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8화 (128/214)

눈을 감고 의지를 집중한 순간 나는 나를 가로막는 정신 방벽 앞에 도착해 있었다.

아니, 이것은 정신 방벽이 아니었다.

또 다른 나의 의지로 만들어진 것이었으니까.

-이따위 것.

전체를 없애는 것은 불가능할지 몰라도 작은 구멍을 내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었다.

방벽에 의지를 집중하자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나는 곧장 그 안쪽으로 이동할 수 있었다.

안쪽으로 빨려 들어가듯 이동한 나는 이내 내 가슴속 깊은 곳에 똬리를 틀고 있는 또 하나의 나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너는?

-이야기 좀 하지.

-드디어 그릇을 만든 건가?

나를 발견한 녀석은 전혀 당황하지 않은 채 역시나 자기 할 말만 하고 있었다.

-그릇을 만들었다고?

-그래. 이제 좀 힘을 사용하는 방법을 깨달은 모양이야?

이번에는 대답을 해주네?

-노력 좀 했지.

아! 이게 아닌데?

녀석의 칭찬에 나도 모르게 대답을 한 나는 정말 궁금한 것을 묻기 위해 이어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것보다 너는 도대체 뭐지?

-나? 나를 모른다고? 알고 있을 텐데?

잘 알고 있었다.

저 녀석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그래. 나는 너다. 너는 나고.

내 생각을 읽었는지 대답을 하기도 전에 답을 말해주는 녀석.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걸 물어본 것이 아니야. 너 같은 녀석이 왜 존재하는지를 묻는 거지.

-내 존재라, 정말 궁금한 것이 그것인가?

정말 궁금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녀석의 정체에 대해서는 대충 예상이 갔으니까.

바로 내 전생.

그러니까 회귀를 하기 전의 내가 아닌 그 전의 나.

아마 그것이 정답이리라.

-너의 존재가 궁금한 것은 사실이야. 전생의 나. 그것이 바로 너고 그 기억들 역시 그때의 기억이라는 것에 대한 사실 확인을 하고 싶은 거니까.

-너의 말대로 나는 너의 전생이라고 할 수도 있겠군.

-전생일 수도 있다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지?

-같지만 다르다고 할까? 나는 전생의 너이기도 하지만 지금의 너이기도 하니까.

이게 무슨 개소리야?

그럼 저놈이 그냥 나 자체라는 소린데, 내가 알지 못하는 내가 있다는 것이 말이 되나?

-혼란스러운 모양이군.

-당연한 거 아닌가? 전생의 나와 현재의 나. 그래. 너의 말대로 둘 다 나인 것은 맞지. 하지만 그렇다면 너라는 존재는 어떻게 설명할 거지?

-아주 간단해. 모종의 이유로 나 자신을 둘로 나눈 거지.

-둘로 나누었다고? 누가?

-누구긴 누구야 바로 너지.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는 건가?

내가 나눴는데 내가 모른다고? 그게 말이 되는 소린가?

-이유는?

-그건 아직 말해줄 수 없겠는데?

-잘 나가다가 왜 이래? 이왕 설명해 줄 거면 숨기지 말고 전부 알려줘.

-싫은데?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알려주지 못할 이유가 있는 건가?

분명 녀석은 아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아직이란 말은 언젠가는 알려주겠다는 뜻이었기에 뭔가 이유가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는데, 문제는 내가 너무 궁금하다는 것이었다.

-그냥 알려줘.

-싫어.

-그럼 다른 것을 물어보지. 개인적으로 이건 꼭 대답을 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지배의 군주냐고?

-맞아.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단 말이지. 그 지배의 군주라는 자. 내가 어째서 그와 똑같은 힘을 가졌는지 정말 궁금했거든.

항상 들던 의문이었다.

지배의 군주와 내 힘이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후부터 그와 내가 어떤 연관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이상한 것은 무의식이었다.

지배의 군주를 떠올릴 때마다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그와 나는 다르다는 거였는데, 이것은 정말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런 생각이 계속 드는 걸까?

분명 그와 나는 어떤 연관성이 있음에도 무의식이 그것을 거부했다.

그는 절대로 내가 아니라 강조하는 듯한 기분.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은 하나다. 너는 지배의 군주가 아니라는 것.

-아니야?

-실망했나?

-조금? 내가 지배의 군주 본인이 맞다면 앞으로의 일이 더욱 수월해질 수도 있잖아. 아니라니까 좀 아쉽네.

-아쉬울 것 없다. 너 역시 대단한 자질을 타고났으니까.

대단한 자질이라?

이 능력을 말하는 건가?

누군가를 지배해 내 권속으로 만드는 이 능력과 일반적인 마력에 비해 수백 배 그 이상의 파괴력을 가지는 파괴의 마력.

그를 보면 나 역시 대단한 자질을 타고 났다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군주라는 자들과 비교하면 별것 아닌 힘일 뿐이었다.

-지금 나를 위로해 주는 거야?

-사실을 말한 것일 뿐 위로가 아니다.

-그래. 그렇다고 쳐.

녀석은 전과 다르게 좀 친절한 모습이었다.

-물어볼 것은 이제 끝난 건가?

-아! 기억. 왜 이번에는 기억이 흘러들어오지 않는 거지?

-네가 이곳에 왔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내가 전부 틀어막아 버렸다.

-어째서?

-아직은 때가 아니니까.

영화나 만화에서 자주 듣던 대사였다.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것.

그놈의 때가 언제 오는지 모르지만, 솔직히 좀 짜증이 나는 대사였다.

-그놈의 때는 도대체 언제 오는데?

-그건 나도 모른다.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그래. 때가 되면 알려줘.

내가 아무리 추궁을 해도 입을 열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에 대충 대답을 한 나는 이제 그만 이곳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 나가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 생각을 읽었는지 축객령을 내린 녀석.

-그래. 이만 가 볼게.

-이제 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는 것이 좋을 거다.

-왜?

-아마 이곳을 벗어나면 그 이유를 알게 될 거다.

-아! 설마?

분명 처음 이곳에 왔을 당시 깨어난 후 주변을 확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 나는 내가 너무 성급했음을 깨달아야 했다.

그때 분명 주변이 초토화됐었지?

이런 병신!

-걱정하지 마라. 그때와 같은 상황은 벌어지지 않았으니.

아! 다행이네.

-그럼 왜 오지 말라는 거야.

-가 보면 알게 될 거다. 이곳에 오는 것이 결코 좋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잘 있어.

내 인사에 고개를 끄덕이는 녀석은 미세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와의 대화가 즐거웠던 모양이었다.

그만 가 볼까?

정신을 집중한 순간 나는 어느새 현실로 돌아와 있었다.

그리고.

달라진 나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 * *

“도련님?”

“상무님?”

겁을 잔뜩 먹은 토끼처럼 문 뒤에 숨어 고개를 빼꼼 내미는 현지와 지안을 보며 설마 이런 부작용이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성격이 변하다니?

그랬다.

내 성격은 이상하게 변해버린 상태였다.

모든 일이 내 맘대로 되어야만 직성이 풀렸는데, 조금이라도 어긋나면 화가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어 오르며 한 마리의 미친개가 되었다.

한마디로 화가 주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가장 어이가 없는 건.

라면을 끓여온 현지에게 냄비를 집어 던졌던 것이었다.

그것도 라면이 조금 불었다는 이유로.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안이 내 시야를 가린다는 이유만으로 지안에게 화를 내기도 했고, 나에게 놀아달라며 다가온 레이가 귀찮아 화를 내기도 했으며, 내 앞에서 얼쩡거리는 마일이에게 화가나 개 패듯이 패기도 했다.

왜 마일이만 팼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뭐랄까? 직성대로 해야 화가 풀린다고 해야 할까?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일단 화부터 나는 이상한 성격.

그나마 다행인 것은 시간이 지날수록 성격이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다는 거였는데, 문제는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음에도 완전히 원래대로 돌아오지는 못한다는 거였다.

설마 그곳에 들어갈 때마다 점점 심해지는 건가?

그래서 다시는 오지 말라고 했던 거야?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 녀석을 찾아가려 했던 계획을 수정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면 녀석을 찾아가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문 뒤에 숨어 있는 현지와 지안에게 입을 열었다.

“이제 괜찮으니까 나와도 돼.”

“정말요?”

“정말이시죠?”

내 말에도 확신이 들지 않는지 쭈뼛쭈뼛 문에서 나오는 둘을 보며 일단 사과를 했다.

“미안해. 내가 갑자기 변해서 좀 그랬지?”

“조금 놀랐어요. 상무님이 갑자기 이상해지셔서…….”

“저는 놀라긴 했는데, 오랜만에 예전의 도련님을 보는 것 같아서 조금 재밌기도 했어요. 히히히.”

내 예전 모습이라?

그러고 보니 비슷하긴 하네?

분명 그때도 이렇게 화를 잘 참지 못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아무 이유 없이 화를 냈던 거고.

지금의 나는 분명하게 화를 내는 이유가 있었다.

물론 그 이유가 정말 별것 아니긴 했지만.

“그러냐? 근데 무슨 일이야? 당분간 찾아오지 말라고 했잖아.”

“아! 웨이브요! 곧 웨이브가 발생할 거래요.”

“웨이브라면 그 마수들이 몰려오는 거?”

“네. 축제라나?”

점점 복귀의 시점이 늦어지는 것 같았다.

원래는 레이와 그 수족들만 지배하고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지금껏 돌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룩산은 지금 뭐 해?”

“대기 중이에요. 상무님의 성격이 원래대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했거든요.”

“내 성격이 변한 걸 말했어?”

“그건 말하지 않고 그냥 기다리라고만 전했어요.”

“잘했어. 그럼 일단 그놈부터 데려와. 묻고 싶은 것들 좀 물어보게.”

“네.”

내 지시에 곧장 몸을 숨겨 사라지는 현지를 보던 나는 지안에게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미안. 나도 갑자기 내가 그렇게 변할 줄 몰랐어.”

“그런데 왜 갑자기 변하셨던 거예요?”

“그걸 모르겠단 말이야. 변할 만한 이유가 없는데 갑자기 변해버려서 나도 좀 궁금해.”

또 하나의 나를 만났다는 말을 하기가 좀 그랬기에 설명하기가 좀 그랬다.

거기다 나 역시 변한 정확한 이유를 모르기도 했다.

변할 만한 이유가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변한 이유가 설명되지 않았기에 설명 역시도 불가능했고.

“저 정말 깜짝 놀랐어요. 상무님이 저에게 그렇게 화를 낸 건 처음 있는 일이라 많이 당황하기도 했고요.”

“미안.”

할 수 있는 말이 사과밖에 없었다.

어쨌든 잘못을 했으니까.

“그래도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요. 뭐랄까? 정말 가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거든요. 현지에게는 화 자주 내시잖아요. 그런데 저에게는 도통 그런 모습을 보여주시지 않으셔서 아직 저를 대하는 게 조금은 불편하신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요.”

“현지와 다르게 너는 지금껏 화를 낼 정도로 실수를 한 적이 없잖아. 뭐든 알아서 잘하니까 당연한 거지.”

이 말은 정말이었다.

지안을 현지와 다르게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그저 현지의 경우 사고를 치는 성격이었고, 지안은 그런 것이 전혀 없었기에 둘을 대하는 것이 조금 다를 뿐이었다.

아! 딱 한 번 지안에게도 화를 낼뻔한 상황이 있긴 했다.

그건 바로 지안의 방 꼴을 봤을 때였다.

쓰레기장에 들어선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방 꼴이 말이 아니었기에 언제 한번 그것에 대해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후 지안의 방에 갈 일이 없었기에 잊어버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아니, 갈 일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으로 지안의 방에 가는 걸 피한 것이지만.

“그나저나 들었지?”

“네? 뭘요?”

“현지가 능력을 더 발전시켰다는 거.”

“아! 들었어요. 진짜 힘들게 쫓아왔는데 거기서 더 발전할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이쯤 되니까 질투가 날 정도예요.”

지안은 티를 내지는 않고 있지만, 현지를 따라잡기 위해 그동안 많은 노력과 시간을 써왔었다.

물론 현지 역시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지안이 따라잡지 못하도록 노력에 노력을 더하는 중이었고.

“너는 어때? 더 발전시킬 수 있겠어?”

“모르겠어요. 아직은 감조차 잡히지 않거든요.”

“너도 하다 보면 금방 현지를 따라잡을걸? 내가 보기엔 너와 현지의 재능은 차이가 없어 보이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마.”

이건 빈말이 아니었다.

둘의 재능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다만 현지의 경우 마력을 다루는 데 조금 더 특화되어 있고, 지안의 경우 마력을 쌓는 데 더욱 특화되어 있다는 것이 다를 뿐 기본적인 재능은 거의 차이가 없었다.

솔직히 몇 년이라는 차이를 극복하고 지안이 현지를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것만 해도 경악할 일이었기에 앞으로 시간이 조금 더 지난다면 지안은 분명 현지와 같은 선에 서 있으리라.

거기다 현지라는 좋은 교재가 있기에 그 시간은 더욱 앞당겨질 테고.

-룩산이 군주님을 뵙습니다!

지안과 대화를 나누던 도중 룩산이 들어와 무릎을 꿇으며 인사를 했고, 그에 화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 반가워.”

-저에게 묻고 싶으신 것이 있으시다 들었습니다.

“맞아. 너를 부른 이유는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기 때문이야.”

-제가 아는 모든 것을 말씀드리겠습니다. 모르는 것이 있다면 이 목숨을 바쳐서라도 알아오겠습니다.

“아니,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고. 그냥 아는 것만 말해주면 돼. 음- 일단 대공에 대해서 좀 알려줄래?”

대공에 대해서는 집사에게 듣긴 했지만, 그래도 대공의 밑에 있었던 룩산에게 듣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란 생각에 처음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대공은…….

룩산의 말은 대부분 아는 것이었다.

대공의 나이, 이름, 취미 등등 대부분이 마족들에게 알려져 있었던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그중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두 가지였다.

바로 그의 힘과 혈육.

일단 그의 혈육의 경우 슬하에 몇이 있는지 정도는 알려져 있었지만, 자식들의 수준에 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었기에 그것부터 듣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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