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을 정화하는 작업을 계속 이어가고 있던 그때 이상 현상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바로 정령들의 이동.
정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예상하기로는 수아의 존재를 느낀 정령들이 수아를 찾아 이동을 시작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떡하죠? 주변에 정령들의 수가 너무 불어났어요. 길드원들을 더 투입했지만, 여기저기서 계속해서 문제가 발생하고 있어요. 이러다가 길드원 중에 사상자가 생길지도 몰라요.”
“기다려봐. 나도 생각 중이니까.”
지금 이곳에 투입된 길드원들의 수가 오백이 넘었다.
처음 백여 명을 투입했던 것에 비해 5배로 늘어난 수.
문제는 추가 투입을 해도 계속해서 밀려드는 정령들을 막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안 되겠어. 내 소환수들 투입해서 막아야겠어.”
“하지만 그랬다가는 많은 수의 정령들이 소멸할지도 모르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마력을 이용해 정령을 속박하는 방법을 내 소환수들에게 가르쳐 주었지만, 이상하게도 악마종이 아닌 소환수들은 그 방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길드원들만 투입한 이유가 거기 있었다.
특이하게도 소환수들은 정령을 속박한다는 것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싶었으니까.
“왕눈이도 데려와.”
악마종들의 경우 만약을 대비해 유명시와 수아를 지켜야 했기에 함부로 데려올 수가 없었지만, 지금으로써는 왕눈이 말고 해결책이 없었다.
“네?”
“왕눈이가 도착하면 정령들도 함부로 이곳으로 향하지 못할 거야.”
“아! 그러네요.”
그냥 물러나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것은 기회였다.
빠르게 수아의 정령을 늘릴 기회.
거기다 이번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정령을 정화할수록 수아의 마력이 소량이지만 조금씩 늘어나는 걸 생각한다면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수아가 힘들긴 하겠지만, 최대한 빨리 수아의 전력을 늘려놓을 필요가 있었고, 거기다 해야 할 일이 이것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수아의 전력을 충분히 늘린 후 악마종들의 힘을 최대한 불리기 위해 죽음의 땅으로 갈 계획을 세워 놓았으니까.
“현지 너 말고 길드원 보내. 너는 혹시 모르니까 길드원들 도와주러 가고.”
“도련님은요?”
“난 걱정할 거 없어.”
“하지만 지금 도련님 상태가…….”
“수아 덕분에 다 치유됐어.”
“네?”
수아가 정령들을 정화하기 위해 뿜어냈던 마력으로 인해 내 몸 안에 남아 있던 파괴의 마력 역시도 전부 정화가 되어버려 몸이 정상으로 돌아온 상태였다.
아니, 전보다 훨씬 강해진 상태였다.
육탄전으로도 세계랭커란 자들을 가볍게 씹어먹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바로 가.”
“네!”
* * *
왕눈이가 투입된 후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정령들의 움직임이 멈춘 건 아니었지만, 일정 영역 안으로는 들어서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왕눈이는 이 자리에서 멀리 있는 정령들을 한 번에 수십 마리씩 끌고 왔기에 오히려 편해진 감이 있었다.
문제는 내가 생각했던 길드원들의 성장이 조금이지만 막혀 버렸다는 것.
“지금까지 총 몇 개체 정화했지?”
“방금 정화한 것까지 하면 총 257개체요.”
“등급은?”
“음- 최상급 10개체 상급 55개체 나머지 모두 중급이요. 그나저나 아가씨 정말 대단하시네요.”
현지가 말하는 대단하다는 말은 정령의 정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리라.
타락한 정령이 수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 거다.
처음 정령들의 이상을 알아차렸을 때.
수아가 속박당한 정령을 정화하던 중에 S급으로 보이는 정령이 난입한 적이 있었다.
현지가 급히 녀석을 상대하기 위해 나서기 전 일정 거리까지 다가왔던 정령은 마치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는 듯 자리에 멈춰 서서는 수아를 멍하니 보던 모습이 떠올랐다.
그에 녀석을 속박하지 않고 가만히 지켜보란 지시를 내렸는데, 어이없게도 녀석은 정화를 받던 정령들이 모두 정화된 후에 수아에게 다가가 마치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수아를 재촉했다.
공격성을 전혀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빨리 자기도 정화를 해 달라는 것 같은 행동을 보이며.
“걔들이 그냥 알아서 찾아오게 만들어도 되는 거 아니에요?”
“그건 안돼.”
“왜요?”
“혹시 모르잖아. 그중에 수아를 공격하는 개체가 있을지도.”
“그런가?”
현지의 말대로 알아서 찾아오도록 하는 방법을 취할 수도 있었다.
혹여나 수아를 공격하는 개체가 있다 해도 문제없이 처리할 수 있었지만, 수아의 눈앞에서 정령을 처리하는 것은 좀 꺼림칙했다.
거기다 길드원들의 성장을 조금도 기대할 수 없었기에 지금이 딱 좋았다.
내 소환수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전면에 나서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대중들은 아직 내 소환수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아무리 안전해 보인다고 해도 일단 몬스터였기에 사람이라면 누구나 몬스터에 대한 두려움을 품을 수밖에 없었기에 전면에 나서는 것은 길드원들이 되어야 했다.
-위험!
“응?”
“어?”
갑작스럽게 왕눈이로부터 위험이라는 텔레파시를 받은 나는 왕눈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상급 악마종인 왕눈이가 위험하다는 텔레파시를 보낼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위험하다고 한 거야?”
-긍정! 대피!
“어? 어? 이거 뭐야!”
왕눈이의 텔레파시를 받음과 동시에 현지 역시도 이상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왜 그래?”
“피, 피하셔야 해요!”
현지의 말과 동시에 지시를 내리지 않았음에도 왕눈이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도련님! 지금 길드원들 데리고 빨리 피하세요. 저하고 왕눈이가 막고 있을 테니까!”
현지는 그 말을 남기며 사라졌고, 남은 나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아 잠시 멍하니 있었다.
“상무님!”
멀리서 지안이 길드원들과 소환수들을 데리고 급히 이쪽으로 오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무슨 일이야!”
“빨리 들어가세요. 들어가셔서 공간의 문을 닫으셔야 해요.”
“왜?”
“빨리요!”
“일단 너희들 먼저 들어가 있어. 나는 상황 좀 파악할 테니까.”
내 말에 길드원들이 우르르 공간의 문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다만 공간의 문으로 사라지는 길드원들 역시도 영문을 모르는지 얼떨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상무님도 어서 들어가세요.”
“이유를 말해줘야 뭘 하던 할 거 아니야?”
“안 느껴지세요? 지금 이거?”
“뭐가 느껴진다는 거야?”
아무래도 지안의 수준이 정말로 나를 한참 넘어선 모양이었다.
“최소 왕눈이 급은 되어 보이는 존재가 나타났어요. 갑자기요.”
“뭐? 왕눈이 급?”
“그것도 최소라고요.”
최소 왕눈이 급이라고?
솔직히 어이가 없었다.
타락한 대지가 남단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북단도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중앙을 조금 넘어서는 곳이라고 할까?
물론 타락한 대지의 끝에는 어둠뿐인 어둠의 바다가 존재하지만, 상급의 악마종이 출현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아니 전생 역시도 악마종이 출현한 적 자체가 없었다.
설마 저번과 비슷한 놈이 나타난 건가?
“거기! 가서 내 소환수들 전부 보내!”
“네!”
이제 막 공간의 문을 통과하려는 자들에게 지시를 내린 후 나는 현지와 왕눈이가 향한 방향으로 이동하려 했지만, 지안이 막아섰다.
“상무님! 너무 위험해요!”
“어차피 현지하고 왕눈이를 잃으면 똑같아!”
쿠아앙!
내가 소리치는 순간 멀리서 무언가가 폭발하는 듯한 굉음이 들리며 후폭풍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후폭풍에 실려 오는 마력의 잔재를 느낀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끼며 마음을 다잡았다.
“빨리 들어가! 들어가서 내 소환수들 바로 보내고!”
지안이 말한 왕눈이와 같은 급이란 소리.
전에 처리했던 드래곤처럼 힘을 잃은 것이 아니라 추정되었기에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지만, 일단 내 소환수들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려야 될 듯싶었다.
지안의 말대로 너무 위험해 보였기 때문이다.
“소환수들 도착하면 출발할 거야. 그때까지 준비해놔!”
“네!”
지안은 나를 말리는 것을 포기했는지 몸을 풀며 아스트라를 꺼내 들며 마력을 뿜어내 주변에 막을 쳐버렸다.
후폭풍이 계속해서 이곳을 강타했기 때문에.
콰앙- 쿠아앙-
연속적으로 굉음이 터져 나오며 계속해서 후폭풍이 밀려왔지만, 지안 덕분에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충돌음이 엄청났다.
마치 하늘이 무너지기라도 하듯 거대한 소리가 연속해서 터져 나왔기에 현지와 왕눈이가 걱정되어 나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괜찮겠지?”
“네? 네! 왕눈이와 현지라면 충분히 막아낼 거예요. 아마도.”
걱정하며 내 소환수들을 기다리던 그때 공간의 문을 통해 하임이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샤크와 뚱이, 니안, 펜릴, 마귀, 스카가 나타났고 마지막으로 미호가 나타났다.
고블린들은 어비스에 있는 상태가 아니었기에 바로 오지 못한 모양이었다.
“바로 출발하자. 하임!”
“뀨!”
하임은 곧장 우리를 데리고 이동술을 펼쳤고, 이어서 빠른 속도로 이동을 시작했다.
점차 거리가 가까워지자 온몸에 소름이 돋으며 손을 비롯한 전신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고, 두 눈동자의 초점이 흔들리며 가슴속에 공포가 차오르는 걸 느껴야만 했다.
“으, 으으-”
내 소환수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한다는 것조차 잊을 만큼 엄청난 공포가 나를 잠식하는 것을 느낀 나는 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 이를 악물며 몸속의 마력을 끌어올려 마력의 성질을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파괴의 마력으로.
다행히 파괴의 마력이 늘어남에 따라 공포가 사라지기 시작했고, 이어서 파괴의 마력에 의해 공포라는 감정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아니, 감정 자체가 사라져버린 거겠지.’
“괜찮으세요?”
“괜찮아. 그것보다 저거야?”
공포가 사라지고 녀석을 똑바로 바라본 나는 녀석이 타락한 정령의 한 종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십여 미터가 넘어 보이는 크기를 가진 검붉은 색의 타락한 정령.
“네. 그것보다 정말 괜찮으신 거 맞으세요?”
“왜?”
“상무님 표정이…….”
“이상해?”
“네. 엄청 차가워 보이세요.”
“걱정할 거 없어. 저놈이나 처리해.”
내 지시에 소환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펜릴을 타고 날아오르는 지안과 놈에게 성큼성큼 다가가는 뚱이를 비롯한 악마종들.
나 역시 공간확장 주머니에 넣어둔 용의 뼈를 제련해 만든 창을 꺼내 들고 하임과 함께 녀석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도련님!”
50m 정도의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현지가 옆에 모습을 드러내며 나를 불렀다.
“왜?”
“정말 도련님 맞으세요?”
아무래도 파괴의 마력을 너무 많이 변환한 듯했다.
파괴의 마력은 일정 수준 이상을 넘어서면 나를 변화시킨다.
감정과 통증을 없애버리기 때문에 냉정한 판단을 내릴 수 있게 만들고 모든 존재를 하찮게 생각하게 되며 강한 힘을 나에게 선사한다.
다만 너무 위험하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 수준에 맞는 힘이 아니기 때문에 육체가 빠르게 망가져 버릴 위험이 있었다.
거기다 계속해서 힘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해 버릴지도 몰랐다.
정말 큰 문제는 내가 이 사실을 망각해버린다는 거였다.
물론 지금은 아무런 신경도 쓰고 있지 않지만.
“상황이나 설명해.”
“네? 아, 네. 일단 저놈 좀 이상해요. 왕눈이처럼 텔레파시를 보내는 것 같긴 한데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어요.”
“텔레파시라고?”
“네. 일정 영역 안으로 들어서면 머릿속으로 파고드는 의지? 비슷한 것이 느껴지는데, 도저히 알아먹을 수가 없어요.”
“하임. 이동해!”
“뀨!”
하임은 내 말에 따라 이동을 시작했고, 일정 거리에 다가서자 잡음이 머리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왕#@#%
계속해서 같은 텔레파시를 보내는 녀석에게서 알아들을 수 있는 것은 단 하나였다.
왕이라는 단어.
‘녀석도 수아를 찾는 건가?’
타락한 정령들이 수아의 앞에서 하는 행동을 볼 때 수아를 대단한 존재라 생각하는 것 같긴 했지만, 설마 왕이라 생각할 줄은 몰랐기에 왕이라는 단어가 수아를 지칭하는 것이라는 확신은 없었다.
“좀 건방진데? 일단 좀 꿇려놔야겠어.”
내 앞에서 날뛰는 녀석을 보자 건방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눈이를 비롯한 내 악마종들이 녀석을 공격하고 있긴 했지만, 정령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큰 피해를 입히지 못하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물론 왕눈이의 공격은 녀석도 쉽게 생각하지 못하는지 최대한 피하거나 막고 있긴 했지만, 그 외의 악마종들의 공격은 그냥 몸으로 받아내거나 쉽게 막아내는 수준이었으니까.
“네? 건방지다고요? 아니, 그것보다 꿇려 놓겠다니요?”
나는 아무 말 없이 녀석에게 손을 뻗었고 이어서 내 손에서 파괴의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잠시 후.
쿠웅-
내 공격을 눈치챈 녀석이 방어를 위해 힘을 뿜어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십여 미터가 넘는 녀석이 내 마력에 짓눌려 바닥에 처박혀 버렸고 어떻게든 벗어나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벗어나려 하면 할수록 녀석을 더욱 옥죄며 녀석을 천천히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현지를 비롯한 내 소환수들 모두가 당황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가서 수아 데려와.”
“네? 수아 아가씨를 여기로 데려오라고요?”
“그래.”
“하지만…….”
말을 듣지 않는 현지를 보던 내 머릿속에는 이상한 생각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감히 내 명령에 토를 달아?’
현지에게 고개를 돌리자 현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는 흠칫하며 놀라더니 급히 미호를 재촉해 공간의 문을 열고 사라졌다.
마치 거부할 수 없는 명령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상무님?”
나를 부르는 지안에게 고개를 돌리자 지안 역시도 흠칫하고는 한걸음 물러서며 입을 다물었다.
“응?”
순간 입과 코에서 뭔가가 흘러내리는 걸 느낀 나는 그것이 피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겨우 이 정도 힘을 사용한 것만으로 육체가 버티지 못한다는 사실에 짜증이 치솟았다.
“상무님 피, 피가…….”
이어서 코와 입뿐 아니라 눈과 귀에서도 피가 흐르기 시작했고, 그에 놀란 지안은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고는 나에게 다가와 피를 닦아내곤 엘릭서급 포션을 꺼내 급히 나에게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든 나는 포션을 전부 바닥에 쏟아 버리며 지안에게 입을 열었다.
“겨우 이딴 것으로 치료될 거였다면 애초에 이렇게 되지도 않았다.”
“네? 그게 무슨.”
나에게 묻는 듯한 지안을 무시하곤 수아가 도착하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자 공간의 문을 통해 현지가 수아를 안고 나타났다.
“왔네.”
“아, 아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