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배한 마족은 집사의 지시를 잘 따랐는데, 아무래도 이게 마족들의 방식인듯했다.
패자는 말이 없는 법 같은?
아무튼, 그렇게 집사와 시녀들이 녀석을 끌고 사라졌고, 남은 나와 레이 그리고 현지는 방으로 돌아와 잠시간의 대화를 나눴다.
“스트레스 확 풀리네!”
“근데 현지야? 이건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왜 스트레스가 풀려?”
“강자와의 전투는 언제나 즐겁거든요!”
강자와의 전투라?
아무리 생각해도 치열한 전투였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에 좀 어이가 없었다.
“내가 보기엔 너보다 많이 약한 녀석 같았는데 도대체 어디가 강자와의 전투라는 거야?”
“물론 조금 더 강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반항을 했잖아요.”
“반항?”
“네. 상대의 반항이 거세면 거셀수록 재밌는 법이거든요!”
‘이게 무슨 소리야? 그럼 전투가 좋은 것이 아니라 상대를 괴롭히는 것이 좋은 거란 말이야?’
조금 전 현지의 말은 악당들이나 하는 멘트였다.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삼류 악당들이 반항하는 상대를 괴롭히며 즐기는 것이 자주 나왔는데, 지금 현지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너 정신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야?”
“아닌데요? 저 멀쩡한데요?”
현지가 멀쩡하다는 의견에는 찬성하지 못하겠다.
분명 얼마 전, 그러니까 천마와의 전투가 있기 전에는 그렇게 심각하다고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전투 후 깨어난 현지는 성격이 특이하다고 할 정도까지 변해 버렸기 때문에 요즘 현지를 보면 걱정이 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마 친한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친분이 별로 없던 사람들이나 아예 친분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싸가지가 없다고 해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변해 버린 상태였다.
분명 그 전까지의 현지는 친절하다고는 못해도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는 편이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길드원들이나 유명과 관련되어 일하는 사람들과 인사 정도는 하며 지내던 현지가 그때를 기점으로 그들의 인사를 무시로 일관하거나 그들의 시선을 무시로 일관하기 시작했기에 조금 걱정이 되던 마음이 들었었는데, 조금 전의 이야기에서 확실히 현지의 생각 자체가 변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내가 네 성격을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고치는 게 좋을 거야. 특히 그 손이 먼저 나가는 버릇은 꼭 고치도록 해.”
“에이~ 그건 마족에게나 그러는 거죠. 사람들에게는 안 그래요.”
현지의 성격을 가지고 뭐라고 할 처지는 아니었기에 더는 이야기하지 않겠지만, 이 문제에 대해서는 내 탓이라 생각하고 있었기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내 마력을 받아들인 후유증이라고 해야 할까?
분명 파괴의 마력이 현지에게 어떠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이 틀림없었기에 문제가 더 커지지 않도록 방법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나저나 너 어떻게 능력을 더욱 진화시킨 거야?”
“그거요? 별거 아니에요. 그냥 은신의 방법을 바꾼 거예요.”
“방법을 바꾸다니?”
“그전까지는 마력을 이용해 기척을 숨기고 모습을 감췄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거든요.”
“어떻게 다른데?”
“음- 다른 공간에 숨었다고 하면 될까요?”
다른 공간이란 말이 의미하는 것이 뭘 뜻하는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다른 공간이라니?”
“저도 수련을 하다가 발견한 거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는데 이상한 것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틈이라고 할까요?”
“틈이라고?”
“네. 공간의 틈새? 차원의 틈새? 어느 순간부터 그런 것이 보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그냥 무시했거든요? 근데 이게 계속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한번 들어가 봤죠. 도대체 뭐길래 자꾸 걸리적거리나 해서.”
들어가 봤다고?
이건 겁이 없는 거야? 아니면 순진한 거야?
“그러다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걱정하실 거 없어요. 저도 확인해 보고 들어간 거니까. 아무튼, 그곳에 들어가 보니까 알 수 있겠더라고요. 그곳이 이곳과는 전혀 다른 공간이라는 것을요.”
“어떻게 다른데?”
“음- 차원과 차원 사이에 존재하는 틈새라고 하면 비슷하려나?”
차원의 틈새라니?
솔직히 말해 무슨 말인지 하나도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 지금 해봐. 직접 느껴보게.”
“아! 그러면 되겠구나.”
마족과의 전투에서는 선을 통해 현지의 위치만을 파악했다면 이번에는 현지와 완전히 접촉해 현지의 감각을 직접 느껴볼 생각이었다.
현지가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을 확인한 나는 곧장 현지와 연결된 선에 정신을 집중해 현지에게 접촉했고, 이어서 현지가 말한 차원의 틈이라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대충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 역시 설명할 수 없었다.
그냥 이런 것이 있구나 하는 정도로만 파악할 수 있었는데, 정말 황당한 느낌이었다.
뭐랄까? 마치 영혼이 되어버린 느낌?
육체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는 이상한 감각에 소름이 끼치면서도 몸이 한없이 가벼워진 듯한 날아갈 것만 같은 이상한 감각.
‘그런데 이 상태로 어떻게 공격을 한 거지?’
내가 느끼기로는 현지가 있는 곳과 이곳은 정말 별개의 공간이나 다름없었다.
현지가 있는 곳에서는 절대 이곳의 존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을 것 같았기에 그때 마족을 베어버린 현지의 공격이 어떻게 이루어졌는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거기서 어떻게 공격을 한 거야? 아무리 생각해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내 물음이 끝나는 순간 허공이 찢어지며 무언가 나타났는데.
바로 마력이 잔뜩 실려있는 단검이었다.
“이렇게 공격한 거죠.”
단검과 함께 다시 모습을 드러낸 현지.
“설명해 봐. 나는 그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으니까.”
그곳에서 내가 느낀 대로라면 저런 것은 불가능해야 맞았다.
자신의 육체조차 느껴지지 않는데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하단 말인가?
“별거 아니에요. 저는 공격하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이건 가능하거든요.”
“그게 무슨 소리야?”
“사실 저도 이유는 잘 몰라요. 그냥 제 몸이 아닌 단검이나 다른 물건들 같은 경우 마력을 주입하면 그곳에서 잠시 벗어난다는 것만 알아요.”
저 말은 생명이 없는 물건의 경우 마력이 주입되면 그 공간에서 빠져나온다는 말이었는데, 솔직히 이게 무슨 말도 안 되는 경우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잠깐만? 그럼 너는? 아무도 너를 직접 공격하지는 못한다는 말이야?”
“음- 그건 아닐걸요? 차원 자체를 베어버리면 저도 무사하지 못할 테니까요.”
차원 자체를 베어버릴 수 있는 존재가 있기나 할까?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극소수만이 가능할 거다.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네? 너는 그곳에서 누구라도 공격할 수 있지만, 너를 공격하지는 못한다는 말이니까.”
“그렇긴 한데. 저도 거기서 오래 버티지는 못해요.”
현지의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내가 느끼기에도 그곳은 정말 오래 있을 만한 곳이 아니었으니까.
자칫 잘못했다간 자아를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공허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버틸 수 있는데?”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 사실 저도 확인을 안 해봐서 얼마나 가능한지는 잘 몰라요.”
“한 시간만 버틸 수 있다고 해도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겠는데?”
이기지 못할 상대라는 판단이 들면 자리를 피하면 그만이었다.
한 마디로 항상 이기지는 못하지만 절대 지지도 않는다는 말이었다.
‘어째 이건 가면 갈수록 더 괴물이 되어가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현지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나에겐 좋은 일이었으니까.
* * *
-누가 보냈어?
패배한 마족.
그는 이름이 있는 마족이었다.
룩산이라는 진명을 가진 마족으로 군주가 아닌 대공이라는 자에게 진명을 하사받은 최상급 마족이었다.
특이하게 군주가 아닌 대공 역시도 진명을 하사할 수 있었는데, 군주와 다르게 진명을 받는다고 해도 특별히 강해지지는 않는다고 한다.
그저 명예를 얻을 뿐.
-대공가에서 보낸 자가 틀림없습니다. 대공에게 직접 진명을 받았다는 것은 그의 소속이 대공가라는 말과 다르지 않으니까요.
“혹시 모르잖아. 대공가를 나왔을지도.”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진명을 하사받은 존재는 절대 주인을 배신할 수 없으니까요.
“대공이 진명을 하사하는 것은 그냥 명예라며?”
-그것뿐만이 아닙니다. 더욱 강해지지는 않지만, 구속력은 가지기 때문에 배신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집사의 설명에 조금 황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도대체 이득이 뭐야?
강해지지는 않지만, 구속력을 가진다?
그냥 노예계약과 다르지 않아 보였기에 좀 어이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진명을 왜 받는 거야? 아무런 이득이 없잖아?”
-네? 진명을 받는다는 것 자체가 이득입니다. 특별히 강해지지 않는다고 해도 진명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명예로운 일이니까요.
어이가 없었다.
그놈의 명예가 뭐길래 노예를 자처한단 말인가?
-이봐! 도대체 지금 뭔 소리를 지껄이는 거야?
-닥쳐라! 이놈! 이분이 누구신지 알고 감히 너 따위가 말을 함부로 하느냐!
룩산이 나를 보며 의념을 보내자 집사가 흥분해 녀석의 멱살을 잡으며 살기를 드러냈다.
-허! 누가 보면 군주님이라도 되는 줄 알겠군.
-이, 이놈이!
“그만해. 일단 이놈이 이곳에 온 이유나 좀 알자고.”
-알겠습니다!
놈이 실패했다는 사실을 알고 대공이 이대로 체념을 하면 좋겠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었다.
물론 현지의 성장으로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겠지만, 그것도 당분간일 뿐이었다.
보호 기간이 끝나는 순간 대공이라는 녀석이 어떤 짓을 저지를지 몰랐기 때문이다.
주변 영지를 부추겨 이쪽을 공격할지도 몰랐고, 직접 군을 보낼지도 몰랐기에 지금으로서는 대공의 생각을 파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대공이 보낸 건 확실한 것 같으니 물어볼게. 도대체 대공의 생각이 뭐야?
-네놈이야말로 말을 조심해라. 너 따위가 감히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분이 아니다!
-이놈! 네놈이 죽고 싶어 환장했구나! 감히 이분이 누구신 줄 알고 그따위 망발이냐!
‘이것들은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호칭 하나로 왜 이렇게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다.
저놈이야 내가 누군지 모르니 저렇게 말하는 건 당연한 거였고, 오히려 비밀을 지켜야 하는 집사가 저러면 안 되는 거였다.
-저놈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대공님만 하겠느냐?
-어디 대공 따위를!
-뭐라? 대공 따위라고! 이놈이 정말 뭐라도……?
순간 룩산의 의념이 끊기며 나에게 고개를 돌렸고, 그에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으며 룩산을 보는 집사.
‘설마 이걸 원한 거였어?’
집사가 설마 이런 식으로 나를 알리려 할 줄은 몰랐기에 잠시 당황하던 그때 룩산에게서 다시 의념이 터져 나왔다.
-크하하하하! 이놈! 네놈이 지금 나를 놀리는 것이냐? 설마 저놈을 군주님이라 할 생각이었더냐? 네놈은 내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느냐? 대공님의 성이 바로 군주님의 성이거늘 어디 감히 거짓을 말하느냐?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놈이 집사의 생각과는 다르게 반응했기 때문에.
-흥! 네놈이 군주님을 직접 뵙기라도 했단 말이냐?
-당연하지 않으냐? 네놈이야말로 소문을 듣고 그딴 헛소리를 지껄이는 모양인데, 내 군주님을 직접 뵌 적이 있느니라! 모습을 자주 바꾸시긴 하지만 틀림없이 내 두 눈으로 뵌 적이 있다!
-지배의 군주님을 뵈었다고?
-그렇다! 이곳으로 향하기 전 분명 그곳에서 난 지배의 군주님을 뵌 적이 있느니라!
-다른 군주님이 아닌 것이 확실하단 말이냐?
둘의 설전을 지켜보던 나는 결국 포기했다.
어떻게든 되겠거니 하는 심정으로 둘을 지켜보며 한숨을 푹 내쉴 뿐이었다.
-내 어찌 마족의 주인이신 군주님을 못 알아보랴! 분명 그분은 지배의 군주님이셨다.
‘어? 잠깐만 마족의 주인? 이게 뭔 소리야? 마족의 주인이라니? 그럼 다른 군주들은 마족의 주인이 아니란 말이야?’
둘의 대화를 듣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잠깐! 마족의 주인이라니? 그럼 다른 군주들은 마족의 주인이 아니야?”
-그렇습니다. 다른 군주님들은 각자가 다스리는 종족이 따로 있습니다.
“설명해봐.”
-네! 군주님들은 각각 수인, 용족, 정령, 엘프, 드워프, 천족의 위에 군림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마계라 부르는 이 땅에 총 일곱 종족이 있다는 말이네?”
-그렇습니다.
나는 당연히 군주라는 자들이 마족들만의 군주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설마 저렇게 많은 종족이 있을 거라곤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기에 잠시 당황했는데.
그나저나 무슨 판타지 세계도 아니고 엘프에 드워프까지 존재하는 거야?
“어? 용족? 그놈들은 마수 아니야?”
내가 지금껏 싸웠던 드래곤은 총 두 마리.
둘 모두가 악마종과 다르지 않아 보였기에 당연히 악마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들어보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마룡을 만나신 모양이군요.
“마룡?”
-네. 용족 중에서 타락한 용족을 마룡이라 부릅니다. 그 외에도 타락한 정령을 마령 엘프를 다크 엘프라고 부릅니다.
“타락하는 이유는?”
-바하무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사념에 빠져 미쳐버리는 것이죠.
“봉인됐다며?”
-바하무트란 존재가 워낙 강하기 때문에 봉인을 뚫고 사념이 조금씩 흘러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도대체 얼마나 강하길래 신과 같은 존재 일곱의 봉인을 뚫고 사념이 흘러나오는 걸까?
-어이가 없군. 군주님께서 저런 것도 모르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느냐?
-닥쳐라! 이놈! 군주님께선 지금 기억의 혼란을 겪고 계신다.
-큭크크. 어디서 이상한 소문을 주워들은 모양인데 군주님께선 멀쩡하시다! 네놈이야말로 속고 있는 모양이구나.
-흥! 네놈이야말로 우습기 짝이 없구나. 내가 속고 있다고? 군주님께선 네게 지배의 의식을 행하셨을 뿐만 아니라 진명까지 하사하셨다. 이래도 내가 속고 있다고 생각하느냐?
-뭐? 진명을 하사받았다고?
-그렇다! 나 세바스찬! 군주님께 직접 진명을 하사받아 최상급 마족으로 거듭난 마족이다!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이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룩산에게서 정보를 캐는 방법은 간단했다.
내가 지배의 군주라는 거짓을 믿게 만든 후 지배를 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순식간에 해결될 거다.
하지만, 녀석의 마음속에 조금이라도 의심이 남아 있다면 지배에 실패할지도 모른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