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의 검제.
내가 끼고 있는 인피니티 링의 원주인.
그가 길드를 탈퇴하고 시장에 나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는 후에 자신이 나온 수호 길드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수호 길드를 나왔다고?
“이, 이 사람이 정말로 길드 나왔다고?”
“네. 김수찬은 지금 길드를 나온 상태입니다.”
내가 그를 손으로 가리키며 묻자 김 실장은 나와는 다르게 태연하게 말했다.
“왜?”
“네? 그야 다른 자들과 똑같은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그의 정보를 보며 정말 그가 맞는지 확인을 한 후 급히 입을 열었다.
정보에 나온 대로라면 그는 아직 B급 가디언이었다.
“이 사람 무조건 영입해.”
“네. 알겠습니다.”
아직은 볼품없어 보일지라도 그의 재능이라면 순식간에 치고 올라오리라.
물론 인피니티 링이 나에게 있기에 전보다 빠르게 성장하진 못하겠지만 상관없었다.
‘무한’이란 이명이 빠진다고 해도 그에게는 ‘검제’라는 이명이 남아 있으니까.
아니 오히려 무한을 초라하게 만들 정도로 그의 검술은 대단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들은 검제라는 이명에 의문을 가지지 못했으니까.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검을 무기로 사용하는 다른 각성자들과 확연히 달랐다.
마치 검이 살아 있는 생물처럼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생각에 잠겨 있던 내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그를 영입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이득이 될 테니까.
S급 최상위에 오를 그의 가치는 연합을 통째로 갖다 바쳐도 바꾸지 않을 보물 중의 보물이었다.
“일단 이 사람을 최우선으로 움직여. 절대 다른 곳에 빼앗기지 마. 이미 다른 길드에 들어갔으면 뺏어서라도 내 앞에 데려다 놔야 해. 알았어?”
“네.”
지끈거리던 머리의 통증이 순식간에 괜찮아졌을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알겠습니다.”
내 방으로 향하려던 나는 갑자기 떠오르는 생각에 멈칫했다.
잠깐만?
“정근이 지금 어딨어?”
“그게…….”
“설마 또?”
“네.”
내 이득의 한 축을 차지하는 미래라는 기업.
그 기업의 주인이 될 놈은 그 고생을 해 놓고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차 대기시켜.”
“알겠습니다.”
* * *
강남에 위치한 클럽 앞에 도착한 나는 한숨을 내쉬며 차에서 내렸다.
“도련님.”
정근에게 붙여놓은 경호원 중 하나가 날 마중 나와 있었다.
“그놈 안에서 뭐 해?”
“그게…….”
경호원이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또 술판을 벌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안내해.”
“네.”
경호원을 따라 클럽 안으로 들어선 나는 시끄러운 음악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며 안내를 하는 경호원을 따라 이동했다.
그가 안내한 곳은 VVIP 룸.
문을 열고 들어서자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마치 고급 호텔의 스위트룸처럼 고급스러워 보이는 인테리어와 예술품들이 방 안을 꾸미고 있었는데 전혀 클럽 같지 않은 모습이었다.
거기다 한쪽에는 커다란 침대까지 놓여 있었는데 그 이유가 쉬이 짐작되었다.
성철이 이 새끼는 도대체 무슨 의도로 클럽에다가 이런 방을 만든 거야?
생각을 잠시 멈추고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아 있는 정근과 반나체의 옷차림을 한 여성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보였다.
남자는 이정근 혼자.
여자는 7명.
내가 들어왔음에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정근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쉴 수밖에 없었다.
정근뿐 아니라 아무도 내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
그래. 어디 얼마나 재밌게 노는지 좀 보자.
한 편에 마련되어 있는 식탁? 비슷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이 하는 행태를 지켜봤다.
보통 말을 하는 건 여성들이었다.
정근에게 애교를 부리거나 칭찬을 하면 정근은 기분이 좋아져서 돈을 뿌리는 모습.
진짜 별거 없네?
내가 저 안에 속해있을 때는 몰랐는데 3자의 눈으로 보니 정말 꼴불견이었다.
그때는 저게 왜 그렇게 좋았을까?
“나 오빠 회사 메인 모델 시켜주라~”
정근의 오른쪽에 앉아 있던 여성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메인 모델이라고?
“그래. 선영이 정도면 우리 회사 메인 모델로 충분하지! 오빠만 믿어!”
“정말이다? 약속!”
새끼손가락까지 걸어가며 약속을 하는 정근의 모습을 보니 다시 머리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웬만한 인기 연예인도 될까 말까 할 판에 인지도조차 없는 저 여자에게 10대 기업 중 하나인 미래의 메인 모델을 시켜준다고?
어이가 없다 못해 허탈하기까지 했다.
“서, 선우야…….”
가만히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때 고개를 돌리던 정근과 눈이 마주쳤다.
잔뜩 당황해서 말을 더듬는 정근 때문일까?
모두의 시선이 내게 몰리기 시작했다.
“제가 정근이랑 할 말이 좀 있어서 그러는데 자리를 좀 피해주시면 안 될까요?
몸을 일으키며 입을 열었지만, 그녀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오빠 저 사람 누구야?”
내 말에 대답조차 하지 않고 정근에게 묻는 그녀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를 모른다고?
요즘 방송을 탈 일이 많아서 나름 유명해졌다고 생각했는데 혼자만의 착각인 모양이었다.
그래도 한 명 정도는 알아봐야 정상 아니야?
“그, 그게…….”
말을 더듬는 정근 때문일까?
그녀들이 나를 째려보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누구신데 우리 오빠를 협박하시는 거죠?”
허? 협박? 이건 도대체 어느 나라 논리지?
“협박이라고요?”
“우리 오빠가 당신 때문에 겁먹었잖아요! 당장 나가세요!”
정근이 겁을 먹었다는 건 내가 그녀들이 함부로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의미했다.
도대체 무슨 자신감이지? 그리고 왜 자꾸 우리 오빠라고 하는 거야?
한숨을 내쉬며 정근을 바라보자 정근의 입이 열렸다.
“서, 선우야 그게…….”
“너 언제까지 이러고 놀 거냐?”
“어, 어차피 나는 회사 일은 잘 모르잖아. 그냥 그 뭐야 전문 경영인? 그거 세워서 네가 알아서 하면 되잖아.”
“오빠 그게 무슨 소리야! 오빠 회사를 왜 저 사람이 알아서 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 정근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얘는 생각이라는 게 있긴 한가?
“정근아 이 여성분들 좀 내보낼래?”
“어? 어…….”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정근에게 직접 말해야 했다.
정근은 이어서 그녀들에게 자리를 비켜달라 말했지만, 그녀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걱정 마, 오빠! 우리가 오빠 지켜줄게!”
얼씨구? 도대체 이 여자들은 뭘 믿고 이렇게 당당한 거지?
“당신 뭐야? 뭔데 우리 오빠보고 이래라저래라 하는 거야! 우리 오빠가 누군지 알아? 무려 미래 그룹의 주인이 될 사람이야!”
바로 그거다.
미래의 주인이 될 사람.
그럼 그 사람이 꼼짝도 못 하는 난 누구겠는가?
왜 이걸 이해를 못 하는 거지? 꼭 내 입으로 내가 누군지 말해야 하는 건가?
“저는 유선우라고 합니다.”
“유선우?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데? 연예인인가?”
이것들은 뉴스도 안보나?
내 입으로 직접 유명그룹을 언급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아! 나 알아! 그 유명그룹…… 어?”
말을 하던 도중 나를 보고는 멍한 표정을 짓는 여성.
“유명그룹?”
“정말?”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 그녀들을 보며 나는 차분한 미소를 보였다.
“이제 좀 자리를 피해주시겠어요?”
그녀들은 내가 누군지 알곤 깜짝 놀라서는 도망치듯 나가려 했다.
마치 내가 그녀들에게 해코지하기라도 할 것처럼.
여성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녀들이 모두 나갔음을 확인하고 정근에게 고개를 돌리다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한 명의 여성이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른 여성들은 모두 도망치듯 급히 나갔음에도 꼼짝도 하지 않은 채 은은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
“안녕하세요. 이지혜라고 해요.”
우아하게 몸을 일으켜 나에게 다가와 손을 내미는 이지혜라는 여자를 보며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그런데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당신을 만나기까지.”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당신을 만나기 위해 매일 저 사람 비위를 맞춰줘야 했다는 소리죠.”
당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누구지? 날 만나기 위해서는 또 무슨 소리고?
“이유는요?”
“제안을 하나 할까 해서요.”
“제안이라고요?”
“네.”
사기꾼인가?
의심이 가긴 했지만 일단 들어는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떤?”
“요즘 유선우 씨를 보면 안쓰럽다는 생각이 문득 든답니다.”
“안쓰럽다고요?”
“네.”
환하게 미소짓는 그녀를 보자 이 여자가 나에 대해 뭔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째서죠?”
“본성을 숨긴 채 연기를 하고 계시잖아요.”
“제가요?”
그냥 미친년인가?
“네. 그 목적은 당연히 유명일 테고요?”
틀린 말만 골라서 하는 주제에 자신감 가득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자 황당함이 몰려왔지만, 태연함을 가장해야 했다.
그녀의 제안이라는 걸 들어보기 위해서.
“무슨 소리죠?”
“제 앞에서는 연기하실 필요 없어요. 저는 모든 걸 알고 있답니다.”
“네?”
진짜 미친년인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진 것과 다르게 그녀는 도저히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정근 씨? 미안한데 자리를 좀 피해주시겠어요?”
멍한 눈으로 우리의 대화를 바라보던 정근은 그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는 재빨리 룸을 벗어나려 했다.
“정근아. 밖에서 기다려라. 너 또 룸 잡고 놀면 진짜 뒤진다.”
“어? 아, 알았어.”
나는 그녀가 원하는 모습을 살짝 보여주었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하죠.”
“그럴까요?”
눈웃음을 치며 대답하는 그녀에게 약간 사나워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그럼 제안이라는 걸 좀 들어볼까요?”
“제안하기에 앞서 확인할 게 좀 있는데 괜찮을까요?”
“네. 말씀하세요.”
“이민우. 그러니까 변신능력자에 대해 어떻게 알았는지 대답을 좀 해주셨으면 해요.”
요것 봐라? 혹시 최강준 쪽에서 나온 사람인가?
태연한 표정을 유지한 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아버지가 알려주셨죠.”
“아버지라면 유 회장님?”
“네.”
“혹시 유 회장님이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도 알고 계신가요?”
“저야 모르죠.”
내 대답에 그녀는 깊은 고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열었다.
“정말 모르시나요?”
“네. 몰라요.”
“어쩔 수 없네요.”
내 단호한 대답에 한숨을 내쉰 그녀는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던 붉은색 드레스를 손으로 잡아 뜯기 시작했다.
그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죠?”
“보면 모르세요? 당신이 지금 절 성폭행하려고 제 옷을 찢으셨잖아요.”
“내가 왜요?”
“글쎄요? 제가 너무 아름다워서?”
태연한 표정으로 내게 대답을 해주는 그녀를 보며 눈요기를 하던 나는 문득 궁금한 것이 떠올라 물었다.
“혹시 지금 이걸로 절 협박하려는 건가요?”
“네.”
“그게 가능할 거라고 보세요?”
“당연하죠. 둘만 있던 공간에서 여성이 옷이 찢어진 채 도망치듯 방을 나서는 걸 본 사람들이 생각할 건 뻔하잖아요.”
“지금 당신이 착각하시는 게 하나 있어요.”
“그게 뭐죠?”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 표정으로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그녀가 모르는 한 가지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내 허락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 당신은 절대 이 방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거요.”
“풉! 정말 재밌네요. 설마 내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이런 일을 벌였을 거라 생각하는 건가요?”
“설마 이 방에 저희 말고 다른 사람이 또 있는 건가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저와 선우 씨 둘뿐이죠.”
단정 짓듯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몇 가지 사실을 유추해 낼 수 있었다.
첫째는 그녀가 각성자라는 것.
둘째는 그녀의 등급이 S급 이상이라는 것.
내 등급이 A급 이상이라는 건 나를 아는 자들은 모두 알고 있었다.
“혹시 등급이 S급이에요?”
“와! 똑똑하시네요.”
“그래서 그렇게 자신하셨군요.”
“물론이죠.”
“그래도 당신이 모르는 게 하나 있는데. 알려드릴까요?”
“설마 밖에 있는 경호원들을 말하는 거라면 포기하세요. S급 각성자는 생각보다 강하거든요.”
그녀는 자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마치 날 유혹이라도 하는 것처럼 혀로 입술을 핥았는데.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혹시 이러는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아뇨. 알 필요 없어요.”
“그럼 개인적인 질문이 하나 있는데 대답해 주시겠어요?”
“들어는 보죠.”
태연한 표정으로 말하는 그녀를 보며 진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혹시 고통에 익숙하신가요?”
“고통?”
황당한 얼굴로 묻는 그녀를 보며 나는 눈을 감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살살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