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쟤가 백작이라고?”
“그런가 봐요.”
내 물음에 대답한 지안과 아무 말 없이 멍한 표정으로 백작이라 생각되는 존재를 바라보는 현지.
“마, 말도 안 돼! 백작이라며! 500살이라며!”`갑자기 현지가 절규를 내질렀다.
생각했던 백작의 모습과 너무나 다른 모습 때문에.
내 앞에서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는 백작이라 소개한 존재는 어이없게도 어린아이였다.
그것도 수아 또래로 보이는 여자아이.
500살은커녕 10살도 되어 보이지 않는 아이는 커다란 눈동자에 눈처럼 흰 피부,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트린 아주 귀엽게 생긴 아이였는데, 그것이 바로 백작의 정체였다.
“얘랑 어떻게 싸우라고요? 무슨 아동 학대도 아니고 이런 꼬맹이랑 싸우라니…….”`잔뜩 기대했던 현지는 지금 절망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멀뚱멀뚱 나를 보는 백작이란 애 때문에.
“근데 좀 심한 거 아니야? 500살이라며? 근데 왜 저런 모습인 거야? 아니 그것보다 저 조그만 뿔만 빼면 그냥 어린 여자앤데?”`-군주님이야?
그때 아이에게서 의념이 새어 나왔다.
나를 보며 군주냐 묻는 의념이었지만, 이상하게도 그 목소리까지 들리는 듯했다.
-그렇다! 백작이여. 어서 무릎을 꿇고 군주님을 맞이하라!
저 새끼는 상황 판단이 그렇게 안 되나?
마일이는 마치 자신이 군주라도 되는 양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의념을 보냈는데, 그 모습을 본 나는 한 대 패주고 싶다는 생각이 무럭무럭 샘솟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어야 하는 거야?
-감히 백작 따위가 군주님께 그 무슨 말버릇이란 말이냐!
-그럼 어떻게 말해야 하는데?
-이, 이녀언!
“그만!”
이대로 가다간 정말 저 조그만 어린아이가 무릎을 꿇으며 땅에 머리를 박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마일이를 말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저 아이는 인간이 아니었고, 500살이라는 나이가 있긴 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그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아동 학대를 하는 것 같았기 때문에.
“상무님. 500년이나 살았는데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 같을까요?”`“나도 의문이다. 왜 그런지.”`-그건 제가 설명 드리겠습니다.
나와 지안의 대화를 듣던 마일이 그 이유를 아는 듯 보였기에 설명해 보라는 듯 고개를 끄덕여 주자 마일이 설명을 시작했다.
-수면기 때문입니다. 보통 귀족으로 태어나는 마족들의 경우 일반 마족들과 다르게 수면기가 조금 더 긴 편입니다.
“수면기? 그게 뭔데?”`-수면기를 모르십니까?
어째 모르냐는 말을 자주 듣는 것 같았다.
“설명이나 해라.”
-알겠습니다. 수면기란 마족이 태어난 후 육체가 마력에 적응하는데 필요한 시기를 말합니다. 보통 일반 변종 마족의 경우 수면기가 10년에서 50년 사이인 것과 다르게 귀족인 오리지널의 경우 수면기가 최소 100년이라는 시간이 걸립니다.
“100년? 그럼 400년은 깨어 있었다는 거 아니야?”`-그것은 최소로 잡은 기간입니다. 보통 150년에서 200년 사이가 오리지널의 평균 수면기입니다.
150년이든 200년이든 500년에 비하면 적은 시간이었기에 마일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저 백작의 경우 특이하게도 깨어난 게 비교적 최근이라…….
“그게 무슨 말이야?
-깨어난 지 10년도 되지 않았습니다는 말입니다.
”10년? 그럼 수면기가 500년이나 된단 말이야?
-네.
허 참! 남들은 길어야 200년인 수면기를 두 배 이상 길게 잠들어 있었다는 말이야?
“이유가 뭔데?”
-너무 강한 마력을 가지고 태어나는 바람에 육체가 마력에 적응하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 그 이유입니다.
재능이 어마어마하다는 말인가?
“그럼 앞으로 엄청 강해질지도 모른다는 말이네?”`-그렇습니다. 각성에 성공하기만 한다면 높은 계급의 귀족들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굉장한 존재가 될 수 있을 가능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망해버린 영지를 떠나지 못하는 마족들이 존재하는 것이고요.
“그러니까 자신들을 완벽히 지켜줄 수 있는 강한 마족의 탄생을 기다리는 놈들이 영지 내에 많다는 말이네?”`-그렇습니다.
이건 기회였다.
만약 지금 저 아이를 내 지배하에 둔다면 후에 각성하게 되었을 때 엄청난 존재를 얻을 수 있을 최고의 기회.
-집사야, 군주님이 이상한 말을 하는데 너는 알아들어?
-저, 저도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입니다.
마일의 경우 이미 내 지배하에 들어왔기에 대화가 통했지만, 나를 이곳으로 안내한 마족과 백작은 알아듣지 못하는 상태였다.
“어떻게 하실 거예요?”`“지금 이건 기회나 다름없잖아. 어떻게서든 지금 지배를 해 둬야지.”`“음- 그럼 저 싸워요? 저 어린애랑?”`“아니. 일단 살살 구슬려 볼 생각이야.”`“그러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아기랑은 도저히 싸울 수 없을 것 같거든요.”`현지는 마음의 가책이라는 것이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물론 백작이라는 저 조그만 아이가 먼저 덤빈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도저히 손을 데기가 어려운 모양이었다.
-얘야, 혹시 이름이 뭐니?
-레이시스 뷔 펠클라인인데, 백작이라 뷔는 쓰면 안 된대요. 집사는 레이 님이라고 불러요.
-그럼 레이라고 불러도 될까?
-응!
내 물음에 밝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레이에게 수아가 겹쳐지며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래, 레이야. 혹시 내 부탁을 좀 들어줄래?
-부탁? 무슨 부탁인데요?
-별건 아니고. 내가 저곳에다 문을 하나 만들 건데 그곳을 통과하기만 하면 된단다.
-문이요?
손가락을 입에 물며 고개를 갸웃하는 레이는 너무 귀여웠다.
깨물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족이 맞는 건가? 어째서 행동 하나하나가 이렇게 인간이랑 비슷할 수 있지?
-잘 보렴.
마음을 가라앉힌 나는 이어서 거대한 방 한쪽에 균열을 만들어 냈다.
-우와! 정말 문이 나타났다!
-혹시 저 안에 들어가 줄 수 있겠니?
-응!
고개를 끄덕인 레이가 조그만 다리를 움직여 균열로 다가가려던 순간.
-기, 기다려 주십시오. 레이 님!
지금껏 상황을 조용히 지켜보기만 하던 마족이 레이를 급히 말리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레이를 말리는 녀석의 두 눈에 들어차 있는 의심을 발견한 나는 현지에게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왜 그래? 나 군주님 부탁을 들어줘야 하는데?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뭔데?
언제든 나설 수 있게 자세를 잡는 현지를 보며 일단 기다리란 눈빛을 보낸 나는 녀석이 입을 열기를 기다렸다.
-군주님께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놈이 돌았구나! 감히 너 따위가 뭐라고 군주님께 함부로 입을 여느냐!
또다시 나서는 마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마일이 한 걸음 물러나야만 했다.
집사가 마력을 끌어올려 마일을 압박했기 때문에.
-크윽!
-군주님 제 질문을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말해.
-제가 알기로 저것은 균열이라 불리는 현상이라 알고 있습니다.
균열을 안단 말이야?
지구에 나타났던 균열은 분명 이곳과 연결되지 않았다고 생각하던 중이었기에 집사의 물음은 나를 조금 당황시켰다.
-맞아. 균열이지.
-저것을 통과하면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닌지요?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내가 만들어 낸 것은 좀 달라. 저건 통과한다고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는 건 아니니까.
-그 말씀은 저것을 통과해도 다른 차원으로 이동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맞아. 보여줄까?
집사의 물음에 거짓을 말할 필요는 없었다.
그냥 있는 대로 이야기해도 그의 의심을 풀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해 주시겠습니까?
-알았어. 미호야!
순간 내 어깨에 앉아서 상황을 지켜보던 미호가 훌쩍 뛰어올라 균열을 통과해 반대편으로 나왔고, 이후 다시 내 어깨로 뛰어올라 자리를 잡았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뭐 또 궁금한 것 있어?
이건 이미 예전에 확인했던 사실이었다.
이미 나에게 지배당한 소환수는 내가 만든 균열을 아무렇지 않게 통과할 수 있다는 걸.
-그, 그게 어째서 레이 님에게 저 균열을…….
집사는 현지가 뿜어내기 시작한 기운을 느껴버렸는지 겁을 먹은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가지 못했고.
-통과시키려 하냐고? 그거야 백작을 지배하기 위해서지. 저렇게 해야 부작용이 없거든.
-부, 부작용 말씀입니까?
-그래. 그냥 내 지배를 걸면 가끔 정신이 부서지는 경우가 있거든.
개뻥이었다.
그냥 지배를 거는 방법도 모를뿐더러 지배당한 존재가 정신이 부서진 경우는 더더욱 없었으니까.
-정신이 부서진다니? 그, 그런 걸 저희 백작님께…….
-왜 싫어? 하지만 이건 나도 어쩔 수 없거든? 너희들을 믿기 위한 방법이 이것뿐이라서 말이지. 그리고 또 다른 이점도 있고 말이야.
-또 다른 이점이라 하시면?
-그건 말이야. 음- 직접 보여주지. 아까 다 내보냈던 시녀 중 하나만 데리고 들어 와봐.
-아! 알겠습니다.
내 지시에 집사는 빠른 걸음으로 이동해 밖에서 대기하던 시녀 중 하나를 데리고 들어왔다.
마일과 비슷한 수준의 마족.
집사보다는 키가 큰 편이었지만, 마일보다는 작은 여성 마족.
-저 안에 들어가 볼래?
-그, 그게…….
내 지시에 여성 마족은 겁을 잔뜩 먹은 표정으로 벌벌 떨기 시작했다.
-걱정할 거 없어. 아무런 문제는 없을 테니까.
안심시키려 해봤지만, 태도가 변하지 않는 여성 마족.
-뭐 하느냐! 지금 군주님의 말씀을 거부하려는 것이냐? 당장 들어가지 못할까!
‘뭐야? 이놈 왜 이래?’`집사의 태도가 조금 변했다.
지금껏 나를 믿지 못하는 행동을 보이던 녀석이 갑자기 시녀에게 호통을 치는 모습.
그에 시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체념한 듯 균열로 향하기 시작했다.
균열의 앞에 도착한 시녀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벌벌 떨던 도중.
“에잇!”
시녀의 뒤에 나타난 현지가 그녀를 밀어버렸다.
“꺄악!”
‘뭐야? 의념이 아닌 소리도 낼 수 있었던 거야?’`비명을 터트리는 시녀의 목소리를 들은 나는 솔직히 조금 어이가 없어졌다.
지금껏 만났던 마족
중 그 누구도 육성으로 소리를 내는 것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어? 이런!’
시녀가 균열에 닿는 순간부터 조금씩 빠져나가던 마력이 서서히 양을 증가시키더니 이내 막대한 양의 마력이 한순간에 빠져나가 버렸다.
정신력 역시 마찬가지.
머리가 지끈거리며 정신력이 소모되는 것을 느낀 나는 필사적으로 고통을 참아내며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했다.
군주라는 자가 겨우 시녀 하나를 지배하는 데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응? 가, 강해졌어!
균열을 완전히 통과한 시녀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 갑자기 소리쳤다.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시녀의 힘이 늘어난 것.
-이, 이럴 수가? 성장이 끝난 마족이 강해지다니?
집사의 말이 정확히 무슨 소리인지 알 순 없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놀랄만한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어때? 이래도 내 말을 못 믿겠나?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군주님을 의심한 죄 소멸로 대가를 치르겠습니다!
-멈춰!
와! 시발 깜짝 놀랐네.
말을 마친 집사가 순식간에 마력을 끓어 올리더니 자신의 머리통을 날려버리려는 모습에 급히 외쳐야만 했다.
-이번 한 번은 용서해주도록 하마. 너의 의문은 당연한 것이니까.
-군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군주님께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집사와 함께 무릎을 꿇는 시녀.
둘 다 나에게 충성을 바치는 모습에 흐뭇해진 나는 이 기회에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시녀를 보며 의념을 보냈다.
-이제부터 너의 이름은……. 음- 뭐가 좋을까?
이름을 지어주려던 나는 딱히 떠오르는 이름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침묵해야만 했다.
지금껏 이름을 너무 대충 지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그동안의 내가 너무 소환수들에게 무심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뚱이, 왕눈이, 니안, 샤크, 하임, 모두 그냥 있는 대로 이름을 지어준 거였다.
펜릴의 경우 전생에 그렇게 불렸기에 그나마 괜찮은 편이었지만, 나머지는 정말 대충 지었다는 것이 티가 날 정도로 허접한 이름이었다.
특히 뚱이나 왕눈이.
‘이름이 그게 뭐야? 무슨 개 이름도 아니고.’`아니, 요즘은 개 이름도 그렇게 짓지 않았다.
“생각 안 나시면 셰인 어떠세요? 제가 좋아하는 만화책 주인공 이름인데?”`“괜찮은 것 같은데? 잠깐 만화책? 설마 그 주인공이 메이드야?”`“뭐 어때요? 쟤도 메이드나 다름없는데.”`
“어? 그러네.”
생각해보니 내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기다리는 시녀 역시도 메이드와 다를 게 없었다.
아니, 메이드 그 자체였다.
-너의 이름은 지금부터 셰인이다!
순간 내 육체에 잠들어 있던 마력이 절로 파괴의 마력으로 변환되며 셰인에게 흘러 들어갔고, 이어서 셰인의 진화가 시작되었다.
-지, 진명을 하사하시다니! 이런 영광이!
그 모습을 확인한 집사는 환희의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내가 집사 자신에게 이름을 하사할 생각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변했지만.
물론 집사 역시도 지배할 예정이었고, 이름 역시 지어줄 생각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력 소모와 정신력의 소모가 컸기 때문이다.
이대로라면 레이를 지배하는데 차질이 생길지도 몰랐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나도! 나도 할래요!
레이가 양손을 번쩍 치켜들며 균열로 달려가는 모습이 시야에 포착된 순간 깜짝 놀란 나는 급히 균열을 닫아버렸다.
이대로라면 지배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한다면 나를 의심하는 상황이 올지도 몰랐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어? 없어졌어!
-레이야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내가 급한 일이 생겨서 말이야.
-히잉! 알았어요.
살짝 삐진 듯 보이는 레이였지만, 그 모습도 정말 귀여웠다.
“야! 일단 좀 쉬어야겠다. 피곤하네.”`-이쪽으로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어느새 진화를 끝낸 셰인이 나를 안내했는데, 생각했던 것보다 큰 변화가 그녀에게 일어나 있었다.
집사보다 작아진 키와 더욱 길어진 뿔.
거기다 전보다 외모가 더욱 아름다워진 모습.
뭐라고 해야 할까? 민얼굴과 화장했을 때의 얼굴 정도의 차이라고 할까?
변한 것은 얼굴뿐만이 아니었다.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만큼 작았던 가슴이 조금 더 봉긋해지며 몸매 역시도 좀 더 여성스럽게 변한 상태였다.
“와! 무슨 전신 성형을 한 것도 아닌데 외모가 저렇게 변하냐?”`“그러게? 나도 저기 들어갔다 나오면 더 이뻐지려나?”`그에 지안과 현지가 살짝 질투하는 것 같았지만, 둘의 외모에 비하면 셰인은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심한 차이를 보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