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처음 뵙겠습니다. 상무님.”
유명그룹 본사 로비의 한쪽 구석에 마련되어 있던 카페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던 나는 누군가 건네는 인사에 고개를 돌렸다.
내 눈에 들어온 것은 훤칠한 사내가 나에게 고개를 숙이고 있는 모습이었다.
“반가워요. 유선우에요.”
“오늘부터 상무님을 안내할 유찬용입니다.”
김 실장에게 미리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회사에 도착하면 안내를 해줄 직원이 기다리고 있을 거란 말과 함께 이름과 직책을 알려 주었는데 이 사람인 모양이었는데.
오늘 바로 임원들과 인사를 할 자리를 마련하겠다는 아버지를 말리며 오늘은 그냥 분위기만 좀 살피고 부서들이나 돌아보겠다고 하자 유찬용을 나에게 배정해 주었다.
“일단 상무님 집무실부터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나한테도 집무실이 있어요?”
이름만 올려놨을 거란 예상과 다르게 집무실까지 있다는 그의 말에 순간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물음을 던지고 말았다.
“물론입니다.”
“그럼 일단 거기부터 가죠.”
내 집무실이 있단 사실에 잘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내 공간이 필요했기에 그의 말대로 집무실로 가기로 정했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이동하자 일반 엘리베이터가 아닌 고위직이나 중요한 손님을 위해 마련되어 있는 전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특이하게도 엘리베이터만 담당하는 직원이 따로 있었다.
그 직원은 유찬용과 나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엘리베이터의 문을 연 후 미소를 지으며 허리를 숙였다.
별게 다 있네.
우리가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숙였던 허리를 펴고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따라 들어오려 했는데 유찬용이 손바닥을 펴 보이며 저지하고는 19층의 버튼을 누르고 문을 닫았다.
오늘 내가 방문한다는 걸 좀 숨겨달라고 했는데 그 때문인 모양이다.
엘리베이터는 19층에 멈추었고 그를 따라 잠시 이동하자 대외 홍보부 상무실이라는 명패가 달린 자동문이 보였다.
“들어가시죠 상무님.”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옮기자 문이 자동으로 열려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쪽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것은 내 직무실이 아닌 비서가 대기하는 공간이었다.
회사 로비의 안내원들이 있는 카운터를 닮은 커다란 책상이 눈에 보였고 그 앞으로 고급스러워 보이는 문이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당황했는지 어쩔 줄 몰라 하는 여직원의 모습이 보였다.
어디서 많이 본 듯 익숙한 외모의 여직원이었다.
긴 생머리에 적당한 키, 동그랗게 뜬 큰 눈을 한 그녀는 아름다웠다.
다만.
낯이 익은데?
“비서?”
“저, 그, 그게··· 누, 누구시죠?”
말을 심하게 더듬는 걸 보니 정말 많이 당황한 모양이었다.
“내 방 맞아요?”
그녀의 반응에 뒤따라 들어오는 유찬용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착오가 있는 모양입니다. 상무님께서 방문하시는 걸 비밀로 해달라 하셔서 상무님 비서에게도 연락이 가지 않은 듯합니다. 죄송합니다.”
듣고 보니 이해가 가긴 했다.
다만 그에게 질문을 던진 이유는 하나가 아니었다.
상무라는 직함이 생겼지만, 단 한 번도 회사에 나온 적이 없었다.
그런 내게 비서까지 있다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을 뿐이다.
그런데 정말 낯이 익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보았다.
이지안? 역시 어디서 들어본···?!
어떤 사실을 떠올린 나는 순간 머릿속으로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장면에 온몸이 굳어버렸다.
초점이 흔들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고 이어서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천···궁?
나는 이 여자가 처참하게 살해당한 채 방치되어 있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지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저 동그란 눈이 뒤집힌 채 흰 자만을 보여주었고 저 앵두 같은 입술에 피가 잔뜩 묻어서는 그 입을 커다랗게 벌린 채 고통스런 표정으로 숨이 끊어져 있던 그 모습.
그뿐 만이 아니었다.
높이 걸려있던 그녀의 무기인 활.
활시위에 목이 묶여 허공에 매달려 있던 그녀는 아주 긴 혀를 내밀고 있었다.
팔과 다리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고 그녀의 가랑이 사이를 관통해 배꼽까지 갈라버린 커다란 대검과 길게 흘러내리던 내장들.
그때의 그 충격적인 장면이 지금 내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었다.
내가 괜히 현지를 두려워하는 게 아니었다.
그 장면을 만들어 낸 당사자가 바로 현지였기 때문이었다.
“상무님 괜찮으십니까?”
순간 귓가로 들리는 목소리에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던 장면이 사라지며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 괜찮아요. 신경 쓰지 마세요.”
“저, 저기 차를 내올까요?”
고개를 돌리자 바짝 다가와 어색한 미소를 짓고 있는 이지안이 보였는데.
“으헉!”
나도 모르게 비명이 나왔다.
아주 어두운 밤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마주친 잔인한 시체.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여자의 시체를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때 그 장면은 나에게 트라우마를 만들어 주었었다.
“상무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내 속도 모르고 계속 옆에서 떠드는 이 여자를 얼른 치워버리고 싶었다.
이 얼굴을 보면 그때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인데.
“이, 일단 들어가죠.”
나는 멈춰있던 걸음을 빨리해 상무실로 향했다.
뒤이어 따라 들어오는 유찬용과 이지안.
나는 이지안에게 시선을 맞추지 않고 손바닥을 내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지안 씨는 하던 거 하세요.”
“네!”
뭐가 그렇게 좋은지 밝고 힘차게 대답하고 등을 돌리는 이지안 때문에 몰래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왜 내게 비서가 있는 거죠? 할 일이 없을 텐데요?”
안으로 들어서자 보이는 소파를 향해 이동하며 입을 열었는데.
다리가 후들거려 제대로 서 있지 못할 지경이었기 때문이다.
“그게··· 원래는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이지안 씨는 본래 진 이사 비서실에서 근무하던 직원입니다. 그런데 그의 눈 밖에 난 모양인지 인사이동 때 대기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래서요?”
“좀 아까운 인재라 일단 이곳에 발령을 내놓긴 했는데 마땅히 새로 자리가 생기지도 않고 진 이사가 방해를 하는 바람에 3개월째 이곳으로 출근하는 중입니다.”
진 이사라?
성철과 연결되어 있던 작은아버지 쪽 사람도 진 이사였던 걸로 알고 있었다.
“이사 중 진씨가 몇 명이죠?”
“한 명입니다.”
“그래요? 그 진 이사란 사람 혹시 작은아버지 쪽 라인인가요?”
“네? 그걸 어떻게···”
약간 놀라서 말끝을 흐리는 걸 보니 좀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회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들은 모양이었다.
일단 이건 넘어가기로 하고.
지금 급한 건 이게 아니었다.
저 밖에 있는 이지안이 문제였다.
왜 여기 있는 거지? 어째서?
그 천궁이 우리 회사에 다녔다는 사실도 놀라운데 내 비서라니?
좀 당황스러웠다.
“혹시 저 밖에 있는 이지안 씨 이력서 같은 거 볼 수 있을까요?”
“네. 가능합니다. 바로 준비해 드릴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밖으로 걸음을 옮겼는데 나는 급히 그를 붙잡아야 했다.
“잠깐만! 여기서 볼 수 없나요?”
“그게, 상무님 자리에는 아직···”
나오지도 않는데 사내 전산프로그램을 깔아 놓았을 리가 없지.
아니 깔려있긴 하겠지만 보안이 심하게 걸려있을 게 틀림없었다.
“알았어요. 기다리도록 하죠.”
“네.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유찬용이 나가자 나는 고개를 돌리며 상무실을 한번 죽 둘러 보았다.
소파, 테이블, 책장, 안마의자 등등 하나같이 모두 고급스러워 보였다.
세련되고 정갈한 느낌을 주었지만.
별 감흥은 없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혼자라는 사실이었다.
똑똑-
“상무님. 차를 준비했습니다.”
들리는 목소리는 이지안의 것이었다.
심호흡을 한 차례 한 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입을 열었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온 이지안은 가볍게 인사를 한 후 소파에 앉아 있는 내 쪽으로 사뿐사뿐 다가왔는데.
역시 그녀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은 적응이 되지 않았다.
괴리감이라고 해야 할까?
내 머릿속에서 그녀는 틀림없이 죽었다. 그것도 충격적일 정도로 잔인하게.
그런 그녀가 살아서 움직이는 모습은 나에게 커다란 괴리감을 선사했다.
들고 있던 쟁반을 테이블에 내려놓은 그녀는 이어서 고급스러운 찻잔을 내 앞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금 뜨겁습니다.”
이어서 그녀는 할 일을 모두 마치고는 내 왼쪽에 자리 잡고는 미동도 하지 않고 반듯한 자세로 서 있었다.
“나가보세요.”
“저··· 상무님. 하나만 여쭤봐도 괜찮을까요?”
내 말에 바로 나가지 않고 우물쭈물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네. 말하세요.”
“계속 회사에 나오시는 건가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제발 매일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이 들어있는 것 같았다.
내가 없으면 더 좋은 거 아닌가?
망나니라고 소문난 내가 나오지 않는 게 일 하는데 더 편할 거란 생각을 잠시 했던 나는 이내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아! 할 일이 없어서 그렇구나?
비서란 상사가 존재함으로써 일이 생겨나는 직업이기 때문에 내가 나오지 않으면 당연히 그녀에게도 일이란 것이 존재하지 않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올 일이 그렇게 많지는 않을 거 같네요. 이 정도면 대답이 됐나요?”
“네···”
시무룩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모습에 나 역시 궁금한 게 하나 떠올랐다.
“이지안 씨? 나도 하나만 물어볼게요.”
“말씀하세요.”
“혹시 각성했어요?”
“네?!”
깜짝 놀라는 모습에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 대한 기억은 그 충격적인 장면만이 아니었다.
전생에서의 그녀는 임자가 있는 몸이긴 했지만, 그 인기가 대단했기에 연일 언론이 그녀에 대한 이슈를 자주 다뤘었다.
내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10대 후반에 각성했을 거다.
다만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일반인의 삶으로 돌아가 평범한 생활을 잠시 하다 가디언으로 돌아왔다고 들었었다.
“이지안 씨 각성자 맞죠?”
“네···”
“특성이 뭐죠?”
“분열이요···”
힘없이 대답하는 그녀를 보며 ‘이 여자를 어떻게 할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분열이란 능력은 그녀가 천궁이 맞다는 걸 의미했다.
천궁.
천 개의 활이란 뜻의 이명을 가진 그녀는 한 발의 화살을 수십 수백 발로 분열시킬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여자를 찾는 것 역시도 내 계획에 들어있었다.
다만 어떻게 찾아야 할지 고민 중이었다.
그녀에 대한 정보가 너무 없었는데.
정확한 나이나 직업, 학벌, 사는 곳 등등 아무것도 몰랐다.
여자라는 사실과 각성했다는 것 20대라는 걸 제외하면 내가 그녀에 대해 아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이걸 운이 좋다고 해야 하나?
적당한 거리만 있으면 누구도 정면으로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강한 존재.
한때 그런 소문이 돈 적이 있었다.
살성에게 살해당하기 전까지는.
똑똑-
“상무님. 유찬용입니다. 말씀하신 자료 가지고 왔습니다.”
“들어와요.”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유찬용을 보며 이지안에게 나가보라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이지안이 나가자 유찬용이 들고 있던 서류를 나에게 건넸다.
넘겨받은 서류를 천천히 살펴봤는데, 한 곳에서 시선이 멈췄다.
한국대학교 경영학과?
학벌이 생각보다 좋았다.
국내 최고 대학을 다녔다는 것은 애초에 가디언이 될 생각이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는데.
거기다 이 정도 스펙이라면 다른 곳에 취직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아직 회사에 남아있는 걸까?
고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않은 내가 뭘 알겠냐마는 이상해 보이긴 했다.
그녀의 이력서를 보며 이런저런 생각을 하던 나는 대충 살펴보고는 서류를 유찬용에게 넘기며 말했다.
“나가서 이지안 씨 좀 들어오라고 전해 주고 커피라도 한잔하고 있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유찬용은 바로 대답하고는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고 바로 이지안이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상무님 찾으셨습니까?”
출근
“앉아요.”
“네!”
자리를 권하자 그녀는 대답과 함께 조용히 소파에 앉았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나는 궁금한 걸 물어봤다.
“실례가 안 된다면 왜 아직 회사에 남아있는지 알 수 있을까요?”
각성자 중에는 지안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는 경우도 많았다.
재능이 부족하고 능력이 별로 좋지 않거나 몬스터를 상대하는 게 내키지 않는 사람들은 평범하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자들도 대부분 그쪽과 관련된 일을 하며 살아가고 있었다.
마력을 다룰 수 있다는 건 그만큼 메리트가 있었으니까.
“그게···”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의 모습에 의아함이 들었다.
“어째서 그만두지 않은 거죠? 이지안 씨 정도 스펙이면 다른 직장을 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텐데?”
여기서 이렇게 시간만 보내는 것보다, 이직하는 것이 그녀에게 이득일 거란 생각에서였는데.
“그게··· 당장 돈이 좀 필요해서 옮길 수가 없어요.”
그녀는 눈에 띄게 당황하고 있었다.
“이유는요?”
“이모가 좀 아프시거든요. 병원비하고 치료비 때문에요.”
한때 영웅이라 불렸던 여자치고는 과거가 참 씁쓸했다.
“그래서 마련했어요?”
“아직요. 조금만 더 있으면 대출을 받을 수 있거든요.”
잘은 모르지만 분명 이곳에서 3개월 이상 근무했다면 웬만한 대출은 다 가능할 거라 생각되는데?
“유명그룹에 속해있는데도 대출이 안 된다고요?”
“그게··· 금액이 좀 커서요···”
“회사에는 말해 봤어요?”
“네. 안된대요.”
분명 진 이사가 손을 써 놨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들어보니 진 이사 때문에 이곳에 배치된 모양인데 가만히 있을 리가 없겠지.
진 이사가 여자를 좀 밝히나? 하긴, 이 정도 외모면 그놈뿐 아니라 다른 놈들도 안달하긴 하겠네.
“얼만데요?”
“네? 그, 그게···”
쉽게 대답하지 못하는 걸 보니 금액이 좀 크긴 한 모양이었다.
거기다 나에게 그런 말까지 할 필요도 없을 테고.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니까 편하게 말해봐요.”
“2억 정도요.”
생각보다 센데?
아주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에게는 얼마 하지 않는 금액이지만 서민이라 생각되는 그녀에게는 커다란 금액이라 생각되었다.
“생각보다 많네요?”
“이모가 마력중독이란 병에 걸렸는데 병원비하고 치료비에 약값까지 하면 그 정도 필요하거든요.”
이제야 이해가 갔다.
생각보다 큰 금액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마력중독이라면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력중독은 의료보험이 안 된다.
치료비도 치료비지만 약값 역시도 장난 아닐 거다.
지금으로서는 완치가 불가능 한 병이었는데.
치료 후에 약값뿐 아니라 마력포션을 꾸준히 복용해야 거동이나마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가 그 돈 빌려줄까요?”
“네? 사, 상무님이 왜요?”
이상한 상상을 하는지 얼굴이 시뻘게진 지안이였다.
“부탁할 게 좀 있는데 그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부탁이라 하시면···”
“별건 아니고 내일부터 집으로 좀 출근을 해 줬으면 하는데···”
“네?! 어, 어째서요?”
잠시 제 색을 되찾았던 그녀의 얼굴이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빨개졌다.
“내가 할 일이 좀 있는데 비서가 좀 필요해서요. 근데 회사까지 나오는 게 좀 뭐랄까? 귀찮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집으로 좀 출근을 해줄 비서가 필요하거든요. 어때요? 생각 있어요?”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푹 숙이는 그녀의 모습에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오르는지 쉽게 예측할 수 있었다.
망나니가 집으로 여직원을 끌어들인다?
안 봐도 그 이유는 뻔하지 않은가.
“이상한 거 시키려는 거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이, 이상한 거라뇨?!”
내 예상이 맞았는지 심하게 놀라는 그녀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그녀를 안정시켜야 했다.
“지금 이지안 씨가 상상하는 그런 일들은 없을 거라고요.”
“네?! 저 아무 상상도 안 했어요.”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보니 이 여자도 현지와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하죠. 먼저 2억을 빌려줄 테니까 내일 집으로 출근해요. 그리고 내가 만약 이상한 짓을 하면 그 2억은 받지 않도록 할게요. 물론 더 집으로 출근을 안 해도 되고요. 어때요?”
내 말을 듣고 잠시 고민하던 그녀는 결정을 내렸는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정말인가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물론이죠.”
“감사합니다.”
그녀는 절대 이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아마 그녀의 이모는 입원실에서 꼼짝도 하지 못하는 상태일 테니까.
입원비뿐만 아니라 간병비까지.
아마 지금의 월급으로도 빠듯하겠지.
허리를 숙이며 인사하는 그녀를 보고 나는 유찬용을 호출했다.
이후의 상황은 별거 없었다.
계약서를 만들어 계약을 체결한 후 돈을 그녀의 통장에 입금해 주었다.
“그런데 저는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건가요?”
“아니요. 업무를 보는 곳이 이곳에서 그곳으로 바뀐 거뿐이에요.”
“그럼 급여는?”
“똑같이 입금될 거에요.”
이런저런 사항들을 꼼꼼히 따지는 그녀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진 이사가 도움을 주기도 하네?
진 이사 덕분에 그녀가 내 비서가 되었고 대출을 막아버려 그녀를 곤란하게 만들어 주었기 때문에 그녀를 쉽게 내 곁에 붙잡아 둘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
그녀와 계약을 끝마친 나는 회사에 온 진짜 목적을 상기하고 부서들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회사에 나온 진짜 이유는 혹시 내가 아는 얼굴이 있나 찾아보기 위해서였다.
전생에서는 유명그룹이 무너져내렸다.
오랜 시간을 공들여 준비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형과 아버지가 죽었다고 해도 1년 만에 유명그룹이 무너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부에 배신자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중요한 부서 위주로 돌아다니며 살펴보았는데, 아는 얼굴을 찾는 게 쉽지 않았다.
물론 쉽게 찾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한번 찾아볼 생각이었는데, 의외의 곳에서 대박을 하나 건졌다.
이지안.
최강준의 최측근이자 연인인 그녀를 발견한 것만으로도 큰 수확이 있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둘러볼 수 있었다.
“이곳이 전략기획실입니다.”
“중요한 곳인가?”
“네. 회장님 직속 부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안으로는 그룹의 모든 사업기밀 및 비거래 내역까지 속속 들여다보고 밖으로는 정치 경제 언론 가디언 같은 이 나라의 지배층 동향과 인적 네트워크 정보까지 수집하고 감시하는 부서라고 보시면 됩니다.”
나는 천천히 부서의 사람들의 얼굴을 살피기 시작했다.
설마 아버지 직속 부서의 사람 중에 배신자가 있을 거란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기에 자세히 하나하나 그 얼굴들을 살펴보았다.
그러던 중 정말 뜻밖의 얼굴을 발견했다.
한 여성의 얼굴이 내가 아는 얼굴과 똑같았다.
내가 기억하기로 이 여성은 최강준의 길드 대변인으로 자주 언론에 얼굴을 노출하던 여자였는데.
최강준은 대한민국 최고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만큼 해야 할 일들이 많았는데.
그가 처리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았기에 그를 대신하던 사람들이 꽤 있던 걸로 기억한다.
그중 한 사람이 저 여자와 똑 닮은 얼굴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런 여자가 아버지 직속 부서에 속해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정말 큰 충격이었다.
“저 여자는 이름이 뭐죠?”
다급히 입을 열어 유찬용에게 물었다.
“김진아 실장입니다.”
“실장이라고요?”
“네. 무슨 문제라도?”
전략기획실장이란 소리에 나도 모르게 큰 소리가 나와 모두가 나를 주목하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일단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좀 옮길까요?”
“네. 이쪽으로 가시죠.”
주목된 시선을 차단하고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나는 유찬용에게 그녀에 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김진아 실장? 이라고 했나요?”
“네. 그렇습니다.”
“혹시 그녀가 각성자인가요?”
“아닌 거로 알고 있습니다.”
“확실한가요?”
“잠시만요.”
그는 스마트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는데.
잠시 후 그의 입이 다시 열렸다.
“네. 확실합니다. 일반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나는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내 기억대로라면 그녀는 틀림없는 각성자였다.
능력은 알 수 없지만 확신할 수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전생의 그녀는 S급 가디언이었다.
내가 저 얼굴을 아는 이유도 그녀가 대변이이면서 동시에 S급 가디언으로 이름을 날렸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3년 후 그녀는 S급 가디언으로서 최강준의 길드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만약 아직 각성하지 않았다면 3년 만에 S급 가디언이 된다는 건데 오늘 각성을 한다 해도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3년 후 천궁인 지안 역시 A급에 머물고 있는걸 생각한다면 정말 말이 안 됐다.
거기다 3년 후라면 어비스가 열린 후이기 때문에 가디언의 기준점이 올라간다.
그런데 아직 각성조차 하지 않았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그룹 차원에서 검사를 진행한 적이 있나요?”
“무려 회장님 직속 부서입니다. 더욱 정밀하게 검사를 진행한 거로 알고 있습니다.”
“그럼 그 검사지를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유찬용은 약간 곤란한 표정을 지었는데, 아무리 내가 회장 아들이라도 함부로 보여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버지에게 허락을 받으면 가능한가요?”
“네. 당연히 가능합니다.”
“일단 허락부터 받아야 한다는 소리군요.”
“네.”
그의 대답을 들으며 고민에 잠겼다.
당장 회장실로 쳐들어갈 수 있었지만,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럼 다른 곳도 좀 둘러보도록 할까요?”
그에게 그렇게 말했지만 지금 내 머릿속에는 김진하란 여자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기에 그가 소개하는 다른 어떤 곳에도 관심이 가지 않았다.
*
똑똑-
“들어오세요.”
유명그룹 본사의 또 하나의 부회장실인 이곳에는 선우의 형인 신우가 직무를 처리하는 곳이었다.
“부회장님 유찬용입니다.”
들어온 사람은 오늘 선우의 안내를 맡았던 유찬용이었다.
“보고드릴 사항이 있어서 왔습니다.”
신우가 찬용을 보며 눈을 빛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보고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직접 찾아온 것을 보니 특별한 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보고하세요.”
“네.”
단답형으로 말하는 신우에게 고개를 숙이며 대답한 유찬용은 심호흡을 한번 하고는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서 간략하게 보고를 시작했다.
이지안 이란 비서와의 계약에 대해 보고를 했을 때는 조용히 듣고만 있었던 신우가 전략기획실장에 대한 보고를 진행하던 도중 갑자기 입을 열었다.
“잠깐. 지금 김진아 실장 말하는 건가?”
“네. 그렇습니다.”
“선우가 그녀가 각성자인지 물어봤다고?”
“네. 제 생각이지만 김진아 실장이 각성자가 틀림없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습니다.”
유찬용의 말에 잠시 생각에 잠긴 신우는 이어서 입을 열었다.
“확신이라? 자네 생각은?”
“그게··· 한 번 더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각성자일 지도 모른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유는?”
“보고하기 전에 그녀에 대한 검사지를 확인해 본 결과 약간 미심쩍은 부분을 발견했습니다.”
유찬용의 보고에 신우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지금껏 진행했던 모든 검사지에 표시된 그녀의 마력양이 너무 차이가 없었습니다.”
“그게 미심쩍다는 건가? 어째서?”
“확인해본 결과 일반인의 마력양은 그날의 컨디션이나 식사, 심리상태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그런데 김진아 실장의 경우 검사에 표시되는 마력양이 모두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자기 관리가 철저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 않나?”
“그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닙니다만 그래도 확실히 하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요즘 그룹에 대한 정보가 새어나가는 것을 확인한 신우였다.
지금껏 작은아버지를 통해 정보가 유출되고 있다고 생각했었기에 전략기획실을 향한 큰 의심을 하지 않았었지만, 이걸 계기로 생각이 바뀌었다.
“방법은?”
“이번에 선화제약과 합작으로 만든 신약의 도움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선화제약과의 합작으로 만든 신약.
각성자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지만, 일반인이 복용했을 시 면역력이나 그 건강이 눈에 띄게 좋아지는 영양제의 한 종류였다.
“그걸 복용시키고 검사를 진행하겠다는 건가?”
“그녀에게만 다른 약을 주고 검사를 진행해 볼까 합니다.”
일반인에게는 획기적인 영양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뛰어난 이 약은 당연히 일반인이 복용했을 시 검사를 진행한다면 마력양이 큰 폭으로 상승할 게 분명했다.
물론 각성자와 비교하면 별거 아닌 양이겠지만.
“그 말은?”
“네. 모두에게는 약의 성능 테스트를 진행한다고 설명할 예정입니다.”
검사를 진행할 때 영양제에 대한 설명을 진행한 후 복용시키고 검사를 진행 시키겠지만, 김진아 실장에게만은 다른 일반영양제를 복용시키겠다는 말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영양제를 먹어도 마력의 양이 상승할 수도 있겠지만 그 차이가 확연할 것이다.
이미 약의 성능테스트 까지 모두 마쳤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일반인인 경우 마력양이 증가했지만 각성자의 경우 아무런 변화가 없었기에 확실하게 그녀를 판별할 수 있을 거였다.
“총 두 번의 검사를 진행할 예정입니다. 일반적인 검사와 약을 복용 후 검사를 한 번 더 진행하려 합니다.”
“음··· 회장님께는 내가 직접 보고드리죠. 이 일을 아는 사람은 당신과 나 그리고 회장님뿐이어야 합니다.”
“네!”
유찬용의 눈빛은 지금보다 더욱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자의 눈빛이었다.
그는 기회를 잡은 자만이 보일 수 있는 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머릿속은 지금보다 더 찬란한 삶을 그리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