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이렇게 이동하실 거예요?”
“왜 싫어?”
여정을 함께하던 현지는 지금 상황이 조금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냥 미호의 능력으로 이동하면 중간까지는 금방 갈 텐데 왜 걸어서 가시려는 거예요?”
“그냥 좀 무서워서.”
“무섭다뇨?”
“네 입장에서야 대부분이 너보다 약하기 때문에 크게 신경 쓰이진 않겠지만, 나는 아니잖아. 잘못 걸리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당연히 무섭지 않겠냐?”언제까지고 지금처럼 천천히 이동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조금 여유를 가지고 싶을 뿐.
“그런데 상무님, 애들은 왜 데리고 오지 않은 거예요?”
“그 도시라는 곳에 데리고 들어가지 못할 텐데. 뭐하러 데려와? 거기다 수가 많으면 도망치다 괜한 희생이 생길지도 모르고.”
“맞아요. 그곳에도 악마종을 데리고 다니는 놈들이 있긴 했지만, 다들 좋게 보진 않는 것 같더라고요.”현지에게 듣기로는 마족이라는 놈들은 개개인의 강함에 큰 격차가 있다고 한다.
최하위 마족부터 고위 마족까지.
최하위 마족의 경우 중급 몬스터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고위 마족의 경우 상급 악마종과 비슷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알은 왜 가지고 오신 거예요?”내 등 뒤로 허공에 둥둥 떠서 따라오는 알을 가리키며 현지가 입을 열었다.
“이거? 당연히 부화시키려고 가지고 온 거지.”
“언제 부화가 되는데요?”당연히 나도 모른다.
그저 최대한 빠르게 부화를 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할 생각으로 가지고 온 것뿐이었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 그냥 언제 부화가 될지 몰라서 최대한 많은 마력을 주입하기 위해 이번 여정에 가지고 온 것뿐이야.”그 때문에 지금도 계속 알에 마력을 주입하는 중이었다.
“그런가?”
미호의 능력은 정말 쓰임새가 다양했다.
알을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이유도 미호 덕분이었고, 얼마 전 현지가 가져온 뿔을 제련한 무기들을 가지고 이동할 수 있는 이유 역시도 미호의 아공간 덕분이었다.
만약 직접 가지고 이동했다면, 현지 설명대로 엄청난 수의 악마종이 앞을 가로막았을지도 모르지만, 미호의 아공간 덕분에 그 귀찮음을 피할 수 있었다.
“지안이, 너는 어때? 확실히 변환을 끝낸 거야?”
“90% 정도 변환한 상태에요. 더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현지 말대로 그 이상으로는 변환이 되지 않고 있어요.”
“거봐요. 제 말이 맞죠? 90% 이후부터는 정말 짜증 난다니까요.”
“맞아. 너무 짜증 나. 왜 될 것 같으면서도 안 되는 거야!”얼굴을 찌푸린 지안은 뭐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짜증을 내고 있었다.
‘그나저나 지안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네?’언제나 긍정적이었던 지안이 짜증을 내는 모습은 조금 색달랐다.
“도대체 어떻길래 그러는 거야?”
“엄청 답답해요. 될 듯 말 듯 마치 저를 놀리는 것 같다고요.”
“놀리는 것 같다고?”
“네. 그냥 안 될 것 같으면 그냥 무시라도 하겠는데, 이게 될 것 같은데 막상 해보면 안 된다니까요? 정말 미칠 것 같아요.”무슨 말인지 이해는 갔다.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시도를 해 봤는데 막상 해보면 또 안 되고. 이걸 계속 반복하다 보니 짜증이 난 거겠지.
“나랑은 좀 다른데? 왜 다른 거지?”
“무슨 말이야?”
“나는 그렇지는 않았거든. 너는 여기까지다! 라고 못을 박는 기분이었다고.”
“아닌데? 나는 그런 건 없는데?”지안과 현지의 대화를 듣던 나는 어처구니없는 사실을 깨달았다.
지안이 현지보다 재능이 더 뛰어날지도 모른다는 것.
물론 마나 친화력이 조금 더 뛰어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건 그것과 다른 문제였다.
현지는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강함을 쟁취했지만, 지안 아직 자신의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었다.
‘이거 정말 놀라운데? 설마 이러다 지안이가 현지를 넘어서는 날이 오는 거 아니야?’생각 도중 현지를 힐끔 본 나는 그럴 가능성이 정말 적다는 걸 깨달았다.
한계를 뛰어넘은 현지는 언제 한계를 맞았냐는 듯 지금도 계속해서 강해지고 있었으니까.
그냥 보는 것만으로는 느끼지 못하지만, 현지와 연결된 선에 접촉하면 현지가 계속 강해지고 있다는 걸 분명히 느낄 수 있었는데, 선에 접촉할 때마다 현지를 통해 느껴지는 것들은 다른 소환수들에 비하면 너무 심한 격차를 보였다.
현지가 무의식적으로 느끼는 것들.
따로 집중하지 않은 상태임에도 유명시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를 단 하나도 놓치지 않고 파악할 정도였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영역 역시도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그것도 정말 빠른 속도로.
* * *
“어? 여기부터는 좀 다른 것 같은데?”
“여기에요. 여기서 미호의 분신이 갑자기 사라졌다니까요.”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마치 결계 비슷한 것을 넘어선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 발자국 내딛는 순간 뭔가가 변한 느낌이 들었는데, 마치 이곳과 저곳이 다른 차원인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거의 보이지 않던 어두운 시야도 경계를 넘어서는 순간 시야가 탁 트이며 밝기가 많이 밝아졌기에 여기부터는 지금껏 겪었던 어비스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호야, 분신을 좀 만들어 줄래?”
“끼웅!”
미호의 분신이 나타난 후 나는 분신을 향해 이런저런 명령을 내려보았다.
“어? 정말이네?”
미호의 분신이 경계를 넘는 순간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사라지는 건지 모르겠지만, 미호의 분신은 이쪽에서 저쪽, 혹은 저쪽에서 이쪽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버렸다.
“설마 공간의 문도 안 열리는 거 아니야? 미호야 유명시로 통하는 문 좀 열어볼래?”
“끼웅!”
찌지지직-
“어? 이거…….”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미호가 연 문은 마치 어비스에서 지구로 통하는 문을 열어버렸을 때처럼 불안정한 모습으로 문 안쪽이 새카만 어둠에 물들어 있었다.
“정말 차원이 다른 것 같은데요? 마치 지구와 어비스처럼요.”
“그렇지?”
겨우 한 발자국이었지만, 둘의 차원이 분명하게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음- 이거 확인을 조금 해 볼 필요성이 있겠는데.”그 이후 나는 미호에게 이런저런 지시를 내려보았고, 그 결과 이 경계가 바로 차원의 경계가 아닌가 하는 의심에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지구와 어비스처럼 미호의 능력이 경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경계 밖에서는 유명시와 통하는 문을 열 수 있었지만, 안에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경계를 넘어서지 않는 한은 분신이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음- 미호야 여기를 꼭 기억해 둬. 알았지?”
“끼웅!”
“일단 이곳에서 휴식을 좀 취한 후에 이동하자. 현지 너는 최대한 약한 놈을 찾아둬.”
“네!”
현지의 대답을 들으며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은 나는 눈을 감으며 경계를 넘는 순간부터 느껴지는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명상에 들어갔다.
흥분, 희열, 분노.
세 가지의 감정이 뒤섞여 나를 혼란스럽게 하고 있었기에 급히 마음을 다스리기 위한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안정시키는 것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마족이란 존재와 가까워질수록 이럴 거라 예상은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더욱 감정이 격하게 날뛰었기에 감정의 근원을 찾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나는 감정을 타고 정신을 이동시키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흔드는 감정이 어디서 흘러나오는 것인지 발견할 수 있었다.
내 의지를 막아서는 특이한 벽.
‘이건 뭐지? 내 정신 안에 나조차도 들어가지 못하게 막는 정신 방벽이 존재한다고?’분명 나를 막아서는 눈앞의 벽 안쪽에서 감정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내 정신조차 차단하는 벽의 틈새에서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것을 확인한 나는 그곳으로 이동했고, 아주 작은 구멍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대체 이 안쪽에 무엇이 있는 거지?’그때였다.
틈을 확인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한 순간.
나는 이상한 곳으로 와 있었다.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순백의 공간.
‘여기가 어디지?’
처음 겪어보는 특이한 상황에 당황한 것도 잠시 나는 주변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돌렸고, 그것을 발견했다.
‘넌…… 뭐야?’
‘너의 물음에 대답할 생각은 없다.’나와 똑같이 생긴 존재가 무표정을 유치한 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뭐?’
‘벌써 여기까지 도달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바보는 아니었던 모양이야. 아니, 이건 내 실수인가?’‘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돌아가라. 나를 만나기에는 너의 성장이 지나치게 부족해. 나를 만나고 싶다면 더욱 강해져라.’뜻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나와 똑같이 생긴 녀석에게 궁금한 것을 다시 물어보려던 그때, 이상한 기억들이 나에게 흘러들어오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처음 보는 존재들이 내 앞에 무릎을 꿇으며 충성을 맹세하고 있는 기억.
수를 헤아리지 못할 정도의 엄청난 수의 존재들이 끝을 모르고 길게 뻗어있었고, 그들의 충성심이 기억을 타고 새어 나올 정도로 나를 강하게 자극했다.
‘이런! 돌아가라! 아직은 때가 아니니!’계속해서 이상한 기억을 받아들이던 중, 놈의 의지가 나에게 전달되었고, 그 순간 나는 원래 있던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벽이 있던 그 장소로.
‘도대체 그놈은 뭐고 이 기억들은 또 뭐지? 어째서 이런 기억들이 내 정신에 깃들어 있는 거냐고!’아무리 생각해 봐도 알 수 없는 사실들.
전생과 현생의 기억 중 내가 알지 못하는 기억이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조금 전 나에게 흘러들어온 그 기억들은 단연코 있을 수 없는 기억들이었다.
그것들이 뭐길래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던 것일까?
도대체 기억일 뿐인 것들 속에 어떻게 내 감정이 아닌 다른 존재의 감정이 스며들어 있을 수 있는 건지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 그러고 보니 새어 나오던 감정들이 모두 사라졌네?’벽에서 새어 나와 나를 자극하던 감정들이 모두 사라진 것을 느낀 나는 벽의 틈을 확인하기 위해 벽을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그 어디서도 틈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욱 견고해진 것처럼 보이는 꽉 막힌 벽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후우-”
다시 그곳으로 들어갈 방법을 찾지 못한 나는 결국 정신을 일깨우며 참았던 숨을 뱉어냈고.
“너네 뭐 하냐?”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현지와 지안을 발견할 수 있었다.
“도, 도련님 괘, 괜찮으신 거 맞으시죠?”
“왜? 무슨 일 있었어?”잔뜩 겁먹은 모습으로 말을 더듬는 현지.
현지와 같은 표정으로 현지의 등 뒤에 숨어 고개만 살짝 내밀고 있는 지안과 그녀의 어깨로 자리를 옮긴 미호.
“지, 지금 뭐 하신 거예요?”
“뭘? 나 그냥 명상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조금 전에 도련님에게 무시무시한 마력이 뻗어 나왔었다고요!”
“나한테? 그럴 리가?”
“정말이라니까요? 주변을 한 번 보시라고요!”현지의 말에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라야만 했다.
“이, 이게 뭐냐?”
나를 중심으로 거대한 크레이터가 만들어져 있었다.
지름이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거대한 크레이터가.
“도, 도련님이 이렇게 만든 거라고요. 그것도 순식간에요. 갑자기 엄청 소름 끼치는 마력을 뿜어내더니 단숨에 이렇게 만드셨다고요! 만약 저희가 피하는 게 조금만 늦었으면 다 죽었을지도 모른다고요!”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라곤 그 이상한 공간에 다녀온 것이 전부였으니까.
“현지, 너도?”
“그럼 저라고 다를 줄 아세요? 그 소름 끼치는 힘 앞에서는 누구라도 목숨을 부지하기 힘들다고요. 제가 지금보다 10배는 강해진다고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 자신할 수 없을 정도로!”
“하, 하하하. 미안!”나도 어떻게 된 영문인지 몰랐지만, 일단 사과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음-”
“왜 그러세요?”
현지와 지안에게 사과를 했지만, 지금 나의 관심사는 그것이 아니었다.
명상에서 깨어난 후부터 느껴지기 시작한 기운들.
그것도 정말 멀리 떨어져 있는 기운들이 느껴지기 시작했기에 조금 황당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설마?
“음- 잠깐만.”
고개를 갸웃거리며 묻는 지안의 입을 막은 나는 이어서 마력을 끌어올려 보았다.
“오- 역시!”
“어? 담을 수 있는 마력이 늘어나신 거예요?”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물론이죠. 도련님이 지금 몸에 담고 있는 그 소름 끼치는 마력의 양이 그걸 증명하잖아요.”나는 명상 전과 많이 달라진 상태였다.
육체에 담을 수 있는 파괴의 마력의 양이 두 배 이상 증가한 것.
물론 1%가 2% 정도로 변한 정도일 뿐이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수준이었다.
아무래도 그 이상한 공간에 발을 들인 효과가 아닌가 했다.
갑작스럽게 변할 이유가 그것 말고는 없었기 때문이다.
강해졌다는 기쁨도 잠시 나는 마냥 좋아할 수만은 없다는 걸 깨달아야 했다.
도대체 그 장소, 그놈, 그 기억이 무엇이길래 단숨에 나를 이렇게 강하게 만들 수 있었을까?
특히 그놈.
그놈이 나를 보던 눈빛에는 무시라는 감정이 담겨있었다.
물론 마지막에는 조금 짜증을 내는 것 같긴 했지만, 시작은 무시였다.
“현지야, 너 혹시 또 다른 자아 같은 거 만난 적 있냐?”
“또 다른 자아라뇨? 그게 뭐예요?”고개를 갸웃거리며 오히려 되묻는 현지는 내 말의 뜻이 감조차 잡히지 않는 모양이었다.
“상무님, 혹시 해리성 장애 같은 걸 말하는 건가요?”
“해리성 장애가 혹시 이중인격 같은 걸 말하는 거라면 그건 아닌 것 같아.”이중인격과 비슷해 보이긴 했지만, 또 그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게 머릿속으로 그놈을 떠올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상하게도 나 자신이었던 것 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그 순간에 느꼈던 놈에 대한 감상은 나와 똑같이 생긴 놈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또 달랐다.
그놈조차 나였던 것 같은 기분.
제대로 된 설명이 되지 않을 정도로 뭐가 뭔지 모르겠다.
‘뭐지? 왜 점점 그놈이 나인 것 같지?’그냥 잠깐 돌았었다고 생각하면 될지도 모르지만, 이건 그렇게 쉽게 넘어가서는 안 될 문제였다.
내가 했음에도 아무런 기억이 없는 일들.
수호자급 정령을 굴복시켰던 그때의 기억이 없는 이유가 그놈이 한 일이기 때문이라면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일단 출발하자.”
“네? 괜찮으시겠어요?”현지는 내가 혼란스러워한다는 걸 눈치챘는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지만, 나 역시 생각이 있었다.
그곳에 다시 들어가 보면 분명 뭔가 반응이 있으리라.
정신 방벽의 틈으로 또다시 감정이 새어 나오는 것을 포착해 다시 그곳에 들어가 어떻게서든 방법을 찾는 거다.
또 쫓겨날지도 모르지만, 최대한 버티며 조금이라도 더 많은 기억을 받아들이며 그놈에 대한 실마리를 찾는 것.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