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2화 (32/214)

“자, 잠깐! 협상을 하자.”

현지가 문을 나서려는 순간 그녀에게서 다급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대로 멈춘 현지는 지혜를 보며 실망한 눈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협상이라고?”

“그, 그래. 질문에 대답해 줄 테니까 나를 풀어줘.”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이미 내 손안에 들어온 사냥감이다.

풀어주지 않아도 충분히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정말이야?”

“대신 약속해라. 대답만 해 주면 풀어주겠다고.”

“약속하지. 사실이라 판단되면 풀어줄게.”

정말 어이가 없는 여자였다.

내가 한 입으로 두말하면 어쩌려고?

나는 충분히 한 입으로 두말이 가능한 사람이었다.

하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정신이 아니겠지…….

“내 제안은…….”

지혜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던 나는 그녀가 최강준 쪽 사람임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유명을 먹을 수 있게 지원을 해 줄 테니 자신들에게 협조해달라는 제안을 하려고 했던 거였다.

“그런데 왜 그런 이상한 짓을 저지른 거지?”

“제안하기 전에 우, 우선권을 잡으려고…….”

얼굴을 붉히며 말을 흐리는 그녀를 보며 지금껏 의문이었던 물음을 던졌다.

“그런데 너 S급 각성자라며? 상식적으로 내가 너를 성폭행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거 아니야?”

“그, 그건…….”

“그건?”

그녀가 멈칫거리는 걸 본 나는 뭔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제안만 말해주면 풀어준다고 했잖아. 그건 말해 줄 수 없어.”

“내가 너의 제안을 받아들일지도 모르잖아. 그 정도 패는 보여줘야 내 생각이 변하지 않겠어?”

“내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그래.”

생각에 잠겨 침묵하는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나는 그녀를 부추기기 위해 입을 열었다.

“너의 제안은 마음에 들어. 하지만 너나 너의 세력에 대한 정보가 하나도 없잖아. 내가 뭘 믿고 너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 있겠어.”

내 말에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거의 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너희들이 가진 것이 어느 정도인지 알아야 내 생각이 바뀔 거 아니야?”

“그, 그런가?”

“당연하지.”

“좋아. 말해줄게.”

그녀는 자신의 계획에 대해 말해주기 시작했다.

만약 내가 제안을 거절한다면 그대로 빠져나가 내가 성폭행을 하려고 했다는 걸 세상에 퍼트릴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게 가능한 이유는 일단 그녀가 일반인의 신분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그녀의 말에 나는 현지가 없었다면 정말 크게 당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마력을 숨길 수 있는 약이 있다고?

정확히 말하면 구속구처럼 일정 시간 동안 몸 안의 마력을 전부 배출시키는 기능을 하는 약이 있다는 말이었는데.

“정말이야?”

“그래. 정확히 말하면 약이 아니라 독이지만.”

회귀한 나도 들어본 적 없는 정보였다.

“독이라고?”

“독이긴 하지만 인체엔 거의 영향이 없어. 마나독이니까.”

이건 그냥 넘어갈 만한 사안이 아니었다.

혼자 생각해서 처리하기에는 너무 심각한 사항이었다.

멍청한 여자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치밀하지 않을 뿐 계획 자체는 나쁘지 않았으니까.

마치 사회생활을 이제 막 시작한 신입처럼 경험이 전혀 없어서 멍청한 것처럼 보일 뿐이었다.

“구별할 방법은?”

“거기까진 말해 줄 수 없어. 어때? 이제 내 제안을 받아들일 생각이 좀 들어?”

“현지야. 이년 다시 고문 시작해.”

“정말요?”

“그래. 아는 건 모두 자백하게 만들어. 어떤 방법을 사용해도 되니까 자백하게만 만들어.”

“자, 잠깐만! 무슨 소리야 풀어준다고 했잖아!”

나는 그녀를 무섭게 노려보곤 등을 돌려 방을 나섰다.

그녀가 알고 있는 모든 걸 실토하려면 시간이 걸릴 테니까.

* * *

아버지의 서재에 도착했을 때 문 앞에 대기하고 있는 경호원들과 김 실장의 모습을 발견한 나는 고개를 갸웃할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일이지?

“형이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아버지가 계시는 서재에서 들려오는 고성에 잠시 멈칫한 나는 살짝 열려 있는 틈을 발견하곤 안쪽 상황을 살펴보았다.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앉아 계시는 아버지와 잔뜩 화가 난 채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작은아버지의 모습이 보였다.

경호원들과 김 실장은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문을 슬쩍 열어 놓은 모양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그걸 모른단 말이냐?”

“몰라! 난 모르니까 당장 철회해!”

“넌 어째 어릴 때 하고 변한 게 하나도 없는 것 같구나.”

작은아버지의 모습은 떼를 쓰는 예전의 내 모습과 비슷해 보였다.

형이나 아버지에게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냐고 소리치던 어린 시절의 내 모습.

“난 못 내려오니까 그렇게 알아. 내 자리 치우기만 해봐!”

“너는 지금 네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알고 그딴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냐!”

“내가 뭘? 그깟 것들 조금 건든 게 그렇게 큰 잘못이란 말이야? 내가 부회장 자리에서 내려올 만큼?”

“지금 그깟 것들이라고 했느냐?”

작은아버지의 말에 지금껏 참아 오셨던 아버지가 폭발할 기미가 보였다.

다만 작은아버지만이 그 사실을 모를 뿐이었다.

“그 버러지만도 못한 놈들 죽이는데 손 좀 보탠 게 그렇게 문제야?”

쾅-

책상을 내려치시는 아버지는 정말 화가 많이 나신 듯 고함을 치셨다.

“이놈! 그 때문에 자그마치 16명이 죽었다. 그런데 지금 그딴 소리가 나온단 말이냐!”

16명이라고?

미래 그룹의 사망자 숫자와 똑같은 숫자였다.

정근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어머니, 형, 동생, 그리고 그곳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숫자를 합하면 모두 16명이었으니까.

설마 그 일에 작은아버지도 관여하고 있었단 말이야?

“내가 그들이 죽을지 알았냐고? 난 그냥 그들이 좀 도와 달라길래 도와준 것밖에 없다고!”

“그래서 탐지기의 작동을 멈추게 했단 말이냐? 그 일이 어떤 일을 초래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모든 사건의 시작은 균열을 탐지하지 못한 탐지기에 있었다.

“나도 미래 놈들이 모두 죽을 거라곤 생각 못 했다고!”

“아니! 넌 생각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거다. 미래가 아니었다 쳐도 누군가는 다치거나 죽었을 테니까!”

“그래! 나 때문에 죽었다고 치자! 근데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깟 버러지들 몇 죽은 게 내가 자리에서 내려올 정도로 잘못한 거란 말이야?”

아! 이건 정말 뭐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작은아버지가 저 정도였어?

망나니 시절의 나를 보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그때의 나보다 더욱 심해 보였는데.

마치 죄책감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시절의 나도 이건 해서는 안 될 짓이라는 것 정도는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그를 보는 아버지 역시 많이 놀라셨는지 눈동자가 흔들리고 계셨다.

“버러지라고? 사람을 버러지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냐 지금!”

“그게 뭐?”

아무리 봐도 작은아버지는 겁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시절의 나조차도 아버지는 무서워했었다.

아버지가 화를 내면 잔뜩 겁에 질려서 벌벌 떨었으니까.

“내가 너를 너무 오냐오냐 키웠어. 하나뿐인 동생이라 지금껏 아무 말 않고 넘어갔는데 그게 실수였던 모양이야.”

아버지는 회한 섞인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표정에도 불구하고 작은아버지는 코웃음을 칠 뿐이었다.

“김 실장!”

아버지는 무언가 결심을 하셨는지 표정을 지우곤 김 실장을 호출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나가!”

작은아버지는 김 실장을 보며 소리쳤지만, 김 실장은 꿈쩍도 하지 않고 아버지의 명령을 기다릴 뿐이었다.

“이놈 정신병원에 처넣어!”

“뭐?”

아버지의 말에 작은아버지는 순간 무슨 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한 모양인지 멍한 표정으로 물었는데.

“이놈 정신병원에 처넣으란 말 못 들었나?”

“알겠습니다. 회장님.”

“잠깐만! 형 이게 무슨 소리야? 나를 정신병원에 넣으라니!”

“뭐해! 이놈 치우지 않고!”

김 실장이 경호원을 부르자 이제야 상황파악이 되는지 작은아버지는 아버지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한번 결정을 내리면 웬만해서는 말을 바꾸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아는 작은아버지는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찾아와 소란을 피운 거겠지.

어떻게서든 자리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다만 그로 인해 이런 일이 벌어질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거다.

“형 내가 잘못했어. 다신 이런 일 없게 할 테니까 한 번만 용서해줘. 제발.”

작은아버지의 애원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아버지의 모습에 결심을 굳히셨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 때문에 지금껏 작은아버지를 건들지 못하고 있었는데 기회가 생긴 것 같았다.

“이번 일은 내가 잘못했어. 어차피 형이 막아서 아무도 모르잖아. 응? 제발 용서해줘.”

“뭐해? 끌고 나가!”

작은아버지의 행태에 어찌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던 경호원들은 아버지의 명령이 떨어지자 곧바로 움직여 그를 끌고 나갔다.

그 모습을 잠시 지켜보던 나는 서재로 들어갔다.

“정말 작은아버지를 정신병원에 보낼 생각이세요?”

“크흠-”

내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아버지는 놀라셨는지 헛기침을 하곤 입을 여셨다.

“듣고 있었냐?”

“네. 문이 살짝 열려 있어서요.”

“쯧쯧쯧.”

“그런데 정말 작은아버지를 정신병원에 보내실 거예요?”

“그래.”

“얼마나요?”

“정신을 차릴 때까지 두고 볼 생각이다. 저놈이 정신을 차릴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을 오래도록 못 차렸으면 좋겠다.

되도록 평생 그곳에 갇혀 있었으면 좋겠는데?

똑똑-

“들어와.”

“회장님. 어디로 보낼까요?”

김 실장은 아버지에게 어디로 보낼지를 물어봤다.

“최악으로 보내. 그래야 정신을 차릴 놈이니까.”

“알겠습니다.”

복수.

내가 직접 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마음에는 들었다. 기회라는 것이 생겼으니까.

그리고 내가 갇혀 있어봐서 아는데 자유를 박탈당한다는 건 정말 괴로운 일이었다.

다만 여기서 내 복수가 끝나면 너무 쉽잖아?

성철에게 따로 연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작은아버지가 갇히게 될 정신병원을 알아내 더욱 괴롭게 만들어 주기 위해서.

차라리 죽여달라 애원할 정도로 지옥을 보여줄 생각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네?”

“왜 왔냐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 때문에 심기가 불편해지셨는지 작게 호통을 치셨다.

“아! 그게요. 들으셨죠? 제가 이상한 여자 하나 데리고 왔다는 거.”

“그래. 들었다. 이상한 짓을 하고 있다는 것까지.”

아! 그걸 보고 받으셨단 말이야?

아버지의 말에 살짝 무안해진 나는 급히 본론을 꺼냈다.

“방금 그 여자를 심문하다 들은 건데 혹시 마나독이란 것에 대해 들어본 적 있으세요?”

“마나독? 그게 무엇이냐?”

“마력을 숨길 수 있는 독 비슷한 건가 봐요.”

“마력을 숨긴다고?”

아버지는 놀란 표정을 짓곤 잠시 침묵에 잠겨 계시다가 입을 여셨다.

“짐작은 했는데 정말 그런 것이 있었구나.”

“네? 짐작하셨다고요?”

“그래. 요즘 국내에 중국 각성자들이 국내에 들어와 분탕질을 치는 것을 아느냐?”

“네. 뉴스에 자주 나오잖아요.”

“이상한 게 좀 있었다.”

“뭔데요?”

“국내로 입국하는 중국놈들을 아무리 살펴봐도 각성자가 없더란 말이지. 요즘 밀입국을 완전히 차단해서 들어올 방법이 없을 텐데 아무리 그들을 잡아들여도 계속 어디선가 튀어나오더구나. 그래서 짐작은 했다. 혹시 그들이 그런 물건을 가지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마나독을 먹고 일반인인 척 입국을 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각성자를 판별할 수 있는 물건이 있었지만, 그건 몸속에 일정 수준의 마력이 존재할 경우에만 확인할 수 있었다.

마나 파동을 쏘면 각성자의 경우 몸속의 마력이 자동으로 반발한다.

그 반발력이 존재하는가 아닌가로 각성자를 구분하기 때문에 이미 모든 마력을 배출해 버린 그들은 판별이 불가능했을 거다.

“상황이 심각하네요.”

“구별할 방법에 대해서도 들었느냐?”

“일단 현지에게 맡겨 놨어요.”

“그럼 기다려 봐야겠구나.”

“어떻게 하실 거예요?”

“판별할 방법이 있다면 모두 잡아들일 생각이다.”

“그래서요?”

내 물음에 한참을 고민하시던 아버지는 질문에 대한 답을 해 주셨다.

“그쪽과 협상을 해야겠지.”

“이쪽에 손을 떼라고요?”

“어디 그뿐이겠느냐? 얻을 수 있는 건 모두 얻을 생각이다. 만약 정말이라면 그놈들의 역린을 틀어쥔 거나 마찬가진데 그냥 넘어갈 수야 있나.”

“아버지가 직접 나서시게요?”

“그래. 내가 직접 나서야 그놈들이 함부로 움직이지 못할 거다.”

“왜요? 정부를 내세우셔도 되잖아요.”

아버지는 직접 나서야 하는 이유를 천천히 설명해 주셨다.

한국정부를 내세울 경우, 놈들이 시간을 끌 우려가 있었다.

물론 결국 이쪽이 원하는 걸 얻게 되겠지만 앞으로의 일정 때문이라도 빠르게 정리를 하셔야 한다고 한다.

“일정이 뭔데요?”

“너는 아비가 돼서 딸아이의 입학식도 까먹었느냐?”

“네?”

“이제 곧 수아의 초등학교 입학식이 있지 않느냐!”

“그러니까? 수아의 초등학교 입학식 때문에 이 일을 얼른 정리해야 한다고요?”

아버지의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이어지는 아버지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입학식 전까지 협상을 마무리하지 못할 경우 놈들이 그날을 노리고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아버지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나와 아버지, 형 그리고 수아가 외부에 모습을 보이는 날 그들이 미친 척 공격이라도 한다면?

거기다 입학식에 참여할 인사들 역시 보통이 아니었다.

분명 아버지와 형이 초대할 인사들에 대해 심각하게 토론하는 것을 본 적이 있었기에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원래 입학식을 이렇게 거창하게 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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