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창렬
“들어는 봤는데 무슨 일이죠?”
서창렬이라는 확신은 가질 수 없었지만, 그의 목소리만큼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놈은 이렇게 예의 바른 놈이 아닐 텐데?
-저를 아신다니 이야기가 빠르겠군요.
“이유나 말 하시죠.”
-소문대로 성격 참 급하시네요.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지금 나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그건 아니고요. 일단 제 이야기를 좀 들어주시겠습니까?
“말하세요.”
-저희 크로우가 이번에 아주 큰 프로젝트를 하나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크로우는 국내의 빌런 연합의 이름이었다.
한 마디로 쓰레기들.
-그런데 그 프로젝트 막바지에 어떤 정신 나간 놈이 그걸 가로채지 뭡니까?
“그거랑 나랑 무슨 상관인데요.”
-청화 제약. 이래도 모르겠나?
갑자기 목소리를 낮게 깔며 반말을 지껄이는 놈 때문에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약간 화가 나기도 했고.
“그래서 어쩌라고? 꼬우면 니가 먼저 쳐 먹든가? 수습 다 해놨더니 이제 와서 니들 꺼다?”
-허! 소문을 듣긴 했는데 정말 겁 대가리를 상실한 모양이야?
“겁 대가리를 상실한 건 이쪽이 아니라 그쪽 같은데? 내가 만만해 보여?”
이런 놈들에게는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한번 숙이고 들어가면 절대 허리를 펼 수 없게 만드는 놈들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누군지 알면서도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건가?
“그 말 그대로 돌려주고 싶은데?”
-내 옆에서 벌벌 떨고 있는 부하가 걱정되지도 않나봐?
되도 않는 협박을 하는 꼴에 기가 막혀왔다.
“이봐. 너 같으면 상관할 것 같아 안 할 것 같아?”
-나야 원래 이런 놈이지만 넌 좀 다르지 않나?
“내가 너랑 다를 게 뭔데? 내 소문 들어봤다는 놈이 그딴 소리를 지껄여? 애초에 내가 그런 걸 신경 쓰는 놈이었으면 망나니짓 못했어! 이 새끼야!”
-그래서 상관없다?
상관이 없지는 않았다.
다만 놈이 성철을 건드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아쉬운 놈은 내가 아니라 서창렬이었다.
놈이 성철에게 무슨 짓을 한다면 앞으로의 협상은 불투명해질 테니 함부로 움직이진 못하리라.
“그딴 시덥잖은 소리 집어치우고 본론을 말해.”
-생각보다 멍청하지 않은데?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니었다.
약간 멀게 들리는 걸 보니 주위에 있는 누군가에게 하는 말 같았는데.
그게 그거였다.
나 들으라고 하는 소리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급한 건 이쪽이 아닐 텐데?”
-이쪽도 딱히 급한 건 아니야.
“그럼 이대로 전화 끊을까?”
-성격 참 급하네. 그래도 이야기는 끝까지 들어봐야지.
“그래서 원하는 게 뭔데?”
원하는 게 있으니 내 밑에 있는 성철을 찾아갔을 테고, 그건 당연히 버프 포션이다.
청하 제약이 놈의 입에서 나오는 순간 알아챘지만, 모르쇠로 일관했다.
-버프 포션의 정기적인 납품을 원한다.
“대가는?”
-그쪽에서 원하는 걸 말해봐. 웬만해서는 다 들어줄 테니.
“잠깐만.”
나는 잠시 생각하는 척을 하며 시간을 끌었다.
이미 내 머릿속에는 모든 시나리오가 완성되어 있었지만.
나는 청화를 인수하면서 이쪽에 대해서도 생각해 놨었다.
문제는 나와 협상할 놈이 서창렬이라는 걸 몰랐다는 것뿐이다.
원래 이런 쪽으로는 잘 움직이지 않는 걸로 아는데?
“이쪽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하니까. 내일 결정하는 게 어때?”
-무슨 말이지?
“내일 직접 찾아와. 우리 집으로. 너 혼자.”
-···뭐라고?
“찾아오라고.”
서창렬은 많이 당황한 듯 싶었다.
혼자 집으로 찾아오라고 할 줄은 몰랐을 거다.
기껏해야 성철을 통해 연락을 줄줄 알았을 테니.
그러니 자신만만하게 나를 도발했겠지.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장난으로 보여? 싫으면 포기하던가.”
-이봐 너무하는 거 아니야? 나보고 지금 혼자 그 사지로 들어오라는 건데. 내가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결정을 내릴 거 같아?
“생각보다 겁이 많은데? 설마 내가 널 어떻게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아니란 말이냐?
“당연하지. 단지 내가 움직이기가 귀찮을 뿐이야.”
겁이 났다.
계약을 하기 위해서는 그를 만나야 하는데 놈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기에 내가 만든 판 위에서 계약을 해야만 했다.
그게 바로 우리 집이었고.
물론 성철에게 계약을 맡길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분명 저쪽이 압도적으로 좋은 계약이 체결될 거다.
놈들은 무력으로 성철을 협박할 거고 자신들이 원하는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만들 거다.
물론 내가 안 따르면 그만이지만 놈들은 분명 그 계약서를 핑계로 날 괴롭히겠지.
-귀찮다고?
“물론이지. 거기다 그쪽이 원하는 버프 포션은 지금 생산중지 중이야. 원하는 양이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생산시설을 몰래 돌리는 걸 들킬지도 모른다고. 그럼 나도 무사하지 못해.”
-보안이 백악관보다 철저하다는 유명이? 농담이 너무 심하군.
“누가 언론에 노출된대? 아버지한테 들킨다고. 그렇게 되면 너도 무사하지 못할걸? 너 때문에 내가 그 생산시설을 다시 돌리게 된 거니까.”
-음~ 그건 좀 무섭긴 하군.
서창렬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마음을 독하게 먹으면 국내의 빌런들에게 재앙이 될 테니까.
블랙마켓 역시 쓸려나갈지도 모르고.
“그래서 올 거야 말 거야?”
-생각을 좀 해봐야겠는데.
“잘 생각해 보라고.”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다시 서창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수락하는 거로 하지.
“잘 생각했어. 그럼 내일 1시에 만나기로 하지.”
-그래. 근데 생각 잘하는 게 좋을 거야. 길드의 움직임이 포착되면 이쪽도 가만히 있지는 않을 테니까.
“그럴 일은 없을 테니 걱정하지 마라.”
아마 녀석은 지금부터 유명길드를 비롯해서 이쪽에 우호적인 길드의 움직임을 살피기 시작할 거다. 조금의 움직임이라도 보이면 내일 만남은 파토날테고.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내가 길드를 움직일 일은 없을 테니까.
*
“아버지. 내일 수아랑 쇼핑이라도 가시는 게 어떠세요?”
“쇼핑?”
“네. 수아도 이제 초등학교에 입학하잖아요.”
“김 실장이 모두 준비해 놨다고 하지 않았느냐?”
“에이~ 그거랑 아버지가 직접 가서 보고 골라주는 거랑 어디 같나요?”
“그, 그런가?”
내 말에 아버지의 얼굴이 점차 밝아지는 것을 느꼈는데.
이상하게 아버지는 수아 이야기만 나오면 생각을 거의 안 하시는 듯했다.
“내가 직접 골라준 옷을 입고 수아가···”
거기다 뭔가 이상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계신 게 틀림없었다.
“저는 내일 할 일이 좀 있어서 수아랑 아버지랑 둘이 다녀와야 할 것 같아요.”
“저, 정말이냐? 수아와 둘이서?”
“네.”
아버지는 급히 전화기를 들어 김 실장을 호출했다.
김 실장은 금방 서재에 도착했는데.
“김 실장 요즘 서울지역 백화점 중 매상이 가장 떨어지는 곳이 어디지?”
“구로점입니다.”
“그래? 그럼 내일 구로점 문 닫도록 해.”
“네?”
아버지의 말에 김 실장이 황당한 표정을 지었는데.
“내일 수아랑 쇼핑을 해야 하니까 문 닫으라고.”
“시간대는?”
“무슨 시간대! 그냥 내일은 장사하지 말라고 해!”
“하지만 그럼 손해가···”
“괜찮아. 그 정도 손해 본다고 굶어 죽는 것도 아니니까.”
너무 나가시는 것 같은데?
아버지가 아무리 수아를 아끼신다고 해도 이런 건 철저하신 분이었는데?
“그렇게 조치하겠습니다.”
김 실장은 아버지를 설득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아버지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그런데 수아가 안 보이네? 이 기쁜 소식을 전해줘야 하는데?”
“수아 아가씨는 지금 공부 중이십니다.”
곧 초등학교에 입학할 수아에게 기본적인 것은 가르쳐야 할 것 같아서 유명한 선생을 섭외하려 했는데, 형이 수아의 교육을 담당하겠다며 직접 나섰다.
아버지는 일밖에 모르는 형의 변화가 마음에 드셨는지 별 말씀 하지 않으셨다.
문제는 아버지가 찾아가면 형이 수아가 공부하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축객령을 내렸는데 이게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인지 요즘 점차 불만이 생기시는 모양이다.
*
역시 아버지였다.
내가 아버지와 수아를 집 밖으로 내보내려는 이유가 있다는 걸 이미 눈치 채고는 조용히 물어보셨는데.
결국 모든 사실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아버지를 설득하는 게 힘들긴 했지만 결국 설득해 내었고 그 결과가 바로 이거였다.
형과 나 그리고 아버지를 호위하는 모든 경호 인력을 집에 두고 나가셨다.
형이나 아버지가 외출할 시 경호를 위해 따라붙는 모든 자들이 집에 남아 나 하나를 지키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긴장감이 내 몸을 지배하고 있었다.
심호흡을 하며 긴장감을 완화시키려도 해 봤지만, 큰 도움은 되지 않았다.
서창렬.
그 이름만으로도 두려움을 심어주기 충분했으니까.
전생뿐만 아니라 지금 시대에서조차 놈은 흉악한 범죄자였다.
빌런들의 무력을 대표하는 이름 칠악.
그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놈이었다.
현지가 없었다면 놈을 만날 생각조차 하지 않았을 거다.
“준비 끝났지?”
“물론입니다.”
“아무도 별채에 출입하지 못하게 감시 철저히 해야 할 거야.”
“물론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를 만나려 하시는 겁니까?”
현태가 낯빛을 굳히며 입을 열었다.
“궁금해?”
“궁금한 것보다 너무 위험합니다. 놈은 칠악이에요.”
“나도 알아.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만나주지 않으면 계속 귀찮게 따라다닐 놈이니까.”
“차라리 회장님께 부탁해 없애버리는 선택을 하실 수도 있었습니다.”
현태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아버지 역시 놈을 없애버리는 쪽으로 생각하고 계셨는데.
너무 위험했다.
만약 실패한다면?
생각조차 하기 싫었다.
“실패하면 어떻게 될지 잘 알잖아.”
“저희는 실패를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알아. 그래도 너무 위험해. 만에 하나라도 놈이 살아남으면 아버지와 형 그리고 수아의 안전을 보장할 수가 없다는 걸 너도 잘 알잖아.”
“그건 그렇지만···”
거기다 유명길드가 움직인다면 놈은 나타나지 않을 거다.
함정이란 게 뻔히 보일 테니까.
아무리 은밀하게 움직인다고 해도 놈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지도 않았고.
“그런데 현지님은 어디에?”
현지는 지금 내 옆에 없었다.
미리 준비를 해야 하기 때문에.
“방에서 대기중이야.”
“아! 그렇군요.”
현태가 내 말 뜻을 이해한 모양이었다.
내 주변에서 호위를 하다가는 위치를 노출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에 놈과 회담이 진행될 방에서 대기중이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바로 놈의 뒤를 칠 수 있을 장소에서.
“저기··· 그런데 혹시 길드에서 지원이 온 건가요?”
“왜?”
“도련님 주변에 이질감이 좀 느껴지는 것 같아서요.”
역시 현태정도 되면 느낄 줄 알았다.
다만.
왜 모르는 척을 하는 거지?
고블린들에 대해 듣지 못한 건가? 현지가 분명 자랑을 했을 거라 생각하는데?
현지가 고블린들을 가르치긴 하지만 고블린들을 관리하는 것은 현태였다.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현지한테 못 들었어?”
“네? 딱히 들은 건 없는데요?”
“고블린 관리 하는 거 너 아니야?”
“저 맞는데요?”
“근데 왜 몰라?”
고개를 갸웃 거리며 의문에 찬 표정을 짓던 현태는 순간 뭔가를 깨달았는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도련님 주변에서 느껴지는 이질감의 정체가 고블린··· 인가요?”
고개를 끄덕여주자 현태는 믿을 수 없는 사실을 마주하기라도 한 것 마냥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고, 고블린이 은신을? 마, 말도 안 돼···”
현태의 반응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었다.
아직까지는 몬스터가 은신을 사용했다는 말은 그 어디에서도 들려오지 않았으니까.
거기다 고블린이 은신을 사용할 줄 알았다면 그 등급이 하급이 아닌 최상급에 랭크되어 있어야 했다.
“그, 그때 그 말이 농담이 아니었던 겁니까?”
“뭐가?”
“현지님에게 고블린을 가르치라고 했던···”
아마 현태는 현지에게 고블린을 좀 가르쳐 달라고 했던 내 말을 농담으로 치부해 버린 모양이다.
“내가 왜 농담을 해? 그리고 현지가 창고에 자주 가는 거 보면 알 수 있는 사실이잖아.”
“저는 현지님이 창고에 들어가면 고블린들의 비명이 들려서 괴롭히는 거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그럴 수 있다.
나는 알면서도 괴롭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아! 도착했답니다.”
멍한 표정을 짓던 현태는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서창렬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서창렬
멀리서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의 실루엣.
서창렬이었다.
마력 한 줌 흘리지 않고 있었지만, 불길한 오오라를 뿜어내는 듯한 그의 모습에 긴장감이 커졌다.
그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 내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들을 닦아내며 티 나지 않도록 입꼬리를 올렸다.
“도련님.”
어느새 내 앞에 도착한 서창렬을 가로막는 현태.
현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걱정하지 말라고 미소지어 준 내 눈에 서창렬의 온전한 모습이 들어왔다.
사악해 보이는 미소.
반달을 그리는 눈.
내가 아는 서창렬이 확실했다.
“반갑습니다. 서창렬입니다.”
“네. 반갑네요. 유선웁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나누시죠.”
전의 반말은 없었다.
상황이 상황인 만큼 서로에게 맘 상할 짓을 하지 않는 게 나쁠 건 없었으니까.
서로 악수를 주고받은 후 그를 직접 안내하려던 그때 나와 그의 사이에 끼어드는 현태.
적대감 섞인 표정으로 그를 보던 현태는 직접 그를 안내하기로 했는지 서창렬에게 입을 열었다.
“이쪽으로 가시죠.”
잠깐 멈췄던 발을 떼며 움직이기 시작하자 지금껏 그를 안내했던 경호원들이 그 뒤를 따라 움직였다.
혹여나 상황이 발생하면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나보다는 그의 뒤에 바짝 붙어서 움직이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내 뒤를 따라 움직이던 그가 몸을 멈칫하며 입을 열었다.
“네. 말씀하세요.”
“살기가 느껴지는군요?”
“살기라고 하시면?”
“이 주변에 우리 말고 누군가가 또 있는 것 같은데요?”
그의 말은 아마 은신한 채 뒤를 따르던 고블린들의 존재를 말하는 게 틀림없었다.
당연히 들킬 거란 건 알고 있었다.
현태조차도 이질감을 느끼는데 그가 눈치채지 못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으니까.
다만.
“신경 쓰지 마시죠. 제 안전을 위한 하나의 장치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러시다면 제가 이해하도록 하죠.”
위치는 모두 파악하고 있겠지만 고블린이란 사실까지 알지는 못하리라.
일단 몸을 숨겼으니까.
다만 살기가 느껴지기에 의아했을 거다.
어쩔 수 없었다.
평범하지 않다고 해도 몬스터는 몬스터였으니까.
잠깐 멈췄던 발을 옮겨 준비해 놓은 방에 도착한 나는 문고리를 돌리며 문을 열었다.
먼저 방에 들어가 그에게 들어올 것을 종용했다.
“드시죠.”
“그럼.”
그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 안에 들어왔는데.
“어?”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살짝 당황했다.
커다란 오크가 떡하니 서 있었기 때문이다.
뚱이였다.
“저건··· 뭐죠?”
“보시다시피 오크입니다만?”
“그, 그렇군요.”
나를 이상한 눈으로 보던 서창렬은 다시 뚱이를 보더니 눈을 살짝 빛냈다.
신기하단 생각과 정말 오크인지 확인하는 듯한 그의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나는 입을 열어 그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그, 그럴까요?”
얼떨떨한 표정으로 아직도 뚱이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의 시선을, 감각을 흔드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뚱이에게 고정된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내가 권하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그 몇 발자국 떨어진 뒤에는 현지가 날카로운 단검을 든 채 몸을 숨기고 있었다.
만약 서창렬이 현지의 존재를 감지했다면 그는 쉽게 저 자리에 다가가지도 앉지도 않았겠지만, 뚱이에게 정신이 팔린 그는 내 생각대로 아무 의심도 없이 자리에 앉았다.
“어떻게 차라도 한 잔?”
“아닙니다.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죠.”
뚱이에게 시선을 거두고 나를 직시하는 그를 보며 협상을 진행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럼 수량부터 들어볼까요?”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그래서 얼마나?”
“얼마나 생산할 수 있습니까?”
이럴 거라고 예상은 했다.
“1개월에 2000개 정도는 가능합니다.”
“그것밖에 안 되나요?”
그것 밖이라?
1개월에 2000개면 원래 생산하던 양보다 많은 수준이었다.
각성자만 사용하는 포션이기도 했고, 그 사용조차도 위기의 순간에만 복용하는 수준이었기에 많은 물량을 찍어낼 필요가 없었다.
포션을 영양제처럼 마시는 미친놈들이 아니라면 이 수준으로도 충분히 국내에서 소모되는 개수를 맞출 수 있었으니까.
물론 국내에서만 판매 중이기도 했고.
거기다 가격 또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한 병에 1억.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소모품 치고 가격이 너무 엄청났지만, 가디언들이나 특히 헌터들의 입장에서는 싼 가격이었다.
당연했다.
목숨값이니까.
부작용이 있더라도 목숨을 잃을 바에야 이걸 마시고 살아남는 게 이득이었으니까.
마력 증폭률 50%.
고통 역시 사라질뿐더러 무의식이 강제하는 육체의 리미트를 해제시켜 엄청난 힘을 선사해 주기 때문에 위기 상황을 넘길 수 있게 해준다.
그렇기에 각성자라면 한 병씩은 꼭 가지고 다니는 필수품이었고.
사실 이 포션이 도마 위에 오른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길드들 역시 이 포션에 대한 안 좋은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을 때 많이 당황했다.
어떻게든 상황을 반전시켜 보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을 거다.
다만 어떻게 된 일인지 여론은 잠잠해지지 않았고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부은 듯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여론의 편에 설 수밖에 없었다.
정부와 재벌들 역시 마찬가지였고.
그게 모두 이놈들이 벌인 짓이었다.
나도 알고 있었다.
다만 이놈들은 과거에도 이 포션을 손에 넣지 못했다.
왜냐?
완성품이 나왔기 때문이다.
마력 증폭률이 30%로 떨어졌고 육체의 리미트 해제가 제한되었지만, 부작용을 거의 없애버린 것이다.
중독성과 흥분 증세가 거의 없어졌다는 말이다.
물론 이놈들은 포기하지 않았지만, 그 획기적인 변화에 전 세계가 주목을 시작했기 때문에 더는 건드릴 수 없었다.
놈들이 너무 시간을 끌기도 했고.
“지금 이 수가 적다는 말인가요?”
“네. 좀 적네요.”
“어느 정도를 원하시는 거죠?”
“적어도··· 오천?”
하! 이것들 봐라?
이제야 알겠다.
버프포션에 집착하는 이유를.
이놈들은 이 포션을 버프포션이라 생각하는 게 아니었다.
각성자 전용 마약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거다.
“너무 많다고 생각하지 않나요? 저희 입장도 좀 생각해 주셔야지요.”
“값은 제대로 치러드릴 겁니다.”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지면 유명이라고 해도 무사하지 못하단 걸 그쪽도 잘 알잖아요.”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국내에 유통할 생각은 없으니까.”
국내에 유통하지 않는다고 해도 문제가 있는데 뭘 걱정하지 말라는 거지?
“무슨 뜻이죠?”
“해외에 유통할 생각입니다. 특히 일본 쪽에. 물론 국내에서도 소비가 되겠지만 그 양은 얼마 안 될 겁니다. 단언하죠.”
와~ 이거 진짜 대박인데?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일본.
지금 일본과의 사이는 극악이었다.
계속해서 대한민국을 도발하는 일본 때문에 여론은 화가 많이 난 상태였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일본을 욕하면 누구라도 국회의원이 될 수 있다는 말까지 들려올 정도로 지금 국민들은 일본을 혐오하고 있었다.
아마 일본으로 유통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욕은커녕 잘했다는 칭찬만 들려올 거다.
그 정도로 일본과의 사이는 최악이었다.
지금 시대에 각성자는 그 나라의 무력을 확인하는 지표였다.
그런 각성자를 매일 욕하는데 싫어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다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였다.
“오천이라? 생각을 좀 해볼 문제네요.”
“긍정적인 답변 기대하겠습니다.”
“그럼 가격협상을 시작할까요?”
“원하시는 가격을 말씀해 보세요. 웬만하면 맞춰드리겠습니다.”
“제가 생각하는 병당 가격은 3억입니다.”
“3억? 잠깐만요. 3억이라고 하신 거 맞죠?”
되물어 오는 그를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네. 맞습니다.”
“지금 장난하시는 건가요?”
장난처럼 들렸나? 나름 진지하게 생각하고 결정한 건데?
“설마요? 그런데 왜 그렇게 놀라시는 거죠?”
“애초에 가격이 1억이었던 걸 몇 배로 부풀려 버리니 안 놀랄 수가 없죠.”
“부풀렸다라? 혹시 지금 몰래 거래되고 있는 포션의 가격이 어느 정도 선에 거래되는지 모르시는 겁니까?”
지금 포션의 가격은 3배를 훌쩍 넘어서는 중이었다.
당연했다. 구하고 싶어도 더는 구할 수가 없었으니까.
놈은 내 말에 뜨끔 했는지 살짝 인상을 구기고는 입을 열었다.
“그건 생산량이 없기 때문이잖습니까? 이제 재생산이 들어갈 텐데 그 가격을 생각하는 건 말이 안 되죠.”
“왜 말이 안 되죠? 앞으로 생산할 것들 역시 모두 비공개입니다. 거기다 지금 거래되는 가격보다도 저렴한 편인데요?”
이놈들은 도대체 얼마나 남겨 먹을 생각인 거지?
분명 가격을 더 올려서 팔아먹으면 먹었지 싸게 팔 놈들은 아니었다.
“그렇게 거래를 하게 되면 이쪽에서 남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아실 텐데요?”
“어째서죠? 지금 가격 그대로 거래가 된다면 적어도 병당 5천 정도는 남으실 텐데요?”
사실 내가 말했지만 억지였다.
분명 재생산이 들어가고 처음에는 지금 가격으로 팔리겠지만 어디선가 꾸준히 공급된다는 걸 알게 되면 자연스럽게 가격은 떨어져 버릴 테니까.
다만 이놈들과 거래 할 때는 상관없었다.
애초에 말이 통하는 부류가 아니었으니까.
저쪽에서 막무가내로 나올 게 뻔했기에 이쪽에서도 막무가내로 나가기로 한 거다.
근데 생각보다 막무가내는 아니네?
“혹 저희에게 원하시는 게 있는 건가요?”
역시 눈치를 채네?
“물론입니다. 제가 아무리 막 나가는 놈이라지만 이런 거래를 할 정도로 막 나가진 않는 놈이에요.”
“이런 거래?”
“내가 이런 거래를 할 만큼 돈이 필요해 보여요?”
“그건··· 그렇네요.”
“그럼 당연히 그쪽에 필요한 게 있으니까 이 거래를 받아들였겠죠.”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긴 서창렬은 말해 보라는 듯 턱짓을 했다.
“총 2가지에요. 첫째는 안티 디텍터를 구해줬으면 해요.”
내 말을 들은 그는 의아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앞으로 열릴 게이트를 숨기기 위해서는 이게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좀 범위가 큰 걸 원하는데 그쪽을 통하지 않고는 구하기가 좀 애매하더군요.”
“어느 정도의 범위를 원하시는데요?”
“우리 집을 모두 커버할 만큼?”
약간 놀란 듯한 표정을 지은 서창렬이 입을 열었다.
“그 정도 범위라면 가격이 만만치 않다는 걸 잘 아시겠네요?”
“물론이죠.”
놈은 뭔가 기회를 잡았다는 듯 사악한 미소를 지어 보였는데.
“포션 3천 개. 어때요?”
“음~ 나쁘지 않네요.”
나는 서창렬의 입에서 딴말이 나오지 않게 바로 두 번째로 원하는 걸 말했다.
“두 번째는 후에 내가 제안할 사업에 힘을 좀 실어줬으면 해요.”
“제안할 사업? 그게 뭐죠?”
“그건 비밀이고요.”
“아시겠지만 저는···”
“물론 그쪽에 해가 되는 사업은 아니에요. 후에 제가 제안을 했을 때 들어보고 마음에 안 들면 거절해도 되고요.”
내가 제안할 사업이란 건 바로 블랙마켓의 이전이었다.
어비스 게이트를 차지한다고 해도 후에 개척도시를 지을 때 수많은 길드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만은 않을 거다.
빌런들 역시도 마찬가지고.
그 빌런들의 목줄을 쥐기 위해서는 그의 협력이 필요했다.
블랙마켓을 그곳으로 이전시키고 치안을 맡긴다면 거대 길드보다 효율이 높을 건 당연했다.
“그럼 이 건은 그때 생각해 보기로 하죠.”
“그럼 가격은 어떻게?”
“에누리 없이 2억 어때요?”
“저희 쪽에서 생각한 가격하고 정확히 일치하네요.”
“나머지는 성철이를 통해 진행하도록 하죠.”
“그 똘마니요? 알겠습니다.”
“그럼 일어나시죠.”
“그런데 혹시 저 오크 길들인 건가요?”
일어나자는 말에 그는 뜬금없이 뚱이를 가리키며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볼 수 있죠.”
“혹시 방법을 알 수 있을까요?”
뚱이는 내 균열을 통해 나와서 자동으로 나에게 충성을 바치기 때문에 알려주고 싶어도 알려줄 수 없었다.
그런데 만약 다른 길들일 방법이 있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알려줄 리가 없지 않은가?
“그건 좀 곤란하겠는데요?”
“그렇죠? 제가 좀 실례되는 질문을 했네요. 저희도 이쪽으로 연구 중이기 때문에 혹시나 팁이라도 얻어갈까 했는데···”
말을 하던 서창렬의 표정이 빠르게 굳어가기 시작했다.
서창렬
“이것 봐라?”
혼잣말 하며 당황한 표정을 짓는 서창렬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의문이 들었다.
주위를 빠르게 살피며 뭔가를 찾는 듯한 모습.
아!
그가 현지의 존재를 눈치챈 것이었다.
“왜 그러시죠?”
“그쪽에 있는 다섯 말고 하나를 더 숨겨두고 있었네요?”
“네. 당연하죠. 설마 제가 미쳤다고 이들만 데리고 있겠습니까?”
나는 짐짓 태연한 척하며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부정할 경우 그가 어떻게 나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만 어째서 들켰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는 분명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혹시 위치도 들켰나?
“그건 그렇군요. 그런데 생각보다 무서우신 분이었군요.”
그의 말에 미소로 대답을 해 줄 수밖에 없었다.
딱히 할 말이 없었으니까.
“이런 존재를 호위로 두고 있을 줄이야. 이 정도면 적어도 나와 비슷한 수준인데? 허!”
말을 하던 서창렬은 슬며시 눈을 감고는 현지의 위치를 찾아보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현지의 존재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점차 표정을 굳히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이럴 리가 없는데? 내가 찾아내지 못한다고? 설마?”
서창렬의 혼잣말에 그가 현지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걸 안 나는 급히 입을 열었다.
“언제까지 그러고 계실 거죠?”
“응? 크흠-”
그는 내 말을 듣고서야 자신의 모습이 꼴사나워 보인다는 걸 깨닫고는 헛기침을 했다.
“이거 실례했네요.”
“괜찮습니다.”
“그만 가봐야 할 것 같네요. 무서워서 더는 있을 수가 없겠네요.”
비아냥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배웅해 드릴까요?”
“아니!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급한 일이라도 생긴 것처럼 다급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럼 안녕히 가세요.”
“실례했습니다.”
나는 현태에게 눈짓으로 그의 안내를 부탁하고는 그와 현태가 나가는 모습까지만 확인하고 입을 열었다.
“나와.”
*
“보스?”
“어, 어?”
“협상이 잘 안 되셨습니까?”
서창렬의 친위대 대장으로 보이는 자가 서창렬의 굳어있는 모습에 의문이 생겼는지 물음을 던졌다.
절대 이럴 사람이 아님에도 유명의 본가에서 나온 뒤부터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니야. 협상은 잘 마무리됐어. 다만··· 걸리는 게 하나 있을 뿐이야.”
“혹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을 수 있겠습니까?”
그는 서창렬의 이런 행동을 처음 보았기에 그 이유를 꼭 알고 싶었다.
서창렬은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그에게 고개를 돌려 급히 입을 열었다.
“잠깐? 혹시 감시 붙였어?”
“유명 쪽을 말씀하시는 거면 붙였습니다만?”
“다 철수시켜.”
“네? 어째서요?”
“잘못하다간 다 뒤진다.”
그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서창렬을 보았다.
솔직히 서창렬의 지금 행동은 너무 이상했다.
거기다 이쪽에서 붙여둔 자들은 그쪽으로는 스페셜리스트들이다.
자신이라고 해도 그들의 은신을 감지하기 힘들 정도로 엄청난 자들을 붙여 두었기에 한편으로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혹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괴물이 있어.”
“괴물이라고요?”
“그래. 나조차도 파악하기 힘들 정도로 괴물 같은 놈이 숨어있었어.”
“설마요? 착각하신 게 아니신지요?”
“내가 그런 걸 착각할 놈으로 보여?”
그는 서창렬의 입에서 나온 말들을 믿고 싶지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서 서창렬은 언제나 우상이었으니까.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그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뭣도 모르는 놈들이 최강준이 최고라고 하지만 자신이 보기에 최강준은 서창렬에 비하면 애송이였다.
서창렬이 진심으로 전투에 임하는 모습을 한 번도 보지 못한 자들은 절대 이해하지 못하리라.
그 흉악하고 폭발적인 마력과 그의 특성인 흑염을.
모든 걸 불태우기 전까진 절대 꺼지지 않는다는 그 흑염을 몸에 두른 채 움직이는 그의 모습은 지옥에서 온 악마 그 자체였으니까.
“만약 그 괴물이 처음부터 나를 따라온 거라면 나도 감당하지 못할 거야.”
“처음이시라면?”
“내가 그 집에 들어가는 순간부터 따라붙은 거라면 허락받지 못한 자는 그게 누구라도 저 집 대문을 넘지 못한다는 말이야.”
“믿기진 않지만 일단 철수시키겠습니다.”
“그래. 그리고 애들한테 전해. 호위 강화하라고. 소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애들이라고 하시면?”
“크로우 윗 대가리들 말이야. 그리고 절대 유명이랑 부딪히지 말라고 전해. 절대로!”
서창렬은 아직도 그 순간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을 놀리듯 기척을 슬며시 흘리곤 순식간에 사라지던 그 소름 끼치던 순간을.
각성자가 되고 처음으로 죽음이란 걸 떠올렸던 순간이었다.
아마 그는 평생, 이 순간을 잊지 못하리라.
“유명길드 쪽에 갑자기 사라진 자가 있는지 알아봐. 특성 중에 은신이 있는 자로.”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유명에 대한 등급을 올려. 지금껏 모두가 속고 있었어. 저들은 돈만 믿고 까부는 게 아니야.”
“지금보다 더 올리면 그 괴물들과 동급이 됩니다만?”
“그래. 그 괴물들하고 동급으로 올려.”
“하지만···”
“그놈만이 아니야. 내가 본 게 사실이라면 유명은 앞으로 그 괴물들조차 함부로 건들 수 없게 될 거야. 아니. 이미 건드리기에는 너무 커졌으려나?”
서창렬은 협상이 진행되던 방에서 보았던 오크를 떠올리고 있었다.
단순한 오크가 아니었다.
순간 뿜어내던 마력의 힘이 지금 그의 옆에 있는 친위대 대장의 힘을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으니까.
“재미있을지도 모르겠네. 그 괴물들이 유명의 실체를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할지.”
“정말 유명이 그 정도입니까?”
“아마도?”
“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나도 어이가 없는데 너라고 다르겠냐?”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사실을 마주한 것처럼 둘은 한동안 아무런 말이 없었다.
*
“야! 너 왜 들켰어?”
“네?”
나는 들키지 않아도 될 사실을 들킨 현지에게 살짝 화가 났다.
내 비장의 무기가 노출될 수도 있을 거라 생각은 했지만, 분명 서창렬은 협상 후반까지도 현지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뚱이를 보여주더라도 현지를 숨기면 이득이라고 생각했는데 둘 다 노출되어 버려 그의 경계심만 커지게 만든 것 같았다.
거기다 이 사실을 누군가에게 알린다면?
한숨이 나왔다.
물론 그 정도로 입이 싼 놈은 아니었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분명 모르고 있었다고!”
“그게··· 너무 지루해서 저도 모르게 하품이 나오는 바람에···”
“하품? 너 지금 하품이라고 했냐?”
어이가 없었다.
현지 이것은 서창렬을 보고도 긴장이 안 되나?
“내가 긴장하라고 했지?”
“죄송해요. 저도 처음에는 긴장했는데. 그 사람 돼지한테 정신 팔려서 저를 아예 모르더라고요. 목에다가 단검을 들이대 봐도 모르길래 긴장을 좀 풀었는데 하필 하품이 나와서···”
“뭐?!”
현지의 말에 뜨악할 정도로 놀라버렸다.
목에다 뭘 들이대?
“목에다 뭘 어쨌다고?”
“이거요! 단검!”
현지는 들고 있던 단검을 내 눈앞에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이걸 목에다 대봤다고요.”
“왜?”
“심심해서?”
“겨우 그런 이유로?”
“사실은 제가 어느 정도 되는지 알고 싶었어요. 그 사람 정도면 테스트를 해보기에 적합하기도 하고요.”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을 뻔했다.
현지는 혹시 제정신이 아닌 걸까?
만약 그러다 서창렬이 알아차렸으면 쉽게 끝나지 않았을 거다.
“너 미쳤냐? 그러다 서창렬이 알았으면 어떻게 됐을 거 같냐?”
“알면 지목만 따이는 거죠.”
자신감이 너무 과한 거 아닌가?
서창렬이 목을 그렇게 쉽게 내줄 거 같은가?
“자신감이 너무 과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건 제 생각인데요. 아마 제 부하들하고 같이 움직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 같아요.”
현지가 말하는 부하들이란 고블린들을 말하는 것 같았다.
요즘 현지는 고블린들에게 애정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이제는 아예 부하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뭐가?”
“서창렬 암살하는 거요.”
현지의 말에 설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저 사실 처음부터 그 장소에 은신하고 있지 않았어요. 그가 방에 들어왔을 때 그 사람 뒤에 서서 따라다녔는데 전혀 모르더라고요.”
“정말?”
“아마 돼지에게 정신이 팔린 거 말고도 제 부하들에게 감각을 할당하고 있어서 저를 찾아낼 수 없었던 거 같아요. 그 순간에 그냥 확!”
“진짜?”
어이가 없었다.
이 정도면 살성이었던 시절의 현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기에.
“네. 아가씨가 많은 도움이 됐죠.”
“수아가?”
“네. 수아 아가씨가 가끔 마력을 주입해 주는데 이상하게 그걸 받고 나면 막혀있던 벽이 허물어져서 요즘 급성장 중이에요.”
요즘 수아는 나와 함께 마나 호흡법을 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에게 버프를 걸어주고 싶다며 자기도 알려달라길래 마나 호흡법을 알려줬는데 그 덕분에 수아의 마력이 급속도로 느는 중이었다.
자신을 귀여워해 주는 사람한테 보답이라며 버프를 걸어주며 밝게 웃는 모습에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그게 그렇게 도움이 돼?”
“저같이 벽에 막혀있는 사람한테는 물 한 방울 없는 사막에서 찾은 오아시스나 다름없죠. 마력도 늘릴 수 있고 특성의 깊이도 달라지니까요. 물론 엄청 힘들긴 하지만.”
아마 보통 사람에게는 현지만큼의 효과는 없을 거라 생각했다.
현지는 이쪽으로는 천재였으니까.
벽에 구멍을 내준다 해도 그 벽을 허무는 건 보통의 노력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수아가 주로 버프를 걸어주는 사람들이 누구지?”
“집에서 일하시는 분들이요.”
“마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제가 확인해 봤는데, 각성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는 마력이 별로 안 들어가더라고요.”
“그럼?”
“저랑 비교했을 때 1%도 안 되는 것 같아요.”
“너 말고 다른 각성자한테는?”
“그건 저랑 비슷하던데요? 급에 따라서 달라지는 건 아니더라고요. 거기다 하루에 여러 번 받는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요.”
현지가 이런 걸 살펴보고 있을 줄은 몰랐다.
가끔 수아가 방에서 나가 집 안을 돌아다닐 때 현지가 몰래 따라가는 걸 보긴 했는데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였나보다.
“아! 그리고 도련님 이건 비밀인데. 현태가 아가씨한테 자주 와서 버프 받고 가요.”
“그게 왜 비밀이야?”
“몰라요. 현태가 가끔 뭔가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아가씨한테 주고 버프를 받고 가면서 도련님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설마 그 바리바리 싸 들고 온다는 게 장난감이냐?”
“네. 현태 뿐만이 아니라 벽에 막혔다는 애들은 다 뭘 바리바리 싸 들고 오더라고요.”
“어휴~”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분명 아버지도 형도 심지어 김 실장도 수아에게 장난감을 따로 선물하지 않고 있었다.
장난감 방이 꽉 차버려서 더는 장난감을 주지 말라고 했는데도 이상하게 장난감이 계속 늘어나길래 어떻게 된 건지 의아했었는데 범인이 따로 있었던 거였다.
괜히 아버지를 의심했다.
똑똑-
“들어와요~”
현지는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노크에 반응했다.
노크를 한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 때문인 것 같았다.
“도련님 회장님과 아가씨가 도착하셨습니다.”
현태였다.
“그래? 알았어.”
나는 아버지와 수아를 마중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키며 현태에게 이어서 말했다.
“현태야. 범인이 너라지?”
“네?”
“수아한테 장난감을 계속 가져다주던 게 너라면서?”
“그, 그걸 어떻게?”
현태는 많이 당황했는지 말을 더듬다가 과하게 미소짓고 있는 현지를 보더니 눈을 얇게 뜨고 째려보기 시작했다.
“내가 말했다! 왜? 뭐?”
당당하게 말하는 현지를 보던 나는 현태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제 장난감은 제발 그만 줘라. 지금 수아 장난감 방이 두 개가 넘어! 다른 애들한테도 말해. 이제 장난감은 안된다고.”
“네··· 그런데 그럼 뭘?”
“그건 알아서 생각해.”
“네···”
잔뜩 주눅이 든 현태를 보자 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안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너무 많아진 장난감은 지금에 와서는 쓰레기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수아는 장난감을 주면 가지고 오긴 하지만 대부분 그대로 방치되어 버린다.
거기다 장난감이라고 가져온 것들이 대부분 사내아이가 가지고 놀 만한 36단 변신 로봇이라던가 장난감 검이라던가 심지어 비비탄 총 같은 거였기에 더욱 가지고 놀지 않았다.
“킥킥-”
현지의 웃음소리가 들리자 현태가 현지를 다시 째려보았지만, 태연하게 현태를 무시하고는 나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도련님.”
“왜?”
“그 서창렬이란 사람하고 계약서 같은 거에 도장 안 찍어요?”
“내가 미쳤냐? 그런 놈하고 계약서에 도장 같은 걸 찍게?”
“왜요?”
“걔들이 그 계약서를 가지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고 그딴 걸 만들어?”
“그럼 그냥 구두로만 계약하는 거예요?”
“성철이 있잖아. 계약서는 성철이 이름하고 성철이가 만든 회사 있거든 거기랑 진행하게 할 거야.”
나는 현지에게 천천히 설명을 해주며 수아와 아버지를 마중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아버지는 내가 서창렬과 계약을 한다는 걸 알고 말리셨지만, 결국 내 뜻에 따라 주겠다는 의사를 밝히셨다.
다만 한가지 경고를 하신 것이 있는데.
그런 놈들은 뒤가 없기 때문에 수틀리면 얼마든지 배신을 할 수 있는 놈들이니까 계약서 같은 건 절대 만들지 말라고.
아니 만든다고 해도 절대 유명 쪽에서 계약했다는 내용을 남기지 말라고.
그래서 성철의 이름과 성철이 슬라임 결정을 사들이기 위해 만든 회사로 그놈들과 계약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문제가 생겨도 이쪽에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문득 웃음이 나왔다.
앞으로 서창렬은 자신에게 아낌없이 줄 나무가 될 테니까.
아마 어비스가 열리면 볼만 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