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0화 (40/214)

선화와의 마지막 협상 자리에 나온 나는 이제 끝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화가 나의 조건을 대부분 수락함으로써 곧 이쪽은 날개를 달게 될 테고 최강준은 그나마 남은 마지막 성장 가능성을 본인조차 모르는 사이에 빼앗길 테니.

중국과 국내 재벌들의 지원이 끊겼고 연합이 해체되면서 세력 역시도 반 토막이 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대중의 신뢰도조차 많이 하락한 상태였기에 이제 그에게 가능성이란 남아 있지 않았다.

물론 아직 정권의 힘이 남아 있지만, 그들은 박쥐랑 똑같은 종족이었다.

자신이 탄 차가 똥차라는 걸 깨닫는 순간 바로 차로 갈아탈 놈들.

이제 그에게 남은 거라곤 단 하나뿐이었다.

끝없는 추락.

아무리 노력해도 바뀌지 않는 현실과 그 노력이 오히려 자신의 목을 죄어오는 상태가 되어버린 것이다.

“벌써 일어나시게요?”

“제가 저녁 약속이 따로 잡혀 있어서요.”

이제 남은 건 실무진들끼리의 조율뿐이었다.

일단 큰 그림을 그려놓았기에 내가 할 일은 여기서 끝이었다.

“좀 서운하네요. 식사까지는 함께할 줄 알았는데.”

선화가 일어나려는 나를 보며 서운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저도 그러고 싶지만 아주 중요한 약속이라 취소를 하지 못할 것 같네요.”

정중하게 사과를 하며 이만 일어나려던 그때 그녀가 황당한 말로 나를 붙잡았다.

“혹시 제가 싫으세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전부터 느낀 건데 선우 씨가 선을 긋는 느낌이 강하게 드네요.”

전부터라?

선을 봤을 때를 말하는 건가?

“그럴 리가요?”

“우리 선 본 사이에요. 집안끼리 만나 보라고 허락을 할 정도라고요. 그럼 적어도 서로를 알아보기 위한 말들이 오고 가야 하는데 선우 씨는 그런 게 전혀 없잖아요.”

몰랐다면 모를까 약혼자가 있다는 사실을 아는 나였기에 그녀의 말대로 선을 긋고 있는 건 맞았다.

물론 선화에게 남자로서 관심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긴 하지만.

혹시 자존심이 상해서 이러나?

“선화 씨. 하나만 물어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제가 선화 씨 옆자리에 있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상상해 보신 적 있으세요?”

“옆자리라면 부부로서요?”

“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그녀를 보며 좀 무례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어요!”

“있으시다고요?”

“네. 그게 문제가 되나요?”

단호하게 대답한 것과 다르게 얼굴이 살짝 붉어진 선화는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이 여자가 진짜 왜 이러지? 약혼자도 있으면서?

거기다 나는 애 아빠다.

그녀도 당연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이러는 이유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물론 서로의 이득에 의해 진행하는 혼사는 애가 있어도 상관없는 경우가 많았지만, 당사자 입장에서는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이 말을 꼭 해야 하나?

“선화 씨에겐 약혼자가 있으실 텐데요?”

“네? 그걸 어떻게…… 그건 집안끼리만 알고 있는 사실인데?”

“어쩌다 보니 알게 됐습니다. 이제 제 행동이 이해가 되셨나요?”

잔뜩 당황해서 입을 꾹 닫고 있는 그녀를 보며 이만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이럴 땐 자리를 피해 주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그, 그게 뭐 어때서요!”

갑자기 소리치는 그녀를 보며 난 다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네?”

“그, 그게. 야, 약혼이 결혼도 아니고 요즘 세상에 파혼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 아니잖아요!”

홍당무처럼 빨개진 얼굴로 횡설수설하듯 소리치는 선화는 많이 당황한 것 같았다.

물론 그녀만큼 나도 당황한 상태였고.

덕분에 둘만 있는 공간에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선화 씨, 그럼 몇 가지만 물어보겠습니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킨 후 조용히 입을 열었다.

“마, 말씀하세요…….”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선화를 보며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여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말은 선화 씨가 저에게 마음이 있다는 말로 받아들여도 되는 건가요?”

“네…….”

부끄러운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을 표하는 선화를 보자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게 딸이 있다는 건 아시죠?”

“네…….”

혹시나 해서 물어봤지만 역시 알고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뭐지?

“제가 망나니라는 건 당연히 아실 테고요?”

“지, 지금은 아니시잖아요…….”

솔직히 마지막 말은 그냥 할 말이 없어서 내뱉은 말이었다.

그런 나를 감싸주는 듯한 선화를 보며 뭘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고민을 해봤지만, 답이 나오지 않았다.

여자 경험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여자 경험은 차고 넘쳤지만, 문제는 그 여자들과 선화는 전혀 다른 존재라는 거였다.

종류가 다르다고 해야 할까?

내가 지금껏 만나왔던 여자들은 솔직히 말하면 필요한 걸 주고받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보이는 선화의 모습은…….

“그럼 일단 이렇게 하죠.”

“네?”

“기간을 정해두고 만남을 가져 보기로 하죠. 끝나는 날 그때도 제가 마음에 드시면 저도 진지하게 생각을 해 보겠습니다.”

솔직히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어디선가 들었는지 봤는지 모를 내용을 지껄인 것뿐이었다.

“네!”

표정이 밝아진 선화를 보자 이게 잘한 선택인가? 하는 고민이 들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이었다.

“그럼 나머지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도록 하죠. 제가 시간이 얼마 없어서요.”

“언제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묻은 선화를 보며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기다릴게요!”

환한 미소를 짓는 선화를 보자 뭔가 당했다는 느낌이 드는 이유가 뭘까?

마치 뭔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 *

호화스럽게 꾸며진 공간에 앉아 있던 나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으로 들어온 사람은 둘이었다.

70대로 보이는 노인과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중년인.

“반갑습니다. 유선우입니다.”

가까이 다가가 악수를 청하며 나를 소개했다.

“반갑네. 한명진이네.”

“한수길입니다.”

로열그룹의 회장 한명진과 그의 아들인 부회장 한수길의 등장이었다.

한 회장만 불렀는데 왜 한수길까지 온 거지?

“일단 앉으시죠.”

자리를 권한 나는 한수길을 빤히 쳐다보았다.

“혹시 제가 이 자리에 나온 게 불편하십니까?”

“그건 아닙니다. 다만 좀 의아해서요.”

“제가 아버지께 부탁했습니다.”

설마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이 자리에 나온 건가?

오늘 내 입에서 나올 소리는 결코 듣기 좋은 소리가 아니었다.

그들의 자존심을 뭉개버릴 폭탄을 들고 왔는데 한수길은 도대체 뭘 믿고 이 자리에 나온 걸까?

“일단 식사부터 함세.”

“아니요. 이야기부터 마치도록 하죠.”

“어린 친구가 참 급하구먼. 그래 이야기해 보게. 왜 날 보자고 했는지.”

그래도 재계서열 2위라는 건가?

지금껏 내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 중에 내 앞에서 저런 자세를 취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특히 재벌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 중에는.

“며칠 전 제가 한성균이라는 친구를 우연히 보게 됐습니다.”

“우리 성균이를?”

정말 듣지 못한 거야?

그들이 연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한 회장의 태연한 모습을 보니 정말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듣지 못하셨습니까?”

“그렇다네.”

“아! 들었습니다. 성균이가 선우 군을 만났다는 말을 지나가듯 했는데 정말이었군요.”

오호라?

이제야 좀 알 것 같았다.

부회장이 이 자리에 따라온 이유를.

“그럼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아시나요?”

“그건…….”

“무슨 일이 있었느냐?”

부회장이 제대로 말을 못 하자 한 회장이 부회장을 재촉했다.

이 자리가 자신이 생각한 자리가 아니라는 걸 눈치챈 거겠지.

내가 만나자는 걸 들은 한 회장은 내가 자신에게 손을 내밀 줄 알았나 보다.

정신을 차린 망나니.

과연 망나니가 그냥 정신을 차린 걸까?

어떤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정신을 차린 척 연기를 하는 게 아닐까?

요즘 나에게 쏟아지는 말들이었다.

유명을 가지기 위해 정신을 차렸다.

형제의 난을 예상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말이었다.

“제가 설명을 하는 게 빠르겠네요.”

“아닙니다. 제가 말하겠습니다.”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한 부회장을 보며 내가 설명하려 했지만, 한 부회장은 나를 막았다.

최대한 한 회장을 화나지 않게 하기 위함이겠지.

“성균이가 선우 군에게 살짝 실례를 좀 한 모양입니다. 아버지.”

“살짝?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내 물음에 한 부회장은 당황한 눈치였다.

“네. 그 정도는 철없는 아이의 실수라고 생각합니다.”

당황한 모습을 살짝 보였지만, 찰나의 순간일 뿐이었다.

순식간에 표정을 감추는 한 부회장을 보며 역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그 실수를 제가 한번 저질러 볼까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직접 당해보면 정말 실수인지 아닌지 판단하기가 쉬울 것 같아서요.”

부회장의 얼굴이 잔뜩 구겨졌다.

이번에는 표정을 쉽게 숨기지 못하는 부회장이었다.

“쯧쯧. 넌 아직도 표정관리가 되지 않는구나.”

“죄송합니다.”

한 회장은 평온한 모습으로 부회장을 질책했다.

“그래서 선우 군이 원하는 게 뭔가?”

“역시 한 회장님이시네요.”

한성균의 실수를 약점 잡아 내가 원하는 게 있을 거라는 판단을 순식간에 내려 버리고 물어오는 한 회장을 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한 가지만 물어보겠네.”

“네. 물어보세요.”

“자네가 원하는 게 혹시 이쪽의 지원인가?”

그는 형제의 난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는 듯했다.

한 번 찔러볼까?

“그렇다면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네. 아무리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라고 해도 자네는 자네 형에 비해 부족한 게 너무 많아.”

잘 알고 있네?

형은 그런 쪽으로는 타고났다.

아니 천재적이라는 말이 부족하다.

유명을 지금의 위치까지 끌어올린 아버지보다 형을 높이 평가하는 자들이 더 많을 정도로.

“하하.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형은 그쪽으로는 정말 타고났다고 생각하니까요.”

“다행이네. 솔직히 말하면 이 자리에 나오면서도 많은 걱정을 했다네. 자네가 그런 제안을 하면 어쩌나 하고 말일세. 정작 뚜껑을 열어보니 전혀 다른 일 때문이었지만.”

부회장을 보는 한 회장의 눈에는 한심함이 담겨 있었다.

그런데 이걸 어쩌나?

지금부터 내 입에서 나올 말들은 그런 걱정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텐데?

“그런데 이걸 어쩌죠? 제가 더욱 큰 걱정거리를 안겨드릴 예정인데?”

“그게 무슨 말인가?”

“제가 댁의 손자 때문에 열을 아주 많이 받은 상태라는 말이죠.”

“뭐라?”

내 태도에 한 회장은 살짝 화가 난 모양이었다.

하긴 지금껏 살면서 자신에게 이런 태도를 보인 사람은 내가 처음일 테니까.

물론 한 회장은 거의 티를 내지 않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가 열 받았다는 게 뻔히 보였다.

“그 녀석이 저에게 그러더군요. 거지새끼라고. 그걸 듣고 제가 그에게 뭐라고 했을까요?”

침묵을 지키는 둘을 보며 이어서 입을 열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로열그룹을 거지그룹으로 만들어 주겠다고요. 저는 일단 내뱉은 말은 지키자는 주의라 이걸 실행할 생각인데 두 분 생각은 어떠세요?”

“가, 감히!”

부회장은 제대로 열받은 모양이었다.

내 앞에서 ‘감히’라는 말을 내뱉는 걸 보니.

“자네 제정신인가?”

한 회장은 부회장을 진정시키며 나에게 물음을 던졌다.

“물론 제정신입니다.”

“겨우 그런 말 한마디 때문에 로열과 싸우겠다고?”

겨우 그런 말이라?

어디 직접 듣고도 겨우 그런 말이라는 소리가 나오는지 볼까?

“어이! 거지새끼. 지금 겨우 그런 말이라고 했냐?”

“무, 뭐라고? 거, 거지새끼라고?”

내가 들었던 말을 조금 돌려주자 광분하기 시작하는 부회장과 한 회장을 보자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나보고는 겨우 그런 말이라고 한 주제에 정작 자신들에게 말을 돌려주자 화를 주체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니 웃음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특히 한 회장은 나를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칠십 먹은 노인네가 이까지 갈면서 분노한 눈으로 노려보는 건 좀 생소한 기분을 느끼게 했다.

“자! 이제 진정을 좀 하시죠. 제가 설마 진짜 로열그룹과 싸울 생각이겠습니까?”

내 말이 들리지 않겠지.

지금껏 단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모욕일 테니까.

부회장은 여전히 흥분상태로 씩씩거리고 있었고 한 회장은 그저 조용히 나를 노려볼 뿐이었다.

“물론 싸우려고 하면 못할 것도 없습니다. 아버지에게 여쭤보니 시간은 좀 걸리겠지만 큰 어려움은 없을 거라고 하시더군요.”

“유…… 회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셨다고?”

아버지의 이야기가 나오자 정신이 번쩍 드는지 반문하는 한 회장이었다.

아버지가 그렇다고 하면 그게 설령 거짓이라도 결국, 진실이 되어 버리니까.

“이제 좀 정신이 번쩍 드세요?”

“크흠-”

헛기침하며 부회장을 보는 한 회장의 눈빛에는 진정하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저는 두 가지의 선택지를 준비했습니다.”

“두 가지? 그중 하나는 우리 로열의 파멸이겠구먼.”

“잘 아시네요.”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한성균. 그 쓰레기를 받았으면 합니다.”

“쓰, 쓰레기라고!”

금방 흥분하는 부회장과는 다르게 한 회장은 조용히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내 손자를 가지고 이미지 장사를 하겠다는 말인가?”

한 회장은 내가 한성균이 저지른 일들에 대해 아는 것이 있는지 확인하듯 물었다.

“오! 그것도 좋은 방법이네요. 하지만 틀렸습니다.”

“그럼?”

처음 생각은 로열그룹 자체를 날려 버리는 거였지만, 지금에 와서는 한성균 그놈만을 노리기로 마음을 바꿔먹었다.

물론 지금 내 앞에 있는 놈들도 쓰레기였다.

모든 사실을 은폐한 건 이놈들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놈들은 좀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아버지와 형이 그러길 바랐으니까.

지금 내 이미지는 정말 좋아진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나서서 로열그룹을 무너트리면 안 좋은 소문이 퍼져 버릴 위험이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지금껏 내가 한 일 중에는 기업과 관련된 일들이 너무 많았다.

제약회사 인수부터 재계 순위 7위인 미래 그룹을 먹어치웠고 4위인 선화 그룹에서 추진하는 사업 나눠 먹기, 마지막으로 로열그룹까지 건드린다?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건드린 기업이 너무 많아 자칫 잘못했다가는 유명이 대한민국을 먹어 치우려 한다는 질 나쁜 소문까지 퍼질 위험이 있었다.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것이 아버지와 형 그리고 전략 기획실의 판단이었다.

다만 그렇다고 아예 손을 놓고 있겠다는 건 아니다.

시간이 좀 더 걸리더라도 부작용이 없는 방향으로 일을 추진한다는 말이었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그들을 보며 섬뜩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입을 열었다.

“쓰레기는…… 태워버려야죠. 존재 자체가 사라질 때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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