

“제, 제발···”

내 앞에서 울상을 지으며 용서를 바라는 이정근을 보며 생각을 정리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리고?”

“뭐, 뭐가?”

“또 뭔가 부탁받은 거 없어?”

“그것 말고는 없어. 정말이야.”

“그래 용서해줄게. 앞으로 내 입에서 이 일이 거론되는 일은 없을 거야.”

“고마워.”

고맙다고 소리치는 놈을 보면서 이놈은 정말 머리가 짐승 수준이란 걸 알게 됐다.

내가 말 안 한다고 어디 이 얘기가 그대로 묻힐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와 단둘이 있던 것도 아니고 나에게만 말한 것도 아닌데?

이 이야기를 들은 승냥이 같은 놈들이 분명 여기저기 퍼트리고 다닐 게 뻔했다.

나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한편에 마련된 작은 문들을 보며 걸음을 옮겼다.

“선우 씨 생각보다 악취미가 좀 있으시네요.”

나를 따라 움직이는 선화를 보며 나는 쓴웃음을 지어야 했다.

“저분은 좀 멍청한 것 같고요.”

모든 상황을 지켜본 선화는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거기다 나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을 거고.

한숨을 내쉬며 여러 개의 방중 비어있는 표시가 되어있는 방을 찾아낸 나는 문을 열고 들어가 그곳에 마련된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어서 선화가 내 앞쪽에 조용히 앉았고 현지가 왼쪽에 앉았다.

“그런데 정말이에요? 방금 그 말들?”

파티장에 도착한 이후로 처음 현지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뭐? 내가 가지고 놀았다는 거?”

“네.”

“사실이지.”

충격받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현지의 얼굴을 보며 나는 이 이야기의 숨겨진 사실을 떠올렸다.

“정말이요? 진짜 그러셨어요?”

“그래. 왜 실망했어?”

“네. 망나니란 걸 알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거든요.”

“전 알고 있었어요.”

선화는 아마 이 이야기의 숨겨진 부분까지 알고 있을 거였다.

선화 제약의 정보력이라면 모르는 게 이상하다.

다만 현지가 나를 보며 실망한 표정을 짓자 이상하게 내 입에서 변명이 나왔다.

“그런데 말이야. 과연 그 똑똑한 여자가 그것도 모르면서 나에게 접근했을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MBA까지 나왔다는 능력 있고 똑똑한 여자가 겨우 나 같은 놈한테 농락을 당했을 것 같냐고.”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생각을 하던 현지는 뭔가를 깨달은 것 마냥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설마? 그 여자가 모두 알면서 접근했다는 말이에요?”

“그래. 아마 아버지를 끌어내기 위해서였겠지. 덕분에 제일 우유만이라도 지켜낸 거고.”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무서운 여자였네요.”

정말 무서운 건 돈이었다.

돈이라는 권력을 내려놓지 않기 위해 얼마든지 자신의 몸을 내던져 버릴 정도로 돈이라는 것은 무서운 거였다.

“그럼 도련님은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던 거예요?”

“도련님? 아 벌써 그 정도까지···. 정말 대단하네요. 이런 걸 숨기고 있었을 줄이야···”

선화는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남편의 동생을 부르는 호칭이 도련님이었으니까.

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숨기고 있는 건 맞았으니까. 다만 상대가 다를 뿐.

“네? 무슨 말씀이신지?”

현지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했는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역시 멍청하단 말이야.

“그 여자가 집에 찾아왔었거든. 나를 만나겠다고. 그때 알았지. 서민정이란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

그때 난 화를 주체하지 못했었다.

내가 데리고 논 것이 아니라 그녀가 반대로 나를 데리고 놀았다고 생각해서.

지금 생각해 보면 좀 씁쓸했다.

하나라도 건지겠다고 자존심을 모두 내려놓고 내 앞에서 미소를 지으며 유혹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랐기에.

*

보고 싶은 사람이 있었다.

이 파티에 참석한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그를 보는 거였다.

최강준.

나를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꺼내주고 복수를 대신해준 은인.

그가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은인은 은인이었다.

그 역시 이 파티에 참석한 게 틀림없었다.

국내 1위 길드의 수장이 이 파티에 참석하지 않는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세계로 나간다면 아직 그 이름값이 약했지만, 국내에서는 좀 다르다.

영웅이라 불릴 정도로 많은 국민들이 그를 찬양하고 있었으니까.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좀 더 쉬겠다는 선화를 내버려 두고 따라오겠다는 현지를 애써 말리면서까지 휴게실을 나선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다.

넓은 연회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두리번거렸다.

주로 많은 사람이 모여있는 곳을 기웃거리며 이리저리 살피던 나는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저 멀리 많은 사람이 그의 주변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모습이 내 눈동자에 들어왔다.

큰 키에 호감형의 잘생긴 얼굴과 단련된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

틀림없는 그였다.

후우-

심호흡을 한번 하고 그를 향해 똑바로 걸어갔다.

내가 그에게 향하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힘차게 발을 뻗으며 조금의 시선도 흐트러트리지 않고 그를 향해 똑바로 나아갔다.

그와 점차 가까워져 갈수록 내 심장은 더욱더 힘차게 박동했다.

전생에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감춰야만 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아무것도 거리낄 게 없었다.

그때와 지금의 나는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으니까.

그와의 거리가 점차 좁혀지던 그때 그의 고개가 돌아간다.

나를 향해서.

그를 둘러 쌓고 있던 장막들이 길을 만들어 줬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나는 어느새 그의 바로 앞에 도착했다.

“반갑습니다. 최강준 씨. 유선우입니다.”

“아, 네 반갑습니다. 최강준입니다.”

반사적으로 튀어나오는 그의 인사에 내 입가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하지만, 이내 유선우란 이름이 누구를 지칭하는 것인지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눈동자에 어리는 불쾌감과 경멸의 시선.

찰나였지만 분명히 보았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에 스며있던 불쾌와 경멸을.

역시인가?

이해한다.

내가 그의 입장이었어도 그랬을 테니까.

정의를 대변하는 자.

그때의 그는 그렇게 불렸었다.

악을 심판하고 정의를 바로 세우는 영웅.

수많은 악덕 길드들이 사람들을 착취할 때 오직 그와 그의 길드만이 그들을 심판했다.

수많은 사람이 몬스터에게 짓밟힐 때 오직 그만이 그들을 구하기 위해 뛰어다녔다.

그랬던 그였기에 방금 그의 눈빛에 스쳐 지나가던 그 감정들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에게 말했다.

“만나 뵙고 싶었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의아한 표정을 짓는 그를 보며 나는 준비했던 말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정말로.”

“네? 그게 무슨···”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입을 여는 그는 정말 당황한 것 같았다.

“앞으로 더욱 빛나길 기대 하겠습니다.”

내 할 말만 하고 등을 돌린 나는 그대로 자리를 벗어나 버렸다.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보는 그를 등 뒤에 남겨두고.

이거면 됐다.

선물이라도 준비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안 그래도 이상한 지금 상황이 더욱 혼란으로 가득 차 버렸겠지.

거기다 받지도 않았을 거다. 그는.

“크흠-”

“어? 아버지? 형?”

어느새 내 옆에는 아버지와 형 그리고 길드 장과 부 길드 장이 서 있었다.

화가 나신 듯한 표정을 짓고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는 어딘가 이상해 보였다.

마치 내가 만나선 안 될 사람을 만나기라도 한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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