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14)

수아.

“와아~”

한쪽에 마련되어 있는 의자에 앉아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던 나는 슬슬 움직이기로 했다.

작은 상자를 들고 몸을 일으킨 나는 걸음을 옮겼다.

홀로 떨어져 있는 수아에게로.

“이름이 뭐니?”

“···수아에여.”

내 말에 조금 뜸을 들이다 대답하는 수아의 모습에 아이가 좋아할 법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수아는 내 미소를 본 후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고개를 푹 숙이고는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무섭다는 듯이.

그 지옥 같은 곳에서 풀려난 직후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쓰러움이 느껴졌다.

그때는 누군가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겁이 났었으니까.

“아저씨가 이걸 선물하고 싶은데 받아주겠니?”

슬며시 고개를 든 수아는 내 손에 올려져 있는 상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느껴보는 오묘한 감정이 느껴졌다.

이게 무슨 감정이지?

받을까 말까 고민하는 수아의 모습에 미소를 지은 나는 아이의 양손에 상자를 올려 주었다.

“풀어보겠니?”

상자를 양손에 쥐고 고개를 끄덕인 수아는 상자를 천천히 풀어가기 시작했다.

상자 안에 있던 것은 갈색 털의 작은 곰 인형이었다.

전생에 수아를 만났을 때 품에 꼭 앉고 있던 곰 인형이 떠올라 직접 골라온 거였다.

“어때? 마음에 드니?”

곰 인형을 상자에서 꺼낸 수아는 품에 꼬옥 안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싫어요.”

“응?”

잘 못 들었나?

분명 수아가 싫다고 한 것 같은데?

곰 인형을 소중히 꼭 끌어안고 있는 수아가 싫다고 말했을 리가 없었기 때문에 주위를 둘러봤지만, 이곳에 있는 사람은 나와 수아뿐이었다.

“싫어요.”

또다시 들리는 목소리는 분명 수아의 입에서 나온 소리였다.

“곰 인형이 마음에 안 드니?”

“아니여.”

“그럼?”

“수아는 아빠가 있어요.”

아! 그 소리였구나.

민희라는 아이를 통해 듣기는 했지만, 입양을 거부하는 게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아이가 거부한다고 입양이 취소될 수도 있나?

“수아야 이 아저씨는 수아를 입양하기 위해 찾아온 게 아니에요.”

“정말여?”

“그럼~ 아저씨는 수아에게 선물을 주려고 온 거예요.”

“헤~”

그제야 수아는 안심이 되는지 환하게 미소를 보여주었는데.

그 모습은 정말 깜찍하고 귀여웠다.

깨물어 주고 싶을 만큼.

너, 너무 귀엽잖아? 아기천사가 있다면 이럴까?

“아빠는 아직 수아에 대해서 모른대요.”

“응?”

갑자기 수아가 아빠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정말 뜬금없이.

“그, 그렇구나?”

“이모가 그러는데 조금만 기다리면 아빠가 데리러 올 거래여.”

이모가 있다고? 분명 그런 말은 듣지 못한 거 같은데?

성철이 이 새끼 조사 제대로 한 거 맞아?

“이, 이모가 있구나? 혹시 이 아저씨가 만나 볼 수 있을까?”

“이모는 하늘나라로 여행을 떠났는데? 아주 오래 있어야 볼 수 있대요.”

죽었구나.

그래서 성철의 조사에서 빠진 모양이었다.

“그럼 혹시 아빠 이름을 좀 알 수 있을까?”

“그, 그게. 그게···”

“그, 그럼 엄마 이름은?”

아이의 큰 눈동자에 차오르기 시작하는 물기 때문에 다급하게 입을 열어야 했다.

“엄마 이름은 김짜 미짜 진짜에여.”

김미진?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조사한 자료를 자세히 볼 걸 그랬다.

사진만 보고 확신을 가진 나는 아이에 대한 자료를 제대로 살펴보지 않았었는데, 아이의 엄마 이름을 들으니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익숙함이 느껴졌다.

설마 내가 아는 사람이겠어? 거기다 이름이 같은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고.

“그럼 수아는 아빠가 데리러 올 때까지 이곳에서 기다리는 거야?”

“네!”

밝게 웃으며 대답하는 수아의 모습에 내 입가에도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도련님 여기서 뭐 하세요?”

누군가 둘만의 대화에 끼어들었는데 바로 현지였다.

현지에게 고개를 돌려 자리를 좀 피해달라 눈짓을 했지만,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아무렇지 않게 곁으로 다가오는 현지는 아이를 보며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와! 정말 귀여운 아이네요?”

“가라. 제발.”

“왜요? 그런데 이 아이 도련님하고 정말 많이 닮았네요.”

수아와 나를 번갈아 보던 현지는 나의 짜증을 부추겼다.

“어쩐지 기부를 한다고 했을 때 이상하다 했어. 이 애 도련님 딸 맞죠?”

“너 진짜!”

“큰일 났네. 회장님 아시면 그냥 안 넘어가실 것 같은데.”

비아냥거리는 듯한 현지의 모습에 화가 났지만, 아이에게 화를 내는 모습을 보여주기 싫었던 나는 자리를 벗어나기 위해 현지를 잡아끌며 입을 열었다.

“너 잠깐 나 좀 보자.”

“왜요? 비밀 지켜달라고요?”

현지를 끌고 수아에게서 잠시 멀어지려 했는데 수아의 반응이 이상했다.

몰래 우리를 따라오고 있었다.

아! 일 났네.

“너 이거 어쩔 거야? 아이 앞에서 그런 소리를 하면 어떻게 해!”

“아이도 알아야죠. 자기 아빠가 누군지.”

“너 자꾸 이럴 거야? 아무리 나에게 화가 났어도 그렇지 아이 앞에서 해도 될 소리가 있고 안될 소리가 있다는 걸 구분 못 하면 어쩌자는 거야!”

말하면서도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현지가 화가 났어도 이런 걸 구분 못 할 정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너. 뭐 알고 있지?”

“뭘요? 저 아이가 도련님 딸이라는 거요?”

“자꾸 이럴 거야? 왜 이러는 건데?”

“알면서 모르는 척하지 마시죠. 역겨우니까!”

역겹다고? 내가?

나보다 더 화를 내는 현지의 모습에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뭐 때문에 이러는 건데?”

“이름 김미진 94년생. 고아에 희망 보육원 출신. 세화 초등학교, 세화 중학교를 졸업하고 명진 고등학교 진학.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아이를 출산하다 사망.”

명진 고등학교라면 내가 나온 학교인데?

김미진? 김미진이라?

한참을 생각에 빠져 고심하던 나의 머릿속에 한 여성의 얼굴이 떠올랐다.

내 딸이라고?

그 얼굴이 떠오르는 순간 누군가 내 머리를 후려치는 듯한 충격이 나를 강타했다.

분명 나보다 2년 선배였던 걸로 기억한다.

유명한 선배였다.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그녀는 고아라는 타이틀조차 무색하게 만들 정도로 인기인이었다.

전국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똑똑할 뿐 아니라 운동이면 운동 외모면 외모 성격이면 성격 어디 한 군데 모난 곳이 없는 선배였다.

나와 얽히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있었던 나는 그녀 역시 금방 나에게 넘어올 거라 생각하고 그녀에게 접근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이에 화가 난 나는 그녀를 비참하게 만들어 주겠다 다짐하며 연기를 시작했다.

거짓 미소를 짓고 양아치임을 숨긴 채 잘생긴 외모와 많은 돈으로 그녀를 유혹했다.

나를 거부하던 그녀였지만, 친절한 모습으로 다가가자 그녀도 나를 달리 보기 시작했다.

그녀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에 찾아가 도와주기도 하고 양아치들을 매수해 그녀를 위험에 처하게 한 후 도와주기도 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그녀가 먼저 나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내 앞에서 수줍게 웃으며 날 좋아한다던 그녀의 말을 듣는 순간 모든 놀이가 끝났다.

나는 그녀를 가지고 논 후 버렸다.

아주 비참하게.

너 따위가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하냐며 차마 듣기 힘들 정도의 심한 모욕을 주었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모두 내가 한 짓들이었다.

현지가 나에게 화를 내는 이유는 당연했다.

내가 한 쓰레기만도 못한 짓을 알아버렸으니 역겨웠겠지.

아니 나조차도 내가 역겨웠다.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안 좋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그때 한쪽 다리에서 작은 압박감이 느껴졌다.

수아였다.

겁을 잔뜩 집어먹은 눈으로 내 바지를 꽉 부여잡고 있는 아이를 보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복수였던 걸까? 나에게 복수하기 위해 이 아이를 이렇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내 딸이기도 하지만 그녀의 딸이기도 한 아이였다.

자신의 아이를···

그러던 도중 문득 하나의 생각이 떠올랐다.

전생에 수아를 처음 보았을 때 아이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죽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죽어있던 눈이 나와 대화를 나누며 점차 활력을 찾는 모습에 의문이 들었었다.

겨우 나 따위와 대화를 나누는 게 그렇게 좋을까? 라는 생각을 감출 수 없었는데.

아마도 그때 이 아이는 내가 자신의 친부라는 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지금 한 말 모두 사실이야?”

“네.”

내 다리에 얼굴을 박고 꼼짝도 하지 않는 수아에게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저도 오늘 아침에 회장님에게 듣고 알았어요.”

“아버지는 어떻게 알았는데.”

“아마 성철이란 사람이 아이를 조사한다는 사실을 보고 받고 따로 알아보신 듯해요.”

“검사는?”

“아이의 유전자가 도련님과 정확히 일치한답니다.”

최강준 이 개새끼가!

나에 대한 혐오감은 이내 최강준에 대한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스스로에 대한 혐오감에 정신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으니까.

그에 대한 분노로 감정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유명그룹이 무너졌음에도 대한민국의 경제가 무너지지 않았던 이유가 모두 이 아이 때문이었다.

아버지와 형 그리고 나.

모두의 유산이 이 아이에게 상속되었기에 작은아버지는 1년도 버티지 못했던 거였다.

최강준이 수아를 입양한 진짜 이유가 그 모든 것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던 거였어?

나를 살려뒀던 이유가 설마 수아를 협박하기 위해서는 아니겠지?

아빠를 간절히 원하던 수아에게 나의 존재를 알려주고 말을 듣지 않으면 나를 죽인다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개새끼가 감히 내 딸을 가지고 장난을 쳐?

너무 나간 생각일 수도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그때 나를 찾아왔던 수아는 분명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다.

그러니 나를 찾아왔겠지.

“아빠?”

분노로 머리가 뜨거워진 내 귓가로 들리는 목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숙인 나는 머릿속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두 눈에 수아의 모습이 담기자 세상이 멈춰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오직 수아의 모습만 보였고.

내 머리를 지배하던 분노는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분노가 사라진 머릿속은 텅 비어버린 듯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아무리 고민을 해도 내 머리는 고장이라도 난 듯 어떤 생각도 허락하지 않았다.

“수아 데리러 온 거에여?”

물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수아의 모습에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지만, 내 입에서는 어떤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랬는데.

수아의 커다란 눈동자에 어렸던 물기가 흘러내리자 본능적으로 입이 열렸다.

“그, 그럼.”

“지, 진짜루 수아 아빠에여?”

아빠냐는 수아의 물음에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자격도 없는 나 같은 놈이 아빠라고 해도 될까?

“아가씨? 이게 맞나?”

전전긍긍하는 내 모습을 본 현지는 무릎을 꿇고 앉아 수아와 눈높이를 맞추곤 입을 열었다.

“아가씨는 오늘부터 아빠랑 함께 살 거랍니다.”

“진짜요?”

“그럼요. 그러려고 아빠가 오늘 이렇게 찾아왔잖아요.”

수아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곤 몸을 들썩이기 시작했다.

“흑- 흑-”

점차 들리기 시작하는 아이의 울음소리.

달래줘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서서 전전긍긍하고 있을 뿐이었다.

내 딸이라는 사실을 모를 땐 잘만 말하던 입이, 잘만 움직이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으앙~ 아빠!”

그렇게 굳어 있던 그때 수아가 두 팔을 벌리곤 나에게 뛰어들었다.

그제서야 내 몸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는데.

신기했다.

수아의 모든 것이 영혼에 각인되는 듯한 느낌.

“미안해 수아야.”

꾹 닫혀버렸던 입이 저절로 열렸고, 내 두 눈에서 눈물이 봇물 터지듯 터져 나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 번 느꼈던 죽음의 고통 따위는 아무렇지 않게 느껴질 정도로.

내 아이의 존재조차 몰랐던, 알아보지도 못했던 자신이 너무 혐오스러웠다.

다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로지 미안하다는 감정만이 가슴을 가득 채워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멈추지 않는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수아를 품에 꼭 안은 채 수아가 내 품에서 잠들 때까지 그냥 그렇게 있었다.

아마 이때부터였을 거다.

내 목표가 단순해진 것이.

수아

내 품에 안겨 잠든 수아를 보던 나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뭐라셨어?”

“무조건 아가씨를 집으로 데려오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것밖에 없는데요.”

“나에게 전하라는 말 같은 거 없으셨어?”

“각오하라고 하시던데요. 아마 그냥 넘어가시진 않으실 거에요. 화가 정말 많이 나셨거든요.”

현지의 말을 들은 나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아버지가 수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가 걱정될 뿐이었다.

“나한테 실망했냐?”

현지의 눈치를 슬쩍 보고는 조용히 말을 내뱉었다.

“네. 솔직히 좀 많이요.”

“그렇겠지. 나도 내가 이렇게 병신같은데 너라고 다르겠냐.”

하소연이라도 하고 싶었다.

존재조차 몰랐던, 생각지도 못했던 딸의 존재.

사실 지금 누구보다 당황스러운 건 바로 나였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아버지와 형에겐 또 뭐라고 해야 하지?

아니 사실 이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내가 지금 가장 걱정되는 건 이 아이가 앞으로 변할 환경에 잘 적응할 수 있을지가 걱정이었다.

아버지와 형이 수아를 무심하게 대하면 어쩌지?

수아가 내 딸이라는 게 밝혀졌을 때 사람들이 손가락질하지 않을까?

“정말 모르셨어요?”

“뭐가?”

“그 아이가 딸이라는 거요.”

“알았으면 내가 오늘처럼 행동했겠냐?”

“그럼 뭐 때문에 아이를 만나러 온 건데요.”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사실대로 말할 순 없었다.

회귀자란 사실을 말해 봐야 믿지도 않을뿐더러 정신병자 취급이나 하겠지.

잠든 수아의 천사 같은 모습을 보던 내가 생각해 낸 건 결국, 거짓이었다.

“들었거든. 오래전에 내가 몹쓸 짓을 한 여자가 아이를 낳다 죽었다는 걸.”

“그래서요?”

“아이가 보육원에 맡겨졌다는 이야기를 들었어. 그래서 속죄라도 하고 싶어서 찾아온 거야. 후원이라도 하려고.”

“그럼?”

“그래. 하필 그 아이가 내 아이였던 거지.”

현지는 내 말을 듣고 고민에 찬 표정을 지으며 아무런 말이 없었다.

믿는 것 같았다.

다만 아버지도 이렇게 쉽게 넘어갈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도 다행이네요.”

“뭐가?”

“이렇게라도 알게 되셨잖아요. 아이에 대해.”

슬며시 미소 지으며 말하는 현지는 나에 대한 화가 모두 풀려버린 모습이었다.

“저는 도련님이 모두 알면서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고 생각했거든요.”

“내가 아무리 막 나간다고 해도 그 정도는 아니다.”

“어머? 정말요? 저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거라 생각했는데요?”

“그래. 예전의 나였다면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와 형도 죽이는 패륜아였던 나다.

그랬던 내가 아이를 무시하지 못했을 리 없었다.

“상무님!”

멀리서 지안의 목소리가 들렸는데.

급히 지안에게 고개를 돌려 조용히 하란 제스쳐를 취했다,

“무슨 일이야?”

“그게··· 김 실장님이 오셨어요.”

“김 실장이? 어딨는데?”

“아! 저기 오시네요.”

지안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김 실장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회장님 말씀 전하러 왔습니다.”

이 모든 게 아마 계획되어 있던 일일 거다.

어쩐지 좀 이상했다.

저녁에 기부를 좀 하겠다고 했는데.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니 모든 준비가 끝나 있었다.

그것도 과할 정도로.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었지만 기부금을 제외한 생활용품이나 가전제품 학용품 등등이 과할 정도라는 사실을 부정할 순 없었다.

마치 그 전에 미리 준비해 놓은 것처럼.

“말해.”

“이분이 아기씨입니까?”

내 품에 안겨 잠든 수아를 보며 김 실장이 물어왔다.

“아기씨요?”

지안의 어리둥절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김 실장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이어서 입을 열었다.

“아기씨와 함께 오시랍니다.”

“한 가지만 물어도 될까?”

“네. 말씀하시죠.”

“아버지는 이 아이를 어쩌실 생각이야?”

“무슨 뜻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해외로 내보낼 생각은 아니시지?”

“그럴 일은 없으실 겁니다. 도련님의 호적에 아기씨의 이름을 올리기 위해 법무팀이 준비 중입니다. 내보낼 생각이셨다면 보낸 후에 준비를 시키셨겠죠.”

김 실장의 말을 듣자 좀 안심이 되었다.

이제야 아빠인 나를 만난 수아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 나와 떨어트리려 하시진 않을까 걱정을 했으니까.

“그럼 이만. 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김 실장이 나가자 지안이 부담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보는 게 팍팍 느껴졌다.

“왜?”

“아기씨라면 도련님의?”

“그래 내 딸이야.”

“상무님 아직 결혼···”

“결혼을 해야 애가 있는 건 아니잖아.”

“그, 그렇죠. 그런데 여긴 보육원인데? 설마 입양을···”

“아니야.”

“그, 그럼 친딸?”

“지안 씨 쉿!”

횡설수설하는 지안을 현지가 조용히 시켰다.

“니가 설명 좀 해줘.”

“네.”

내 말에 현지가 지안을 끌고 나가자 방 안에는 침묵만이 흘렀다.

조용한 방 안에서 수아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나는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를 상대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있었으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수아의 잠든 얼굴을 보니 뭐든 할 수 있을 거 같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

“아버지 들어갈게요.”

수아의 손을 꼭 붙잡고 서재의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었다.

열린 문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와 형의 모습에 지금껏 가슴을 가득 채우던 자신감이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지만,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앉아라.”

“네.”

수아를 품에 안은 채로 소파에 자리를 잡았는데.

아버지와 형의 시선이 수아에게 고정된 채 이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버지?”

“그, 그래? 크흠-”

“하실 말씀 있으시면 빨리 좀 해주세요. 수아 밥 먹어야 해요.”

강하게 나가기로 정한 나는 어떻게 보면 버릇없어 보이는 모습으로 말했다.

“나도 아직 밥 안 먹었다.”

역시 버릇없어 보였던 모양이었다.

아버지도 형도 식사를 하지 않고 기다렸으니 좀 참으라는 의미인 듯싶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가, 같이 먹자고. 나도.”

작은 목소리로 말하는 형의 모습은 좀 이상해 보였다.

“어? 뭐라고?”

“아니 그냥 밥 먹을 거면 나도 같이 먹자는 거다.”

아버지에게 혼날 걸 대비하고 있던 나는 상황이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느꼈다.

“저 안 혼내세요?”

“크흠- 일단 소개부터 좀 해주지 않겠느냐?”

“네?”

응? 뭐야 이건?

“이름이 수아라고 했지? 내가 수아 할애비란다.”

내가 멍하니 있자 아버지가 직접 수아에게 자신을 할아버지라고 소개했다.

“나, 나는 수아 삼촌이란다.”

“아, 안녕하세요. 수아에요.”

내 품에서 빠져나와 배꼽에 손을 얹고 고개를 숙이는 수아의 깜찍한 모습을 본 아버지와 형의 얼굴엔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그래. 내가 할애비다. 하하하~”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이 상황은 뭐지?

웃음을 터트리시는 아버지와 항상 무표정을 유지하던 형의 밝은 미소.

자, 잘된 건가?

아버지와 형을 번갈아 바라보고 있던 그때 형이 품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형이 품에서 꺼낸 것은 고급스러워 보이는 작은 케이스였다.

액세서리가 들어있을 법한.

“이건 삼촌이 수아에게 주는 선물이에요.”

“감사합니다.”

상자를 받은 수아는 바로 열어보지 않고 품에 안고 있었는데.

“한번 열어보겠니?”

“네.”

수아가 상자를 열자 빛나는 무언가가 안에 들어있었다.

그것은 목걸이였다.

커다란 다이아가 중앙을 밝히고 작은 다이아들이 주변을 떠다니듯 수놓아진 아름다운 목걸이.

가볍게 억을 넘을 넘어갈 법한 여성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싶어 할 그런 목걸이.

이걸 지금 선물이라고 준비한 거야?

이제 8살이 되는 아이에게?

“마음에 드니?”

“이, 이뻐요.”

조용히 대답하는 수아의 모습에서 알 수 있었다.

아직 어린 수아는 자신이 받은 게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냥 이쁘다고 생각할 뿐.

“신우야 아이를 데리고 자리를 좀 피해 주겠니?”

잔뜩 굳은 아버지의 표정과 목소리에 드디어 올 게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아야 삼촌이랑 식당에 가 있을래. 아빠가 할아버지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그래.”

“···네.”

망설이며 대답하는 수아는 형이 많이 낯선 모양인지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나도 좀 낯설어 하는 것 같은데 형은 더 그렇겠지.

조금 전 수아가 내 품에서 깨어났을 때.

수아는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조용히 내 품에 안겨 오긴 했지만, 거의 말을 하지 않던 수아였다.

아버지와 형에게 인사한 것만 해도 대단한 일이라 생각한다.

“신우야 나가면서 김 실장 좀 들어오라고 하거라.”

“네.”

아버지의 말에 대답을 한 형은 수아가 쭈뼛거리며 좀처럼 다가오지 않자 먼저 다가가 수아를 번쩍 안아 들었다.

“아?”

“삼촌이랑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수아는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이어지는 형의 자상한 말투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 이상한 건 형이 수아를 안는 자세가 나보다 훨씬 안정되어 보인다는 것이었는데.

설마 연습을 한 건 아니겠지?

그렇게 형이 수아를 안은 채 나가는 모습을 보며 나는 마음을 다잡고 아버지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버지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계셨는데.

조용히 아버지의 입이 열렸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손녀를 처음 만나는 자린데 당연히 선물을 준비했어야지. 신우 이놈이 나에겐 말도 안 하고 혼자 선물을 준비할 줄은 생각도 못 했구나. 못된 놈!”

어? 지금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조용히 혼잣말하시는 아버지는 마치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셨다.

“아이가 나를 미워하면 어쩌지?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내가 가서 데려올 걸 그랬어!”

아버지의 혼잣말을 조용히 듣던 나는 어이가 없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었다.

설마 이런 식으로 날 혼내시는 건가?

똑똑-

“드, 들어오게.”

노크 소리에 아버지가 급히 입을 열자 김 실장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찾으셨습니까?”

“지금 당장 내 손녀의 선물을 가져오라 연락하게.”

“어떤 것으로 준비할까요?”

“얼마가 됐든 좋으니 그 아이가 좋아할 만한 것으로!”

“알겠습니다.”

“김 실장만 믿겠네.”

김 실장은 아마 어이가 없을 거다.

10년 넘게 아버지를 모시면서 이런 경우는 처음일 테니까.

나도 이런 아버지의 모습은 처음 봤으니까.

김 실장이 나갔음에도 아버지는 역시 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으셨다.

그저 초조한 모습으로 다리를 덜덜 떨고 있을 뿐이었는데.

결국, 내가 먼저 아버지에게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저 혼내시려던 거 아니에요?”

“조용히 하거라.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그럼 뭐가 중요한데요?”

“수아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겠느냐? 삼촌도 선물을 준비했는데 할애비가 되어서 선물하나 준비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 나를 미워하지 않겠느냐?”

“미워하지 않을 거 같은데요?”

“저, 정말 그럴까?”

반색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정말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누가 이런 아버지를 보고 대한민국 경제를 한 손에 쥐고 흔드는 권력자라 생각할까?

“당연하죠. 수아는 그냥 할아버지가 생긴 것만으로도 좋아할걸요?”

“그렇겠지?”

“네. 그리고 선물도 준비하라고 하셨잖아요.”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시며 표정이 밝아지신 아버지는 나를 슬쩍 보시곤 갑자기 표정을 굳히셨다.

근엄하게.

“각오는 되었느냐?”

“네?”

진짜 어이가 없었다.

“내 핏줄을 감히 그런 곳에 방치하고도 그냥 넘어갈 거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라 말해주고 싶구나. 아들아.”

일순간 방 안의 공기가 변해버린 듯했다.

마치 공기가 무거워진 것처럼 나를 압박하기 시작했는데.

순식간에 변해버린 분위기 때문인지 아버지가 거대해진 것 같은 착각이 일 정도였다.

“저도 몰랐어요.”

“몰랐다라?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 게냐?”

“정말이에요.”

“모른다면서 왜 그 아이를 찾은 게냐?”

“그게···”

나는 현지에게 했던 변명을 아버지에게 그대로 말했다.

“어째서 그 소식을 들었을 때는 네 아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느냐?”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까요. 그때에는 최근의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아이의 나이를 듣고도 말이냐?”

“저 때문에 안 좋은 길에 빠졌다고 생각했거든요.”

분명 그랬다.

그녀는 나에게 모욕을 당한 후 학교에 거의 나오지 않았으니까.

학교에 안 좋은 소문들이 많았다.

그녀가 미쳐버렸다던가 자살했다는 소문이 학교에 흘러 다녔었다.

심지어 몸을 판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한 여자의 인생을 망쳐버림으로써 네 아이가 똑같은 고통을 받을 뻔했구나.”

“네.”

“네가 저지른 잘못들이 너나 가족들에게 돌아갈 수 있다는 걸 기억하거라. 신우가 될 수도 있고 이 아비가 될 수도 있음이야.”

“무섭네요. 제가 저지른 잘못이 제가 아닌 내 가족에게 돌아갈 수도 있다니···”

내 말에 한참 아무 말 없던 아버지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미 지나버린 일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후에 아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너를 원망할지도 모른다.”

“알고 있어요.”

“그러게 말할 때 좀 듣지 그랬느냐?”

아버지의 말에 나는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아버지가 나를 싫어해서 그러시는 줄만 알았다.

주변 모두가 나를 치켜세워줬기에 나는 어떤 짓을 저질러도 상관없는 특별한 인간이라고 계급이 다르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그보다 아버지. 혹시 조사한 것 중에 수아 이모라는 사람이 있었나요?”

“그래. 있다.”

“그녀는 왜 알리지 않고 수아를 보육원에 맡긴 거예요?”

“나도 모르겠구나. 아마 아이의 엄마가 부탁한 게 아닌가 생각하고 있다.”

아버지의 말을 듣자 정말 내 예상이 맞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육원에 맡기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때 아이의 존재를 나에게 알릴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나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서.

“아버지 혹시 그 이모라는 여자 말고도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이 있었을까요?”

이걸 물어보는 이유는 최강준 때문이었다.

최강준은 어떻게 알았을까?

수아가 내 딸이라는 걸?

“확신은 들지 않지만 있었을 거다.”

“누군데요.”

“그 여자 기둥서방. 지금은 감옥에 가 있지만, 곧 부자가 될 거라고 떠들고 다녔다고 하더구나.”

그놈이구나.

최강준에게 수아의 존재를 알린 놈이!

“그 사람을 좀 보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왜 찾아가서 복수라도 하게? 걱정하지 말 거라. 그놈을 보게 될 일은 없을 테니까.”

“그게 무슨 말이세요?”

설마 아버지가?

“이유는 모르겠지만 아이의 이모라는 여자를 죽인 놈이 그놈이더구나. 평생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놈이다.”

아버지는 더 이상 신경을 쓰지 말라고 하셨지만 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놈이 아니었다면 더 빨리 수아의 존재를 알 수 있었을지도 몰랐다.

이모라는 여자를 죽이지만 않았다면.

거기다 전생에 수아를 최강준에게 넘긴 놈이었고.

성철에게 방법을 찾으라고 해야겠어.

놈을 지옥으로 보낼 방법을···

수아

수아가 집에 온 뒤로 많은 것이 변했다.

집안의 분위기가 전과는 180도 달라졌을 정도로 밝아졌다.

항상 무뚝뚝한 아버지와 형, 변하긴 했지만, 망나니였던 나.

그래서인지 전에는 우리 집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이나 행동이 살짝 경직되어 있었다.

하지만 수아가 온 뒤로 그들의 입가에는 은은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고 호주머니 속에는 수아가 좋아하는 초콜릿, 사탕 등의 군것질거리를 가득 넣고 다니는 모습이 자주 내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와 형 역시 마찬가지로 많이 변했는데.

형의 퇴근 시간이 빨라졌고 아버지는 이제 회사에 나가는 일이 거의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일까?

아버지에게 보고를 위해 방문하는 임직원들이 부쩍 늘어나 버렸다.

다만 문제가 하나 생겼는데.

그들의 보고가 내 방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었다.

아직은 많이 어색한지 내 곁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수아 때문에 아버지가 회사로 출근하는 대신 내 방으로 출근을 하시기 시작했고, 당연히 아버지에게 보고를 위해 방문한 자들이 내 방으로 향하게 되는 이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분명 누가 봐도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데 아무도 이걸 신경 쓰지 않고 있다는 게 정말 황당했다.

거기다 아버지의 저 모습.

수아를 품에 안은 채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은 차마 보기 힘들 지경이었다.

너무 좋아 죽겠는데 그래도 부하직원 앞이라고 억지로 표정을 굳히려 하는 그 모습은 정말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표정이었다.

“아버지 도대체 왜 이러세요.”

“뭐가 말이냐?”

“언제까지 제 방에 계실 거냐고요.”

“누가 이 방에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아느냐? 우리 귀여운 수아가 있으니까 있는 거지.”

“최소한 보고를 받으실 때는 다른 곳에서 받으시면 안 될까요?”

“뭐가 문제더냐? 이곳에 들어서는 안 될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아버지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나, 수아, 아버지, 마지막으로 현지가 이 방에 있었고 김 실장을 비롯한 경호 인력과 비서가 방 밖에서 대기 중이었다.

모두 아버지의 측근들이었다.

보고를 듣는다고 해서 문제가 생기지 않는.

다만 마나 호흡법을 하는데, 집중하지 못한다는 아주 사소한 문제가 있었다.

거기다 시간이 조금만 더 지나면 형까지 이곳으로 올 게 뻔했다.

그 무뚝뚝한 인간이 수아만 보면 얼굴에 꽃을 피워내는데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물론 우리 수아가 그만큼 귀엽긴 하지만.

“그나저나 포로론가 뭔가를 만드는 회사를 인수하셨다는 게 정말이에요?”

“그래. 우리 수아가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깟 회사 인수하는 게 대수냐?”

“수아가 좋아하는 거랑 회사를 인수하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요?”

“수아를 위한 시리즈물 하나 제작하라고 했다.”

“겨우 그거 때문에요?”

“겨우라니? 수아가 좋아하질 않느냐?”

요즘 아버지를 보면 팔불출이란 말이 자꾸 떠올랐다.

얼마 전에는 수아에게 인형의 집을 사준다면서 내 방만한 맞춤 제작형 초거대의 인형의 집을 주문한 적이 있을 정도로 아버지의 스케일은 정말 남달랐다.

“그나저나 선우야? 혹시 수아가 각성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드는데 검사를 해 봐야 하는 게 아니냐?”

아버지의 말에 내 행동이 모두 멈췄다.

생각도 못했던 말이 아버지의 입에서 나왔기 때문이다.

벌써?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아무리 일찍 각성한다 해도 그 시기는 10대였다.

최연소 각성자의 나이가 열 살이라는 걸 생각하면 이제 8살인 수아가 각성을 했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어째서 그런 생각을 하시는 건데요?”

물론 수아는 각성을 할 거다.

하지만 아직은 아니란 생각이 들었기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요즘 이상하게 수아를 앉고 있으면 젊어지는 기분이 들어.”

“젊어지는 기분이요?”

“그래 건강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실제로 좀 젊어지기도 했고 말이다.”

이 인간이 진짜.

아무리 팔불출이라도 이건 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보거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주름이 꽤 많았는데 거의 사라지지 않았느냐.”

아버지는 손을 내밀어 이리저리 돌리며 나에게 보여 주었는데 정말 아버지의 손에 있던 주름들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근데 내가 아버지 손을 자주 봤어야 이게 진짜인지 알아보지?

그 모습을 본 나는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손을 자세히 살폈는데.

“수아 각성해써요!”

한 손을 번쩍 들고 대답하는 수아의 모습은 정말 깜찍한 모습이었지만, 그 모습조차 눈에 들어오지 않을 정도로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그럼~ 우리 수아가 그깟 각성조차 못 할 리 없지. 누구 손녀인데.”

귓가로 들리는 아버지의 목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버지는 수아가 각성을 했든 안 했든 상관이 없는 모양이었지만 나는 아니었다.

만약 전생의 내가 수아에게 들었던 것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이건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수아야. 정말이니?”

“응!”

수아는 아버지의 품에서 두 팔을 쏙 빼내고는 눈을 살며시 감았다.

순간 수아의 몸에서 자그마한 마력의 움직임을 느낀 나와 현지는 동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헉!”

“아!”

마력의 움직임뿐 아니었다.

수아가 손을 뻗고 있는 방향의 허공이 일그러지며 순간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균열과 비슷한 어떤 공간이었다.

내가 여는 균열과는 다르게 수아가 연 공간은 푸른 빛의 신비로워 보이는 작은 구멍이었다.

성인 남성의 주먹 크기 정도 돼 보이는 작은 공간.

그뿐만이 아니었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느껴지자 마치 몸이 상쾌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이게···”

“허허허~”

나의 입에서 나오는 당황한 음성과는 다르게 아버지는 웃고만 계셨는데.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 안에서 손톱만 한 크기의 투명한 것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정령이었다.

여러 마리의 정령이 튀어나왔는데 그 빛깔이 여러 가지인 걸 보니 한 가지의 속성을 가진 정령들이 아니었다.

물, 불, 바람, 땅, 빛 흔히 말하는 5대 속성의 정령들이 모두 튀어나와 버린 것이었다.

물론 모두 최하급으로 보였지만.

깔깔거리며 방안을 가득 채우는 정령들의 모습은 어찌 보면 장관이었다.

현지의 주위를 빙글빙글 도는 정령들의 모습에 몇 번이나 눈을 비비며 확인했지만, 환상이 아니었다.

최연소 각성자.

거기다 이 상황을 보니 다중특성을 보유했다는 게 실감이 났다.

수아는 두 가지의 특성이 있다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 다른 한 가지는 아버지가 젊어졌다고 하는 것과 연관이 있으리라.

“헤헤~”

“어이쿠 우리 수아는 역시 이 할애비를 닮아서 그런지 못하는 게 없구나. 허허허.”

아버지는 지금 이 상황을 전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냥 수아가 뭐든 잘하면 좋다는 생각뿐인 듯했다.

나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는데.

순간 정령의 문이 닫히며 모든 정령이 사라졌다.

수아의 마력이 너무 적어 오래 유지하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수아야 혹시 할아버지가 젊어진 것도 수아가 한 거니?”

“네! 수아가 한 거에요. 할아버지가 오래오래 건강했으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기도해써요.”

“허허허~ 역시 아들놈들 키워봐야 하나도 소용이 없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구나. 어떻게 된 것이 수아 하나만 못해. 허허허”

각성자에게는 잠재력을 주고 일반인에게는 건강을 주는 능력이라고?

전생과 현생을 모두 포함해도 들어보지 못한 특이한 능력이었다.

아니 듣긴 했다.

하지만 아이의 말이었기에 모두 믿지 않았다고 하는 게 정답이리라.

과장을 심하게 한 거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내가 수아를 찾은 이유는 혹시 몰랐기 때문이다.

최강준이 수아를 콕 찍어서 입양한 이유가 분명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다중 능력자란 소문이 돌기도 했고.

하지만 지금 수아의 능력을 확인한 나는 어쩌면 수아의 능력이 최강준의 가장 강력한 패였을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잠재능력을 올려주는 특성과 방금 봤던 정령들을 소환하는 특성은 말 그대로 최강의 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으니까.

마력만 충분하다면 그 누구도 수아에게 상대가 되지 않을 최강의 특성.

정령의 문에서 최상급 정령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온다면 그때의 최강준 역시 상대가 되지 않을 테니까.

아니 아마 세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10명 중 그 누구도 수아의 상대가 되지 않았으리라.

“정말 도련님의 딸이라는 게 실감이 나네요. 도련님과 꼭 닮은 능력이라니.”

정확히 말하면 닮았다고 하는 건 좀 아니었다.

성스러운 존재를 소환하는 수아와 불길한 존재를 소환하는 나는 어찌 보면 정 반대였으니까.

*

“옳지. 자 이것도 먹어 보려무나.”

아버지는 수아의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수저에 반찬을 하나씩 올려주고 있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아주 예전 기억을 떠올랐다.

내가 수아의 나이 정도였을 무렵 아버지에게 투정을 부린 적이 몇 번 있었다.

그때의 아버지는 지금과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이셨었다.

그래. 그때의 아버지는 오히려 나를 혼내셨었지.

“아버지 그렇게 좋으세요?”

“응? 뭐, 뭐가 말이냐?”

아버지는 나를 보고는 순간 당황하셨는지 말을 더듬으시며 헛기침을 남발하셨다.

그 모습은 나의 입가에 미소를 그리기 충분했는데.

“손녀가 생긴 게 그렇게 좋으시냐고요?”

“물론이지. 너희들에게 말은 하지 않았다만 내 평생소원이 딸을 갖는 것이었으니까. 이번 생에는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여쁜 손녀를 보게 돼서 얼마나 기쁜지 모른다.”

“그럼 제가 그 소원을 이뤄드린 거네요?”

“조용히 하거라. 이런 어여쁜 아이를 그동안 그런 곳에 방치한 것만 생각하면 너를 때려죽여도 시원치 않으니!”

허! 때려죽인다니?

요즘 내 변한 모습에 아버지가 한동안 하지 않으시던 험한 말을 내뱉으시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않은가? 나라고 해서 그러고 싶었던 것도 아니었고.

“아버지! 아이 앞에서는 말씀 좀 조심해 주세요.”

“이런! 수아야 많이 놀랐니?”

아버지는 형의 말에 아이 앞에서 너무 험한 말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는 급히 표정을 바꾸며 수아에게 고개를 돌렸다.

“수아는 괜찮아요.”

“허허허.”

“그보다 아버지. 수아 학교 문제는 어떻게 하죠?”

아직 1월이지만 수아의 나이는 8살이었다.

초등학교에 입학해야 하는 나이.

“걱정하지 말 거라. 이미 다 처리해 놨으니.”

“벌써요?”

“그래. 내가 우리 수아의 일에 소홀할 리가 없지 않으냐.”

“학교는 어디로 정하셨어요.”

“일반 학교로 정했다.”

“네? 하지만 수아는 각성자잖아요? 특수 학교로 보내야 하는 거 아니에요?”

“당분간은 숨길 생각이다. 능력에 대해 알려지면 분명 위험한 생각을 하는 놈들이 나타날 게야.”

아버지의 말에 고개가 절로 끄덕여졌다.

“그리고 내일부터 수아의 경호팀이 새로 올 예정이니까 알고 있거라.”

“경호팀을 벌써 뽑으셨어요?”

“그래. 현지 저 아이가 맡아 줬으면 했는데 싫다는구나.”

얼마 전 아버지가 현지에게 사정하며 수아의 경호를 부탁했지만, 현지는 기어코 내 옆에 있겠다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현지는 나의 메이드 생활을 포기할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나 역시 현지가 수아의 경호를 해주길 원했기에 부탁을 해 보았지만 역시나 거절이었다.

절대 내 옆을 떠날 생각이 없다는 현지의 확고한 신념에 결국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 했더라?

한번 주인을 정하면 바꿀 수 없는 게 메이드의 철칙이라고 했던가?

현지는 메이드가 무슨 중세시대의 기사라도 되는 것처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몇 명이나 뽑으셨는데요?”

“10명.”

아버지의 말에 살짝 의문이 들었다.

10명은 좀 많은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형, 나를 경호하는 인원이 각각 5명이었다.

그런데 수아에게 열 명이나 붙인다고?

“아버지. 그건 좀 아닌 것 같습니다.”

형의 말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10명이나 되면 많이 불편할 거다.

5명인 나도 불편함을 느낄 때가 자주 있었기 때문인데.

“뭐가 말이냐?”

“너무 적다고 생각하지 않으세요?”

응? 뭐라고?

형의 말에 잠깐 멈칫했던 나는 이어지는 형의 말에 정말 이 인간이 어떻게 된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적어도 그 두 배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런데 너무 많으면 수아가 불편하지 않겠느냐?”

“그것도 그렇군요.”

마치 그룹의 중요한 일을 의논하듯 진지하게 대화하는 둘의 모습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런데 정말 이상한 것은 저 뒤에서 고개를 끄덕이는 김 실장이었다.

김 실장도 요즘 정상이 아닌 것 같단 말이야?

집 안의 모든 대소사를 처리하는 김 실장은 요즘 모든 것을 수아에게 맞추고 있었는데.

심지어 수아의 일이라면 아버지조차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자주 있을 정도였다.

“응? 수아가 어디 갔느냐?”

“수, 수아야?”

수아가 보이지 않자 당황하는 둘의 모습에 한숨이 나왔다.

너무 진지하게 토론을 하던 두 사람은 모르겠지만 수아는 이미 자리를 벗어난 지 한참 되었다.

“포로로 보고 싶다고 해서 현지에게 데려가라고 했어요.”

그제야 안심하는 둘을 보는 나는 한숨을 쉬지 않을 수 없었다.

너무 과보호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의 버릇이 나빠질까 걱정이 될 정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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