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안
“도련님. 말씀하신 분이 찾아오셨어요.”
들리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어 눈을 뜨니 현지가 방안에 들어와 있는 모습이 보였다.
어제 집으로 들어온 후 아버지가 올 때까지 한참을 고민했었다.
전략기획실장이란 여자 때문에.
하지만 아버지에게 그 여자에 관해 물어본 결과 크게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확히 말씀해주시진 않으셨지만 보고를 받으신 아버지는 이번 검사를 통해 그녀에 대해 알아볼 거라고 하셨었다.
아버지가 직접 나서시는 거니 그녀가 각성자인지 아닌지는 분명하게 밝혀질 것이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앞으로 그녀를 어떻게 할지는 아버지와 형이 알아서 결정할 테니 걱정은 접어두기로 했다.
그나저나 그분이라?
이지안을 말하는 건가?
“이지안 씨?”
“네. 어떻게 할까요? 이곳으로 안내할까요?”
“조금 기다리라고 해.”
이제 막 일어나 엉망인 모습으로 그녀를 볼 수 없었기에 기다리란 말을 하며 몸을 일으켰다.
욕실로 걸음을 옮기며 기지개를 쭉 켠 나는 욕실의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바닥에 깔려있는 50억 상당의 마석들.
이상하게 이것들을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웃음이 나왔다.
작게 미소지은 나는 대충 씻은 후 밖으로 나왔는데 현지가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기에 입을 열었다.
“어디?”
“별채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사실 말이 별채지 본채와 그 크기나 화려함이 크게 다르지 않았기에 이곳에도 있을 건 다 있었는데 응접실에서 기다린다는 말에 걸음을 옮겼다.
계단을 내려가자 보이는 이지안의 모습에 나는 약간 굳어있던 표정을 피며 살짝 미소지었다.
“아! 상무님 안녕하세요!”
나를 발견한 이지안은 서둘러 몸을 일으켜 큰 목소리로 인사를 했는데 뒤따라 오던 현지가 깜짝 놀라 입을 열었다.
“깜짝이야!”
옆에서 들리는 현지의 놀람에 내가 더 놀랐다.
“뭐 하는 여자예요?”
뭐 하는 여자긴?
니가 난도질한 여자지.
생각과는 다르게 미소를 풀지 않은 나는 이지안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앉아요. 식사했어요?”
“네? 아니요. 아직 안 했는데요.”
보통 이런 자리에서는 안 먹었어도 먹었다고 하지 않나?
뭐 아무튼 잘 됐다고 생각했다.
그냥 이렇게 대화를 나누는 것보다 식사하며 대화를 이어 가는 게 편할 거란 생각 때문이었다.
“그럼 식사부터 좀 할까요? 나도 아직 식전이거든요.”
“네.”
나는 현지에게 식사를 좀 준비해 달라 말하며 그녀와 함께 별채의 식당으로 향했다.
처음 내가 별채로 옮겨왔을 때는 이곳에 출입을 제한했었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뚱이야 밥만 주면 혼자 잘 지내기 때문에 그 주위 빼고는 집의 사용인들이 별채에 들락날락하는 것은 이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식당으로 향하던 도중 이지안을 흘끔 보자 그녀는 이리저리 고개를 돌리며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신기한 모양인지 연신 감탄을 내뱉으며 내 뒤를 따라왔는데.
각종 예술품, 화려한 장식 고급스러운 집기들이 아마 신기할 거였다.
별채지만 유명의 본가였기에 어디서도 보지 못하는 신기한 것들이 여기저기 진열되어 집을 꾸미고 있었으니까.
식당에 도착한 나는 그녀에게 자리를 권하고는 그녀의 앞에 앉아 입을 열었다.
“오늘뿐만 아니라 앞으로 이곳에서 지안 씨가 할 일은 간단해요.”
그녀는 내 말을 조용히 듣고 있었는데.
“훈련을 받으면 됩니다.”
“네?”
그녀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훈련이요? 무슨 훈련이요?”
“그냥 각성자들이 받는 훈련이요.”
“그, 그걸 제가 왜 받아요?”
“각성자잖아요.”
“그렇긴 한데···”
그녀는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는데.
“그냥 한번 해보세요. 생각해 봤는데 분열이라는 능력이 아주 좋은 능력 같더라고요.”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제가 왜 훈련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해한다.
오늘 그녀는 내 비서로서 출근했기에 훈련이란 걸 받을 거란 생각을 아예 못했을 거였다.
아니 훈련이란 소리 자체가 어이가 없을 거다.
하지만 내가 그녀와 계약을 하고 그녀를 불러들인 이유는 그녀를 가디언으로 써먹기 위해서지 비서로 내 옆에 두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내 옆에는 현지도 있었고 김 실장이란 유능한 인재도 있었다.
“아깝지 않아요?”
“네? 뭐가요?”
“기껏 각성했는데 사용하지 않는 것이.”
“저도 아깝긴 해요. 하지만···”
궁금했다.
지안은 왜 각성을 하고 바로 가디언으로 활동하지 않는 것인지가.
분명 내가 알기로 지안은 각성한 후 지금까지 마나 호흡법을 꾸준히 하고 있었다.
이건 가디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아마 그녀의 몸속에 쌓여있는 마력은 웬만한 A급 가디언들과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정도일 테다.
그렇기에 그녀가 가디언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폭발적인 성장과 명성 얻을 수 있었던 거고.
지안을 내 편으로 끌어들일 수만 있다면.
그녀는 나에게 엄청난 도움이 될 거였다.
틀림없이.
그렇기에 나는 제안했다.
“혹시 활을 사용해 본 적이 있나요?”
“활이요? 아니요.”
“저번에 말하기로는 대부분의 무기를 다뤄봤다고 하지 않았나요?”
“제 손에서 벗어나는 무기는 사용해 본 적이 없어요.”
“어째서죠?”
“제 능력이 저와 닿아있지 않으면 발휘되지 않거든요.”
그런 거였나?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자신의 능력이 손에서 벗어난 것에는 효과가 없다고 알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전생의 내가 본 그녀는 전혀 아니었다.
활을 떠난 한발의 화살이 수백 발의 화살로 분열하여 적을 폭격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장관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뭐죠?”
“그게··· 교관님도 그렇게 말씀하셨고 저도 해봤지만 안 됐거든요.”
교관이 문제였나?
아마 각성하고 잠시 교육을 받는 곳의 교관이 그녀에게 했던 말 때문에 그녀는 제대로 해보지도 않고 포기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이없게도.
“그···”
이어서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현지가 식당의 문을 열고 들어와 내 옆에 앉았는데.
왜 여기 앉지? 보통 내 뒤에 서 있지 않았나?
의문이 담긴 눈으로 현지를 보았다.
“저도 밥 안 먹었거든요!”
그녀의 목소리와 함께 반대편에 있던 주방과 연결된 문이 열리며 음식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그러냐?”
그 모습을 보며 현지에게 말하곤 조용히 음식이 모두 자리 잡을 때까지 기다린 나는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기로 했다.
“일단 들죠.”
“네.”
“네.”
이지안과 현지가 대답을 하며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조용히 식사를 즐기던 나는 이지안을 보며 입안의 음식을 삼키고 말했다.
“어때요? 음식은 입에 맞아요?”
그녀는 입안에 음식을 가득 채운 햄스터 마냥 두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식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 말에 서둘러 턱을 움직여 입안의 음식을 모두 삼키고 대답했다.
“네! 정말 맛있어요.”
뭐라고 해야 할까?
좋게 말하면 순수해 보이는 거고 나쁘게 말하면 약간 모자라 보이는 모습이었다.
“저 여자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때 작은 목소리가 내 귀에 들려와 고개를 돌리니 현지의 얼굴이 가깝게 다가와 있었다.
속삭이듯 말하는 현지의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니가 더 이상해 보여.
조금 전까지 지안의 모습과 똑같은 모습으로 식사를 하던 현지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물론 음식이 맛있긴 하다.
초일류 요리장 주방장으로 두고 있기 때문에 음식의 맛에서는 최고라 할 수 있었지만 이건 좀 심하단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
현지는 매일 먹는 음식일 건데 왜 이진아랑 똑같은 모습일까?
원래 여자란 생명체가 이런 거였나?
뭔가 내가 알던 여자라는 생명체들이 아닌 것 같았는데.
거기다 현지는 아까부터 지안을 바라보는 눈빛에 적대감 같은 게 살짝살짝 보였는데 그 또한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한참을 먹던 둘은 어느새 식사를 모두 끝마쳤는지 방금 식사를 하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차분하게 앉아 이어서 나온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휴-
한숨을 내쉰 나는 지안에게 말했다.
“혹시 사용해봤던 무기 중에 능력과 잘 맞는 무기가 있었나요?”
“네. 그게 채찍 종류가 제 능력과 가장 잘 맞았어요.”
“채찍이요? 잘 맞는 무기가 있었다면 포기할 이유가 없었을 텐데요?”
“그게··· 마력 소모가 너무 심해서요.”
그녀의 말에 떠오르는 게 있었다.
분명 그녀의 재능은 유니크라 불릴 정도로 뛰어난 능력이었다.
다만, 마력의 소모가 엄청나게 심하다는 걸 얼핏 들어본 적이 있었다.
분열된 물체에 하나하나 마력을 불어넣어 적을 타격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마력 소모량을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데도 그녀가 천궁이란 이명을 얻었다는 것은 마력에 대한 재능이 일반적인 천재 수준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괴물.
그래 그녀가 가진 마력에 대한 재능은 말 그대로 괴물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마력 소모가 심하다라···?”
“제가 마력에 대한 재능이 별로 없어서···”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마력에 대한 재능이 없다는 지안의 말에 의문이 들어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 마력 적성검사 수치가 얼마죠?”
“9요···”
“뭐라고요?!”
현지의 놀라는 소리가 들린다.
지안의 입에서 나온 9라는 수치가 비정상적으로 높았기 때문인데.
각성자의 평균 마력 적성검사 수치는 3이었다.
5정도만 되어도 대단히 재능이 있다는 건데 지안은 무려 9였다.
보통 천재라 불리는 자들의 거의 2배는 되는 수치였는데 이 여자는 도대체 왜 자신이 마력에 대한 재능이 없다고 알고 있는 걸까?
“거짓말! 말도 안 돼! 나도 8.3인데 당신이 9라고?”
순간 등 뒤로 소름이 돋았다.
현지가 8.3이라고?
스스로 자신의 수치를 입 밖으로 꺼내는 현지를 보고 눈앞에 앉아있는 지안을 번갈아 보았다.
이런 괴물 같은 년들이···
마력적성 수치가 5 정도만 되어도 10대 길드가 움직인다.
서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신경전이 장난이 아닐 정도로 그들은 귀한 인재들이기 때문인데···
지금 내 눈앞에 있는 푼수들이 그런 존재들을 평범 그 이하로 만들 정도로 재능이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믿고 싶지 않았다.
내 마력적성 수치는 6.6이다.
둘에 비해 초라하긴 하지만 나는 이 수치만으로도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전생의 내가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풀려나고 각성자 등록을 할 때 받은 검사에서 나온 수치였는데 나는 이 수치만으로도 거의 모든 길드에 러브콜을 받았었다.
6.6이라는 수치만으로도 10대 길드 뿐 아니라 거의 모든 길드가 나를 미친 듯이 쫓아다닌 걸 생각하면 이 둘의 수치는 불가능한 수치나 다름없었다.
그때의 나에게 왔던 제의는 정말 장난이 아니었다.
눈 딱 감고 받아들이고 싶을 정도로.
내가 유선우가 아니었다면 분명 어느 길드든 들어갔으리라.
“누가 지안씨에게 재능이 없다고 한 거죠?”
“그게··· 제 교육을 담당하시던 교관님이 그러셨어요.”
교관이라고?
협회의 교관 따위가 그딴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다고?
아니 그러기도 전에 각 길드가 알아서 그녀를 찾아갔을 텐데?
도대체 어떻게 된 거지?
설마? 숨긴 거야?
“혹시 누구한테 원한산 적 있어요?”
“원한이라뇨?”
그 교관이라는 놈 뒤에 협회의 고위 간부가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
아니 협회장조차 저런 짓을 함부로 저지를 수 없었다.
만약 이 여자가 어떤 길드에 들어가 그 재능을 꽃피우게 된다면 다른 길드들이 협회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테니까.
마력적성 수치가 무려 9였다.
어떻게든 밝혀질 수밖에 없다는 말이다.
하다못해 인터넷만 조금 뒤져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그녀가 가디언이나 헌터가 되길 포기하지만 않는다면.
포기라?
“혹시 그 교관이 이지안 씨에게 가디언이 되길 포기하라고 하지 않았어요?”
“어떻게 아셨어요? 저보고 재능이 너무 없어서 길드에서 받아줄 리가 없다고 했거든요. 그냥 포기하는 게 오래 사는 길이라고··· 그리고 교관님 말대로 저를 찾아오는 길드가 없기도 했고요.”
“하! 마력적성 수치가 9인 사람한테 가디언을 포기하라고 했다고요? 이런 미친!”
현지가 어이가 없는지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제 친구도 그랬는걸요. 각성자의 마력적성 수치는 10부터 시작이라고.”
“친구요?”
“네. 무려 아버지가 가디언 협회장이세요.”
자랑스럽게 말하는 이지안을 보자 이제야 좀 감이 잡히기 시작했다.
그년이구만.
협회장 딸이라는 그 년이 아마 뒤에서 수작을 부렸으리라.
“그 친구랑 사이가 좋아요?”
“물론이죠. 제일 친한 친구예요.”
어째서 그녀가 자신의 마력적성에 대해 찾아보지 않았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장 친한 친구라고 믿는 자가 자신에게 거짓을 말할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 친구랑 요즘도 연락해요?”
“음~ 요즘은 좀 뜸하긴 해요.”
“잘됐네요. 앞으로도 연락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네? 왜요?”
의아한 표정을 짓는 이지안에게 내가 직접 말해줄 필요도 없었다.
현지가 그녀에게 화가 잔뜩 나서는 소리치듯 설명해주고 있었으니까.
사실을 들은 그녀는 정신이 나갔는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